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조선 선교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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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이다. 1883년 말경 얼마 동안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온 주중 영국 전권대사 해리 팍스(Harry Parkes) 경은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의 문호개방에 관한 1884년 1월 12일자 편지를 받고 한국선교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담은 서신을 띄웠으며, 찰스 스캇(Charles Perry Scott) 감독은 이 편지를 켄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전했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이다. 1883년 말경 얼마 동안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온 주중 영국 전권대사 해리 팍스(Harry Parkes) 경은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의 문호개방에 관한 1884년 1월 12일자 편지를 받고 한국선교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담은 서신을 띄웠으며, 찰스 스캇(Charles Perry Scott) 감독은 이 편지를 켄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전했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 ||
+ | ==한국 선교 구상== | ||
1890년 영국 성공회의 선교 기관인 “해외복음전파회”(The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白樂濬은 파스코(C. F. Pascoe)의 해외복음전파회 1701-1900년을 인용하여 영국 성공회가 어떻게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아래와 같이 그 전후 상황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 1890년 영국 성공회의 선교 기관인 “해외복음전파회”(The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白樂濬은 파스코(C. F. Pascoe)의 해외복음전파회 1701-1900년을 인용하여 영국 성공회가 어떻게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아래와 같이 그 전후 상황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 ||
− | 韓國에서의 영국 성공회사업은 當時 해외 일본 선교사업의 창시자 중의 한 분이요, 또한 개척 선교사이던 쇼(A. C. Shaw) 신부가 1880년에 구상한 데서 출발했다. 한국과 對外交通을 개시할 목적으로 쇼는 이 전도회에서 주교 한 분과 신부를 함께 한국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주도해야 할 준비의 필요성을 느끼고, 또한 그 길을 열기 위하여 1880년에 그 隸下 일본인 전도사 한 사람을 보내어 한국말을 배우게 하였는데 그 전도인의 봉급은 해외 일본교회 교인들이 부담했다. 이 구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쇼 부주교는 이 일을 계속하여 추진했다. 그 후 1884년에 한영통상조약의 체결교섭이 진행 중에 있을 때 중국에 주재한 영국교회 주교 세분도 이 기회를 捕捉하고 동일한 시도를 제기했다. 그 조약내용에 영국인에게 신교자유권 賦與條款이 여러 象譯권 항목보다 더 많이 토의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전통적 사교배척정책에 의하여 일어났던 병인(丙寅, 1866), 신미(辛未, 1871)의 박해와 같은 사건을 대비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영조약에서 선교 활동이 용허되어 있지 아니하지만 한어를 통하고 한국 정부와 민간사정을 아는 선교사들은 척사책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약 체결 직후에 한국 정부는 병원설립에 필요한 의사와 외국어 특히 영어와 기타과목을 가르칠 교사들을 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87년에 북중국의 스코트(Scott)주교와 일본의 빅커스테드(Bickersteth)는 한국을 往訪하고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지체 없이 한국에 영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안건이 복음 전도회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1888년에 와서 북중국 주재 주교에게 2,500파운드를 보내어 선교사업 개시에 사용하게 했다. 다행하게도 선교사업을 개시하려던 본래의 계획은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어” 출발하였는데 勅令에 의하여 일찍이 영국해군 종군사제로서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코르프(C. J. Corfe) 사제가 1889년 萬聖節日(11월 1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주한 주교로 陞品되었다. 