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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성지순례 [[https://anytimebus.tistory.com/3]] | * 강화도성지순례 [[https://anytimebus.tistory.com/3]] | ||
* 한국 기독 교회사 [[http://photohs.co.kr/xe/kyungki_kyodong/7244]] | * 한국 기독 교회사 [[http://photohs.co.kr/xe/kyungki_kyodong/7244]] |
2019년 4월 18일 (목) 11:38 판
디지털 큐레이션의 교육학적 연구
- 디지털 큐레이션
- 연결주의
- 영상 세대, 이미지 세대
- 빅데이터
- 스몰데이터
- 온톨로지
- 탐구정신
양명학
주자학과 양명학은 유학 경전 <대학>을 해석하는 데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대학>은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이 핵심이다. 이 중 특히 처음 두 조목인 격물, 치지의 뜻을 파악하는 데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다름이 두드러진다. 주희는 격물치지를 ‘사물의 이치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앎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한 반면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격물치지를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해서 앎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즉, 주희는 진리탐구를 중시하고 왕수인은 도덕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 되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하게 된 것이다. 해석의 차이는 먼저 글자의 뜻을 달리 파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주희는 격물치지의 ‘격(格)’을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파악한다’, 즉 ‘궁리(窮理)’의 뜻으로 이해한 반면 왕수인은 격에 자격의 뜻이 있다고 하여, 격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 즉 ‘정기부정(正基不正)’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할 경우 ‘물(物)’의 의미도 심각하게 달라진다. 주희에게 물은 나와 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일 뿐이지만 왕수인에게 물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어서 내가 주체가 되어 파악하여야 할 ‘주관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왕수인은 평소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를 구한다는 것은 가령 부모에게서 효의 이(理)를 구한다는 말과 같다.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면 효의 이는 과연 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왕수인 <견습록>, 민음한국사총서 02, 92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왕수인이 주희를 비판한 말이다. 앞에서 양명학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한다고 했다. 왕수인에 의하면 부모를 모시는 데 불효한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이런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아 효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격물’이 되는 것이다. 주자학이 객관주의라면 양명학은 주관주의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인류 역사의 모든 사상은 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용어에 포괄된다. 가톨릭이 객관주의라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주관주의다. 가톨릭은 객관적 권위(교황)를 절대화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이 바이블이나 기도를 통해 교황의 개입 없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농업이 객관주의라면 상업은 주관주의다. 농사는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상업에는 매번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으로 16세기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농업에서 상업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중앙집권체제와 정착민의 삶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방분권체제와 유목민의 삶은 주관적이어야 한다. 조선에서는 16세기에 양명학이 대두되었지만 주자학에 밀려 세를 얻지 못했다. [1]
