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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7일 (수) 10:13 판

교재 표해록

소학에 나오는 행동규범이 표출된 교재이면서 소학의 교재 구성 방식으로 쓰여졌다. 단순하게 중국 현지를 소개하는 내용이 아니라 고사를 답사하고 난 후에 증명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후에 교재로 사용되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다. 성종에게 바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책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최부는 교육자였다. 자신이 속에 담고 있는 말을 왕에게 전하고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는 부분이 편집되어 들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종 당대는 정치적으로 유학이 널리 퍼져야만 하는 시대였다. 한글로 만들어진 유학지침서가 있을 정도로 유학 저변 확대는 시대적인 요구였다. 성종은 학문에 몰두하여 신하들과 책을 읽고 학문을 논하는 경연(經筵)을 가장 많이 연 왕으로 기록된다.[1] 반면 성종은 13세에 즉위해 성인이 될 때까지 신하들에게서 군주 수업을 받으면서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도학 군주로 성장했다.[2] 성종은 이렇게 학문하기를 좋아했던 군주였다. 그리고 이즈음 한글로 새롭게 번역된 《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 열녀도》가 민간 교육서로 전파되고 정문과 복호라는 실제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자 조선은 급속히 유교화되었다. 유교 질서가 잡히면서 조선의 신분질서가 고착화되었고 신분을 대하는 관념도 건국 초와는 많이 달라졌다. 성리학자들이 군주 수업을 한 결과는 유학적 국가 건설을 꿈꿨던 신하들의 바람대로 유교 원리에 충실한 도학 군주를 만들어 냈고 그 도학 군주는 한글을 이용해 신하들이 원하는 세상을 현실화했다.[3]

최부는 그 특유의 나레이션(그래서 기행문학의 으뜸으로 꼽기도 한다)으로 성리학을 전파하는 데에 중국에서의 표류 데이터를 이용했던 것이다. (세종대에 삼강행실도와 같은 시각적 교재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흥미롭고 쉬운 나레이션으로 이어진 최부의 표해록은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실증적 유학 교양서였다. 딱딱한 행동지침으로 가득한 당시의 유학서와는 달리 중국을 지나가면서 만나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유학교육자의 관점에서 엮어나간 이야기이므로 독자가 에피소드와 소재를 통해 학습할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다.

신중함, 현명함, 인내심, 용기, 자제심, 호기심, 박학이라는 덕목. [4][5]

효사상, 충사상 아래 깔려있는 신중함, 지혜라는 덕목을 당시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있던 사림들이 보고 싶어함. 박학때문에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의 소설같은 표류이야기에 더 끌려서 읽고 싶어했을 것. '표해록'에 교과서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에. 정보를 알 수 있는 교과서의 역할도 했지만, 덕목을 알려주는 교과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려진 내용(고사)과 사실을 이야기로 잘 엮었기 때문에 흥미롭지 않았을까? 배움에 재미를 살린 교과서인 것이다. 중국의 강남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곳에 대한 문물을 큐레이션 기법으로 재미있게 설명을 했기 때문에 읽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졌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유용한 정보와 교훈을 담고 있었다는 뜻이다. 글로만 익혔던 내용, 들어서만 알고 있던 내용을 사실적인 필체로 담아내었기 때문에 모두들 일고 싶었을 것이다. 오디세이가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들로 재미를 부가했다면 표해록은 사실을 확인해가면서 알게되는 기쁨을 선사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자신의 경험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최부 스스로가 교육자가 되어 그가 생각하는 덕목을 사실을 기반으로 생생하게 알려준다.

표해록은 중국을 소개하는 중국학 교과서일 수도 있었고, 유학의 내용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한 교과서이기도 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설명을 덧붙인 이유도 이런 데 있었다. 소학은 그 '내편'이 교육의 원칙과 오륜의 도리를 서술한 것이고, '외편'이 중국의 역사적 사례를 들어 증명한 것으로 유학사상의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책이다. [6] 그러므로 표해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행실에 대한 내용은 소학의 내편에 해당되고, 중국 고사에 대한 내용은 이와 관련된 소학의 외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표해록은 -객관(경험): 눈에 보이는 것들(풍습), 경험, 격물치지, 과학 -주관(관념): 평소의 소신, 도덕, 소학, (양명학)

이 들어가 있는 경세제민(이용후생)의 교육서다.