복음 전도회에서는 현재(1889-90) 年額 1,500파운드의 지원을 보장하고 있지만 한국 선교사업은 처음부터 “使徒의 내핍생활 성약 하”에 출발하였으므로 주교와 그 동료들은 봉급을 받지 아니하는 동시에 탁발생활을 할 것도 아니라 소액의 공유금으로 공동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코르프 주교는 한국에 赴任하는 도중 선교사업의 대표자격으로 미국 내 9개 도시와 캐나다의 8개 도시, 일본의 3개 도시를 역방하고 도처에서 성의에 찬 동정을 받았다. 뉴 웨스트민스터(New Westminster) 교구에서는 스몰(R. Small)과 피크(Peake) 두 신부의 선교사 지원도 받았다. 주한 선교사로는 와일즈(Julius Wiles)와 랜디스(Landis) 두 의사와 트롤로프(M. N. Trollope), 와너(L. O. Warner) 두 신부와 파우널(J. H. Pownall), 데이비스(M. W. Davies) 두 사람이 있었다 | + | 韓國에서의 영국 성공회사업은 當時 해외 일본 선교사업의 창시자 중의 한 분이요, 또한 개척 선교사이던 쇼(A. C. Shaw) 신부가 1880년에 구상한 데서 출발했다. 한국과 對外交通을 개시할 목적으로 쇼는 이 전도회에서 주교 한 분과 신부를 함께 한국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주도해야 할 준비의 필요성을 느끼고, 또한 그 길을 열기 위하여 1880년에 그 隸下 일본인 전도사 한 사람을 보내어 한국말을 배우게 하였는데 그 전도인의 봉급은 해외 일본교회 교인들이 부담했다. 이 구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쇼 부주교는 이 일을 계속하여 추진했다. 그 후 1884년에 한영통상조약의 체결교섭이 진행 중에 있을 때 중국에 주재한 영국교회 주교 세분도 이 기회를 捕捉하고 동일한 시도를 제기했다. 그 조약내용에 영국인에게 신교자유권 賦與條款이 여러 象譯권 항목보다 더 많이 토의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전통적 사교배척정책에 의하여 일어났던 병인(丙寅, 1866), 신미(辛未, 1871)의 박해와 같은 사건을 대비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영조약에서 선교 활동이 용허되어 있지 아니하지만 한어를 통하고 한국 정부와 민간사정을 아는 선교사들은 척사책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약 체결 직후에 한국 정부는 병원설립에 필요한 의사와 외국어 특히 영어와 기타과목을 가르칠 교사들을 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87년에 북중국의 스코트(Scott)주교와 일본의 빅커스테드(Bickersteth)는 한국을 往訪하고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지체 없이 한국에 영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안건이 복음 전도회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1888년에 와서 북중국 주재 주교에게 2,500파운드를 보내어 선교사업 개시에 사용하게 했다. 다행하게도 선교사업을 개시하려던 본래의 계획은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어” 출발하였는데 勅令에 의하여 일찍이 영국해군 종군사제로서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Corfe 코르프(C. J. Corfe)] 사제가 1889년 萬聖節日(11월 1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주한 주교로 陞品되었다. 복음 전도회에서는 현재(1889-90) 年額 1,500파운드의 지원을 보장하고 있지만 한국 선교사업은 처음부터 “使徒의 내핍생활 성약 하”에 출발하였으므로 주교와 그 동료들은 봉급을 받지 아니하는 동시에 탁발생활을 할 것도 아니라 소액의 공유금으로 공동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코르프 주교는 한국에 赴任하는 도중 선교사업의 대표자격으로 미국 내 9개 도시와 캐나다의 8개 도시, 일본의 3개 도시를 역방하고 도처에서 성의에 찬 동정을 받았다. 뉴 웨스트민스터(New Westminster) 교구에서는 스몰(R. Small)과 피크(Peake) 두 신부의 선교사 지원도 받았다. 주한 선교사로는 와일즈(Julius Wiles)와 랜디스(Landis) 두 의사와 트롤로프(M. N. Trollope), 와너(L. O. Warner) 두 신부와 파우널(J. H. Pownall), 데이비스(M. W. Davies) 두 사람이 있었다. |
− | + | [[파일:charlesjohncorfeandlandis.jpg|300픽셀|왼쪽|랜디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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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코르프 주교는 1890년 성 미가엘과 諸聖膽禮日에 인천에 도착하였고 그 익일인 9월 30일에 서울에 입성했다. 와일즈 의사는 이보다 3주일 전에 내한하였으므로 지체 없이 곧 서울과 인천에 거주하는 한인 및 歐洲人을 상대로 의료사업에 착수하는 한편 구주인을 상대로 종교 활동을 개시하고 서울에는 영국해군 군목들이 기증한 인쇄기계를 가설하고 선교용 인쇄소를 설치했다. 서울과 인천에 선교사 거주처소를 매입하고 9명의 선교단원들이 서울에서 동거하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선교사업이 1891년 부활주일날 시작되었으므로 그 처소를 “부활의 집”이라 명했다. | |
− | [ | + | [[파일:성공회성미카엘교회신부들.jpg|400픽셀|왼쪽|성공회성미카엘교회신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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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선교 특징=== | ||