주자학 일변도로 정착되어 있던 당시의 유학계에서는 양명학 배척론이 우세하여 그 유입을 금하고, 양명학을 수용하고자 노력했던 학자들을 이단(異端)또는 사문난적(斯文亂的)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이것은 박세당(朴世堂)이 주자학을 비판하자 이를 사문난적이라 하여 유배시킨 사건과 흡사하다. 양명학 반대론자의 대표자는 이황(李滉)으로서, 그는『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양명의『전습록』이론을 성리학에 의하여 비판하였다. 그를 따르던 학자들과 후대의 성리학자들이 참여하여 양명학 배척의 분위기가 고조 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왕양명이 주자학을 비판한 것을 다시 조목별로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유학계를 더욱 성리학 일변도로 만들어 고답적이고 고지식한 경향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양명학 찬성론자들은 주자학 일변도를 비판하고 조선 유학의 활성화를 위하여 양명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양명학을 연구한 학자로는 남언경(南彦經), 이요(李謠),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조선 양명학 연구의 최고봉이다. 후일 실학자 이익(李瀷)은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 경향의 공리공론을 비판하였으며, 구한 말 박은식(朴殷植)은 유교를 대중화하고 민중의 유교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양명학이 필수적이라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미지의 영역이었던 한국 양명학의 연원을 찾는 데 중대한 시금석을 마련하였다.[2]
조선 양명학은 정제두에 이르러 집대성됨으로써 절정을 이루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활동하였던 정제두는 주자학을 정통 학술로 삼았던 조선 학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남언경과 장유의 학설을 수용하여 발전시키고 최명길의 학풍에도 접근하여 조선 양명학을 계통적으로 이어나갔을 뿐만 아니라, 정주학자 중에서 기대승(奇大升)과 윤증(尹拯)의 학문을 존중하여 자신의 양명학 체계에 수렴하였다. 주자학이 지배하던 학문 풍토 속에서 양명학에 대하여 심도 깊은 연구를 수행하던 그의 학문 태도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성학(聖學)에 대한 굳은 신념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이는 훗날 강화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계승 발전되었다. 정제두는 1711년(숙종 37) 8월 경기도 안산에서 강화로 이주하는데, 이를 계기로 생을 마칠 때인 1736년(영조 12)까지 그곳에 거주하면서 정후일(鄭厚一)과 이광사(李匡師) 등에게 강학하였다. 이후 이영익(李令翊), 이충익(李忠翊), 정동유(鄭東愈), 이면백(李勉伯), 이시원(李是遠) 등을 거쳐 신작(申綽), 이건창(李建昌), 이건방(李建芳) 등에게로 이어져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를 일반적으로 ‘강화학파’라고 부른다. 강화학파의 학풍은 근대의 정인보에게 전수되었으며, 박은식(朴殷植)이나 송진우(宋鎭禹) 역시 정인보와 교유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조선후기 실학파와 개화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는 서구의 종교 및 과학 사상, 청대의 고증학과 양명학 등을 들 수 있는데, 학문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주자학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비판하고 현실 타개를 중시하여 지도 이념과 현실 일치를 주장한 양명학의 사상과 정신이 실학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양명학은 주자학의 정통적 권위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통로를 열어 주었고, 실학사상의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 시대 사상사에 의미 있는 기능을 담당하였다.[3]
양명학은 기준과 중심이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내 마음 밖의 이치와 원칙이 중심인 주자학과 대비한다. 주자학을 출세를 위한 관학(官學)으로, 양명학을 민학(民學)으로도 구분하기도 한다. 양명학은 지행합일, 즉 아는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양명학은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화한 조선시대 지배층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양명학은 ‘양지’(良知)를 찾는 학문이다. 양지란 우리가 통상 말하는 양심(良心)이나 유교의 천성이나 본성. 불교의 불성, 기독교의 영성과도 다르지않다. “자기만 살려는 행동은 본래 양지가 아니다. 살면서 형성되어은 습심(濕心)이다. 우리가 경쟁적으로 자기 욕망만 위해 달리다보니, 본래 가진 양지를 잃어버리고 후천적 습관에 의해 형성된 습심에 의해 행동하고 만 것이다.”“양명학자인 독립운동가 정인보 선생은 ‘간격(間格·막힘)에 의해 죽고, 감통(感通·느낌이 통함)에 의해 산다’고 했다. 소통이 주로 언어가 통하는 것을 말하는데 비해 감통이란 감정이 통하고 마음이 통한 것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그와 한마음으로 통해 구해주겠다고 물로 뛰어드는게 감통이다. 온 국민이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과 마음이 통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고 있다. 감통이 된 것이다.”그는 “왕양명 선생이 모든 유기체는 다 하나라는 천지만물일체론을 내놓았는데, 이해타산과 욕심이 차면 일체임을 잃어버리게 된다”며 “세월호 사건은 마음으로 우리의 일체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유교의 본질은 오륜이다. 삼강은 변질된 것이다. 진시황이 통일제국을 이루면서 법가의 이론을 유학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신하의 근본이라는 군위신강(君爲臣綱)같은 주종관계는 유학의 본질이 아니다. 군신유의(君臣有義)가 본질이다. 군신유의란 임금이라서 따르는게 아니라 옳은 것을 따르는 것이다. 군위신강은 깡패라도 따르라는 것이지만 군신유의는 옳지않으면 따르지 않은 것이다. 