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용지:복식 도구:쓰개:동파건

pungseok
이동: 둘러보기, 검색

내용

9) 동파건(東坡巾, 동파관)[1]
동파건에는 담[墻][2]이 4개 있고, 담 밖에 겹쳐지는 담이 있는데 안에 있는 담보다 길이를 약간 줄인다. 전후와 좌우로 모서리를 각각 서로 맞붙이면, 모서리가 만나는 경계가 두 눈썹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소식[老坡][3]이 썼기 때문에 ‘동파건’이라 이름한다. 일찍이 소식의 초상화를 본적이 있는데 지금의 관 및 의복과 비슷했다.
【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관을 ‘정자관(程子冠)’이라 부른다.[4] 그러고서는 다시 관 제도를 하나 더 만들었다. 이 관의 안팎 담은 그 아래 끝이 가지런하지 않고 위는 가지런하다. 밖의 짧은 담 4개를 안에 있는 긴 담 4개 위에 꿰매되, 짧은 담들의 옆면은 서로 잇지 않고 각각 아래로 내려뜨린다. 움직이거나 고개를 들거나 숙일 때는 짧은 담 4개가 사람을 따라 춤을 추니 이를 ‘동파관(東坡冠)’이라 했다. 또 “동파가 정자관의 제도를 보고서 일부러 정자관의 위아래를 뒤집어 정자를 모욕했다.” [5]라고 했다. 나는 평소에 이 말이 제나라 동쪽 야인들의 근거 없는 이야기[6]에 가까운 것 같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삼재도회》를 편찬한 왕 씨[7]의 이 말을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설이 근거 없이 한 말임을 더욱 잘 알겠다. 지금 통용되는 정자관이 바로 동파관(동파건)이고, 지금 통용되는 동파건은 바로 한때 근거 없이 만든 제도일 뿐이다.】《삼재도회》 [8][9]


각주

  1. 동파건(동파관):송대(宋代) 소식(蘇軾)이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유래된 건이다. 동파(東坡)는 소식의 호이다. 동파건은 명대(明代)에도 사대부 계층에서 널리 착용했으며, 조선 중기부터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집안에서 착용했다.(강순제, 〈우리나라의 관모〉, 《韓國의 服飾文化史》, 단국대학교출판부, 26쪽)
  2. 담[墻]:관의 생김새가 다음 그림처럼 네모난 벽면이 맞닿아 사각형을 이룬 형태이므로 벽면을 담이라 표현하였다.
    삼재도회 동파건(앞뒤의 넓은 면들을 '담'이라 한다)










  3. 소식[老坡]:소식의 호인 동파(東坡)에 존경을 뜻하는 ‘노(老)’를 붙여 ‘노파(老坡)’라고 부른다.
  4. 우리나라……부른다:서유구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치명(柳致明, 1777~1861)은 동파건을 ‘정자관’이라 기록했으며, 도설(圖說)에서도 아래와 같이 동파건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定齋集》 卷19 〈程子冠制〉) 그러나 현재 ‘정자관’이라 불리는 관은 약간 다른 형태이다. 정자관은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한 관이라 하지만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정호와 정이는 모두 소식과 같은 동파관을 쓰고 있어 현재 정자관의 형태가 어디서 기원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정자관(국립민속박물관)















  5. 동파가……모욕했다:사마광의 장례식 날 소식은 연회 자리에 참석했는데, 정이는 《논어》의 “곡을 한 날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哭則不歌).”는 말을 근거로 소식의 연회 참석을 반대했다. 이 일로 촉파(소식)와 낙파(정이)는 견원지간이 되었다. 소식의 활달한 문학적 성품과 정이의 엄격한 윤리주의적 기질의 차이가 근본적인 이유겠지만, 이후 두 사람에 관한 많은 이야기는 북송대 두 대학자를 이야깃거리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6. 제나라……이야기:군자의 말이 아닌 제나라 동쪽 지역에서 쓰는 근거 없는 말로 《맹자》에 나온다. “否. 此非君子之言, 齊東野人之語也.”(《孟子》 〈萬章〉 上)
  7. 왕 씨:《삼재도회》를 편찬한 왕기(王圻)와 왕사의(王思義)를 말한다.
  8. 《三才圖會》 〈衣服〉 “東坡巾”, 628쪽.
  9. 《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 2,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6), 47~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