− | + | 이렇게 해서 오랜 준비 작업을 거쳐 1890년 9월 29일 “한국의 첫 감독 선교사” 찰스 존 코르프(Charles John Corfe), 그와 함께 입국한 젊은 성공회 의사 랜디스(E. B. Landis), 그리고 이어 스몰(Small), 피크(Peake),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파우널 부제, 데이비스 등이 도착하면서 성공회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그러나 성공회는 직접선교보다는 의료 선교, 사회복지 사업, 문서 선교에 주력했다. 1890년 10월 제물포에 성누가병원, 1891년 정동에 성베드로병원과 낙동에 성마태병원을 개원했다. 경기도 여주와 충북 진천에도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성공회는 낙동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셩교이증(聖敎理證), 성회송가(聖會頌歌) 등을 발간하여 문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들은 6년 동안 한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습득하면서 직접전도를 삼가오다 189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명의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 |
+ | [https://www.facebook.com/TheKoreaInstituteofChurchHistory/posts/1351226674912678/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
+ | [https://en.wikipedia.org/wiki/Anglican_Church_of_Korea#Diocese_of_Joseon 한국성공회] | ||
− | [[ | + | [[파일:성공회성미카엘교회신부들2.jpg|400픽셀|왼쪽|성공회성미카엘교회신부들2]] |
+ | [https://en.wikipedia.org/wiki/Mark_Trollope Mark Trollope] | ||
− | [[ | + | 1889년 9월 29일 [https://www.youtube.com/watch?v=iDfi-IFU8FU 초대 주교 고요한(Charles John Corfe)]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http://www.cathedral.or.kr/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1890년 11월 그가 정동 현 위치 교회용 한옥과 부지매입했고 12월 21일 기존 한옥건물 ‘장림성당’(The Church of Advent)으로 명명했다. 이해 첫 성탄절 감사성찬례를 봉헌했다. |
+ | 1891년 11월 1일 정기적인 주일 감사성찬례 봉헌시작.(교회설립기념일) | ||
+ | 1892년 11월 27일 전통 한식 교회건물 신축 ‘장림성당’으로 축성. | ||
+ | 1893년 성당 구내에 고아원 개설.(1921년 수원으로 이전 ‘성피득 보육원’으로 개원) | ||
+ | 1895년 7월 2일 성당 부속 건물에 ‘성 베드로 병원’ 개원.(1904년 폐원) | ||
− | + | ===한국 선교 활동=== | |
+ | 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였다. 영국성공회는 코르프(C. J. Corfe, 1865-1921, 高要翰) 초대 주교가 1890년부터 1904년까지 15년간 한국에 처음으로 성공회를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재직 중 마지막 사업으로 벌인 것이 서울·인천·강화 다음에 네 번째로 수원지방의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수원지역은 1904년 서울에서 파송된 송 전도사가 수원천 윗버드내(상유천)에서 전도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수원군 안용면 장지리(현 공군비행장)에 최초의 성공회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1905년 초대 관할사제로 브라이들(Bridle, 부재열) 신부가 부임하면서 수원 매교는 1900년 8월 9일 부인과 첫돌이 채 안된 아들을 안고 수원을 찾아왔다. 기독교 선교를 위한 것으로 일본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 선교 사례이다. 처음 1900년 9월 성안 북수동(장안동)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수원에 정착함으로써 수원에 영주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노리마츠를 특별히 기억하게 하는 것은 그가 여타의 일본인과 다른 생각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타의 일본인들과 달리 한복을 입고 식기와 집도 한국식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에게도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고 한국어를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성서강론소(聖書講論所)’로 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09년 8월 김태정(金泰貞)이 수원천변 토지를 기부하고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로 한옥의 집회소를 지어 ‘수원 성서강당(水原聖書講堂)’이라 이름 붙였다. 1917년 일제 당국의 요청에 따라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였다. 