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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큐레이션의 교육학적 연구
- 디지털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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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 강화군에서 현(근)대 정치는 1900년대 초 강화양명학계열과 기독교 계열의 독립애국운동, 교육운동, 청년운동 등에서 연원이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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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 강화도성지순례 [[2]]
- 한국 기독 교회사 [[3]]
- 한국교회 문화유산 답사기 ⑫ ] 강화도 [[4]]
- [202호 기독교 유적지 답사⑥] 이야기 섬, 강화 가는 길 [[5]]
- 강화도 기독교 역사 이야기 8회 [[6]]
- "개신교 성장, 하곡학과 관련있다" [[7]]
- 한국교회사 [[8]]
- 뼛 속까지 유교 숭배자, 예수 따르다 [[9]]
- 이야기 한국교회사(1) 조선의 바울 김창식 목사 [[10]]
- 장로교와 감리교 [[11]]
- 개신교 감리교의 강화도 전래와 문화변동 [[12]]
양명학
주자학과 양명학은 유학 경전 <대학>을 해석하는 데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대학>은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이 핵심이다. 이 중 특히 처음 두 조목인 격물, 치지의 뜻을 파악하는 데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다름이 두드러진다. 주희는 격물치지를 ‘사물의 이치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앎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한 반면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격물치지를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해서 앎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즉, 주희는 진리탐구를 중시하고 왕수인은 도덕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 되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하게 된 것이다. 해석의 차이는 먼저 글자의 뜻을 달리 파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주희는 격물치지의 ‘격(格)’을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파악한다’, 즉 ‘궁리(窮理)’의 뜻으로 이해한 반면 왕수인은 격에 자격의 뜻이 있다고 하여, 격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 즉 ‘정기부정(正基不正)’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할 경우 ‘물(物)’의 의미도 심각하게 달라진다. 주희에게 물은 나와 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일 뿐이지만 왕수인에게 물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어서 내가 주체가 되어 파악하여야 할 ‘주관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왕수인은 평소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를 구한다는 것은 가령 부모에게서 효의 이(理)를 구한다는 말과 같다.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면 효의 이는 과연 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왕수인 <견습록>, 민음한국사총서 02, 92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왕수인이 주희를 비판한 말이다. 앞에서 양명학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한다고 했다. 왕수인에 의하면 부모를 모시는 데 불효한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이런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아 효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격물’이 되는 것이다. 주자학이 객관주의라면 양명학은 주관주의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인류 역사의 모든 사상은 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용어에 포괄된다. 가톨릭이 객관주의라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주관주의다. 가톨릭은 객관적 권위(교황)를 절대화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이 바이블이나 기도를 통해 교황의 개입 없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농업이 객관주의라면 상업은 주관주의다. 농사는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상업에는 매번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으로 16세기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농업에서 상업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중앙집권체제와 정착민의 삶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방분권체제와 유목민의 삶은 주관적이어야 한다. 조선에서는 16세기에 양명학이 대두되었지만 주자학에 밀려 세를 얻지 못했다. [1]
주자학 일변도로 정착되어 있던 당시의 유학계에서는 양명학 배척론이 우세하여 그 유입을 금하고, 양명학을 수용하고자 노력했던 학자들을 이단(異端)또는 사문난적(斯文亂的)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이것은 박세당(朴世堂)이 주자학을 비판하자 이를 사문난적이라 하여 유배시킨 사건과 흡사하다. 양명학 반대론자의 대표자는 이황(李滉)으로서, 그는『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양명의『전습록』이론을 성리학에 의하여 비판하였다. 그를 따르던 학자들과 후대의 성리학자들이 참여하여 양명학 배척의 분위기가 고조 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왕양명이 주자학을 비판한 것을 다시 조목별로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유학계를 더욱 성리학 일변도로 만들어 고답적이고 고지식한 경향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양명학 찬성론자들은 주자학 일변도를 비판하고 조선 유학의 활성화를 위하여 양명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양명학을 연구한 학자로는 남언경(南彦經), 이요(李謠),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조선 양명학 연구의 최고봉이다. 후일 실학자 이익(李瀷)은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 경향의 공리공론을 비판하였으며, 구한 말 박은식(朴殷植)은 유교를 대중화하고 민중의 유교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양명학이 필수적이라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미지의 영역이었던 한국 양명학의 연원을 찾는 데 중대한 시금석을 마련하였다.[2]
- 하곡학파 [13]
- 강화학파 [14]
- 정제두 [15]
- 만주로 집단 망명한 양명학자들 [[16]]
- 강화도에 '유배' 간 양명학 시대 뛰어넘은 개혁성 조명 [[17]]
- 만주로 떠난 사람들과 조선귀족(朝鮮貴族) [[18]]
- 일본 근대 학술사조와 양명학- 신현승 [[19]]
- 강화학파 이건승 [[20]]
- 하곡학과 실학 [[21]]
- 주종 복종은 유학이 아니다[[22]]
독립운동
- 강화 기독교인들, 3.18 만세운동 주도 [[23]]
- 스무 살 청년 마음속'애국애족의 횃불'타오르다 [[24]]
- 丁未의병서 만세운동까지.. 항일투쟁 맥 이은 '결사대장 유봉진'[[25]]
- 강화도 백범길···역사 탐방지로 만든다 [[26]]
- 1946년 11월 18일 김구선생 강화방문 사진 발견 [[27]]
교육
디아스포라
- ↑ 출처: [주자학과 양명학, 어떻게 다른가 [2017년 5월 12일 / 제121호]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61]
- ↑ 출처: [양명학 논쟁 ([陽明學 論爭])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5&idx=24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