삼강은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지만 오륜은 사리와 공의를 구분해 정의를 실현하게 한 것이다.각자가 자신의 양지에 따라 정의를 지킨다면 이런 불행이 생길 수 없다.”[4]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며 동아시아 근세사상사에서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양명학은 근세 일본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까? 통설에 의하면 일본인이 양명학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660년 전후의 시기라고 한다. 또 이 17세기는 일본에서 신유교(新儒敎)가 활발하게 수용되어 사상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이며 주자학파와 양명학파 이외에도 유교사상의 안티테제로서 출발한 고학파(古學派), 고문사학파(古文辭學派) 등이 성행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자학의 사상사적 위상에 비하여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의 양명학은 비록 다수의 양명학자를 배출했다고는 하나 그다지 주목받는 사조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양명학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막말유신기이며, 메이지시대가 되어 비로소 그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근세 이후 일본 지식인층에서의 유교사상에 대한 인식은 다름 아닌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대한 초월과 극복의 과정이었으며, 양명학은 막말기(幕末期) 일본 지식인층들에게 지사정신(志士情神)으로서 높이 숭앙받았던 사상적 조류였다. 그 단적인 예가 주자학의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고학파(古學派)와 국학파(國學派), 미토학(水戶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양명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양명학(=요메이가쿠)이라는 명칭 자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이며 본토 중국에서의 명칭은 요강학(姚江學)이나 심학(心學)으로 불리던 것이었다. 고지마 쓰요시(小島毅)는 근년 근대 일본의 양명학(近代日本の陽明学)(講談社, 2006)을 간행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 근대 메이지(明治) 제국을 지탱한 세 가지 사상 축으로서 칸트(독일 철학자)와 양명학 및 무사도(武士道)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 책의 에피소드 넷째 부분에서 소제목으로서 명명한 「제국을 지탱한 사상─칸트․무사도(武士道)․양명학(陽明學)─」이라는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 근대 메이지시대의 대표적 양명학자인 미시마 주슈(三島中洲)는 1877년 도쿄(東京) 치요다쿠(千代田区) 고지마치(麹町)의 자택에서 한학(漢學) 전문학교를 개설하고 후에 도쿄 구단(九段)에서 니쇼가쿠샤(二松学舎)를 설립하였다. 이 니쇼가쿠샤(二松学舎)는 미시마 주슈(三島中洲)의 학문정신에 의거하여 양명학에 의한 교육을 표방하는 학교였다. 지금도 일본의 양명학 연구의 메카라 하면 이 학교를 꼽고 있으며 양명학 정신에 의거한 건학 정신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덧붙이면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 일본 근대의 대표적 지식인들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일본 근대기에 양명학을 보편화시킨 인물로서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와 그가 참여한 국수주의자들의 문화단체인 세이쿄샤(政敎社)에 주목해 보면 이것은 양명학을 국수주의적 입장과 연결시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메이지시대에 양명학이 기독교와 매우 닮아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양명학을‘기독교화(基督敎化)’하려 했던 인물로서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의 존재도 있다. 우치무라 간조는 그 자신이 영어로 정리한 대표적 일본인代表的日本人(1894년)이라는 저서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양명학자였다고 하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구미(歐美) 지역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폭넓게 인지시키는 효과를 얻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의 무사도武士道(1899년)도 무사도정신의 기초로서 양명학을 언급한다. 이처럼 메이지시대가 되어 양명학은 다양한 측면에서 각광받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막말유신기부터 서서히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왜 주자학이 아니고 양명학이 일본에서 각광을 받았던 것일까? 그것은 양명학이 지닌 특징이 ‘이론 지향’보다는 ‘실천 지향’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담당자들이 활동한 시대적 상황이 막말유신기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중국 양명학은 명대 중기부터 명대 말기까지 성행하였는데, 이 시기는 명조(明朝)가 대내외적으로 혼란과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이며 이러한 점이 일본의 막말유신기와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중국의 양명학자들이 사회질서의 구축과 유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일본의 재야 지식인층에게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5]