최부에게 '마르코 폴로'라는 수사가 붙은 것은 그가 마르코 폴로를 능가하는 훌륭한 중국 견문록을 지었기 때문이다. '표해록'에는 최부 일행의 표류와 여정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어,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이 묘사되었다. 학자들은 표해록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보다 못할 것이 없으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1299)보다도,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9세기)보다도 가치를 높게 본다. 정해진 루트를 통해서만 중국을 왕래했던 당시에 최부의 기행루트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마치 낯선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처럼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겪어야 했던 이들의 여정은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일행 43명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윤달 정월 3일 제주를 떠나 같은 달 17일 이국땅에 오르기까지 망망대해에서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시달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과 귀국까지의 여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또한 최부의 관찰력은 예리했다. 오가는 길에 본 주변 상황을 통찰하는 안목이 있었다. 표해록을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세기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라고 하는 것은 환관의 정치참여나 명 왕조의 비(非)유교문화에 대한 비판, 사회적 명분질서의 혼란에 대한 비판 등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중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견문기에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찍이 고병익 고 서울대 총장은 표해록이 갖는 가치를 다음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문학적 가치로, 표류하다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저자 최부의 문필력으로 인해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점. 둘째는 정신사적 가치로 역경 속에서도 조선의 선비와 관리로서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한 점, 특히 중국 측과의 교섭과정에서 관복을 입지 않고 상복을 고집하며 우리의 법도를 따른 점. 셋째는 사료적 가치로 당시 중국의 남부는 조선의 관리가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땅으로 그 곳의 습속과 자연은 당시 중국 연구사료로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7]

실증적 유학교양서

중국과 관련한 것들의 고증서이고 소학의 정신을 담고 있는 유학교양서이다. 최부의 스타일은 항상 이런 식으로, 보는이의 학습에 도움이 된다.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구성은 박학에 근거한다. 소재에 대한 관찰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최부가 남긴 대표적인 저술은 표해록과 탐라시인데 이 둘 모두 실제적인 관찰 고증과 함께 전달하고자 하는 유학적인 메시지가 잘 드러난다.

또한 소학의 교육가적 실천은 아는 것을 잘 가르치는 것이지 않을까? 우리가 <소학>의 실천성을 교육자에게 적용시켜볼 필요가 있다. 소학이 인성교본이라고 한다면 그 내용이 교육자에게는 행위의 모범도 될 수 있지만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것(방법론)도 될 수 있다. 실천성을 인성교본의 행동지침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은 실천과 학술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선비 본연의 자세임을 강조하였다. 이때 말하는 실천이라는 것은 몸가짐에 대한 유학적 실천일 수도 있고, 학문의 실천적 자세 즉 관찰과 증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선 최부라는 인물을 통해서 조선조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책임감이 몹시 강했다. 절대절명의 상황을 맞으면서도 주체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지도력을 발휘한다. 그의 다양한 체험과 날카로운 관찰력, 비판의식 덕분으로 당시의 한중항로의 실상을 확인하고, 바다의 시대적인 의미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조의 무지와 왜국의 활동 등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명나라의 실용적인 생활태도와 자유로운 사고를 알 수 있으며, 오히려 조선이 더 교조적이고, 중국적 세계관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록물이 당시대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다. 최부 자신도 가치관에 큰 변화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시대정신이 그런 행위와 사고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표해록은 최부라는 세상경험이 부족하고 교조적인 지식인의 한계와 조선조의 비애를 동시에 보여준다. [8] 아니다. 오히려 교과서적인 측면에서는 당시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책은 유학사상을 공고히 하는 데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윤명철 교수의 이러한 지적은 오히려 당시 조선조의 시대정신에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유학사상과 실학사상의 맥이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은 단순히 표류의 사실 기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성리학性理學적 세계관에 충실한 조선 선비가 유교적 현실에서 보여준 셈이다. [9]

실증적 한문교양서

우리 나라에서 읽혔던 많은 경전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서 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표해록을 저술한 것이다. 표해록은 중국 고사를 고증한 책으로,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저술이다. 그러므로 최부를 실학의 선두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수차와 연결할 것.

중국고사, 인명, 지명은 오래 전부터 우리 글에 풍부한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그 활용은 주로 인용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가사나 한시 갈래 등에 활용된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이 인용된 우리 문학작품의 경우, 올바른 독법 및 해석을 위해 원전의 문구나 물명(物名)에 대한 의미 파악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실학학풍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증명한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실제 생활을 이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시명다식』과 같은 백과사전식 저술은 실학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표해록도 이와 마찬가지로 저자 최부가 스스로 증명한 객관적인 사실(지명, 인명, 고사 등)을 관찰일기식(백과사전식의 또다른 버전)으로 정리한 것이다.

