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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오의 각서

14) 각서(角黍, 주악)

풍토기[1] 단오 하루 전에 줄풀의 잎으로 찹쌀을 싼 뒤, 밤·대추를 태운 잿물에 삶아 익혀서 절일에 먹는데, 일명 ‘주악[糉]’이라고도 한다. 대개 음양이 감싸고 도는 뜻을 취한 것이다.


금화경독기[2] 유몽인(柳夢寅)[3]의 《어우야담(於于野談)》[4]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단(水團)을 ‘각서(角黍)’라고 한다. 유두날에 먹어온 지 수백 년이 되었으나 다른 이름은 없다. 내가 경략(經略)[5] 송응창(宋應昌)[6]의 아문(衙門, 지휘소)에 있을 때 통판(通判)[7] 왕군영(王君榮)[8]이 나에게 각서를 대접하였다. 그 모양이 소뿔과 같았고 찹쌀밥에 대추와 꿀을 섞어 덩어리를 만들었다. 각서 만드는 방법을 물었더니 ‘나무를 파서 소뿔모양으로 틀을 만든 다음 찐 찹쌀과 대추, 벌꿀을 틀에 채워찍어 낸다.’라 했다.”[9]

수단이 각서가 아님을 살펴볼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통판 왕군영이 말한 각서의 제법 또한 의심스럽다. 대개 각서를 만드는 일은 본래 초나라의 풍속으로, 5월에 경도(競渡)[10]라는 놀이에서 물에 던져 굴원(屈原)[11]을 제사지냈던 음식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줄풀잎이나 죽순겉껍질로 싼다. ‘주악[糉子]’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싸는 방식이 없고 다만 그 형태가 소뿔과 비슷하므로 ‘각서’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반드시 그런지는 아직 모르겠다.

각주

경도 굴원

  1. 출전 확인 안 됨 ; 《御定月令輯要》 卷10 〈五月令〉 “初五日” ‘角黍’(《文淵閣四庫全書》 467, 361쪽).
  2. 출전 확인 안 됨.
  3. 유몽인(柳夢寅) : 1559~1623.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1589년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했고, 1592년 명나 라에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했다. 이후 전란 시기에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 지 등으로 활약했고, 전란 후 광해군 시기에 폐모론에 동조하지 않고 1618년 사직하여 5년간 떠돌며 《어우 야담(於于野談)》 을 집필했다.
  4. 어우야담(於于野談) : 조선 중기 문신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설화집.
  5. 경략(經略) : 중국 명나라 군대의 직위. 총사령관.
  6. 송응창(宋應昌) : 1536~1606. 중국 명나라의 관리. 자는 시상(時祥),호는 동강(桐岡).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총사령관인 경략을 역임했다.
  7. 통판(通判) : 중국 명나라 조정에서 군(郡)의 정치를 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지방관.
  8. 왕군영(王君榮) : ?~?. 중국 명나라의 관리. 호는 혜천(惠泉)이고, 산동(山東)청주부(靑州府) 익도현(益都縣) 사람이다. 원임 통판(通判)으로 송응창을 따라 조선으로 파견 나왔다가, 1593년 9월에 명나라로 돌아갔다.
  9. 우리나라……했다 : 《於于野談》 〈學藝篇〉, 188쪽.
  10. 경도(競渡) : 굴원을 작은 배로 구한다는 뜻의 놀이로서 일종의 보트 레이스인 용선경도(龍船競渡)가 지금 까지 전한다.
  11. 굴원(屈原) : B.C.343?~B.C.278?. 중국 초(楚)나라의 문인. 중국 문학사에서 북방의 《시경(詩經)》 에 버금 가는 남방의 《이소(離騷)》 를 지어 초사의 원형을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