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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해록 권1== | + | ==최원재 프로젝트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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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lst 성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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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인(喪人)'인 신(臣) 최부(崔薄)는 제주(濟州)로부터 표류해서 구동(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올 6월 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여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 바치나이다.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A1%B0%EC%84%A0%EC%99%95%EC%A1%B0%EC%A4%91%EB%86%8D%EC%A3%BC%EC%9D%98.lst 조선왕조중농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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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B%96%A1%EC%82%B4%EB%AC%B8%EC%96%91.lst 떡살문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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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화(成化)23년 정미년 가을 9월 17일=== | + | ===[[서예]]=== |
− | 신(臣)은 제주3읍 추쇄 경차관'(濟州三邑推刷敬差官)으로서 대궐에서 하직하고 떠나 전라도에 이르러서, 감사(監司)'가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뽑아 보낸 광주목(光州牧)의 아전 정보(程保)', 화순현(和順縣)'의 아전 김중(金重)과 승사랑(承仕郞)17, 이정(李植), 나주(羅州)의 수배리(隨陪吏)' 손효자(孫孝子), 청암역리(靑巖驛吏)' 최거이산(崔巨伊山) 호노(戶奴) 만산(萬山) 등 6인과 사복시(司僕寺)의 안기(安驥)'인 최근(崔根) 등을 거느리고 해남현(海南縣)으로 가서 순풍을 기다렸습니다. 11월 11일 아침에 제주의 신임 목사(牧使)인 허희(許熙)와 함께 관두량(館頭梁)에서 배를 탔습니다. 12일 저녁에 제주의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하여 유숙하였습니다.
| + | ===[http://digerati.aks.ac.kr/dhlab/2019/101/%EC%B5%9C%EC%9B%90%EC%9E%AC/%EA%B0%95%ED%99%94%EB%8F%84%EC%A4%91%EC%95%99%EA%B5%90%ED%9A%8C.html 강화중앙교회 디아스포라]===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A%B0%95%ED%99%94%EC%9E%A0%EB%91%90%EA%B5%90%ED%9A%8C_%ED%95%AD%EC%9D%BC%EC%9A%B4%EB%8F%99%EC%A7%80 강화잠두교회 항일운동지]===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A%B0%95%ED%99%94%EC%A4%91%EC%95%99%EA%B5%90%ED%9A%8C 강화중앙교회]===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A%B0%95%ED%99%94%EA%B0%90%EB%A6%AC%EA%B5%90 강화감리교]=== |
| + | ===[http://digerati.aks.ac.kr/dhlab/2019/101/%EC%B5%9C%EC%9B%90%EC%9E%AC/leemangyu/index.html 이만규]=== |
| + | ===[https://www.youtube.com/watch?v=pB51JChFtec 이만규와 한국근대교육사]===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A7%8C%EA%B7%9C%EC%99%80_%ED%95%9C%EA%B5%AD%EA%B7%BC%EB%8C%80%EA%B5%90%EC%9C%A1%EC%9E%90%EB%A3%8C_%EB%94%94%EC%A7%80%ED%84%B8_%ED%81%90%EB%A0%88%EC%9D%B4%EC%85%94%EB%8B%9D 이만규와 디지털큐레이셔닝1]===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A7%8C%EA%B7%9C%EC%99%80_%ED%95%9C%EA%B5%AD%EA%B7%BC%EB%8C%80%EA%B5%90%EC%9C%A1%EC%9E%90%EB%A3%8C_%EB%94%94%EC%A7%80%ED%84%B8_%ED%81%90%EB%A0%88%EC%9D%B4%EC%85%94%EB%8B%9D.lst 이만규와 디지털큐레이셔닝2]=== |
| + | ===[http://www.yes24.com/Product/Goods/88417811 인문기술자]===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B%94%94%EC%A7%80%ED%84%B8_%ED%81%90%EB%A0%88%EC%9D%B4%EC%85%98 디지털 큐레이션_동국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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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치(弘治)원년(1488) 무신년 정월 30일=== | + | ==최원재 프로젝트 2020== |
− | 흐렸습니다.
