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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2일 (토) 21:08 판
初五日,至西興驛,是日晴,總兵官等三使相並轎,曉到蓬萊驛,復引臣及從者,拿行裝至前,討東搬西以檢點之,臣所賣,則印信一顆,馬牌一隻,馬鞍一部,諸文書册入大·小箱二齒,衣、食、笙、櫻、銅碗入小皮袋一简,冠帽并匣,程保、金重、孫孝子、李植、安義、李孝枝、崔巨伊山及奴子二人,則無所資,與軍人同包,軍人所賣,或包或袋或無,點畢,謂臣日:“汝可先去杭州,鎮守太監、绣衣、三司大人更問之,一一辨對,無有錯,”又饋臣等以茶果,臣辭退,總兵官,盖指指揮僉事而言也,紹興府會越王舊都,秦、漢為會稽郡,居浙東下流,府治及會稽·山陰兩縣及紹興衛之治、臥龍山,俱在城中,會稽山在城東十餘里,其他若秦望等高山,重疊翠律,千嚴萬壑,競秀爭流于東西南三方,北濱大海,平衍無丘陵,蘭亭在妻公埠上天章寺之前,即王羲之修處,賀家湖在城西南十餘里,有賀知章千秋觀舊基,刻溪在秦望山之南(剩)嵊]縣”之地,距府百餘里,即子猷訪戴逵之溪也.江流有四條;一出台州之天台山,西至新昌縣,又西至嵊縣,北經會稽、上虞而入海,是為東小江;一出山陰西北,經蕭山縣東,復山陰抵會稽而入海,是為西小江;一出上虞縣東,經餘姚縣,又東過慈溪縣,至定海而入
p.386 海,是為餘姚江,是臣所經之江;一出金華之東陽,浦江、義烏合流至諸暨縣,經山陰,至蕭山入浙江,是為諸暨江,其間泉源支派,滙溺堤障,會屬從入者,如脉絡藤蔓之不絕,臣又調鑑水而西,經韻田鋪、嚴氏貞節門、高橋鋪,至梅津橋,距岸五里許有山隆起,東有石壁削成,前有二大石人立,其一天作,人形逼真,又過融光橋,至柯橋鋪,其中有小山,山脊有古亭基,人以謂“蔡邕見橡竹,取為笛之柯亭之遺址也,又過院社橋、白塔鋪、清江橋,至錢清疇,江名乃一錢江也,夜過倉館、白鶴鋪、錢清鋪、新林鋪、蕭山縣地方,至西興驛,天向曙矣,江名即西興河也.
5일 서흥역(西興驛)1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총병관 등 세 사상(使相)이 함께 나란히 교자를 타고 새벽에 봉래역에 도착한 뒤 다시 신과 종자(從者)들을 불러 행장을 앞으로 가져오게 하고는 이리저리 뒤적이며 점검하였습니다.
신이 가진 것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개, 말안장 1벌, 여러 문서와 책이 든 크고 작은 상자 2개, 의복 · 이불 · 갓 갓끈 · 구리그릇을 넣은 작은 가죽 부대 1개, 관모(冠帽)와 관모집뿐이었습니다.
정보 · 김중 · 손효자 · 이정 · 안의 · 이효지 · 최거이산과 총 2인은 가진 것이 없어 군인과 보자기를 함께 썼습니다.
군인들이 가진 것은 보자기에 싸기도 하고 부대에 넣기도 하고 짐이 없기도 하였습니다.
점검을 마치고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먼저 항주(杭州)에 가게 될 터인데 진수태감(鎭守太監), 수의(誘衣), 삼사(三司)의 대인(大人)이 다시 물을 것이니, 일일이 해명하고 대답하되 어긋남이 없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하직하고 물러 나왔는데, 총병관은 지휘첨사(指揮僉事)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소흥부(紹興府)는 곧 월왕(越王)2 의 옛 도읍으로 진한(秦漢) 시대에는 회계군(會稽郡)이었는데, 절강(浙江)의 동쪽 하류에 있었습니다.
