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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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15일 (일) 20:11 판 (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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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학문적 우수함, 학자들의 업적, 시를 짓는 모습, 학문적으로 소통하는 모습.

대동운부군옥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조자앙 등이 모두 충선왕의 문에 놀았다.
왕이 한 연을 지어 읊기를 "닭 소리가 문 앞의 버들과 흡사하네"라고 하니, 여러 학사들이 용사의 출처를 물었다.
왕이 말없이 있자, 익재 이제현이 곁에서 설명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의 시에 '집 머리 처음 뜨는 해에 금계가 우니, 흡사 늘어진 버들 가지 간드러지게 긴 모양일세'라고 한 것이 있는데, 닭 소리가 연함으로써 버들가지의 가볍고 가는 것을 비유했으니, 우리 왕의 시구는 이 뜻을 쓴 것이다.
한퇴지가 거문고를 두고 읊은 시에 '뜬구름과 버들솜처럼 뿌리와 꼭지가 없네'라고 했은 즉 고인이 소리에 있어서 또한 버들솜으로 비유한 이가 있다"라고 하니, 자리에 가득 한 사람들이 칭찬 탄복했다.
익재 이제현이 원나라 서울에 있으면서 송도를 그리워하며 『송도팔경』을 지었는데 첫 번째가 '곡령춘청'이었는데 시는 이러하다.
"팔선궁은 푸르른 봉우리에 있으니 아련한 연하 몇 만 겹이던가? 하룻밤 사이 긴 바람이 비를 불어 지나가니 바다의 용이 옥연꽃을 받들고 나왔도다.
" 이공수가 원나라에 갔다.
황태자가 공수를 불러 함께 관한전에 올라가 금과 옥으로 이루어진 광한전의 기둥을 가리키며, "이러한 기둥을 본 적이 있는가?" 하였다.
공수가 대답하기를 "제왕이 어진 정치를 베풀면 비록 썩은 나무라도 오히려 견고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비록 금옥이라도 믿을 것이 못되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전해듣고 이르기를 "짐이 진실로 이 노인이 어진 이임을 알겠노라" 하였다.
이공수가 원나라에 조회하러 갔다.
황태자가 이공수를 불러 함께 광한전에 올랐는데 거기에 걸려있는 현판 글씨 '인지'의 뜻에 대하여 물었다.
이공수가 대답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 '지'이니, 제왕께서 이 두 글자를 사용하여 사해를 다스려 만세토록 태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정주학이 중국에서 유행하였지만 우리나라에는 보급되지 않았다.
충선왕 때 백이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것을 배웠는데 우리나라에 돌아오자 이제현과 박충좌가 먼저 그를 스승으로 모셔서 배웠다.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만권당을 짓고 이름난 선비 조맹부 등과 함께 담론했다.
왕이 동쪽으로 돌아올 때 문적과 서화 만 권을 실으니 조맹부의 필적이 동방에 가득했다.
우리 동방 사람들 가운데 조맹부의 필법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 이암 한 사람 뿐이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 때 연경의 사저에 만권당을 지어놓고, 이제현을 불러다가 부중을 채우고 문학하는 선비인 요수, 조맹부, 우집 등을 맞이하였다가 서사로 즐기도록 하였는데 종신으로 하여금 번갈아 대신하도록 하였다.
충선왕이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에 가니 원나라 황제가 세자를 불러 보고는 "너는 무슨 책을 읽는가?"라고 물었다.
"사유 정가신이 여기에 같이 왔기에 효경과 논어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정가신을 불러오게 하였다.
정가신이 들어오자 황제가 관을 쓰고 갑자기 일어나서 "네가 비록 배신陪臣이지만 유자儒者이다"라고 하고는 그를 앉게 하고서 고려국의 왕위 전승의 차례, 이난理亂의 자취, 풍속의 마땅함 등에 대하여 물으면서 경청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현이 원나라에 조회했는데, 연구 때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천성 아미산에 있는 절에 향을 내리러 갔다.
이때 지은 시를 모은 『서정록』이 있다.
회재 선생이 갑술년에 서울로 과거보러 가면서 「서정시」 130운을 지었는데 이 해 과거에 올랐다.
고려 관종이 한림학사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하고 진사를 시험하여 취했는데, 왕이 의봉루에 임하여 선비들을 시험하니 문풍이 이에 흥기했다.