| + | ===[[내러티브_도학교재로서의_금남_최부_『표해록(漂海錄)』_연구_시맨틱_큐레이션_방법을 기반으로]]=== |
− | 해질 무렵에 신의 종 막금(莫金)이 나주(羅州)로부터 제주에 도착하였는데, 상복(喪服)을 가지고 와서 신의 아비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25726 역사 데이터 내러티브]=== |
| + | ===표해록=== |
| + | *[[최부의 인맥]]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B5%9C%EB%B6%80%EC%9D%98_%EC%9D%B8%EB%A7%A5.lst 최부의 인맥] |
| + | *[[최부표해록 분석 및 클래스 설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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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 정월 1일=== | + | ===최부의 표해록 노드=== |
− | 비가 내렸습니다.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DB-2019-F 표해록 노드] |
− | 목사(牧使)가 아침저녁으로 와서 조문(弔問)하였습니다. 수정사(水精寺) 승려 지자(智慈)의 배가 튼튼하고 빨라 관선(官船)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며, 병방진무(兵房鎭撫) 고익견(高益堅)과 오순(吳純) 등에게 별도포 (別刀浦)로 돌려 대도록 명하여, 신이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여 주었습니다. 판관(判官) 정전(鄭益)은 군관(軍官) 변석산(邊石山)을 보내어 조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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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일=== | + | ==최원재 프로젝트2021== |
− | 흐렸습니다.
| + | ===[[다포딜 로드]]=== |
− | 해뜰 무렵에 신은 별도포의 후풍관(候風館)으로 나아갔습니다. 정의현훈도(佐義縣訓導) 최각(崔角), 향교생도(鄕校生徒) 김정린(金鼎隣) 등 20여 명과 내수사전회(內需司典會)34 박중알(朴重幹) 및 최근 등은 모두 걸어 서 15리 남짓 따라왔습니다. 조금 후에는 목사가 말을 달려와 위문하였습니다. 이 날 신이 데리고 간 아전 정보와 김중 등이 어승(御乘) 점마별감(點馬別監)35 목장(牧場)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변별하고, 유이인(流移人)을 추쇄(推刷)하고, 멋대로 반당(伴尙)으로 삼거나 양민(良民)으로 잘못 인준한 자 등을 적발한 것 등의 문적(文籍) 및 가져갔던 전주부(全州府)에서 올린 제주(濟州) 3읍 장적(帳籍) 17책과 또 다른 1책, 제주 3읍의 담당관이 올린 매년의 장적·호적(戶籍)·군적(軍籍) 등의 문서(文書)를 봉하여 목사에게 넘겨주어 영청(營廳)에 보관하도록 하고, 그 문서목록을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 + | ===[[수선화 시인들]]===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95686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문학, ‘수선화 시인들']=== |
| + | ===[[데이터 리터러시, '아하! 순간', 송남잡지]]===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83765 데이터 리터러시 교육과 『송남잡지』]=== |
| + | ===[[유럽의 디지털 인문학]]=== |
| + | ===[[유년필독]]===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03157 이큐레이션(E-curation) 역사 수업 - 『유년필독』을 중심으로 -]=== |
| + | ===[[조선의 몽골 인식과 그 흔적 - 시맨틱 큐레이션]]=== |
| + |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와 불교수행]]=== |
| + | ===[[서예역사]]=== |
| + | ===[[만해 한용운]]=== |
| + | ===[[신흥무관학교]]=== |
| + | ===[[데이터 과학과 성경]]=== |
| + | ===[[개화기 교육학]]=== |
| + | ===[[개화기 미술교육]]=== |
| + | ===[[개화기 해외학교]]=== |
| + | ===[[민화]]=== |
| + | ===[[동남아와 한반도]]=== |
| + | ===[[독립군 무기]]=== |
| + | ===[[지리교육]]=== |
| + | ===[[서예추상]]=== |
| + | ===[[한반도 영어교육과 번역]]=== |
| + | ===[[한국 여성잡지]]=== |
| + | ===[[조선 개화기 과목별 교사일람]]=== |
| + | ===[[조선 천주교 선교사]]=== |
| +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06189354 심리기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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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일=== | + | ==최원재 프로젝트2022== |