동 가옥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이듬해 1906년 현재 위치인 [http://www.swcf.or.kr/webzine/_001/kor/?webPage=6&bbsCate=11&mode=view&idx=7157&rIdx=0 교동] 11번지 일대 4,0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교동시대를 열었다. 매입한 땅에 철조망을 치고 전통 가옥을 성당으로 사용하였음을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사진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 1908년 성당을 신축하고 남녀 80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진명학교(進明學校)를 1908년 5월 16일 개교, 교육을 통한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1910년대 당시 교회 규모는 사제 2명, 전도사 7명, 신자 700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당시 성공회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1913년 서울에서 성 피득 보육원을 수원으로 이전하여 운영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한국성공회에서 유일하였던 성피득 보육원은 1898년 서울에서 설립되어 1913년 수원교회 안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1928년 9월 28일 진명학교는 진명유치원(進明幼稚園)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하여 폐원되었다. 초창기 진명유치원 원장은 의사였던 신현익(申鉉益)이었다.[https://swmuseum.suwon.go.kr/board/board_viw.jsp?board_id=culture&seq=OQ== 수원박물관제공] | ||
− | [[ | + | [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1927/03.html John Corfe]의 절친이 [https://london.wikia.org/wiki/Charles_Edward_Brooke Charles_Edward_Brooke]신부였다. |
+ | [http://koreanchristianity.cdh.ucla.edu/images/stories/1893_Corfe_letter.pdf C. John Corfe, “The Bishop’s Letter” in August 1893] | ||
− | + | 1889년 11월 1일, 조선교구 설립을 목적으로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는 것으로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는 주교서품을 받은 후에 한국 선교를 위하여 동역자들을 모집하여 영국을 출발했고, 드디어 1890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 전도하기 시작했다. 코프 주교는 1891년 인천에 병원과 첫 번째 성공회 교회를 지었고 1년 후 서울에 교회를 세웠다. 첫 번째 한국인 성인을 위한 세례식은 1897년에 열렸다. 강화의 김희준(마가)를 포함하여, 후에 1915년에 첫 번째 한인성공회 성직서품을 주었다. 그들은 한국 개화기에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신명학교 를 설립하고 인천, 여주, 진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수원과 안중에는 보육원을 개설하였다.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Mark Napier Trollope(한국명, 조마가) 주교는 한국에 돌아갔다. 후에 일본어를 말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스탭으로 포함되었다. 1922년 트롤로프는 한국 기도서 작문을 시작했다. 1925년 서울대성당인 성 마리아와 성 니콜라성당이 완공되어 봉헌되었다. 트롤로프 주교가 별세한 1930년에 한국에는 20명의 한국인 성직자들이 있었다. 세계 2차대전 동안 일본의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1941년 초 모든 외국선교사들의 한국에서의 철수(추방)를 의미했다. 그러나 한국성공회는 살았고, 1945년 일본의 전쟁 패망으로 선교사들은 다시 한국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교구(敎區)는 소련(USSR)의 북한통제와 미군정(美軍政)의 남한통제로 38선으로 나뉘었다. 비록 한인 성직자들은 계속 군대에 의해 용인되었지만, 북한과의 대화는 1950-1953년 한국전쟁으로 끊어지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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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중국과 일본에는 한국보다 이르게 성공회가 선교되고 있었고 이들의 요청으로 벤슨 켄터베리 대주교는 1889년 11월 1일(모든 성인의 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조선교구장 존 코프(Charles John Corfe)사제를 주교로 서품했다. 코프 주교는 중국 북부에서 2년간 성공회 주교를 보좌했으며 당시에는 영국 해군 군종사제로 있었다. 한국성공회 초대주교인 코프(한국명 고요한) 주교는 1890년 9월 29일 제물포(인천)에 상륙했다. 그는 제물포와 서울에 토지를 매입하고 강화도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드디어 1897년에 강화도 사람 김희준에게 영국인 사제 트롤로프가 마가(Mark)라는 신명(信名; 세례명)으로 첫 세례성사를 주었다. 그는 의료선교와 고아원복지사업을 통해 선교했으며 선교15년만인 1904년에 사임했다. 그동안 성공회는 12개 교회, 5개 병원과 성베드로 수녀원, 고아원1개소, 학교1개소, 출판소1개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다. | |
