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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서쪽의 승평교(昇平橋)에서 숙청문(肅淸門)·영은문(迎恩門)·징청문(澄淸門)·양무문(揚武門)·위진문(威振門)·사로문(四路門) 및 진사문(進士門) 등 팔좌(八座)로부터 고려시(高麗市) 사이에 민가는 번창하다고 할 만하니, 강남으로 가늠한다면 가흥부(嘉興府)와 서로 겨룰 만하였습니다. | 성 서쪽의 승평교(昇平橋)에서 숙청문(肅淸門)·영은문(迎恩門)·징청문(澄淸門)·양무문(揚武門)·위진문(威振門)·사로문(四路門) 및 진사문(進士門) 등 팔좌(八座)로부터 고려시(高麗市) 사이에 민가는 번창하다고 할 만하니, 강남으로 가늠한다면 가흥부(嘉興府)와 서로 겨룰 만하였습니다. | ||
− | 다만 가흥은 성 밖에까지 시가(市街)가 잇닿아 있었는데 요동의 성 밖은 닭 | + | 다만 가흥은 성 밖에까지 시가(市街)가 잇닿아 있었는데 요동의 성 밖은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았으며 해자(垓子) 길 가에는 흙먼지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
성 동쪽에는 또 동녕위성(東寧衛城)을 별도로 쌓았는데 수산(首山) · 천산(千山)·목장산(木場山)·낙타산(協駝山)·태자산(太子山)·행화산(杏花山) 등 여러 산들이 성 서쪽 남쪽 · 동쪽으로 빙둘러 있었으며, 그 북쪽은 '''평평하고 툭 트여서 끝이 없는 벌판'''이었습니다. | 성 동쪽에는 또 동녕위성(東寧衛城)을 별도로 쌓았는데 수산(首山) · 천산(千山)·목장산(木場山)·낙타산(協駝山)·태자산(太子山)·행화산(杏花山) 등 여러 산들이 성 서쪽 남쪽 · 동쪽으로 빙둘러 있었으며, 그 북쪽은 '''평평하고 툭 트여서 끝이 없는 벌판'''이었습니다. |
2020년 12월 10일 (목) 19:07 판
二十八日,大雨,吳鑒又來,曰:“今日治任將行,天雨雨奈何?”臣曰:“以我式端之心,難過一刻之留,憂此兩者,我一人而已,今年大旱,自二月不雨,以至于今,幸而得雨,則其喜之者,人與萬物也,天實為之,謂之何哉?”璽日:“正是正是。”O遼東舊我高句麗之都,為唐高宗所滅,割屬中原,五代時為渤源(太)[大]氏所有,後又為遼、金、胡元所併,城中有都司、察院、布政司、大僕分司、閱馬司,又有左·右·中·前·後衛,自城西昇平橋,以至肅清、迎恩、澄清、楊武、威振、四路等門及進士門八座,以至高麗市間,民居可謂繁夥,揆之江南,可與嘉興府相頡頑矣,但嘉興城外,市間相接,遼東城外,雞鳴狗吠,不得相聞,海子路傍,土飄飄耳,城東又別築東寧衛城,首山、千山、木場、駱駝、太子、杏花諸山,環拱于城之西南東,其北則平曠無現之野,
큰비가 내렸습니다.
오새가 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행장을 차려 떠나려 했는데 하늘이 비를 내리시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의 조급한 마음으로는 한 순간도 머물기 어려워 이 비를 근심하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입니다. 올해에는 크게 가물어 2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오늘에야 다행히 비가 내리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기뻐합니다. 실로 하늘이 하신 일인데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요동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이었는데[1][2][3][4] 당고종(唐高宗)에게 멸망을 당하여 중원에 예속되었습니다.[5]
오대(五代) 시대에 발해(渤碑) 대씨(大氏)의 차지가 되었으나 후에 또 요(遼)나라 금(金)나라 원(元)나라에게 병탄되었습니다.
성안에 도사(都司)·찰원(察院)·포정사(布政司)·태복분사(太僕分司)·열마사(馬司)가 있고, 또 좌위(左衛)·우위(右衛)·중위(中衛)·전위(前衛)·후위(後衛)가 있었습니다.
성 서쪽의 승평교(昇平橋)에서 숙청문(肅淸門)·영은문(迎恩門)·징청문(澄淸門)·양무문(揚武門)·위진문(威振門)·사로문(四路門) 및 진사문(進士門) 등 팔좌(八座)로부터 고려시(高麗市) 사이에 민가는 번창하다고 할 만하니, 강남으로 가늠한다면 가흥부(嘉興府)와 서로 겨룰 만하였습니다.
다만 가흥은 성 밖에까지 시가(市街)가 잇닿아 있었는데 요동의 성 밖은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았으며 해자(垓子) 길 가에는 흙먼지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성 동쪽에는 또 동녕위성(東寧衛城)을 별도로 쌓았는데 수산(首山) · 천산(千山)·목장산(木場山)·낙타산(協駝山)·태자산(太子山)·행화산(杏花山) 등 여러 산들이 성 서쪽 남쪽 · 동쪽으로 빙둘러 있었으며, 그 북쪽은 평평하고 툭 트여서 끝이 없는 벌판이었습니다.
28th Day. Heavy rain.
Wu Hsi came again and said, “Today we were to pack the baggage and start, but it is raining hard; what shall we do?” I said, “It is hard for me, impatient as I am, to delay a moment. I alone am distressed by the rain. There has been a severe drought this year; it has not rained since the Second Month. Now that we are fortunate enough to get rain, men and all things are happy. If Heaven truly has done it, what can I say?” Wu Hsi said, “True, true.”
XXX Liao-tung was the capital of our old Koguryo. It was taken and attached to China by T’ang Kao Tsung [r. 650-683]. Originally in the Five Dynasties period, it was held by the overlords of Po-hsieh. Later it was absorbed by Liao, Chin, and Barbarian Yuan.
Inside the wall are the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the Office of Surveillance [Ch’a-yüan],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the Local Office of the Imperial Stud, and the Inspectorate of Horses. 49 There are also Left, Right, Center, Forward, and Rear garrisons. From Sheng-p'ing Bridge west of the wall to Su-ch’ing, Ying-en, Ch’eng-ch'ing, Yang-wu, Wei-chen, and Ssu-lu gates; and between Chin-shih-men-pa-tso and Koreatown, the houses can be called dense. By standards south of the Yangtze, [the city] can be pitted against Chia-hsing Prefecture. But outside the wall of Chia-hsing Prefecture, villages stretch one after another; outside the wall of Liao-tung, neither the crowing of cocks nor the barking of dogs is to be heard. Along the Hai-tzu Road, there is nothing but great altars stretching like beads on a string. The wall of Tung-ning Garrison is built separately east of the city. Mt. Shou, Mt. Ch’ien; Mu-ch’ang, Lo-to, T'ai-tzu, and Hsing-hua mountains circle the city to the east, south, and west. To the north is a flat, endless plain. 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