−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수선화 한국학]]=== |
− | 이 날은 흐리다 비 오다 하며 동풍이 조금 불고, 바다 물빛은 짙은 청색이었습니다. 대정현감(大靜縣監) 정사서(鄭嗣瑞)와 훈도(訓導) 노경(盧警)은 신이 친상 당한 것을 듣고 달려와 조문하고, 최각(崔角)·박중알, 왜학훈도(倭學訓導) 김계욱(金繼郁), 군관(軍官) 최중중(崔仲衆), 진무(鎭撫) 김중리(金仲理) 등 10여 인과 학장(學長) 김존려(金存麗)·김득례(金得禮) 및 향교생도 20여 명과 함께 포구에서 송별해 주었습니다. 존려와 득례 등은 신이 떠나는 것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저희 늙은이들은 섬에서 자라 바닷길을 잘 압니다.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반드시 바람의 변화가 생기니 배를 타서는 안 됩니다. 또 《가례(家禮)》의, '친상(親喪)을 듣자마자 길을 떠나라 4는 조목의 주(註)에도, '하루에 100리를 가되 밤길은 가지 말아야 하니 비록 슬프더라도 몸을 해치는 일은 피해야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밤길을 가는 것도 안 되는데, 하물며 바다 건너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좌중에 권하는 이도 있고 말리는 이도 있어, 해가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와서 알리기를, “동풍이 마침 알맞으니 떠날 만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중알과 최중중 등도 또한 떠나기를 권하였습니다.
| + |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를 통한 창의력 계발 수업 모델 개발 – ‘수선화 한국학’ ]]=== |
− | 신은 마침내 작별을 고하고 배에 올라 노를 저어 5리쯤 가니, 군인(軍人) 권산(權山)과 허상리(許尙理) 등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불다가 잦아들기도 하고, 먹구름이 꼈다가 개기도 하니 이처럼 바람이 고르지 못한 날에 이처럼 파도가 사나운 바다를 건넌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 듯합니다. 청컨대 별도포로 돌아가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하늘의 날씨는 사람이 미리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볼 수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바다를 건넌 사람으로서 민간의 배가 뒤집혀 침몰되는 일은 잇달아 일어났지만, 왕명을 받든 조신(朝臣)으로서는 오직 전 정의현감(産義縣監) 이섬(李)45 외에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된 적이 드물었던 것은, 모두 임금의 덕이 지극히 높음을 실제로 하늘이 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다 보면 일이 끝이 없는 법입니다. 어찌 길을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시일을 천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돛을 펼치고 가도록 소리쳐 명했습니다. 겨우 대화탈도(大火脫島)'를 지났는데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배가 거요량(巨要梁)을 향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올라가서 바람을 따라 추자도(秋子島)에 정박하면 매우 빠르게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으나, 권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키를 잡고 바람 부는 대로 수덕도(秘德島)49를 지나서 서쪽으로 갔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14146 ESG 개념을 활용한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교육 ]=== |
− | 바다가 어두컴컴해지면서 바람은 약해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자도의 배 정박할 곳에 가까이 갈 즈음에 물살이 아주 급해지고 하늘도 캄캄하여졌으므로, 곁군[格軍]을 독려하여 노를 젓도록 하였습니다. 군인들이 모두, “이 같은 날씨에 배를 출발시킨 것은 누구 잘못입니까?”라고 말하고는, 모두가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힘껏 노를 저으라는 말을 따르지 않아, 뒤로 흘러 내려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쪽 해안에 의지해서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습니다. 