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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簇頭伊]<ref>족두리[簇頭伊]:조선 후기 가체(加髢)를 대신하는 의례용 수식(首飾)으로 제도화된 이후 궁중과 민간에서 폭넓게 사용해 오늘날 전통 혼례에서까지 착용하는 대표적인 여성 예관이다.[[파일: 족두리.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조선시대 족두리(국립민속박물관)]][[파일: 족두리2.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영친왕비가 쓰던 족두리(국립고궁박물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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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제도에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은 모두 가체(加髢)<ref>가체(加髢):여자들이 다리[月子, 髢, 머리를 땋을 때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덧넣는 한 가닥의 머리]를 양쪽으로 길게 땋은 다음 머리숱을 풍성해 보이게 하려고 틀어 얹은 머리[[파일: 단오.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신윤복의 <단오풍정>(간송미술관)]][[파일: 미인도.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신윤복의 <미인도>(간송미술관)]][[파일: 녹우당미인도.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작자 미상의 <미인도>(해남 녹우당)]]</ref>를 얹었는데, 그 값이 무려 수만 전(錢)이나 하여 재력이 없는 사람은 종종 이 때문에 결혼 시기를 놓치기도 했다. 정조(正祖) 무신(戊申, 1788)년<ref>무신(戊申, 1788)년: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커지고 사치스러워지자 영조는 1756년(영조 32)에 처음으로 사족 부녀자들의 가체 사용을 금하고 족두리를 쓰게 했다. 그 후 1758년(영조 34)에도 가체 사용을 금지하고 궁중의 양식인 족두리를 사용하라고 명령했지만, 족두리를 보석으로 장식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가체를 얹는 비용과 맞먹었기 때문에 이 명령은 1763년(영조 39)에 철회되었다. 정조는 1788년(정조 12)에 다시 가체금지령을 내리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다.(김문식, 〈18세기 서울 여성의 머리장식〉, 《문헌과 해석》, 2006, 38쪽;《정조실록(正祖實錄)》 26권, 정조 12년 10월 3일)</ref>에 윤음(綸音)<ref>윤음(綸音):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이 있다.</ref>을 내려 가체 사용을 엄격히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다. 족두리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검은색 단(緞)으로 솜을 싸서 만들되, 봄여름에는 풀 먹인 종이를 붙여 만들고 이를 검은색 단으로 싼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족두리를 쓰려면 반드시 머리카락을 모아 머리 뒤에 쪽<ref>쪽:시집간 여자가 머리카락을 땋아서 뒤통수에 또아리를 틀고 비녀를 꽂은 모양.</ref>을 만들고 또 태퇴(𩬠𩬳)【‘𩬠’는 음이 태(胎)이고, ‘𩬳’는 음이 퇴(𦞙)이다. 태퇴는 가계(假髻, 가발로 만든 쪽)이다.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다. 지금 민간에서는 ‘낭자’ <ref>낭자:조선 후기 부녀가 본인의 머리카락으로 찐 쪽머리에 더하던 가체 머리. 쪽머리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되 조금 크게 해서 풍성해 보이게 한다.[[파일: 낭자.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낭자머리(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파일: 평생도.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작자 미상의 <평생도> 중 회혼례도(回婚禮圖)에 보이는 족두리와 낭자머리(국립중앙박물관)]]</ref>라 부른다.】를 만들어 본래의 쪽 위에 더하여 비녀를 꽂아 고정한다. 화려하게 만든 것은 그 값이 또한 수만 전을 밑돌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오동나무를 깎아 태퇴 모양을 만들고 여기에 옻칠을 하거나, 또는 종이나 대나무로 만들고 증(繒)으로 싸서 본래의 쪽에 덮어씌우면<ref>오동나무를……덮어씌우면:서유구는 사람의 머리털[人毛]로 만들던 머리 장식을 1788년(정조 12년) 10월에 사치를 줄이고자 오동나무로 목제 큰머리를 만들게 한 것처럼 태퇴 또한 나무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목제로 만든 큰머리의 형태는 아래 그림과 같다.[[파일: 큰머리.