강화양명학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와 이광려 등을 주축으로 한 학파를 이르는 말이다. 정제두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면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이 확립된 이후 그 아들인 정후일(政厚一)과 그의 문인인 이광명(李匡鳴), 이광려(李匡呂)등에게 전승되었다. 이후 가학(家學)으로 전승되었는데, 이와 같이 정제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통을 '하곡학', '강화학', '강화양명학', '강화하곡학', 등으로 부르고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를 강화학파라고 하였다. 학술의 내용으로 보면, 그들은 정제두 이래로 양명학을 수용하고 도교와 불교까지 섭렵하고자 했고, 이학(理學:유학)보다는 한학(漢學)을 연구하고 동시에 국학(國學)을 일으켰다.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소화했으며, 훈민정음연구·국어학·국사학·서법(書法)·문자학·문헌학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을 남겼다. 강화학파의 학자들에는 서법에 이광사(李匡師), 국사학에 이긍익(李肯翊)과 황현(黃玹), 한학(漢學)에 신작(申綽), 훈민정음연구에 유희(柳喜), 문자학에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南克寬) 등 오늘날 국학 분야에서 거론되는 선구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학맥에 속한다. 홍양호(洪良浩)나 이종휘(李種徽)같은 학자들도 이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6]
“하곡 이전에 양명학을 연구한 남언경·장유·최명길·이유 등을 하곡학의 연원으로 꼽을 수 있다. 하곡학파를 형성한 초기 인물로는 이광명·이광사·이광신·심육 등이 있다. 그 다음 세대로는 이영익·이충익·신대우·정동유·이면백 등이며, 또 그 다음 세대의 이시원·이지원·이건창·이건승·이건방을 거쳐 정인보에 이르렀다.”하곡학의 특징은“조선 후기 실학의 실질적인 발상지였다. 하곡의 직계 제자들은 ‘실심실학(實心實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실심실학이 바로 하곡학의 핵심이다. 해방 이후 우리 학계에서 ‘실학’은 경세치용·이용후생의 실리적 측면만 주목 받았다. 하곡학으로 실학의 실체를 다시 파악해야 한다. 실학에서 학파로서 실제 존재했던 것은 하곡학파였다.”“‘실심’이란 자기를 속이지 않는 참된 마음을 가리킨다. 실학이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에서 실천하는 학문을 말한다. 실심실학은 자기의 사적인 실리만을 챙기면서 도덕을 빠트린 ‘실용실학’과 차별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맹목적 명분에 빠진 이상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이다. 하곡학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실심을 강조하여 우리의 역사와 한글을 연구하는 실학의 원류가 되었다.”[7]
강화학파는 1709년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가까이 지내던 소론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강화도로 물러나 은거하면서 소론학자 중심의 학맥이 200여 년 동안 형성된 것을 지칭한다.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의 양명학설을 따른 강화학파는 비록 이기론을 사상적 기초로 삼았지만 ‘공평의 원칙’과 시세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적인 실사구시’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주어 한말 민족주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을뿐 아니라 강화 3·1 운동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한국 전통사회에 전래된 가톨릭은 ‘척사위정’의 유교적 가치관과 갈등과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인해, 가톨릭에 대한 강력한 박해로 귀결되었다. 황사영이 로마교황청에 보내려다 중도에 발각된 것이 「황사영백서」 사건인데, 그 서신에 ‘전함 수백 척과 정병 5~6만을 내어 대포 등 강력한 무기를 다량으로 싣고 와서’ 엄포를 놓으라고 요청한 사실에서 ‘나라는 없어져도 교회는 존속해야한다’는 반민족적인 주장이 확인되었고 이는 한국전통사회가 반가톨릭적 입장을 견지하게 하여 나중에 전래된 개신교 또한 배척하기에 이른 것이다. 개신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게 된 전통 유교사회에서 강화개신교는 적극적으로 한국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탈피하고자 ‘민족교회’로서의 방향을 설정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강화의 3·1운동은 길상면 지역의 감리교 교인이 중심이 되어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강화중앙교회 100년사』). 강화의 감리교 개신교의 전래와 강화학파와의 관련성을 보다 집중적으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제는 정제두의 양명학을 ‘강화학파’로 지칭하여 세계화에 힘쓰는 지역 지식인 중 다수가 크리스찬임을 생각할 때 강화의 문화지형은 감리교 개신교가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8]