밤 3경(更)이 되자 허상리가 말하기를, “이 섬은 비록 동풍을 막고 있지만 3면이 트여 있어 배를 정박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지금 또 북풍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데 기댈 곳이 없게 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한 이 배는 처음 정박한 곳에 있지 않고 도리어 점점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으니 내린 닻줄이 이미 끊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닻을 올려 조금 앞으로 나아가 해안에 매어 두었다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노를 저어 추자도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닻을 올려보니 과연 끊어져 있었습니다. 노를 저었으나 미처 해안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북풍을 맞아 기댈 데가 없는 곳으로 몰려나오게 되었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를 않고 풍랑이 사나워 파도를 따라 오르내리니, 향하는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 + | ===[[디지털 데이터 필사]]=== |
| + | ===[[역사 데이터베이스]]=== |
| + | ===[[3D 타임머신]]=== |
| + |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번역, '아저씨, 아가씨']]=== |
| + | ===[[한국삼육고등학교]]=== |
| + | ===[[폭력의 심층기제]]=== |
| + | ===[[성공회 조선 선교사]]=== |
| + | ===[http://www.skh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272 성공회 신문 모닝캄 연재 기사]=== |
| + | ===[[모닝캄(The Morning Calm)]]=== |
| + | ===[[모닝캄 포토(The Morning Calm Photo)]]=== |
| + | ===[[만해 한용운과 기독교]]=== |
| + | ===[https://scholar.kyobobook.co.kr/article/detail/4010036870849 휴타고지 시대의 고등교육 방안: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
| + | ===[http://www.kohisedu.or.kr/notice/view.php?idx=122 2022년 역사와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82918 디지털 데이터 시대의 연구·교육 방안: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 『모닝캄』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션-]=== |
| + | ===[http://digerati.aks.ac.kr/DhLab/2021/101/WonJe/KHUHERC/KHUHERC.htm HERC]=== |
| + | ===[[한국문화융합학회 추계학술대회]]=== |
| + | ===[https://kaeim.jams.or.kr/co/com/EgovMenu.kci?s_url=/po/community/notice/noticeView.kci&s_MenuId=MENU-000000000061000¬iSeq=000000032074 한국교육정보미디어학회•한국교육공학회 추계공동학술대회]=== |
| + | ===[[창의력 계발 교과목 개발 방안: 디지털 분류술(分流術)]]=== |
| + | ===[http://www.hkb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8108 치명적 독 미세플라스틱]=== |
| + | ===[https://keastwest.or.kr/%EA%B3%B5%EC%A7%80%EC%82%AC%ED%95%AD/11571810 2022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추계 정기학술대회]=== |
| + | ===[[모순 연습: 재즈와 메타버스]]===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13839 메타버스와 재즈의 모순 연습 Metaverse and Contradiction Practice of Jazz]===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99021 메타버스 강의 개발 : 블렌더 활용 ‘3D 타임머신’ 강의]=== |
| + | ===[[메타버스 교육 생태계]]=== |
| + | ===[[조선 후기 실학적 교육서 송남잡지]]=== |
| + | ===[http://www.segyenewsagency.com/news/articleView.html?idxno=488567 송남잡지를 통해 본 신교육 선각자 송남 조재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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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일=== | + | ==최원재 프로젝트 2023== |
− | 큰 바다 가운데로 표류해 들어갔습니다.