원종이 옛 서울로 돌아와 감시의 방을 내거니 몽고 사신이 가서 보고 말하기를 "난리를 겪은 뒤에서 문풍을 실추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굉연은 자가 무설이고 호는 죽간인데 원나라에 들어가 구양현, 위소 등과 사귀었다.
『죽간집』이 있는데 '시가 아주 힘이 있다'. 중국 정주학이 우리나라에 아직 보급되지 않았었는데 백이정이 원나라에 들어가 이를 배웠고 이제현 등이 스승을 통해 수학하였다.
우리나라 이학은 백이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정가신이 원나라에 있을 때 황제의 명령으로 낙타조란시를 지어 올렸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면서 어갱 한 사발을 상으로 내렸다.
이제현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를 지었는데, "비 가는데 연못 개구리 시끄러이 다투고, 구름에는 우는 외로운 학 권태로이 돌아가려 하네"하고 하였다.
그 주에 "섬우와는 간신이 공을 바라는 것이고 여운학은 민유전이 충선왕의 일로 상소를 하여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방해하는 자가 있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귀국하려 한 일을 말한다"고 했다.
김태현이 지공거가 되어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왕을 배알하니 왕이 잔치를 베풀어주도록 명하였다.
이때 원나라 사신 이학사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왕에게 말하기를 "천하에는 이런 의례가 없어졌는데, 귀하의 나라에만 고풍이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감히 절하며 하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규보는 경사 백가의 책을 한번 보면 문득 다 외웠다.
문정공 조용은 성품이 총민하여 한번 보면 다 외웠다.
어릴 때 어떤 서생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문선책』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일 동안만 빌려달라고 하였다.
문정공이 그 책을 빌려서는 하루 만에 다 외우고 약속대로 돌려주었다.
본관은 용안. 조부 장영이 진헌사로 원나라에 가서 천호에 제수되었다.
장원적도 또한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그때 지은 시에 말하기를 "삼한의 한 사람이 눈이 내리는 저물녁에 강가로 가네. 돌아가는 배 태평스러움을 싣고 가니, 이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네"라 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그 시를 보고서 관학에서 머물며 공부하게 하였다.
고려에 귀국하여서는 관직이 삼품에 이르렀다.
김구가 문한을 전담했는데 당시에 원나라의 요구가 매우 번다했으나 김구의 표의 말이 이치에 들어맞으니 원나라 학사들이 매양 칭송하여 찬미했다.
원나라 말 하남왕이 중서 검교 곽영석이 돌아가다가 평양에 이르러 기자묘에다가 가음과 같은 시를 썼다.
"무슨 일로 미친 체하여 풀어헤쳤던가? 은나라의 국조를 홀로 세워보려 함이었지. 나라 버리고 간 미자는 다만 몸을 길이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고, 간하다가 죽은 비간을 나라가 이미 위태로운 상황에서 누가 슬퍼하리? 노나라의 땅 한 구릉에 송백이 있으니 충혼은 만고에 귀신이 알아주리. 늦게 조선을 방문하는 길에서 말을 멈추니, 어렴풋이 「맥수가」를 듣는 듯하네." 타조 알의 크기가 독만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정가신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왕위를 충숙에게 전해주고 자칭 상왕이라고 하면서 천자의도성에서 즐겁게 지냈다.
연경에 있는 사택에 만권당을 짓고 글 잘하는 학자들을 초청하여 글과 역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자기 생활을 즐겼다.
이제현을 불러 부중에 있게 하고 따르는 신하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번을 들어 교대하게 하였다.
원 황제가 매양 이색을 불러 볼 때마다 반드시 깨끗이 청소하고 향을 피웠다.
황제 왈 "이색은 용렬한 유학자가 아니니 그의 학문은 비록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또한 드물 것이니 어찌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조선 세종대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책을 편찬하게 했는데, 중국은 주나라 때부터 원나라에서 마치고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기자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흥하고 쇠함, 군신의 사특하고 바름, 풍속의 침체와 융성, 정교의 선하고 선하지 않음과 작게는 필부와 멀게는 사방 오랑캐의 일이 무릇 인륜 등의 일에 관련된 것은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책 이름을 『치평요람』이라고 하였다.
김구는 표를 쓸 때마다 일에 따라 문장을 꾸미는데 모두 이치에 들어맞았다.