시명다식(詩名多識)은 초(草)·곡(穀)·목(木)·채(菜)·조(鳥)·수(獸)·충(蟲)·어(魚) 등 8개 부문으로 나누어 약 310여종의 물명(物名)을 뽑아 해설하고 있다.『시경』은 물명이 가장 풍부한 경서(經書)로 물명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시경』의 경의(經義) 해석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물명들은 본래 중국의 것이어서 우리나라의 물명과는 차이점이 많다. 우리나라의 물명을 모아 상세히 해설한 책으로는 유희(柳僖)의 『물명고(物名考)』가 있는데, 『시경』의 물명을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는 이 책과 상호보완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표해록은 시명다식처럼 일종의 기행백과사전을 만든 것이다.

중국학자들마저도 "중국에 관한 이웃나라의 가장 친절한 묘사"로서 5만여자의 "유창한 한문"으로 쓰여졌다고 높이 평가하는 명저 '표해록'은 기행문학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우선 기행문의 생명이라고 하는 생동있는 사실성이 돋보인다. 이 책은 중국사서에도 없는, 그리고 중국사람들조차 모르는 많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점에서 중국학계는 경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여타의 역사서가 제대로 다루지 않은 중국 남북을 가로지르는 대운하에 관해 생생한 기술을 포함하고 있으며, 당시의 교통제도, 시장, 사찰과 사묘, 심지어 민간 관우묘의 풍경까지도 낱낱이 묘사하고 있다. 군사제도인 위소에 대해선 그 명칭까지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최부는 명나라 초기 다시 소통된 대운하의 전 노정을 주파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사실성은 내용의 정밀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기체로 엮어 내려간 기사마다 꼭 구체적인 시간과 지점, 관련인물들의 실명이 기재되어있다. 또한 '표해록'은 바탕으로 삼은 소재나 기법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유학자인 그는 '논어'나 '맹자' 등 오경사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의 중국의 지리학 고전인 '우공'까지도 십분통달해 글 속에서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는데 대해 중국 학자들 마저 경탄한다.

이 책 속에는 이해를 실감나게 하고 심화시키는 비교법이 자주 눈에 띈다. 사실 문장기법에서 비교법이란 비교하는 두 대상을 깊이 이해해야 쓸 수 있기 떄문에 가장 어려운 기법 중 하나이다. 최부는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과거제도, 환관제도, 관리들의 의관비교, 접대용 차와 술의 비교 등을 통해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남북문화를 비교하는 대목은 신선함을 넘어 충격적이라는 평가이다. 강남여자들의 옷은 거의가 좌임이나 강북은 우임이고, 강남사람들은 온순하고 거의 글자를 알고 있으나 강북은 사납고 뭔가 물어보면 "나는 글을 안배워 무식하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강남에서는 돼지고기 한 접시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고작이나 강북에서는 돼지는 통째로, 술은 단지로 대접하니 그 차이가 크다. 모두 치장을 좋아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강남사람들은 거울과 머리빗 같은 치장도구를 가지고 다니는데 반해 강북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강남 시장에서는 금과 은이 통화로 사용되나 강북에서는 동전이 쓰인다. 강남은 기와집이나 강북은 초가집이 태반이다... 모두 날카로운 통찰력이 아니고서는 이를 수 없는 기록들이다.

특기할 것은 이 책에 나타난 언어적 소재가 학술적 연구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특히 중국 남북 지방의 서로 다른 구어체 어휘들은 중국 언어학자들의 탐구대상이 되고 있다. 예컨대, '曉得'(샤오떠, 알다)는 강남 일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로서 강북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보편화되었다. 지금 보통어에 쓰이고 있는 '얼'화음이 책 속에는 강북의 지명에만 발견되어 그 어원은 북방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사용되는 '아문'(워먼,우리)는 '아매'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것도 이 책 속에서 발견된다. 이렇게 한 외국인의 기행문에서 자국의 언어적 소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최부가 경험하고 목격한 것을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기술하고 다양한 소재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관찰력,문장력과 철저한 기록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이러한 기록정신이 없었다면 호송길에 얼른얼른 스쳐 지나간 현장을 극토록 세심하고 정확하게, 단 여드레만에 5만여자로 써낼 수 없었을 것이다. [10] *기록정신은 경세제민