부치(府治), 회계·산음의 두 현 및 소흥위의 치소(治所)와 와룡산(臥龍山)3 은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회계산(會稽山)은 성 동쪽 10여 리에 있고, 그 밖에 진망산(秦望山)4 과 같은 높은 산들이 겹겹이 솟아있고,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가 동·서·남 3방에서 빼어남을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북쪽은 큰 바다에 연해서 평탄하고 넓었으며 구릉이 없었습니다.
난정(蘭亭)5 은 누공부(婁公婢) 위쪽에 있는 천장사(天章寺)의 앞에 있었으니 바로 왕희지(王羲之)6 가 수계(修_)7 한 곳[1][2][3][4][5][6][7][8][9][10][11]이었습니다.
하가호(賀家湖)8는 성 서남쪽 10여 리에 있었고, 하지장(賀知章)의 천추관(千秋觀)9 옛 터가 있었습니다.
섬계(__溪)는 진망산 남쪽 승현(晦縣)의 땅에 있었으니 부(府)와는 거리가 100여 리나 되었는데, 바로 왕자유(王子獄) , 왕희지의 아들)10가 대규(戴達)11를 찾아갔던12 시내(=소강과 여요강(餘姚江, 위야오장)였습니다.
강은 네 갈래로 나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갈래는 태주(台州)의 천태산(天台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신창현(新昌縣)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승현에 이르러 북쪽으로 회계현과 상우현(上虞縣)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동소강(東小江)입니다.
한 갈래는 산음현 서북쪽에서 나와 소산현(蕭山縣) 동쪽을 거쳐 산음현으로 되돌아와서 회계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서소강(西小江)입니다.
한 갈래는 상우현 동쪽에서 나와 여요현(餘姚縣)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자계현(慈溪縣)을 거쳐 정해현(定海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서 여요강(餘姚江)이 되는데 이것이 신이 지나온 강입니다.
한 갈래는 금화현(金華縣)의 동양(東陽)에서 나와 포강(浦江)과 의오강(義烏江)과 합류하여 제기현(諸誓縣)에 이르고 산음현을 거쳐 소산현에 이르러서 절강(浙江)으로 돌아가니, 이것이 제기강(諸誓江)입니다.
그 중간에 천원(泉源)의 지류가 돌아가다가 제방에 막히고 모였다가 따라 들어간 것이, 마치 혈맥이 서로 연결되고 등나무가 얽혀 끊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신은 또 감수(鑑水)를 거슬러 서쪽으로 가서 운전포(__田鋪) · 엄씨정절문(嚴氏貞節門) · 고교포(高橋鋪)를 거쳐 매진교(梅津橋)에 이르렀습니다.
언덕에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산이 불쑥 솟았는데, 동쪽에 깎아지른 석벽이 있고 앞에는 큰 석인(石人) 두개가 서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도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였습니다.
또 융광교(融光橋)를 지나 가교포(柯橋鋪)에 이르니 그 남쪽에 작은 산이 있고, 산등성마루에는 옛 정자 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채옹(蔡邑)13 이 연죽(__竹)을 보고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었던 가정(__亭)의 유적'14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원사교(院社橋)·백탑포(白塔鋪)·청강교(淸江橋)를 지나 전청역(錢淸驛)에 이르니 강 이름은 일전강(一錢江)이었습니다. 밤에 염창관(鹽倉館) · 백학포(白鶴鋪) · 전청포(錢淸鋪) · 신림포(新林鋪) · 소산현(蕭山縣) 지방을 지나 서흥역에 이르니 날이 새었습니다.
강 이름은 서흥하(西與河)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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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사
5th Day. Arrival at Hsi-hsing Station. This day was fair.