원의 학사 왕악의 표의 글을 볼 때마다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고려 충목왕이 나이 겨우 8세에 왕위를 이었는데, 원나라 황제가 묻기를 "그대는 아버지에게 배웠는가, 어머니에게 배웠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
" 하자 황제가 그 천성이 총명함을 탄복했다.
최성지는 수학에 정통했는데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스승을 구하여 수시역법을 배워 고려로 돌아와 마침내 그 학문을 전했다.
김구는 문장에 있어서 한 때의 으뜸이었는데, 희종 때는 표문 짓는 일을 전담하였다.
원나라 한림학사 왕악이 매양 표사를 보고 반드시 칭찬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
목은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황갑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성호사설

선기옥형(璿璣玉衡)을 가지고 이것을 측량하면, 원 세조 지원(至元) 때에 곽수경(郭守敬)이 측량할 때 3도 반이나 떨어졌다.
저 곽 태사(郭太史)의 수시력(授時曆)이 원 세조(元世祖) 때에 나온 것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 그러므로 원대(元代) 이전에서는 역서를 자주 바꾸어 꾸미지 않을 수 없었고 한번 계산을 세워가지고 초하루ㆍ보름과 일식이 다 들어맞는 것은 지금의 시헌력(時憲曆)만이 그러하다.
한(漢) 나라는 개국 이래 다섯 번 역법을 고쳤고, 원(元)까지는 세 번 고쳤고, 원(元)의 태사(太史)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수시력(授時曆)이다.
옛날 원(元) 나라 사람 풍자진(馮子振)의 정연기(貞燕記)가 있다.
원 나라 장자(張頾)에게도 성회명(聖檜銘)이 있고 원 나라 이걸(李傑)에게도 조성회사(吊聖檜辭)가 있다.
그 후 80년 만인 계사년은 원 세조의 지원(至元) 13년이었는데, 도강(導江) 장자(張頾)가 교수(敎授)로 부임해 왔다.
노재는 원(元) 나라 사람이니, 대개 북방(北方)에 이런 기술이 있었는 듯하다.
고원경(顧元慶)의 시화(詩話)에 이르기를 “원(元) 나라 중 부광(溥光)의 자는 현휘(玄暉), 속성(俗姓)은 이(李)씨인데, 특별히 소문관 태학사 영록대부(昭文館太學士榮祿大夫)로 봉하고 현오대사(玄悟大師)라 호를 내렸다.
사람들의 말이 성인을 지극하게 존숭한 자가 원(元) 나라 성종(成宗) 같은 이는 없다고 한다.
원 나라 역사에는 비록 세조를 위하여 이런 사실을 숨겼지만, 《영헌왕통감(寧獻王通鑑)》에 나타나 있어 박론(博論)하는 자는 소상히 알며, 구문장(丘文莊 구준(丘濬))도 또한 갖추어 논한 바 있다.
이 때문에 경사(京師)에 공자의 묘(廟)가 없었다가 대덕(大德 원성종(元成宗)의 연호) 연간에 이르러 승상(丞相) 합날합손(哈剌哈孫)이 상주(上奏)하여 비로소 건립하였다.
《원사(元史)》에도 “구양현의 글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를 칭찬함이 이 같은데도 그의 유집(遺集)을 얻어볼 수 없으니 한스럽다.
그가 지은 유정수(劉靜修 원(元) 나라 학자 유인(劉因)의 호)의 화상찬(畫像贊)에 “증점(曾點)의 광(狂)은 아니면서도 기상(沂上)의 풍도가 있고, 중유(仲由)의 용(勇)을 본받으면서도 북비(北鄙)의 비파 소리가 없다. 유황(裕皇)의 인(仁)으로도 머물게 할 수 없는 사호(四皓)의 위엄을 나타내 보였고 “한 가지 이로움을 일으키는 것이 한 가지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고 한 것이 야율초재(耶律楚材 원 태종(元太宗) 때의 명신)의 격언이다.
공자를 소왕(素王 제왕은 아니나, 제왕의 덕을 갖췄다는 뜻)이라고 일컬은 것은 두예(杜預)로부터 시작되었고, 문선왕(文宣王)으로 시호한 것은 당 현종(唐玄宗)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원 성종(元成宗) 때에 이르러 대성지성(大成至聖) 4자를 더하였다.