| + | 1학기 |
− | 이 날은 우박이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놀란 파도와 무서운 물결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해면을 내리치니 돛이 모두 부서져 버렸습니다. 배는 높고 큰 돛대 2개 때문에 쉽게 기울어져 뒤집어질 기세였으므로 소근보(肖斤寶)53에게 도끼로 돛대를 제거하게 하고, 고이복(高以福)에게 거적을 읽어 선미(船尾)에 붙여 파도를 막게 하였습니다. 정오가 되어 비는 조금 그쳤으나 동풍이 또 크게 일어나 배는 기울어졌다 떠올랐다 하였으며, 그 가는대로 맡겨두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서해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뱃사공이 동북쪽을 가리키기에 바라보니, 마치 한 점 탄환과 같은 섬이 아득한 곳에 있었습니다. 뱃사공이, “저것이 아마 흑산도(黑山島)54일 것입니다. 이곳을 지나서 앞으로 간다면 사방에 섬이라고는 없고 물과 하늘이 서로 닿아 있는 끝없이 넓은 바다뿐입니다”라고 말하니,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배 안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신이 안의를 시켜 군인들에게 취로(取露)하는 일, 배를 수리하는 일 등을 독려하도록 하였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27054 태동기의 메타버스 대학교육 진단]===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36571 메타버스를 위한 철학과 교육]=== |
| + | ===[[K–컬처가 소환한 가상세계의 환류]]=== |
| + | ===[https://www.segyenewsagency.com/news/articleView.html?idxno=498132 송남잡지 톺아보기]=== |
| + | ===[http://www.skh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41 성공회 모닝캄 연재]=== |
| + | ===[[한국한문교육학회 2023 춘계 학술대회]]=== |
| + | ===[[코로나 세대를 위한 공적 기독교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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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인 고회(高廻)란 자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제주는 바닷길이 매우 험난해서 왕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여러 달씩 순풍을 기다려! 전 경차관(敬差官) 같은 분으로 말하면 조천관(朝天節)에 있다가 수정사(水精寺)에 있다가 하며 모두 합쳐 석 달이나 기다린 뒤에야 길을 떠났거든, 지금 이 행차는 비바람이 고르지 않은 때 하루의 날씨도 살펴보지 않고 이러한 극한 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자초한 일이야!”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 군인들은 모두,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취로를 하고 배를 수리하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야. 애를 쓰다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편안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편이 나아”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 귀를 막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며, 혹은 때려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송진(宋眞)은 모자라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라, 맞으면서 성내 말하기를, “명도 길구나, 이 배는! 파선되기만을 기다리는데, 왜 빨리 파선되지 않는 거야! 어차피 부서지게 될 것이라면 왜 빨리 부서져 버리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말하기를, “제주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독하며 고집스럽고 사나워, 죽음을 가벼이 여기므로 그들의 말투가 이와 같습니다 56 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또한 물에 빠져 죽을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 하늘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 물에 빠져 죽지 않더라도,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 | ===게임으로 보는 조선의 가상세계 구현=== |
| + | ===[[3D 타임머신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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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군인들의 게으른 행동에 분개하다가 마침내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종자(從者)인 정보(程保)·김중(金重)·이정(李)·손효자(孫孝子)·최거이산(崔巨伊山)·막금莫金)·만산(山)과 제주목사가 보낸 진무(鎭撫) 안의(安義), 기관(記官)” 이효지(李孝枝), 총패(總牌)58 허상리(許尙理), 영선(領船)59 권산(權山), 사공 김고면(金高面), 곁군 김괴산(金怪山)·소근보(肖近寶)·김구질회(金仇此廻)·현산(玄山)·김석귀(金石貴)·고이복(高以福)· 김조회(金朝廻)·문회(文廻)·이효태(李孝台)·강유(姜有)·부명동(夫命同)·고내을동(高內乙同)·고복(高福)·송진(宋眞)·김도종(金都終)·한매산(韓每山)·정실(鄭實), 호송군(護送軍) 김속(金栗)·김진음산(金眞音山)·고회(高廻)·김송(金松)·고보종(高保終).양달해(梁達海)·박종회(朴終回)·김득시(金得時)·임산해(任山海), 관노(官奴) 권송(權松)·강내(內)·이산(李山)·오산(吳山) 등과 저까지 합해서 모두 43명이었습니다. 