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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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15일 (일) 20:19 판 (대동운부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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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

고려가 원나라를 사대하는 모습.

대동운부군옥

충렬왕이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따오기 고기를 연달아 바쳤다.
고려 때 원나라에 가서 공물을 바치는데 사사로이 금이나 은을 가지고 가는 것을 금하였다. 신우 때에 위견이 금령을 위반하여 머리를 베어 조리돌렸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미녀를 바치게 하자 전국에 혼인을 금하는 조칙을 내렸다.
충렬왕이 황서를 원나라에 보내어 '금으로 그린 자기'를 바쳤다.
원나라를 섬긴 이래로부터 태평한 날이 오래 계속되어 '문신들이 느긋하고 무신들은 놀며 지냅니다'. 대궐을 지킬 사람이 없어, 호군 등의 관직을 설치하여 대권을 지키는 임무를 대신하고 있으니 조종 때의 팔위 제도는 모두 헛되이 설치한 것이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요서를 침략하니 수나라의 황제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왕 고원이 두려워 표를 올려 사죄하며 '요동의 분토신 원'이라 일컬었다.
충렬왕이 원나라를 섬긴 이래로 국사가 창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많아서 첨의와 밀직이 매양 도평의사에 모여서 의논하였는데, 상의라는 이름이 또한 만들어져 국정에 참여한 자가 6,70명이 되었다.
충렬왕이 원나라 황제를 배알하니 황제가 고려가요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에 왕이 쌍연곡을 연주하였다.
김방경이 원나라 진봉사가 되었다. 출국하면서 가져간 금은 등 국신은 혹 상대편 관원이 궐직이 되어 받을 사람이 없으면, 사신이 마음대로 쓰게 되어 있다. 그러나 공은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국신고에 반납하였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연이어 환관을 바쳤다.
충렬왕이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새매를 바치니 황제가 그것을 받았다.
그 뒤에도 연이어 사신을 보내 새매를 바쳤다.

성호사설

송남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