실증적 중국교양서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은 금릉(金陵)에서 제도(帝都)에 이르기까지의 산천·풍속·습속을 갖추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비록 중국을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하여 알수 있습니다. 청컨대 함께 개간 전파하게 하소서."[11]

'눈으로 보지 않고 중원을 알 수 있는 거필(巨筆)'이었다.[12]

최부의《표해록》은 아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15세기 명나라 풍속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거전자葛振家 교수(베이징대학)가 묘사했듯이 《표해록》은 "단순히 중국 황제의 공적과 업적이나 중국의 사회, 정치를 묘사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당대 정치에서 중요한 내용 즉, 명나라의 정치·군사적 측면인 해안 방비, 세관 운영 등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히 고찰, 기술했다.

최부의 표해록은 「동방견문록」보다 큰가치” 『금남선생의 표해록은 명대의 해안방비, 문물, 민속, 지지, 언어 등을 종합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1백36일간의 짧고 통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록이지만, 마르코폴로가 17년간 머무르며 쓴 「동방견문록」과 당나라 때 일본승려 원인이 9년여간 보고 쓴 「입당구법 순례기행」보다 가치가 높습니다』 [13]

이 견문록을 읽는 것은, 먼저 이 안에 담긴 사건 자체의 재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능력에 도움을 받아 독자가 지식을 넓히는 방편으로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15세기 말 조선의 역사와 풍속뿐 아니라, 명나라의 그것들까지도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14]

금남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못지않은 표해록을 남긴 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는 금남 최부의 표해록에는 중국 명나라의 해안방비 상황과 지리, 민속, 언어, 문화, 조선과 명의 관계사 등 중국 문헌에도 잘 나오지 않는 귀중한 정보가 실려 있다.[15]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은 조선 숙종 대에 활동했던 관료문인 송정규(宋廷奎, 1656~1710)가 제주목사 시절(1704~1706)에 제주에서 발생 한 표류 관련 사실을 정리한 책이다. 송정규는 제주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과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 이 안에 최부의 표해록이 〈표해록 약절〉로 수록되어있다.〈표해록 약절〉은 익히 알려져 있고 여러 종의 번역본도 출간된 최부의《표해록》을 초록한 것인데, 이는 실학적 학문경향을 보였던 송정규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송정규가 살았던 17세기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하여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자리 잡아가던 때였다. 특히 청 조정은 당시 극심했던 왜구의 소요를 통제하고자 '천계령(遷界__)'을 내려 해안을 봉쇄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취했고, 이로 인해 바다를 통한 교역은 매우 위축되었다. 이와 맞물려 국내적으로도 외부를 향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다. 학술계가 성리학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확연히 줄어들고, 관념적인 소중화론이 정통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지식인들의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태도 또한 외부에 대한 관심을 누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 초기와 크게 대비된다. [16] 송정규는《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에 〈표해록 약절〉을 실음으로써 조선 초기의 학문적 분위기와 실증적 연구 자세를 되돌아 보려고 했던 것이다. 정약용(丁若鏞)의 제자 이강회(李綱會)도 《운곡총서(雲谷叢書)》와 《유암총서(柳産叢書)》에서 외국 선박의 상세한 제도에 대해 서술하고 또 표류를 당해 필리핀과 마카오까지 다녀온 문순득(淳得)의 이야기를 수록했는데 이는 외국 문물에 대한 지식이 실학파의 중요한 관심거리이자 실천적 연구 자세의 핵심 요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다로 나아갔던 우리 조상 가운데 표류를 경험한 사람이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품기조차 쉽지 않다. 왜냐하면,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 기》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하멜의 《하멜 표류기》 같은 서양의 걸작 해양문학은 자주 들어봤어도 우리나라의 작품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해양문학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찾지 않으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노력하여 찾아보면 표해록漂海錄이라는 이름의 해외 표류기가 의외로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조선왕조실록》 에서 표류를 주제로 하여 찾아보면 무려 2,000건 이상이 나온다. 지도를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 너머에는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 수많은 나라가 있다. 표류기는 곧 이들 나라와 교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17]

실증적 경세제민서

한편,《표해록》에는 중국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농사 기구에 대한 기술도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차水車이다. 최부는 정해현貞海縣 을 지나면서 수차를 보고는 그 지역 사람에게 제작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수차는 물 푸는 데에만 사용할 뿐이어서 배울 것이 못 된다.”라고 했다. 하지만 최부는 그를 설득했다. "배워다가 동방 백성을 가르쳐서 농사짓는 일에 도움을 준다면 족하의 한번 말하는 수고가 우리 동방 사람의 천만대의 무궁한 이익이 될 것 입니다. (...) 나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리하여 그는 끝내 제작법을 배워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수차를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 이 일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록되었다. 이처럼 최부의 《표해록》에는 이용후생을 이용한 백성을 생각하는 선비의 마음도 잘 드러난다.[18]