신이 안의를 불러 묻기를, “나는 한 상제(喪制)로서 관원의 격식에 따를 처지가 아닌데 종자(從者)가 너무 많아 마음이 몹시 편치 않다. 제주 사람으로서 배를 탄 사람이 35명이나 되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니 안의가 말하기를, “우리 목사(牧使)께서 마음을 다한 것은 경차관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또 큰 배를 부리는 데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힘을 써야만 항해가 가능합니다. 하물며 바닷길이 아득하게 멀 뿐더러 울도(蔚島) 등지와 같은 곳은 해적이 많으니 호송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바다를 건널 때는 배를 부리는 자와 바닷길을 잘 아는 자만 가려 뽑으면 비록 수가 적어도 괜찮다. 지금 이 배를 같이 탄 사람은 모두 게으르고 사나운 자들로서 인원수만 늘려놓았지 그 실속이 없다. 배가 표류되어 사지(死地)에 이르게 되면 통곡 소리만 더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 | ===[[역사학과 빅데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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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를 질러 군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초상(初喪)을 당하여 달려가는 몸이라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인 데다 사람들 중에 떠나기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자식 된 자로서 잠깐 동안이라도 지체할 수 있었겠는가? 너희들이 나와 함께 표류를 당한 것은 실로 나 때문이지만, 형세가 또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물며 살고 싶고 죽기 싫은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데 너희들도 어찌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배가 혹시 부서졌거나 뒤집어졌다면 끝장이지만 살펴보건대 지금 배는 단단하여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겠다. 만약 돌섬에만 부딪히지 않는다면 수리해 가며 물을 퍼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잠잠해진다면 비록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이르더라도 살아날 수가 있다. 지금 너희들도 또한 부모와 처자가 있고 형제와 친척도 있어서, 모두가 너희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일찍 죽을까 걱정할 것이다. 너희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 몸도 아끼지 않으며, 오직 나를 탓하는 마음으로 서로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스스로 죽을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제 정신을 잃음이 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상리 등 10여 인이 말하기를, “군인들은 모두 고루하고 우둔하며 무식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씀이 이와 같이 막혔으나, 사람마다 마음가짐이 다르니 저희는 마땅히 죽을 때까지 힘껏 일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밤에도 바람과 비는 그치지 않고 큰 파도는 더욱 심하여 배 안으로 부딪쳐 들어왔으나 물이 들어오는 대로 퍼내었습니다. 밤 2경이 쯤 되니 성난 파도가 출렁대면서 봉옥(蓬屋) 위로 넘나들었습니다. 배는 반쯤 가라앉아 의복과 행장은 모두 물에 젖었습니다. 추위는 뼈를 깎아내는 듯하였고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은 이정의 손을 잡고 정보의 무릎을 베고 누웠습니다. 김중과 효자는 신의 양쪽에서 어지러이 쓰러져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한 사람이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려 할 때 이정이 그 목맨 것을 풀고 보니 바로 오산이었습니다.
| + | ===[[역사정보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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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이산과 막금 등이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었으나 물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신은 배가 아직 튼튼하므로, 위로 세차게 쏟아져 들어오는 물과 틈에서 새어드는 물을 퍼내지 않는다면 앉아서 배가 침몰되기를 기다리는 셈이겠지만, 물을 퍼낸다면 살아날 길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지로 일어나서 큰 소리로 권송을 불러 부싯돌을 쳐서 불을 지피고 짚자리 를 말아 때게 하였습니다. 또 근보 · 고복·고면 등을 큰 소리로 불러 물이 새는 곳을 직접 찾아낸 다음 이를 막도록 하였습니다. 