대성지성이란 원래 《맹자》와 《중용》에서 나온 말이다.<그런즉 자사(子思)와 맹자가 일컬은 바가 정론(定論)인데, 어찌 원 나라 사람이 추가한 것이라 하여 굳이 제거하려 하였던가?
원(元) 나라 사람 황자후(黃自厚)는 의원이었는데, 원 세조(元世祖) 때에 파스파(巴思八)가 불씨(佛氏)의 유교(遺敎)를 얻어 몽고(蒙古)의 글자를 지었는데, 평ㆍ상ㆍ거ㆍ입(平上去入)의 네 가지 음운(音韻)으로써 순(唇)ㆍ설(舌)ㆍ후(喉)ㆍ치(齒)ㆍ아(牙)ㆍ반순(半唇)ㆍ반치(半齒) 등 칠음(七音)의 모자(母字)로 나누어 무릇 소리가 있는 것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또 스스로 주해하기를,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송 나라보다 잘한 나라가 없었으나, 소인들이 득세하여 천하의 공의(公議)를 극력 배격하고 군자를 간위(奸僞)로 몰아 축출하여 세상에 용납할 수 없도록 하였는데, 원 나라에서는 도리어 이런 일이 없어 선비들로 하여금 도학을 숨기지 않게 하였으니, 비교적 가상히 여길 만하다.
그러므로 인도하고 권장하는 공이 박해를 가하는 해독을 대적하지 못하는 법인즉 송 나라와 원 나라의 일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퇴계가 원대(元代)의 일을 꼬집어 낸 것은 멀리 맹자나 이천의 뜻과 더불어 부합되는 바가 있으니, 세 번 탄식할 만한 일이다.
한(漢) 나라 장노(張魯)란 자는 한중(漢中)으로부터 신주(信州) 용호산에 옮겨가 살았는데, 그후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1374~1367) 때에 진정선생(眞靜先生)이란 사호가 있었으니, 원(元) 나라 때 비로소 봉해서 진인(眞人)이라 하였다.
원(元) 나라 포의(布衣) 조천린(趙天麟)은 금경책(金鏡策)을 올려 아홉 가지의 징험[徵]과 스물 여섯 가지의 아름다움[美]과 서른 아흡 가지의 착함[類]과 또 세 가지의 편함[安]을 조목별로 진술하였는데, 채용할 만 한 말이 많았다.
원(元) 나라 염희헌(廉希憲)이 사령(赦令)이 이른다는 소문을 듣고 이르기를, “억센 도둑이 가까이 있는데 유태평(劉太平)의 무리를 어찌 사령이 내린다 하여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잠깐 사령을 정지시키도록 하고 근교에서 태평의 무리를 처형한 뒤에 비로소 사령을 맞아들이어 민심이 안정되었으니, 이는 임시 권도로 처리함에 있어서는 알맞게 된 듯하나, 옛날 군자는 일을 행하는데 이상한 흔적이 없이 아주 평탄하게 할 뿐이었다.
원(元) 나라 왕봉(王逢)은 국신사 학공의 백서시(帛書詩)를 읽고 읊은 시(詩)에, 원(元) 나라 요수(姚燧)가, “《강목(綱目)》 휘본(徽本)과 건본(建本) 두본(本)을 교정하다가 세 가지의 잘못됨을 발견하였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1297~1307) 무렵에는 합날 합손(合刺合孫)이, “경사(京師)에 공자묘(孔子廟)가 없어진 지 오래고 국학(國學)도 딴 기관에 붙여 있다.” 하고 이에 공자묘와 국학을 세우고 이름난 선비를 뽑을 학관(學官)을 만들고 근신(近臣)의 자제를 모아 입학시키기를 나라에 주달하였다.
휘종(徽宗)은 백이(伯夷)를 청혜후(淸惠侯), 숙제(叔齊)를 인혜후(仁惠侯)로 봉했고, 원 세조(元世祖)는 백이에게 소의 청혜공(昭義淸惠公), 숙제에게 숭양 인혜공(崇讓仁惠公)이란 시호로 추봉(追封)하였다.
원대(元代)에 있어 유인(劉因)은 한(漢) 나라의 엄광(嚴光)과 같고, 두본(杜本)은 노(魯) 나라의 이생(二生)과 같고, 유우(劉于)는 우리나라의 길재(吉再)와 같다.