At dawn the three high officials, the Regional Commander and the others, arrived together in sedan-chairs at P'eng-lai Station. They had me and my staff, bringing our baggage, brought before them again and had everything laid out and examined carefully, one by one. Of the things I had, one seal, one horse permit, one saddle, and a number of documents went into one large and one small box. The clothes, rain hat cords, and bronze bowls went into one small leather bag. My hats were together in a small box. Chòng Po, Kim Chung, Son Hyo-ja, Yi Chòng, An Üi, Yi Hyo-ji, Ch'oe Kõisan, and the two slaves had nothing, [their things] being wrapped with the soldiers'. Some of the soldiers had bundles, some bags, and some nothing. When the check was over, they said to me, “You may proceed. When Their Excellencies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and Three Resplendent Authorities of Hang-chou question you again, make distinct answers, one by one. Let there be no confusion or contradictions.” They served us tea and fruit, and I took my leave. Regional Commander was a term used in reference to the Assistant Commissioner. Shao-hsing Prefecture was the old capital of the kings of Yüeh. In Ch'in [221 B.C.-207 B.C.] and Han [202 B.C.-A.D. 220] it was K’uai-chi-chün and was in the lower reaches of Che-tung. 1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s of K’uai-chi County and Shan-yin County, the headquarters of Shao-hsing Garrison and Mt. Wo-lung are within the wall. Mt. K’uai-chi is over ten li east of the wall. East, south, and west, other high mountains, such as Ch’inwang, rise in many lofty ranges, covered with rocks and cliffs and vying in grace. The north borders the sea and lies level, without hills. Lan-t’ing, on top of Lou-kung-pu in front of T’ien-chang Temple, was the place where Wang Hsi-chih held a purification ceremony.2 Lake Ho-chia is more than ten li southwest of the wall. The site of Ho Chih-chang's Thousand Autumns Hermitage [Ch’ien-ch'iu kuan] is there.3 Yen Stream is in Sheng County, south of the Ch’in-wang Mountains. It is over one hundred li away from the prefecture and was the stream on which Tzu-yu sought out Tai K’uei.4 The river system has four main streams. One rises in Mt. T’ien-t’ai, T'aichou, flows west to Hsin-ch'ang County, continues west to north of Sheng County, passes through K’uai-chi and Shang-yü,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Tung-hsiao River. One rises northwest of Shan-yin, passes east of Hsiao-shan County, enters Shan-yin again, reaches K’uai-chi,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Hsi-hsiao River. One rises east of Shang-yü County, passes through Yü-yao County, goes east through Tz'u-ch’i County to Ting-hai,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Yü-yao River and is the river along which I passed. One rises in Tung-yang, Chin-hua. The P’u River and l-wu flow together and reach Chu-chi County. [The river] passes through Shan-yin to Hsiao-shan and into the Che River. That is the Chu-chi River. Throughout the region, the springs and branch streams that rise and disappear and the dikes and dams that are joined one to another are endless, like a labyrinth of veins and arteries. I went up the Chien River to the west, [passing from Yün-t’ien Stop to Hsihsing Station). The sky was growing light. The name of the river was Hsihsing.