또 옷가지를 풀어 권산·고면 · 거이산 · 괴산 · 상리 등에게 나누어주며 맡은 일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정보 · 김중·손효자 등도 또한 여러 군인들에게 의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인들 중에 구질회·문회 · 도종·매산 · 현산과 같은 사람은 감격하여 죽을힘을 다해 다투어 물을 거의 다 퍼내니 배가 겨우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배가 또 돌섬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권산은 배를 움직이며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알지 못했고, 상리와 구질회 등은 상앗대를 잡고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바람에 힘입어 내몰려 나와, 부서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 + | ===[[빅데이터기반 교육 솔루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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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Spot Virtu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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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일===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53808 가상세계 활용 교육을 위한 인지 전환 이론과 실천방안]=== |
− | 이 날은 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서 빗발이 삼대 같았습니다. 밤이 되자 비가 조금 그쳤으나 성난 파도가 산더미와 같아서, 높게 일 때는 푸른 하늘로 솟는 듯했고 내려갈 때는 깊은 못에 빠져 들어가는 듯하여,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찢는 듯하며, 모두 물에 빠져 썩어 문드러질 것이 순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막금과 권송 등은 눈물을 씻으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급박하여 다시 희망이 없으니 청컨대 의복을 갈아입고 죽음을 맞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그 말과 같이 인장(印章)과 마패(馬牌)를 품에 넣고 상관(喪冠)과 상복(喪服)을 갖추고는 벌벌 떨며 손을 비비면서 하늘에 빌기를, “신은 살아오면서 오직 충효와 우애를 마음에 새기고, 마음으로는 속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몸으로는 원수진 일이 없었으며 손으로는 누구를 죽이거나 해친 적이 없었음은 하늘이 비록 높고 높지마는 실로 굽어 살피시는 바입니다. 이번에도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신에게 무슨 죄와 허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신에게 죄가 있으면 신의 몸에만 벌이 미치면 될 것이지, 같이 배를 탄 40여 인은 죄도 없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하늘은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늘께서 만약 이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바람을 거두고 파도를 그치게 하여 신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다시 삶을 얻어, 갓 죽은 신의 아비를 장사지내고 늙으신 신의 어미를 봉양하며 다행히 다시 궁궐의 뜰 아래에 국궁(鞠)할 수 있게 하신다면, 이후에는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미처 마치지 않았는데 막금이 갑자기 신의 몸을 안으면서, “한 집안 사람들이 평생의 고락을 모두 이 분에게 기대기를, 마치 '열 소경에 한 막대처럼 여겼는데,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집안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피 통곡하였습니다. 배리(陪吏) 이하도 소리를 내어 슬피 울면서 손을 모아 하늘의 도움을 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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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일=== | + | ===역사와 교육학회 2023 춘계 학술대회=== |
−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http://www.kohisedu.or.kr/notice/view.php?idx=132 역사와 교육학회 2023 춘계 학술대회] |
− | 이 날은 흐렸습니다. 풍랑이 조금 수그러들었습니다. 비로소 구질회 등을 독려하여 조각이 난 돗자리를 기워서 돛을 만들고, 상앗대를 세워서 돛대를 만들고, 그 돛대의 밑둥을 잘라서 닿을 만들었습니다. 바람을 따라 서쪽을 향하여 가는데, 살펴보니 큰 파도 사이에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물 위에 드러난 것만 해도 기다란 행랑채와 같고, 거품을 뿜어 내어 하늘에 솟구치는데 물결이 뒤집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공이 배 안의 사람들에게 경계하며 손을 흔들어 말을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배가 멀리 지나간 후에야 사공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저것이 바로 고래입니다. 큰 것은 배를 삼키고 작은 것도 배를 뒤엎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 서로 마주치지 않아서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풍랑이 다시 강해지므로 배가 가는 속도가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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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일=== | + | [http://terms.tta.or.kr/dictionary/dictionaryView.do?subject=%EA%B0%80%EC%83%81+%EC%84%B8%EA%B3%84 정보통신용어사전 가상세계] |
