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
二十二日,至廣陵辱,是日晴,自水府神祠開船,至楊子江,江邊五六里,__舟於陸者,前後相望,臣等懸帆至江之中,金山下江豚戲浪,若戰馬墓奔然,至西津渡馬頭石堤,建木竿於水中,以為長橋,往來者皆繼舟於橋下,線橋登堤岸,江淮勝槃樓,當道峥嵘,臣等步由樓下,過瓜洲鎮,至是禮河,一名鎮上河,復乘船而行,楊旺使傅榮謂臣曰:“你國有韓老老入在我國,知否?”臣曰:“聞有韓氏者入大國耳.”旺曰:“正是此韓氏,即你國婦人入我國為大行皇帝乳母,今已作古,起墳于天壽寺,”榮曰:“此指揮監葬韓氏者,故問云耳,”過攀桂門、南京颠廠、祈求雨澤祠、七錢鋪、花家園鋪、魚井鋪、城澤、楊子鋪,至楊子橋,橋廢只有閣懸標,又有橋倉,日幕,過清涼鋪,夜至廣陵睾,睾北一里,即楊州府城也,城中有府治及楊州衛、江都縣治、兩淮運鹽司,
광릉역(廣陵驛)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수부신사(水府神祠)279에서 배를 출발시켜 양자강에 이르니, 강가의 5-6리 사이에는 육지에서 배를 손으로 밀고 가는 사람이 앞뒤에 잇따라 있었습니다.
신 등이 돛을 달고 강 가운데에 이르니 금산아래의 강돈(江豚)280이 물결을 희롱하는 것이 마치 전마(戰馬)가 떼를 지어 달리는 듯하였습니다.
서진도(西津渡)의 마두석제(馬頭石堤)에 이르니, 나무 기둥을 물속에 세워서 긴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리 아래에 배를 매고는 다리를 따라 석제(石堤)의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강회승개루(江崔勝槪樓)282는 길을 막고 솟아 있어, 신 등은 누각 아래를 걸어 과주진(瓜洲鎭)283을 지나 일명 진상하(鎭上河)라고도 하는 시례하(是禮河)에 이르러서 다시 배를 타고 갔습니다.
양왕이 부영(傅榮)을 시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한노로(韓老老)[1][2]284란 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아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한씨(韓氏)가 대국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왕이 말하기를, “바로 이 한씨가 귀국의 부인(婦人)[3]으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대행황제(大行皇帝)285의 유모가 되었소. 지금은 이미 작고하여 천수사(天壽寺)에 무덤을 만들었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이 지휘(指揮)가 바로 한씨의 장례를 감독한 분인 까닭에 물어 보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 명나라 순장제도 [4]
반계문(攀桂門), 남경전창(南京甄r), 기구우택사(祈求雨澤祠), 칠전보(七錢鋪), 화가원포(花家園鋪), 어정포(魚井鋪), 금성택(城澤), 양자포(揚子鋪)를 지나서 양자교(揚子橋)에 이르니, 다리는 없어졌고 표지가 달린 각(閣)과 교창(橋倉)이 있었을 뿐입니다. 날이 저물녘에 청량포(淸凉鋪)를 지나 밤에 광릉역(廣陵驛)에 이르렀습니다.
광릉역 북쪽으로 1리쯤 가면 곧 양주부성(揚州府城)입니다. 성안에 양주부치(揚州府治)와 양주위(揚州 衛)286, 강도현치(江都縣治), 양회운염사(兩進運鹽司)287가 있었습니다.
- 기후
- 지명
- 지리
- 풍습
- 동물
- 토목
- 제도(교통)
- 인명-조선
- 제도(관직)
- 사건(장례)
- 불교
- 토목
- 시간
22nd Day. Arrival at Kuang-ling Station. This day was fair. From Shui-fu-shen Shrine we pushed off the boats and came to the Yangtze River. For five or six li along the edge of the river, endless lines of people were moving boats across the country. We hoisted the sails and went into the river. Below Mt. Chin, porpoises played in the waves like galloping war horses. We [went from Hsi-chin Ferry to the Shih-li River). Yang Wang sent Fu Jung to say to me, “A Dame Han of your country came to our country. Did you know that?” I said, “I have heard that a Han woman entered China, but that is all.” He said, “She was the one. This Han was a woman of your country who came to our country to be wet-nurse to the late Emperor. She is dead now, and her burial mound was put up at T’ien-shou Temple. This Commander is the one who took charge of burying the Han woman. That is the only reason he asked.” [We passed several places and came to Kuang-ling Station.]
279. 水府란 전설상의 水神 혹은 龍王이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水神의 稱號로 쓰이기도 한다. 280. 江豚은 흔히 '江猪'로 부르기도 하는데, 민물에 살고 있는 희귀한 돌고래 종류이다. 환경이 나빠지면서 1980년대 이후 크게 감소하여, 최근 長江 전 구역의 頭數가 2천마리 이하라고 보고된 바 있다. 281. 鎭江府治와 의리의 거리에 있다. 북으로 瓜洲와 마주 보고 있다. 舊名은 赤山渡이다. 乾隆《鎭江府志》권18, 津梁. 282. 江都縣의 瓜州鎭에 있다. 正統13년(1448)에 侍郞 周佐이 건립하였다. 光緖 《江都縣志》권16, 古蹟. 283. 江都縣城의 남쪽으로 40리 거리에 있다. 옛부터 屯戊의 요해지로 알려졌다. 雍正《揚州府志》권6, 都里. 284. 韓老老는 左議政 韓確의 누이로 이름은 桂蘭이다. 韓桂히은 태종17년에 永樂帝의 후궁이 되었다가 殉葬을 당했던 언니를 이어, 세종10년에 宣德帝의 후궁으로 뽑혀갔 다. 이후 成化帝를 양육하기도 한 韓桂蘭은 74세 되던 해인 成化19년(1427)에 죽었다. 明皇室에서의 오랜 생활로 궁실 내부의 사정에 밝아 嬪 사이에서 '老老'라 불렸 다. 한편 明朝에서는 勅書를 내려 聖節使는 반드시 韓氏의 族親으로 差遺할 것을 명하였기 때문에 여러 韓氏들이 중국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韓致亨의 경우 귀국 후 관직 제수와 賞賜가 지나치다는 비판이 일기도 하는 등 많은 말썽이 일었다. 《朝鮮成 宗實錄》 8년 9월 乙亥 ; 11년 7월 庚寅; 12년 12월 丙寅; 14년 8월 辛未 ; 18년 7월 癸丑 條 등 참조. 285. 大行이란 황제가 승하한 뒤 諡號를 올리기 전의 칭호로 여기서는 明憲宗 成化帝를 지칭한다. 286. 원명은 揚州衛指揮使司로 前後左右中의 五所가 예속된다. 府治의 서남쪽에 있다. 雍正《揚州府志》권13, 公署. 287. 都轉運鹽使司의 하나로서 泰州·淮安·通州가 예속되었다. 한편 運鹽司는 兩.兩浙·長盧·河東·福建·山東 등지에 설치하여 食鹽의 생산과 관리에 관한 일을 관 장하였다. 아래에 14分司를 관할하였다. 泰州·淮安·通州는 兩淮에, 嘉興·松江. 寧紹·溫台는 兩浙에, 滄州·州는 長蘆에, 萊·濱樂은 山東에, 解鹽의 東場·西場 ·中場은 河東에 각기 예속되었다. 都轉運使를 두어 司務·同知·副使·判官을 總領 하였다. 각 穀場倉을 독려하였으며, 場에는 鹽課司를 설치하였다. 모두 巡鹽御史 또는 鹽法道臣의 감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