이에 대하여서 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엄광은 지나치게 특수한 행동을 하여 뾰족하고, 사납고, 날카롭고, 곧아서 모범으로 삼을 수는 없거니와 정수(靜修)는 나아가서는 의(義)를 잃지 아니하고, 물러남에 있어 예(禮)를 어기지 아니하며 나직하나 넘어갈 수 없고 높으면 대항할 수 없으니 원대의 유일(遺逸)로는 이 한 사람일 따름이다.” 하였다.
곤산(崑山) 고영(顧瑛)은 원 나라 말기의 문학하는 선비였다.
기실은 요(遼)ㆍ금(金)ㆍ원(元) 세 나라도 예악(禮樂)이 일찍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소한중(蕭漢中 원(元)의 유학자)의 서괘설(序卦說)은 사(師)괘ㆍ비(比)괘로부터 그 아래로는 인증이 분명하여 속일 수 없다.
원(元)의 성종(成宗)이 조부의 유훈을 어기고 이를 바로잡았으니 기특한 일로서 어찌 평범한 임금의 무리와 같겠는가? 뒤에 와서 원(元) 나라 원호문(元好問)이 이 뜻을 알고서, 한퇴지의 산석 글귀를 뽑아 내보니(拈出退之山石句)그가 바로 여랑의 시란 것을 이제 알겠네(始知渠是女郞詩) 하였으니, 대개 아는 말이라 하겠다.
비록 분명히 그러한 줄을 알지만 자식을 낳으면 능히 시속의 숭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먼저 오언을 외고 두루 여러 대가(大家)를 열람, 심지어 원ㆍ명(元明)의 이름난 사람들에까지 미치게 한다.
정호음(鄭湖陰)의 도화마시(桃花馬詩)에, 망이궁 안에서 천진을 상실하자(望夷宮中失天眞)도원으로 들어가 진의 학정 피했다오(走入桃源避虐秦)등 위에 떨어진 도화 쓸지 않고 그냥 두어(背上桃花仍不掃)무릉의 봄빛을 이제껏 띠었구려(至今猶帶武陵春) 하였는데, 이 시는 원(元) 나라 선비 운봉(雲峯) 호병문(胡炳文)의 소작이다.
원(元) 나라 나필(羅泌)이 궁상변(窮桑辨)을 지어임천(林川) 보광사(普光寺)에 원명국사비(圓明國師碑)가 있는데 원(元) 나라 사람 게법(揭法)의 글씨에 위소(危素)의 글로 된 것이다.

송남잡지

《옥당한화(玉堂閑話》(원(元)나라의 왕운(王惲)이 지은 책)에서 말하였다.나는 생각건대, 원(元)나라 사람은 시에서, (위대한 원나라가 문천상을 죽이지 않았으니.임금의 의리와 신하의 충성 둘 다 얻었다네.)라고 한 것과 같다.
《화죽보(畵竹譜)》(원(元) 가구사(柯九思)의 저서)에서 "오대(五代) 때 어떤 부인이 밤에 누대 위에 앉아 있었는데, 달빛이 난간에 비치자 난간 밖의 대 그림자가 자리에 가득했다. 그래서 먹으로 그것을 모사(模寫)하니, 묵죽의 시초이다"라고 하였다.
왕세정이 "《진서(晉書)》와 《남북사(南北史)》는 패관소설이다. 《송사(宋史)》와 《원사(元史)》는 단란조보(斷爛朝報)이다. 그러나 《송사(宋史)》의 번다함 보다는 차라리 《원사(元史)》의 간결함이 좋다"라고 하였다.
《산거사요(山居四要)》(원나라 왕여무(汪汝懋)가 편찬한 책. 총 4권.)에서 "몸의 한가로움은 마음의 한가로움만 못하고, 약 보신이 음식 보신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설부(說郛)》(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도종의(陶宗儀)가 편찬한 총서. 야사, 설화, 전기 등의 책 1,000여 종에서 초록하여 편집했다. 총 100권.)에서 "고구려의 방언으로 우(盂)를 대야(大耶)라 한다"라고 하였다.
왕정(王禎)의 『농서(農書)』에서 "규(葵)는 양초(陽草)이다.
온갖 채소의 으뜸이며 사철의 반찬거리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