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2일
二十二日,晴風,過高墩鋪,至新關門,有長土城,北附長城而南,關門正當其中,即成化年間所新築也,又過大臺、三官廟、河灣舖,至三叉河,河即遼河也,源自開原東北,經鐵嶺,至此與渾河、(泰)(太子河合流 為一,故名三汉,盖遼地瀕海而高亢,支河皆逆流,故泰子、渾河,皆自東而西,又有境外支河,皆自北而南,曲折紫迴,俱會于此,作浮橋,橫截河流,又挽舟而渡,號為遼河渡,有一官人坐于河岸小廳,以識察往來行人,其南有聖母媽媽廟,又過臨河橋,到牛家莊露,又過石井鋪、沙河在城鋪,至在城睾,睾在海州衛之城西門外,故名,衛亦巨鎮也,東有西车城山。
맑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고돈포(高數鋪)를 지나서 신관문(新關門)에 이르니 장토성(長土城)이 북쪽으로 장성(長城)에 붙어서 남쪽으로 뻗었고, 관문(關門)은 바로 그 복판에 있었으니 곧 성화(成化) 연간에 새로 쌓은 것이었습니다.
또 대대(大臺), 삼관묘(三官廟), 하만포(河灣鋪)를 지나서 삼차하(三가河)에 이르니 삼차하가 곧 요하(遼河)[1][2][3][4][5]였습니다.
그 원류는 개원(開原)의 동북으로부터 시작하여 철령(鐵嶺)[6][7][8]을 지나 이곳에 이르러서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206 와 합류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삼차하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요동 지대는 바다에 가깝지만 지대가 높아서 지류가 모두 역류하기 때문에 태자하와 혼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습니다.
또 이 지역 밖의 지류는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굽이지고 빙 둘러서 모두 이곳으로 모이니 부교(浮橋)를 만들어 하류(河流)를 가로막아 끊었으며, 또 배를 당겨 건너게 되므로 요하도(遼河渡)라고 불렀습니다.
한 관인이 강가의 작은 청사에 앉아서 왕래하는 행인들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남쪽에는 성모양양묘(聖母壤壤廟)가 있었습니다.
또 임하교(臨河橋)를 지나서 우가장역(牛家莊)에 이르고, 다시 석정포(石井鋪)·사하재성포(沙河在城鋪)를 지나 재성역(在城驛)에 이르렀습니다.
재성역은 해주위(海州衛)의 성 서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재성역이라 이름한 것이었습니다.
해주위 또한 큰 진(鎭)이었습니다. 동쪽에 서모성산(西牟城山)이 있었습니다.
22nd Day. Fair but windy.
[We went from Kao-tun Stop across the Liao River to Hai-chou Garrison, which was also a big market town.]
- ↑ 요하문명(遼河文明)의 발견과 동북아 상고사-우실하 교수
- ↑ "고구려시대 압록강은 요하(遼河)였다", 연합뉴스, 2012,02.23
- ↑ 고조선의 서쪽 경계 '요하'는…"현재의 랴오닝강" vs "더 서쪽", 연합뉴스, 2017.03.22
- ↑ 요하지역에서 발견된 ‘신비의 왕국’한국인의 고향,‘신비의 왕국’찾았다(8), the Science Times, 2007.11.06
- ↑ 요하문명론
-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서울신문, 2018.03.12
- ↑ 윤여동설 - 고려는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
- ↑ 철령위, 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