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목제 큰머리(국립민속박물관)]]</ref> 비용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것이다.《금화경독기》<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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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제도에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은 모두 가체(加髢)<ref>가체(加髢):여자들이 다리[月子, 髢, 머리를 땋을 때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덧넣는 한 가닥의 머리]를 양쪽으로 길게 땋은 다음 머리숱을 풍성해 보이게 하려고 틀어 얹은 머리.[[파일: 단오.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신윤복의 <단오풍정>(간송미술관)]][[파일: 미인도.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신윤복의 <미인도>(간송미술관)]][[파일: 녹우당미인도.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작자 미상의 <미인도>(해남 녹우당)]]</ref>를 얹었는데, 그 값이 무려 수만 전(錢)이나 하여 재력이 없는 사람은 종종 이 때문에 결혼 시기를 놓치기도 했다. 정조(正祖) 무신(戊申, 1788)년<ref>무신(戊申, 1788)년: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커지고 사치스러워지자 영조는 1756년(영조 32)에 처음으로 사족 부녀자들의 가체 사용을 금하고 족두리를 쓰게 했다. 그 후 1758년(영조 34)에도 가체 사용을 금지하고 궁중의 양식인 족두리를 사용하라고 명령했지만, 족두리를 보석으로 장식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가체를 얹는 비용과 맞먹었기 때문에 이 명령은 1763년(영조 39)에 철회되었다. 정조는 1788년(정조 12)에 다시 가체금지령을 내리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다.(김문식, 〈18세기 서울 여성의 머리장식〉, 《문헌과 해석》, 2006, 38쪽;《정조실록(正祖實錄)》 26권, 정조 12년 10월 3일)</ref>에 윤음(綸音)<ref>윤음(綸音):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이 있다.</ref>을 내려 가체 사용을 엄격히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다. 족두리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검은색 단(緞)으로 솜을 싸서 만들되, 봄여름에는 풀 먹인 종이를 붙여 만들고 이를 검은색 단으로 싼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족두리를 쓰려면 반드시 머리카락을 모아 머리 뒤에 쪽<ref>쪽:시집간 여자가 머리카락을 땋아서 뒤통수에 또아리를 틀고 비녀를 꽂은 모양.</ref>을 만들고 또 태퇴(𩬠𩬳)【‘𩬠’는 음이 태(胎)이고, ‘𩬳’는 음이 퇴(𦞙)이다. 태퇴는 가계(假髻, 가발로 만든 쪽)이다.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다. 지금 민간에서는 ‘낭자’ <ref>낭자:조선 후기 부녀가 본인의 머리카락으로 찐 쪽머리에 더하던 가체 머리. 쪽머리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되 조금 크게 해서 풍성해 보이게 한다.[[파일: 낭자.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낭자머리(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파일: 평생도.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작자 미상의 <평생도> 중 회혼례도(回婚禮圖)에 보이는 족두리와 낭자머리(국립중앙박물관)]]</ref>라 부른다.】를 만들어 본래의 쪽 위에 더하여 비녀를 꽂아 고정한다. 화려하게 만든 것은 그 값이 또한 수만 전을 밑돌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오동나무를 깎아 태퇴 모양을 만들고 여기에 옻칠을 하거나, 또는 종이나 대나무로 만들고 증(繒)으로 싸서 본래의 쪽에 덮어씌우면<ref>오동나무를……덮어씌우면:서유구는 사람의 머리털[人毛]로 만들던 머리 장식을 1788년(정조 12년) 10월에 사치를 줄이고자 오동나무로 목제 큰머리를 만들게 한 것처럼 태퇴 또한 나무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목제로 만든 큰머리의 형태는 아래 그림과 같다.[[파일: 큰머리.png|300픽셀|썸네일|가운데|목제 큰머리(국립민속박물관)]]</ref> 비용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것이다.《금화경독기》<br/><br/>
 
