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수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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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15일 (일) 20:18 판 (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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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

사람, 품종(동물, 식물), 물품을 뺏는 모습.

대동운부군옥

한 번 오랑캐 원나라가 말 기르는 것을 감독한 이후로 화류가 해마다 천자의 마구간에 들어가네. 원나라에서 탐라에 목장을 설치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수달의 가죽 1천 장[領]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백방으로 잡아도 그 수를 맞추기 어려워 977장을 실어 보냈다.
원종 때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대령산 남쪽의 비자 50근을 구했다.
그 지방 사람들은 비자나무를 백목이라 한다.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동녀를 구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때 이곡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어사대에게 말하여 자기가 대신 상소문을 작성하여 올리니, 황제가 깊이 받아들였다.
원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어 어린 여자를 찾아오도록 했다.
이때 이곡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어사대에 이야기하여 대신 소를 지어 올리니 왕이 그 뜻을 충분히 받아 들였다.
고려 고종 8년 몸고 사신이 와서 광첨동유 160근을 요구했다.
원나라 세조가 황주와 봉주에 둔전을 설치했다.
밭가는 소가 오륙 천 마리도 더 되었다.
고려에 이들의 사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래서 나라 안팎이 모두 곤란하여 백성들은 초목의 열매를 먹었다.
원나라 장군 흔도가 봉주에 주둔하면서 군사와 말 그리고 양식과 사료를 징발하였다.
이에 창고가 고갈되어 더 이상 공급할 수가 없어서 왕이 민가에서 말사료를 내게 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고려 충렬왕 3년에 원나라가 탐라에 목장을 두고 소와 말과 나귀와 양을 실어 보내어 수산평에 방목하게 하니 마축이 번식하였다.
충렬왕 때 탐라는 원나라에 예속되었는데 말을 기르는 것이 번성하지 못하였다.
나라에서 원나라에 갈 때나 원나라의 일본 원정을 도울 때 지방 관리들에게 말을 바치게 하고, 또 관품에 따라 모든 관리들의 말을 거두니 온 나라가 괴로워하였다.
그러자 왕이 마축자장별감을 두어 여러 섬에서 말을 놓아 길러 번식시키게 하였다.
충렬왕 3년에 원나라 세조가 목마장을 탐라에 두고 관리를 두어 주관하도록 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둔전을 설치하여 공물을 마련하게 하니, 중외가 모두 곤궁하여 백성들이 초목의 열매를 먹었다.
몽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원종은 반전색을 설치하여 여러 도에서 백금을 거두도록 하여 조근하는 사람들의 여행 경비로 쓰게 하였다.
백성들이 굶주린 사람이 많자 충렬왕이 명하여 없애게 하였다.
원나라에 발아찰연이 있는데, 인척간에 모여서 즐기며 자손의 경사를 삼는 것으로서 그 예가 매우 성대했다.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기 황후의 어머니를 위해 이 연회를 열기를 청하니, 원나라가 태자를 보내어 드디어 이 연회를 베풀었다.
시종과 호위병들이 고기를 차려 놓고 먹기를 다투어 승부를 겨루었는데 많이 먹는 자가 승자가 된다.
연회가 끝나고 각각 호가를 불고 춤추며 빙빙 돌면서 저사단을 이어 잡고 둥글게 서서 천을 잘라 꽃을 만드는데 5천 여 필에 이르렀다.
다른 물건도 이에 상응하여 소모되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니 국가의 경비가 고갈하였다.
원나라는 탐라가 방성의 분야라고 생각하여 목장을 두었고 또 만호를 두어 목축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원나라 사신이 속임수로 안교를 요구하면서 왔다.
그리고는 충혜왕을 발로 차면서 묶고는 겨드랑이에 끼고 말에 태워 갔다.
관리들은 모두 달아나 숨어서 구원하지 않았다.
원나라 장수지가 사신으로 나왔다가 개인적으로 노새를 열 마리를 청하여 가지고 돌아갔다.
이추가 본국인으로서 도리어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원나라 황제가 추를 보내와서 재목을 구하게 하니, 추가 울릉도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자 했다.
왕이 대장군 강위로 하여금 도와 함께 가게 하니, 추가 3품은 낮은 직급인 것으로써 말하기를 "3품은 개와 같으니 함께 동행할 수 없다"고 하니, 추밀사 허공을 대신 동행하게 했다.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녀를 구하여 오게 하였다.
이곡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들어보니 나라 사람들이 딸을 낳으면 곧바로 숨기고는 그래도 꼭꼭 숨기지를 못했을까 염려하니, 비록 이웃 사람이라 할지라도 볼 수가 없습니다.
혹 동녀를 숨기면 그 친족을 잡아들였다가 동녀가 나타난 뒤에야 그만둡니다.
옛날에 동해에 원한을 품은 아낙네가 있었는데, 삼년 동안 크게 가물었다고 합니다.
지금 고려국에 얼마나 많은 원부가 있겠습니까?"하니, 황제가 이를 깊이 가납하였다.
고종 8년에 몽고의 황태제가 와서 갓는 모시 2천 필을 요구하였다.
"밤 깊은데 가벼운 적삼 가는 모시를 입었네." 고려 고종 8년 몽고의 사신이 와서 가는 명주 3천 필을 요구하였다.
고려 원종 9년(1268)에 원나라 세조가 김유와 신백천을 보내어 대령산의 향백자, 유체인상, 관음송 위에 고인 물, 풍면송 솔잎, 송고떡, 남해도의 실모송, 지령동의 전밀, 금강산의 석용, 영동군의 향국자를 요구했다.