1. 蕭山縣 서쪽의 興場運河의 南岸에 있다. 唐代에는 莊亭, 宋代에는 邊驛이라 불렀다. 《大 淸一統志》 권226, 紹興府. 2. 春秋時代의 越王 句踐을 가리킨다. 처음에 吳王 鬪廬에게 패했으나 후에 이를 설욕하였다. 그 후 盧의 아들 夫差의 공격을 받아 대패를 당했지만 결국 吳를 격파하고 중원에 들어가 覇者가 되었다. 3. 舊名은 種山, 萬曆《紹興府志》 권4, 山川. 4. 秦望山이란 이름은 秦始皇이 이 산에 올라 東海를 바라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明一統志》 권45, 紹興府. 5. 紹興府城의 서남쪽 27리 거리에 있는 山陰의 會稽山麓에 있는 삼각형의 碑亭이다. 東晋 永和9년(353) 삼월 초3일 王羲之와 謝安 등 41인이 이곳에서 修하며 각기 시를 지었다. 특히 王羲之는 이때 유명한 〈蘭亭集序)를 지었다. 萬曆《紹興府志》 권 9, 古蹟. 6. 東晋의 서예가이다. 漢나라와 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楷書, 行書, 草書의 각 서체를 예술적으로 완성함으로써 書聖으로 불린다. 인생 후반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오직 산수 를 벗삼고 약초를 캐는 데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의 글씨는 우아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그의 아들 王獻之도 서예에 뛰어 나, 보통 이 두 부자를 '二王’이라 불렀다. 주요 작품으로는 行書體의〈蘭亭序) 등이 있다. 7. 三씨의 이후 삼월 초3일로 고정되었지만 원래는 삼월 上旬의 巳日에 물가에서 연회를 베풀며, 흐르는 물로 액을 없애는 의식을 말한다. 8. 賀家湖는 賀家池의 다른 이름이다. 소흥부성에서 동으로 22리의 거리이며 周圍는 47리에 달한다. 萬曆《紹興府志》 권8, 山川. 9. 唐 天寶3년(744) 하지장이 秘書監職을 사퇴하고 道士가 된 뒤 자기 집 이름을 道觀으로 바꾸고 이를 千秋觀이라 불렀다. 7년에 天長觀으로 개명하였다. 萬曆《紹興府志》 권 22, 祠祀. 10. 王羲之의 아들인 王徽之를 가리킨다. 역시 東晋의 이름난 서예가이자 詩人으로서, 子獄는 王徽之의 字이다. 11. 東晋의 조각가이자 화가로, 자는 安道이다. 관직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山陰 靈寶寺의 무량수불상을 제작하였다. 漢代의 조악한 불상 제작 방법에서 탈피하여 작품이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물, 산수, 동물 등도 동적인 기법으로 그려내 산수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작품으로 〈三馬伯樂圖) 등이 있는데, 이미 唐 이전에 없어진 듯하다. 12. 東晋의 왕자유가 山陰에서 눈 내린 달 밝은 밤에 小船을 타고 대규를 찾아 갔다가 대규의 집 문 앞에서 되돌아왔다. 그 이유를 묻자 “내 본래 흥이 일어 갔다가 흥이 다하여 되돌아 왔던 것이다. 대규를 굳이 만나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흥에 거워 친구를 찾는다는 의미를 가진 山陰乘興'이란 고사가 유래한다. 《晉書》권80, 列傳 第50, 王徽之. 13. 後漢의 학자 · 문인 · 서예가이다. 젊어서부터 박학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문장이 뛰어났다. 靈帝 때 郞中이 되었으며, 諸經의 文字平定을 奏請하여 스스로 써서 돌에 새긴 후 太學의 문 밖에 세웠다. 이것이 '熹平石經’ 이다. 한때 모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사면을 받았으나 귀향하지 않았다. 후에 董卓에게 발탁되어 관직을 가졌으나 끝내 獄死하였다. 저서로는 조정의 제도와 칭호에 대하여 기록한 《獨斷》이 있다.
14. 채옹이 피난 차 會稽에 와서 柯亭에서 잘 때, 竹을 우러러다 거기에서 기이한 소리가 나는 것을 알고 피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드디어 寶器가 되었다고 한다. 《後漢書》권 60下, 列傳 참조.- ↑ 강남수향소흥난정
- ↑ 난정
-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30/2017033002754.html 오늘은 음력 3월3일 '삼짇날'… 유교 경전은 이날 '프리OO'를 권했다, 조선일보, 2017.03.30 ]
- ↑ 삼짇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
- ↑ 우리 명절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2018.02.28
- ↑ [그림, 詩에 빠지다스타 따라잡기 조선에도 있었네 왕희지 난정집서, 주간조선, [2205호] 2012.05.07]
- ↑ 수계도
- ↑ 옛날 사람들의 봄날,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인의 하루', 뉴시스, 2019.04.05
- ↑ 봄을 즐기다, 국립민속박물관
- ↑ 조용헌의 주유천하 (62)최고의 풍류 유상곡수(流觴曲水)
- ↑ [http://gujoron.com/xe/2535 포석정은 유상곡수시설로 볼 수 없다 ]
- ↑ 무장사
- ↑ 추사의 금석학, 조선일보, 2007.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