항해술

표해록에 담긴 정보가 유용하게 쓰였으리라고 짐작되는 분야는 항해술 분야다. 선원들은 육지가 가까워졌다고 추측되면 온갖 자연 현상을 이용하여 육지나 도서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이때 시도한 구체적인 항해 방법은 물빛을 보고 육지에 가까워진 것을 짐작하는 것이었다. 본래 바닷물의 색깔은 깊은 대양에서는 검푸른 빛을 내며, 육지 가까이 수심이 낮은 곳에서는 녹색 또는 황색 빛을 낸다. 1488년에 제주해협에서 조난당하여 29일간을 표류하다 중국 절강성 해안에 표착한 최부崔溥는 표류 중 바닷물 색깔의 변화를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짙푸른 색에서 백색, 청색, 적색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바닷물 색깔의 변화는 고대의 유능한 선원들에게 중요한 항해 정보였고, 청색이나 적색이 보이면 육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주야를 불문하고 돛대 위에 감시자를 배치하였다. 또한 이렇게 바닷물의 색깔이 변화하면, 선원들은 수심을 측정하여 암초나 수심이 낮은 곳에 좌초되지 않도록 조심하였으며, 때로는 해저의 토양을 채취하여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19]

이러한 세심한 관찰과 기록은 이용후생의 생각이 없다면 쉽게 실천되기 어렵다. 최부는 모든 기록은 당대 혹은 후대에 누군가에 의한 쓰임새를 전제로 한 행위였다. 당장 자신은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과 고난에 처해있으면서도 자신이 남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표해록 간행

최부의 ≪표해록≫은 조선시대에도 고전으로 취급되어, 여섯 차례나 간행된 바 있다. 조선 말엽의 ‘언해본’을 비롯해 현대어 번역까지 우리말 번역도 10종이 넘는다. 이 점은, 수십 종의 번역이 나와 있고 앞으로도 계속 번역되어 나올 ‘사서삼경’과도 비견될 수 있을 듯하다. ≪표해록≫에 대한 관심은 비단 우리나라 안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일찍이 제목을 달리하여 ≪통속 표해록≫으로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구두점을 찍고 주석을 붙인 판본이 간행되었으며, 미국에서도 메스킬(Meskill)의 ≪Ch’oe Pu’s Diary: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University of Arizona Press, 1965)로 영역 출판되어 있다. 이런 세계적 관심만으로도 독자들은 이 책의 진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탐진 최씨 금남선생 표해록≫』 유희춘 서문 ≪금남집≫ 유희춘 서문 ≪최부 표해록≫ 유희춘 발문 ≪최부 표해록≫ 정중원 발문 ≪금남집≫ 나두동 발문

표해록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569년에 평안도 정주에서 그의 외손자인 유희춘에 의해서다. 그 후 1573년에 나주에서 다시 표해록을 간행한다. 외국에서 인정을 먼저 받아 1769년에 일본 청전군금(淸田君錦)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보급하였으며, 1965년에는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존 메스킬(John Meakill)이 영어로 완역하였고, 1979년 최기홍 선생이 국어로 완역하였다. 1985년 금성출판사에서 어린이용 표해록이 발간되었으며 1992년 북경대학 갈진가 교수[20]가 중국에서 역시 발간하였다. 2004년에는 동국대학교 서인범 교수가, 2006년에는 고려대학교 박원호 교수가 출간을 하였고, 2010년 항주 절강대학에서 최부지려(崔簿之旅)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6년에는 최기홍 선생의 아들인 최철호 선생이 발간하였다. [21]

책 제목은 바다에서의 표류를 기록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상 내용의 3분의 2는 중국 강남지대로부터 베이징에 이르는 약 8800리를 135일간 종주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중국에 관한 기록이기는 하지만, 왕명에 의해 중국에 사행한 사신들이 쓴 각종 연행록(燕行錄, 약407건)과는 구별하기 위해 '표해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도 전한다.