김유와 신백천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오랫동안 몽고에 있어서 고려를 등지고 사신의 임무를 받들어 고려로 돌아와 그 욕심을 이루고자 했다.
최우가 14층 금탑을 만들었다.
부소산에 석탑이 있는데 13층이다.
12회상을 조각했는데 인물이 살아 움직이고 형용이 또렷하고 제작이 정교하여 천하에 둘도 없다.
시속에 전하기를 "원나라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만들고 강융이 원나라 공인을 모집하여 이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종 때에 몽고에서 사람을 보내 아길아합몽합의 가죽을 구하였다.
아길아합몽합은 물고기 이름인데 모양은 소처럼 생겼다.
혹은 환각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가죽으로 가죽신을 만들면 병이 낫는다.
활제가 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구한 것이다.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병기를 만들라 하여 민간에서 화살 만들 깃과 활촉 만들 철을 거두게 했는데 장차 다시 일본을 정벌하여 한 것이다.
고려 원종 때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 오매와 화리를 요구하였다.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원나라 군대의 둔전을 두었고 또 둔전우도 두었다.
고종이 왕의 친족과 높고 낮은 관료와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콩을 차등있게 갹출하여 소사료로 공급하게 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태감을 보내어 장인 37인을 거느리고 신광사를 짓게 하고 원찰이라 일컬었다.
고려 원종 9년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 사람 형체를 닮은 인삼을 요구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와서 동남 동녀 각각 5백 명을 요구했다.
왕이 글로써 답하기를 "우리나라 풍속에는 비록 군주라고 할지라도 오직 한 사람의 적실만 취하고 다시 잉첩을 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신료들 가운데 조정의 반열에 있는 이들도 또한 한 사람의 처를 취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자식이 혹 있건 없건 만약 모두 원나라에 보낸다면 누가 그 신하 나라의 직분을 계승하여 대국 원나라를 섬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종때 몽고에서 고려에 사람을 보내서 자로를 구하였다.
고종 때에 몽고의 사신이 왔을 때 자황 10근을 구하였다.
고려 원종 때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 붉은 구리 2만근을 구했다.
구리는 매우 견고하면서도 붉다.
식기, 숟가락, 젓가락 등을 모두 이 구리로 만든다.
바로 중국에서 고려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원의 황제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명령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화살과 깃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원나라 세조의 황후가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나전으로 세공을 한 상자를 요구하였다.
왕이 전함조성도감을 설치하고 나전 상자를 만들어 바쳤다.
몽고에서 사신을 보내 지령동의 전밀을 구했는데 고려에는 없는 물건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 조윤통이 원나라에 갔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세상에 전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생산되는 인삼이 가장 좋다고 하니, 짐을 위해 인삼을 바치거라"라고 하자 조윤통이 대답하기를 "해마다 수백 근의 인삼을 채취합니다.
황제가 명하여 그를 보내 해마다 주, 군을 순회하며 백성들을 징발해 인삼을 채취하게 하였다.
조금이라도 기한 내에 바치지 않으면 곧다로 은과 비단을 징수해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고려 원종 때 이추가 도망하여 원나라로 들어가 원나라 황제한테 거짓으로 말하고는 고려로 와서 금, 옻, '푸른 등나무'를 요구하였는데 모두 다 고려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었다.
고려 고종 33년(1246)에 몽고인이 북쪽 변경에 들어와 수달을 잡는다는 핑계로 모든 산천의 궁벽한 곳을 엿보지 않음이 없었으나, 나라 사람들은 몽고와 우호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자못 개의치 않았다.
34년(1247) 가을에 몽고 병사가 염주에 진을 치니 백성들은 모두 몰리고 약탈을 당하여 벗어난 이가 드물었다.
이듬해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또 수달을 잡는다는 핑계로 청천강을 건너 들어와 도적질하니 왕은 팽배를 내보내서 두 반으로 나누어 번갈아 송도를 지키게 했다.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와서 풍면과 송엽을 요구하였다.
충렬왕 때 원나라 탈탈이 사람을 보내 해청 두 마리를 바치고 그것을 계기로 동녀를 구하였다.
원종 때 원나라가 세조가 사람을 보내어 영동군의 향기로운 누룩을 요구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보낸 사신이 고려에 와서 행백자를 구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와서 어상의 재료로 쓸 향장목을 구했다.
원나라 황제가 송골매를 잡아서 바치라고 독촉하니 고려 충렬왕이 사신을 보내어 송골매를 바치고 또 새매를 바쳤다.
고려 원종이 몽고에 와서 '자단나무' 등의 물자를 요구하였다.
이에 앞서 고려 사람 가운데서 도망쳐서 몽고에 들어가 이런 물자가 고려에서 생산된다고 거짓으로 아뢴 자가 있었으므로 원나라에서 믿고 이런 것들을 요구하레 되었다.

성호사설

내용 없음

송남잡지

내용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