+ | ===성공회 후원단체=== | ||
− | + | 한국 선교의 책임자가 된 코프 주교는 영국의 여러 선교단체로부터 후원을 얻게 된다. 1890년 7월에 영국을 떠나면서 HNF: 해군병원기금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모닝캄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영국 성공회는 국교회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던 SPG와 모닝캄을 후원하였던 HNF 모두 준 국가기구의 일부였다. |
2021년 10월 18일 (월) 14:16 기준 최신판
한국성공회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이다. 1883년 말경 얼마 동안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온 주중 영국 전권대사 해리 팍스(Harry Parkes) 경은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의 문호개방에 관한 1884년 1월 12일자 편지를 받고 한국선교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담은 서신을 띄웠으며, 찰스 스캇(Charles Perry Scott) 감독은 이 편지를 켄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전했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한국 선교 구상
1890년 영국 성공회의 선교 기관인 “해외복음전파회”(The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白樂濬은 파스코(C. F. Pascoe)의 해외복음전파회 1701-1900년을 인용하여 영국 성공회가 어떻게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아래와 같이 그 전후 상황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韓國에서의 영국 성공회사업은 當時 해외 일본 선교사업의 창시자 중의 한 분이요, 또한 개척 선교사이던 쇼(A. C. Shaw) 신부가 1880년에 구상한 데서 출발했다. 한국과 對外交通을 개시할 목적으로 쇼는 이 전도회에서 주교 한 분과 신부를 함께 한국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주도해야 할 준비의 필요성을 느끼고, 또한 그 길을 열기 위하여 1880년에 그 隸下 일본인 전도사 한 사람을 보내어 한국말을 배우게 하였는데 그 전도인의 봉급은 해외 일본교회 교인들이 부담했다. 이 구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쇼 부주교는 이 일을 계속하여 추진했다. 그 후 1884년에 한영통상조약의 체결교섭이 진행 중에 있을 때 중국에 주재한 영국교회 주교 세분도 이 기회를 捕捉하고 동일한 시도를 제기했다. 그 조약내용에 영국인에게 신교자유권 賦與條款이 여러 象譯권 항목보다 더 많이 토의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전통적 사교배척정책에 의하여 일어났던 병인(丙寅, 1866), 신미(辛未, 1871)의 박해와 같은 사건을 대비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영조약에서 선교 활동이 용허되어 있지 아니하지만 한어를 통하고 한국 정부와 민간사정을 아는 선교사들은 척사책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약 체결 직후에 한국 정부는 병원설립에 필요한 의사와 외국어 특히 영어와 기타과목을 가르칠 교사들을 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87년에 북중국의 스코트(Scott)주교와 일본의 빅커스테드(Bickersteth)는 한국을 往訪하고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지체 없이 한국에 영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안건이 복음 전도회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1888년에 와서 북중국 주재 주교에게 2,500파운드를 보내어 선교사업 개시에 사용하게 했다. 다행하게도 선교사업을 개시하려던 본래의 계획은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어” 출발하였는데 勅令에 의하여 일찍이 영국해군 종군사제로서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코르프(C. J. Corfe) 사제가 1889년 萬聖節日(11월 1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주한 주교로 陞品되었다. 복음 전도회에서는 현재(1889-90) 年額 1,500파운드의 지원을 보장하고 있지만 한국 선교사업은 처음부터 “使徒의 내핍생활 성약 하”에 출발하였으므로 주교와 그 동료들은 봉급을 받지 아니하는 동시에 탁발생활을 할 것도 아니라 소액의 공유금으로 공동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코르프 주교는 한국에 赴任하는 도중 선교사업의 대표자격으로 미국 내 9개 도시와 캐나다의 8개 도시, 일본의 3개 도시를 역방하고 도처에서 성의에 찬 동정을 받았다. 뉴 웨스트민스터(New Westminster) 교구에서는 스몰(R. Small)과 피크(Peake) 두 신부의 선교사 지원도 받았다. 주한 선교사로는 와일즈(Julius Wiles)와 랜디스(Landis) 두 의사와 트롤로프(M. N. Trollope), 와너(L. O. Warner) 두 신부와 파우널(J. H. Pownall), 데이비스(M. W. Davies) 두 사람이 있었다.