강화양명학은 하곡 정제두선생으로부터 이어져오는 강화의 대표적인 학문, 사상분파로서 당색으로는 소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강화양명학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 말과 실천은 하나(知行合一), 실천에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특징은 주자학과 달리 강력한 주체의식과 평등의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학문적 경향으로 강화양명학자들은 구한말 명분을 내세우던 주자학자(이완용등 노론세력)와 현실참여를 지향하던 개화파(박영효등)의 상당수가 친일을 통해 현실과 타협한 데 비해 단 한명의 부역자 없이 현실에서는 쓰라리고 어려웠으나 올곧은 정신을 유지하였다. 서여 민영규 선생이 쓴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 이와 같은 사연이 절절이 담겨있다. 영재 이건창의 동생인 경재 이건승, 난곡 이건방, 그리고 그의 제자인 위당 정인보선생이 그러하다. 그들은 강화에 있으면서 계명의숙을 설립하여 교육운동에 매진하였으며, 만주로 망명해서는 정원하, 홍승헌, 이석영, 이회영, 이상설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9]
- 만주로 집단 망명한 양명학자들 [[1]]
- 강화도에 '유배' 간 양명학 시대 뛰어넘은 개혁성 조명 [[2]]
- 만주로 떠난 사람들과 조선귀족(朝鮮貴族) [[3]]
- 일본 근대 학술사조와 양명학- 신현승 [[4]]
- 강화학파 이건승 [[5]]
- 하곡학과 실학 [[6]]
- 주종 복종은 유학이 아니다[[7]]
기독교
강화양명학과 함께 강화의 근대정신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의 수용이다. 18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공회, 감리교 등 기독교의 선교가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설립한 교회와 학교는 근대문물을 익히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특히 성재이동휘가 1907년 조선군대해산 당시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후일 교육운동으로 돌아서면서 합일학교, 보창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게된다. 이때 이동휘 등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는 1919년 강화군 3.1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강화양명학파의 해외망명과 독립운동이 있었다면 1919년 3.1운동 이후 강화의 독립운동은 상해임시정부와 사회주의운동으로 확산되어간다. 일본군 장교 살해협의로 인천감리서에 수용중이던 백범 김구는 기독교계열의 강화 독립지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황해도를 거쳐 망명길을 떠났으며, 3.1운동으로 옥살이했던 죽산 조봉암은 일본유학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조선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설립한다. 일제시기동안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죽산은 해방후 전향선언을 하고, 제헌국회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죽산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진보당사건’을 빌미로 1959년 사형되었으나 2011년 무죄로 판명되었다. [10]
- 강화도성지순례 [[8]]
- 한국 기독 교회사 [[9]]
- 한국교회 문화유산 답사기 ⑫ ] 강화도 [[10]]
- [202호 기독교 유적지 답사⑥] 이야기 섬, 강화 가는 길 [[11]]
- 강화도 기독교 역사 이야기 8회 [[12]]
- "개신교 성장, 하곡학과 관련있다" [[13]]
- 한국교회사 [[14]]
- 뼛 속까지 유교 숭배자, 예수 따르다 [[15]]
- 이야기 한국교회사(1) 조선의 바울 김창식 목사 [[16]]
- 장로교와 감리교 [[17]]
- 개신교 감리교의 강화도 전래와 문화변동 [[18]]
독립운동
- 강화 기독교인들, 3.18 만세운동 주도 [[19]]
- 스무 살 청년 마음속'애국애족의 횃불'타오르다 [[20]]
- 丁未의병서 만세운동까지.. 항일투쟁 맥 이은 '결사대장 유봉진'[[21]]
- 강화도 백범길···역사 탐방지로 만든다 [[22]]
- 1946년 11월 18일 김구선생 강화방문 사진 발견 [[23]]
교육
디아스포라
- ↑ 출처: [주자학과 양명학, 어떻게 다른가 [2017년 5월 12일 / 제121호]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61]
- ↑ 출처: [양명학 논쟁 ([陽明學 論爭])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5&idx=2444 ]
- ↑ 출처: [양명학(陽明學)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6%91%EB%AA%85%ED%95%99(%E9%99%BD%E6%98%8E%E5%AD%B8)]
- ↑ 출처: [주종 복종은 유학이 아니다 http://well.hani.co.kr/469656]
- ↑ 출처: [일본 근대 학술사조와 양명학- 신현승 http://www.asiaticresearch.org/front/board/view.do?board_master_seq=3740&board_seq=46639]
- ↑ 출처: [강화학파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0%95%ED%99%94%ED%95%99%ED%8C%8C]
- ↑ 출처: [‘실학의 뿌리’ 하곡학은 퇴계·율곡학과 함께 조선 3대 학파. 중앙일보]
- ↑ 출처: [문화·종교·사상이 어우러진 공간-강화도 _ 옥한석 로컬리티의 인문학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5/6 Vol]
- ↑ 출처: [강화군 지역정치의 어제와 오늘(1) http://www.gang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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