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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북원(北元)과 단교(斷交)하려고 이 태조(李太祖)로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를 삼아 동녕부(東寧府) 올라성(兀剌城)을 격파하도록 하였다.<br> | ||
+ | 그런데 몽고(蒙古)가 강성할 때 이르러서도 그들에게 주는 예물과 폐백을 모두 나쁜 베로 하였다.<br> | ||
+ | 또 북원(北元 원(元) 나라를 가리킴)과 교통을 끊고 명조(明朝 명 나라 조정)를 오로지 생각한 자는 최영(崔瑩)이었는데, 인임이 귀양가게 되자 영은 오히려 이르기를, “인임은 결국 사대(事大)를 도모하고 국가를 진정시켰으니, 그 공이 허물을 가릴 수 있다.” 하였다.<br> | ||
+ | 대명(大明) 홍무(洪武 태조(太祖)의 연호) 원년(1368, 공민왕 17)에 이르러 경신제(庚申帝)가 도읍을 북쪽으로 옮겼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나라는 벌써 중국에 통사(通使)하여 북원(北元)을 거절한 다음, 먼저 동녕부(東寧府)를 치고 명(明) 나라로 귀의한다는 뜻을 나타내 보였으니, 이는 의리로 보나 형세로 보나 모두 옳다 할 수 없었다.<br> | ||
+ | 그리고 그때 먼저 북원과 끊은 것은 정포은(鄭圃隱)의 제안이었다.<br> | ||
+ | 고려 말기에 이르러, 홍륜(洪倫)이 임금을 죽이고 김의(金義)가 사신(使臣)을 죽임으로 인하여 드디어 원 나라에서 응신하는 규례를 폐기하게 되자, 이로부터 문학의 선비들이 심지(心志)가 안에 국한되고 재주조차 쭈그러들었다.<br> | ||
==송남잡지== | ==송남잡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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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5일 (일) 20:47 기준 최신판
저항
몽골제국의 횡포에 맞선 모습.
대동군부운옥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을 세우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장차 역모의 우두머리를 추궁하려고 하였다.
이에 임연이 그들을 꺾을 계획을 하고 이에 백관들을 모아서 왕을 복위하는 것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근심과 분노 때문에 죽었다.
최유가 원나라 있으면서 덕흥군을 받들고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왔다.
안우경이 그들과 7번 싸워 격파하였다.
또 장군 송신길을 사로잡아 배를 갈라 적군에게 보여주니 원나라 병사들이 대패하여 가버렸다.
정몽주가 북쪽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려 말에 백관들이 몽고옷을 입고 있었다. 정몽주가 건의하여 백관의 관복을 정하였는데 1품부터 9품까지 모두 비단으로 만든 모자와 둥근 깃의 옷을 입도록 하였다.
신우 초에 북쪽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것에 대하여 의논이 있었는데, 정도전이 "제가 마땅히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하였다. 이 일로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 회진현에 유배되었다. 그는 그곳 소재동에 우거하면서 『소재동기』를 지었다
최무선이 원나라 염소장 이원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몰래 그 방법을 물어 집안의 종 몇 명을 시켜서 사사로이 익혀서 시험하고 조정에 아뢰어 비로소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을 만들었다.
최춘명이 자주 부사가 되어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몽고인이 말하기를 "누군인가" 하니 말하기를 "자주 태수이다." 하였다. 이에 몽고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온 성의 사람이 충신이다!"라고 하였다.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웠다. 이에 원나라 황제가 장군을 보내어 임연에게 죄를 따져 물었다. 임연은 황제의 명을 거절하고자 하여 백성들을 거느리고 섬에 들어가 살았는데, 근심과 분노로 인하여 등창이 발병하여 죽었다.
공민왕이 오랑캐 옷을 입고 변발을 하자 이연종이 간하여 말하기를 "변발과 오랑캐 옷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니 본받지 마십시오"라 하였다. 그러자 왕이 즉시 변발을 풀고 기뻐하며 옷과 이불을 하사하였다.당시 사람들이 이연종을 현명한 신하라 생각하였다.
성호사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북원(北元)과 단교(斷交)하려고 이 태조(李太祖)로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를 삼아 동녕부(東寧府) 올라성(兀剌城)을 격파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몽고(蒙古)가 강성할 때 이르러서도 그들에게 주는 예물과 폐백을 모두 나쁜 베로 하였다.
또 북원(北元 원(元) 나라를 가리킴)과 교통을 끊고 명조(明朝 명 나라 조정)를 오로지 생각한 자는 최영(崔瑩)이었는데, 인임이 귀양가게 되자 영은 오히려 이르기를, “인임은 결국 사대(事大)를 도모하고 국가를 진정시켰으니, 그 공이 허물을 가릴 수 있다.” 하였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태조(太祖)의 연호) 원년(1368, 공민왕 17)에 이르러 경신제(庚申帝)가 도읍을 북쪽으로 옮겼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나라는 벌써 중국에 통사(通使)하여 북원(北元)을 거절한 다음, 먼저 동녕부(東寧府)를 치고 명(明) 나라로 귀의한다는 뜻을 나타내 보였으니, 이는 의리로 보나 형세로 보나 모두 옳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먼저 북원과 끊은 것은 정포은(鄭圃隱)의 제안이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홍륜(洪倫)이 임금을 죽이고 김의(金義)가 사신(使臣)을 죽임으로 인하여 드디어 원 나라에서 응신하는 규례를 폐기하게 되자, 이로부터 문학의 선비들이 심지(心志)가 안에 국한되고 재주조차 쭈그러들었다.
송남잡지
내용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