조헌(趙憲)<ref>조헌(趙憲):1544~1592.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생이었다. 중봉(重峯)은 그의 호이다.</ref>은 《동환봉사(東還封事)》<ref>《동환봉사(東還封事)》:조헌이 성절사 질정관으로 중국에 갔다 돌아와서 올린 상소문을 그의 제자인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 엮은 책.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앞부분은 8조로 된 소(疏)와 질정록(質正錄)이다. 8조의 소 중 셋째 조가 의관제도를 논한 ‘귀천의관(貴賤衣冠)’이다. 조헌은 의관제도에서 우리나라도 명나라 제도를 그대로 준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ref>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여자는 시집을 가면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묶고 여기에다 적계(𩭲【안. 자서(字書)에는 이 글자가 없다.】髻)를 더한다. 그 제도는 다음과 같다. 북쪽 사람들은 철사로 엮어 만들고, 남쪽 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드는데, 모두 견(絹)으로 감싼다. 또 견을 말아 머리띠를 만드는데, 이를 ‘역자(鈠子)’라 한다. 겨울에는 모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난액(煖額)’이라 한다.【이마에서부터 쪽을 둘러 정수리 뒤에서 묶고 그 위에 비녀를 가로지른다.】 부인이 일이 있어 외출할 때는 역자를 무늬 있는 견(絹)으로 꾸미거나 혹은 피금(皮金)<ref>피금(皮金):동물성 배지인 가죽에 금을 넓게 펴서 붙인 것으로, 금사(金絲)를 만들 때 주로 쓴다.(노진선, 〈전통 직물에 사용되는 금사 제작 방법〉, 《섬유기술과 산업》 10권 4호, 한국섬유공학회, 2006, 382쪽)</ref>을 더하기도 한다. 신부가 친영(親迎)<ref>친영(親迎):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오는 예. 혼인 육례(六禮)의 하나이다.</ref>할 때도 이것만 머리에 얹을 뿐이다.” <ref>《東還封事》 〈先上八條疏〉 “貴賤衣冠”;《重峯集》 卷3 〈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 “貴賤衣冠之制”.</ref> 여기에서 말한 적계라는 제도는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철사나 대오리로 가계를 엮어 만드니, 내가 대나무나 나무로 가계를 만든다고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형원(柳馨遠)<ref>유형원(柳馨遠):1622~1673. 조선 후기의 학자. 호가 반계(磻溪)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여 중농 사상을 기본으로 한 토지개혁론을 주장했다. 저서로 《반계수록(磻溪隧錄)》이 있으며, 이 책의 권25 〈의관(衣冠)〉에서 복식에 대해 기록했는데, 대부분 심의에 관한 내용이다.</ref>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부인들의 복식에서 족두리를 없애고 역자로 대신해야 한다.”<ref>《磻溪隧錄》 卷25 〈續篇〉 上 “衣冠”.</ref>라 했다. 이 말은 대개 중국의 풍속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려는<ref>중국의……바꾸려는:《孟子》 〈滕文公〉 上 4章.</ref> 뜻이며, 아울러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아끼려는 의미를 붙인 것이다.《금화경독기》<br/>
 
조헌(趙憲)<ref>조헌(趙憲):1544~1592.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생이었다. 중봉(重峯)은 그의 호이다.</ref>은 《동환봉사(東還封事)》<ref>《동환봉사(東還封事)》:조헌이 성절사 질정관으로 중국에 갔다 돌아와서 올린 상소문을 그의 제자인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 엮은 책.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앞부분은 8조로 된 소(疏)와 질정록(質正錄)이다. 8조의 소 중 셋째 조가 의관제도를 논한 ‘귀천의관(貴賤衣冠)’이다. 조헌은 의관제도에서 우리나라도 명나라 제도를 그대로 준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ref>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여자는 시집을 가면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묶고 여기에다 적계(𩭲【안. 자서(字書)에는 이 글자가 없다.】髻)를 더한다. 그 제도는 다음과 같다. 북쪽 사람들은 철사로 엮어 만들고, 남쪽 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드는데, 모두 견(絹)으로 감싼다. 또 견을 말아 머리띠를 만드는데, 이를 ‘역자(鈠子)’라 한다. 겨울에는 모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난액(煖額)’이라 한다.【이마에서부터 쪽을 둘러 정수리 뒤에서 묶고 그 위에 비녀를 가로지른다.】 부인이 일이 있어 외출할 때는 역자를 무늬 있는 견(絹)으로 꾸미거나 혹은 피금(皮金)<ref>피금(皮金):동물성 배지인 가죽에 금을 넓게 펴서 붙인 것으로, 금사(金絲)를 만들 때 주로 쓴다.(노진선, 〈전통 직물에 사용되는 금사 제작 방법〉, 《섬유기술과 산업》 10권 4호, 한국섬유공학회, 2006, 382쪽)</ref>을 더하기도 한다. 신부가 친영(親迎)<ref>친영(親迎):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오는 예. 혼인 육례(六禮)의 하나이다.