코르프 주교는 1890년 성 미가엘과 諸聖膽禮日에 인천에 도착하였고 그 익일인 9월 30일에 서울에 입성했다. 와일즈 의사는 이보다 3주일 전에 내한하였으므로 지체 없이 곧 서울과 인천에 거주하는 한인 및 歐洲人을 상대로 의료사업에 착수하는 한편 구주인을 상대로 종교 활동을 개시하고 서울에는 영국해군 군목들이 기증한 인쇄기계를 가설하고 선교용 인쇄소를 설치했다. 서울과 인천에 선교사 거주처소를 매입하고 9명의 선교단원들이 서울에서 동거하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선교사업이 1891년 부활주일날 시작되었으므로 그 처소를 “부활의 집”이라 명했다.
한국 선교 특징
이렇게 해서 오랜 준비 작업을 거쳐 1890년 9월 29일 “한국의 첫 감독 선교사” 찰스 존 코르프(Charles John Corfe), 그와 함께 입국한 젊은 성공회 의사 랜디스(E. B. Landis), 그리고 이어 스몰(Small), 피크(Peake),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파우널 부제, 데이비스 등이 도착하면서 성공회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그러나 성공회는 직접선교보다는 의료 선교, 사회복지 사업, 문서 선교에 주력했다. 1890년 10월 제물포에 성누가병원, 1891년 정동에 성베드로병원과 낙동에 성마태병원을 개원했다. 경기도 여주와 충북 진천에도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성공회는 낙동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셩교이증(聖敎理證), 성회송가(聖會頌歌) 등을 발간하여 문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들은 6년 동안 한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습득하면서 직접전도를 삼가오다 189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명의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
1889년 9월 29일 초대 주교 고요한(Charles John Corfe)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1890년 11월 그가 정동 현 위치 교회용 한옥과 부지매입했고 12월 21일 기존 한옥건물 ‘장림성당’(The Church of Advent)으로 명명했다. 이해 첫 성탄절 감사성찬례를 봉헌했다. 1891년 11월 1일 정기적인 주일 감사성찬례 봉헌시작.(교회설립기념일) 1892년 11월 27일 전통 한식 교회건물 신축 ‘장림성당’으로 축성. 1893년 성당 구내에 고아원 개설.(1921년 수원으로 이전 ‘성피득 보육원’으로 개원) 1895년 7월 2일 성당 부속 건물에 ‘성 베드로 병원’ 개원.(1904년 폐원)
한국 선교 활동
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였다. 영국성공회는 코르프(C. J. Corfe, 1865-1921, 高要翰) 초대 주교가 1890년부터 1904년까지 15년간 한국에 처음으로 성공회를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재직 중 마지막 사업으로 벌인 것이 서울·인천·강화 다음에 네 번째로 수원지방의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수원지역은 1904년 서울에서 파송된 송 전도사가 수원천 윗버드내(상유천)에서 전도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수원군 안용면 장지리(현 공군비행장)에 최초의 성공회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1905년 초대 관할사제로 브라이들(Bridle, 부재열) 신부가 부임하면서 수원 매교는 1900년 8월 9일 부인과 첫돌이 채 안된 아들을 안고 수원을 찾아왔다. 기독교 선교를 위한 것으로 일본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 선교 사례이다. 처음 1900년 9월 성안 북수동(장안동)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수원에 정착함으로써 수원에 영주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노리마츠를 특별히 기억하게 하는 것은 그가 여타의 일본인과 다른 생각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타의 일본인들과 달리 한복을 입고 식기와 집도 한국식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에게도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고 한국어를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성서강론소(聖書講論所)’로 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09년 8월 김태정(金泰貞)이 수원천변 토지를 기부하고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로 한옥의 집회소를 지어 ‘수원 성서강당(水原聖書講堂)’이라 이름 붙였다. 1917년 일제 당국의 요청에 따라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였다. 동 가옥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이듬해 1906년 현재 위치인 교동 11번지 일대 4,0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교동시대를 열었다. 매입한 땅에 철조망을 치고 전통 가옥을 성당으로 사용하였음을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사진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 1908년 성당을 신축하고 남녀 80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진명학교(進明學校)를 1908년 5월 16일 개교, 교육을 통한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1910년대 당시 교회 규모는 사제 2명, 전도사 7명, 신자 700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당시 성공회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1913년 서울에서 성 피득 보육원을 수원으로 이전하여 운영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한국성공회에서 유일하였던 성피득 보육원은 1898년 서울에서 설립되어 1913년 수원교회 안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1928년 9월 28일 진명학교는 진명유치원(進明幼稚園)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하여 폐원되었다. 초창기 진명유치원 원장은 의사였던 신현익(申鉉益)이었다.수원박물관제공
John Corfe의 절친이 Charles_Edward_Brooke신부였다.