원래 이 책은 왕명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처음에서는 조정에서 동활자로 간행했다. 그 후 최부의 외손자 유희춘에 의해 목판본으로 간행되며, 유희춘의 부탁으로 전라감사 이양원이 다시 목판본을 재간한다. 그러나 목판본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해가 지금은 일본 몇 군데에 흩어져 있다. 조정에서 최초로 간행했던 동활자본 1권만이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부끄러운 일은 이 국보급 진서의 보급이나 연구에서 우리는 후진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가장 먼저 1769년 주자학자 키요타 키미카네(淸田君錦)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일본명 토-도-코-테-키)'라는 이름의 일역본이 나왔고, 미국과 중국에서는 각각 1965년과 2002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우리의 경우 1964년과 1976년에 각각 북한과 남한에서 자료용 번역본이 나왔을 뿐,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뒤늦게나마 남한에서 2004년 처음으로 완역 역주본이 출판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견문록 가운데는 중국의 인문지리에 대한 지식은 물론 중국 관리와의 문답(問答) 내용이 나오는데, 예컨데 조선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답변하면서도, 호구(戶口)나 병제(兵制), 전부(田賦) 등에 대해서는 자신은 유신(儒臣)이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다고 회피하는 등 국익을 생각하여 말을 삼가는 모습이 역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요컨대 조선의 관리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인문학적 소양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그가 표류 전에 이미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의 제작에 참여한 당대의 젊은 학자였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출처 : 월드코리안뉴스(http://www.worldkorean.net)

(조) p. 163 (조) p. 198-203 당초행정기에서 보이는 일본인의 최부 비판


최부의 ‘표해록’은 한국과 중국을 문화적인 동질감을 이끌어내면서도 그 차이를 서로 인정하게 할 수 있는 관광 공연예술상품의 좋은 소재이다.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대형 뮤지컬 작품을 만든다면 사드문제로 서먹해진 양국 간의 친선 회복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 틀림없다. 양국이 가지고 있는 특장들을 잘 활용하고 협력하여 좋은 뮤지컬 작품을 제작해 보기를 제안해 본다. http://www.ithemove.com/news/articleView.html?idxno=681

http://m.blog.daum.net/sswwss/13741172?categoryId=725837

  • 교과서로서의 최부의 <표해록>[22]
  • 최부의 <표해록>에 대한 두 가지 의문, 이복규
  • 최부 표해록 연구 [23]
  • 최부 『표해록』의 관광학적 고찰 [24]
  • 최부 『표해록』 판본고 [25]
  • 최부의『표해록』에 나타난 필담 [26]
  • 조선 후기 표해록에 대한 경영사적 고찰 [27]
  • 예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왕이 된 성종, 조선 조 첫 수렴청정이 시작되다
  • 유교 사상을 널리 퍼뜨리리! 한글 실용 시대를 연 성종
  • [1]
  • “일리아스에서 읽어낼 수 있는 덕목” , BIKorea, 2016.08.27
  • [[칼럼] ‘힘과 용기’의 영웅에서 ‘지혜’의 영웅으로, 대한금융신문, 2016.09.11]
  • 기초한문 강좌, 소학강좌, 사이버서원
  • 조선의 마르코폴로 '최부', 해남신문, 2012.03.19
  • 윤명철 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
  • [맛있는 한국사 인물전_양창진_이숲_p.42-43]
  • [맛있는건 다 내차지 S02]
  • 중종실록 13권, 중종 6년 3월 14일 갑자 3번째기사 1511년 명 정덕(正德) 6년 참찬관 이세인이 성종조 문사들의 유고 개간을 아뢰니 따르다
  • [호남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9] 최부…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운 호남 사림의 선구, 조선일보, 2011.07.25]
  • 답사 동행 갈진가 북경대교수(인터뷰), 한국일보, 1994.06.18
  •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18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318]
  • [금남 최부 강학비 건립, 해남우리신문, 2011.03.15]
  • [해외문견록_송정규_김용태 김새미오 옮김_휴머니스트_p.10-11]
  • [맛있는 한국사 인물전_양창진_이숲_p.39]
  • [맛있는 한국사 인물전_양창진_이숲_p.44-45]
  • [한국해양사, 한국해양재단, 2013.9]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aylll&logNo=11962900&parentCategoryNo=4&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북경대 갈진가 교수의 표해록 논문]
  • [2]
  • 탐진최씨 시조 최사전의 후예들 워크숍, 강진고을신문, 2016.07.12
  • 崔溥 漂海錄 연구-최부가 묘사한 중국의 江北과 遼東-서인범
  • [3]
  • [4]
  • [5]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