</ref>할 때도 이것만 머리에 얹을 뿐이다.” <ref>《東還封事》 〈先上八條疏〉 “貴賤衣冠”;《重峯集》 卷3 〈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 “貴賤衣冠之制”.</ref> 여기에서 말한 적계라는 제도는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철사나 대오리로 가계를 엮어 만드니, 내가 대나무나 나무로 가계를 만든다고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형원(柳馨遠)<ref>유형원(柳馨遠):1622~1673. 조선 후기의 학자. 호가 반계(磻溪)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여 중농 사상을 기본으로 한 토지개혁론을 주장했다. 저서로 《반계수록(磻溪隧錄)》이 있으며, 이 책의 권25 〈의관(衣冠)〉에서 복식에 대해 기록했는데, 대부분 심의에 관한 내용이다.</ref>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부인들의 복식에서 족두리를 없애고 역자로 대신해야 한다.”<ref>《磻溪隧錄》 卷25 〈續篇〉 上 “衣冠”.</ref>라 했다. 이 말은 대개 중국의 풍속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려는<ref>중국의……바꾸려는:《孟子》 〈滕文公〉 上 4章.</ref> 뜻이며, 아울러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아끼려는 의미를 붙인 것이다.《금화경독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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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0일 (화) 15:26 판

내용

족두리[簇頭伊][1]
옛 제도에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은 모두 가체(加髢)[2]를 얹었는데, 그 값이 무려 수만 전(錢)이나 하여 재력이 없는 사람은 종종 이 때문에 결혼 시기를 놓치기도 했다. 정조(正祖) 무신(戊申, 1788)년[3]에 윤음(綸音)[4]을 내려 가체 사용을 엄격히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다. 족두리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검은색 단(緞)으로 솜을 싸서 만들되, 봄여름에는 풀 먹인 종이를 붙여 만들고 이를 검은색 단으로 싼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족두리를 쓰려면 반드시 머리카락을 모아 머리 뒤에 쪽[5]을 만들고 또 태퇴(𩬠𩬳)【‘𩬠’는 음이 태(胎)이고, ‘𩬳’는 음이 퇴(𦞙)이다. 태퇴는 가계(假髻, 가발로 만든 쪽)이다.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다. 지금 민간에서는 ‘낭자’ [6]라 부른다.】를 만들어 본래의 쪽 위에 더하여 비녀를 꽂아 고정한다. 화려하게 만든 것은 그 값이 또한 수만 전을 밑돌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오동나무를 깎아 태퇴 모양을 만들고 여기에 옻칠을 하거나, 또는 종이나 대나무로 만들고 증(繒)으로 싸서 본래의 쪽에 덮어씌우면[7] 비용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것이다.《금화경독기》

조헌(趙憲)[8]은 《동환봉사(東還封事)》[9]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여자는 시집을 가면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묶고 여기에다 적계(𩭲【안. 자서(字書)에는 이 글자가 없다.】髻)를 더한다. 그 제도는 다음과 같다. 북쪽 사람들은 철사로 엮어 만들고, 남쪽 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드는데, 모두 견(絹)으로 감싼다. 또 견을 말아 머리띠를 만드는데, 이를 ‘역자(鈠子)’라 한다. 겨울에는 모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난액(煖額)’이라 한다.【이마에서부터 쪽을 둘러 정수리 뒤에서 묶고 그 위에 비녀를 가로지른다.】 부인이 일이 있어 외출할 때는 역자를 무늬 있는 견(絹)으로 꾸미거나 혹은 피금(皮金)[10]을 더하기도 한다. 신부가 친영(親迎)[11]할 때도 이것만 머리에 얹을 뿐이다.” [12] 여기에서 말한 적계라는 제도는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철사나 대오리로 가계를 엮어 만드니, 내가 대나무나 나무로 가계를 만든다고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형원(柳馨遠)[13]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부인들의 복식에서 족두리를 없애고 역자로 대신해야 한다.”[14]라 했다. 이 말은 대개 중국의 풍속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려는[15] 뜻이며, 아울러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아끼려는 의미를 붙인 것이다.《금화경독기》

각주

  1. 족두리[簇頭伊]:조선 후기 가체(加髢)를 대신하는 의례용 수식(首飾)으로 제도화된 이후 궁중과 민간에서 폭넓게 사용해 오늘날 전통 혼례에서까지 착용하는 대표적인 여성 예관이다.