C. John Corfe, “The Bishop’s Letter” in August 1893
1889년 11월 1일, 조선교구 설립을 목적으로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는 것으로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는 주교서품을 받은 후에 한국 선교를 위하여 동역자들을 모집하여 영국을 출발했고, 드디어 1890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 전도하기 시작했다. 코프 주교는 1891년 인천에 병원과 첫 번째 성공회 교회를 지었고 1년 후 서울에 교회를 세웠다. 첫 번째 한국인 성인을 위한 세례식은 1897년에 열렸다. 강화의 김희준(마가)를 포함하여, 후에 1915년에 첫 번째 한인성공회 성직서품을 주었다. 그들은 한국 개화기에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신명학교 를 설립하고 인천, 여주, 진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수원과 안중에는 보육원을 개설하였다.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Mark Napier Trollope(한국명, 조마가) 주교는 한국에 돌아갔다. 후에 일본어를 말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스탭으로 포함되었다. 1922년 트롤로프는 한국 기도서 작문을 시작했다. 1925년 서울대성당인 성 마리아와 성 니콜라성당이 완공되어 봉헌되었다. 트롤로프 주교가 별세한 1930년에 한국에는 20명의 한국인 성직자들이 있었다. 세계 2차대전 동안 일본의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1941년 초 모든 외국선교사들의 한국에서의 철수(추방)를 의미했다. 그러나 한국성공회는 살았고, 1945년 일본의 전쟁 패망으로 선교사들은 다시 한국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교구(敎區)는 소련(USSR)의 북한통제와 미군정(美軍政)의 남한통제로 38선으로 나뉘었다. 비록 한인 성직자들은 계속 군대에 의해 용인되었지만, 북한과의 대화는 1950-1953년 한국전쟁으로 끊어지고 말았다.
중국과 일본에는 한국보다 이르게 성공회가 선교되고 있었고 이들의 요청으로 벤슨 켄터베리 대주교는 1889년 11월 1일(모든 성인의 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조선교구장 존 코프(Charles John Corfe)사제를 주교로 서품했다. 코프 주교는 중국 북부에서 2년간 성공회 주교를 보좌했으며 당시에는 영국 해군 군종사제로 있었다. 한국성공회 초대주교인 코프(한국명 고요한) 주교는 1890년 9월 29일 제물포(인천)에 상륙했다. 그는 제물포와 서울에 토지를 매입하고 강화도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드디어 1897년에 강화도 사람 김희준에게 영국인 사제 트롤로프가 마가(Mark)라는 신명(信名; 세례명)으로 첫 세례성사를 주었다. 그는 의료선교와 고아원복지사업을 통해 선교했으며 선교15년만인 1904년에 사임했다. 그동안 성공회는 12개 교회, 5개 병원과 성베드로 수녀원, 고아원1개소, 학교1개소, 출판소1개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다.
성공회 후원단체
한국 선교의 책임자가 된 코프 주교는 영국의 여러 선교단체로부터 후원을 얻게 된다. 1890년 7월에 영국을 떠나면서 HNF: 해군병원기금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모닝캄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영국 성공회는 국교회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던 SPG와 모닝캄을 후원하였던 HNF 모두 준 국가기구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