    조선시대 족두리(국립민속박물관)
    영친왕비가 쓰던 족두리(국립고궁박물관)
  2. 가체(加髢):여자들이 다리[月子, 髢, 머리를 땋을 때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덧넣는 한 가닥의 머리]를 양쪽으로 길게 땋은 다음 머리숱을 풍성해 보이게 하려고 틀어 얹은 머리.
    신윤복의 <단오풍정>(간송미술관)
    신윤복의 <미인도>(간송미술관)
    작자 미상의 <미인도>(해남 녹우당)
  3. 무신(戊申, 1788)년: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커지고 사치스러워지자 영조는 1756년(영조 32)에 처음으로 사족 부녀자들의 가체 사용을 금하고 족두리를 쓰게 했다. 그 후 1758년(영조 34)에도 가체 사용을 금지하고 궁중의 양식인 족두리를 사용하라고 명령했지만, 족두리를 보석으로 장식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가체를 얹는 비용과 맞먹었기 때문에 이 명령은 1763년(영조 39)에 철회되었다. 정조는 1788년(정조 12)에 다시 가체금지령을 내리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다.(김문식, 〈18세기 서울 여성의 머리장식〉, 《문헌과 해석》, 2006, 38쪽;《정조실록(正祖實錄)》 26권, 정조 12년 10월 3일)
  4. 윤음(綸音):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이 있다.
  5. 쪽:시집간 여자가 머리카락을 땋아서 뒤통수에 또아리를 틀고 비녀를 꽂은 모양.
  6. 낭자:조선 후기 부녀가 본인의 머리카락으로 찐 쪽머리에 더하던 가체 머리. 쪽머리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되 조금 크게 해서 풍성해 보이게 한다.
    낭자머리(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작자 미상의 <평생도> 중 회혼례도(回婚禮圖)에 보이는 족두리와 낭자머리(국립중앙박물관)
  7. 오동나무를……덮어씌우면:서유구는 사람의 머리털[人毛]로 만들던 머리 장식을 1788년(정조 12년) 10월에 사치를 줄이고자 오동나무로 목제 큰머리를 만들게 한 것처럼 태퇴 또한 나무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목제로 만든 큰머리의 형태는 아래 그림과 같다.
    목제 큰머리(국립민속박물관)
  8. 조헌(趙憲):1544~1592.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생이었다. 중봉(重峯)은 그의 호이다.
  9. 《동환봉사(東還封事)》:조헌이 성절사 질정관으로 중국에 갔다 돌아와서 올린 상소문을 그의 제자인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 엮은 책.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앞부분은 8조로 된 소(疏)와 질정록(質正錄)이다. 8조의 소 중 셋째 조가 의관제도를 논한 ‘귀천의관(貴賤衣冠)’이다. 조헌은 의관제도에서 우리나라도 명나라 제도를 그대로 준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0. 피금(皮金):동물성 배지인 가죽에 금을 넓게 펴서 붙인 것으로, 금사(金絲)를 만들 때 주로 쓴다.(노진선, 〈전통 직물에 사용되는 금사 제작 방법〉, 《섬유기술과 산업》 10권 4호, 한국섬유공학회, 2006, 382쪽)
  11. 친영(親迎):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오는 예. 혼인 육례(六禮)의 하나이다.
  12. 《東還封事》 〈先上八條疏〉 “貴賤衣冠”;《重峯集》 卷3 〈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 “貴賤衣冠之制”.
  13. 유형원(柳馨遠):1622~1673. 조선 후기의 학자. 호가 반계(磻溪)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여 중농 사상을 기본으로 한 토지개혁론을 주장했다. 저서로 《반계수록(磻溪隧錄)》이 있으며, 이 책의 권25 〈의관(衣冠)〉에서 복식에 대해 기록했는데, 대부분 심의에 관한 내용이다.
  14. 《磻溪隧錄》 卷25 〈續篇〉 上 “衣冠”.
  15. 중국의……바꾸려는:《孟子》 〈滕文公〉 上 4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