−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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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77220 한자의 가상세계성과 한자 교육 패러다임 시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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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만해 한용운을 통한 근현대문화지형 해석데이터 구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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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다면 중국은 우리 부모의 나라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모두 하늘이 하는 일이며, 순풍이 불고 역풍이 부는 것도 하늘이 실제로 주재하고 있다. 지금 동풍이 변치 않은 채 이미 여러 날이 지나고 있으니, 아마 하늘이 우리를 꼭 살리실 마음이 있는 듯하다. 너희는 각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힘쓴 다음에 하늘의 명을 기다려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 + | 2학기 |
− | 해가 저무니 바람은 또 동풍이 변하여 북풍이 부는데, 권산은 그래도 키를 서쪽을 가리켜 향하였습니다. 아직 한밤중이 되지 않았을 때 사나운 물결이 부딪쳐 솟구치고 또 봉옥(蓬屋)으로 밀려들어 사람의 얼굴을 덮쳐버리니 모두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영선(領船)과 사공이 모두 통곡하면서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고 홑이불을 찢어서 몸에 여러 겹을 감아 배 가운데의 빗장나무에 묶어 매니, 이는 죽은 후 시신과 배가 오래도록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함이었습니다. 막금과 거이산도 모두 큰 소리를 내어 울면서 신의 몸을 나란히 감싸고 말하기를, “죽더라도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하고, 안의는 큰 소리로 울면서, “나는 짠 바닷물을 마시고 죽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하며, 활시위로 자기 의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김속이 구해주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은 영선과 사공 등을 큰 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배가 부서졌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키를 잃었는가?” “아닙니다.” 곧 거이산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비록 파도가 험악하고 사세가 급박하지만, 배는 실로 튼튼하여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겠다. 만약 물을 퍼내어 버릴 수만 있다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실로 몸이 건장하니 네가 다시 가서 물을 퍼내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거이산은 곧 명령에 따라 물을 퍼내려고 하였으나, 물푸는 그릇이 이미 모두 부서졌으므로 큰 소리로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안의가 즉시 칼로 작은북의 한 면을 찢어 버리고는 이를 그릇으로 삼아 거이산에게 주었습니다. 거이산은 이효지 · 권송·도종·현산 등과 함께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었지만 그래도 무릎 깊이의 물이 남았습니다. 효자 · 정보 · 이정 · 김중 등이 몸소 물을 퍼내기도 하고, 군인 구질회 등 7-8명을 서서 독려하며 서로 잇달아 물을 다 퍼내어 내니 겨우 침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 | ===[[빅데이터와 학습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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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일=== | + | ===[[테크놀로지기반학습]]=== |
−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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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정오를 지나자 서북풍이 또 불었습니다. 배는 다시 뒤로 물러나 동남쪽을 향하여 밤새도록 갔습니다. 신은 권산·고면 · 이복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키를 잡아 배를 바로잡고 있으니 방향을 몰라서는 안 된다. 내가 일찍이 지도를 훑어보니 우리나라 흑산도에서 동북쪽으로 향해 가면 곧 우리 충청도와 황해도의 경계이며, 정북방은 곧 평안도와 중국의 요동(遼東) 등지요, 서북방은 곧 〈우공(禹貢))'에 나오는 청주(靑州)와 연주(州) 지역이며, 정서방은 서주(徐州)와 양주(揚州) 지역이다. 송(宋)나라 때 고려와 교통할 적에 명주(明州)에서 바다를 건너왔으니, 명주는 곧 대강(大江) 이남의 땅이며, 그 서남방은 곧 옛날의 민(聞)지방으로서 지금의 복건로(福建路)요, 서남방을 향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면 곧 섬라(羅)4 점성(占城)5. 만랄가(滿刺加) 등의 나라요, 정남방은 곧 대유구국(大琉球國), 소유구국(小琉球國)이요, 정남방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곧 여인국(女人國)과 일기도(一岐島)요, 정동방은 곧 일본국과 대마주(對馬州)이다. 지금 배가 풍랑에 표류된 지 닷새 동안 밤낮으로 서쪽을 향하여 갔는데, 거의 중국의 땅에 닿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행하게도 또 이 서북풍을 만나서 동남방으로 거슬러 가게 되니, 만약 유구국과 여인국에 이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해(天海) 밖으로 흘러 나가서, 위로 은하수에 닿게 되어 가이없는 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니, 어찌 할 것인가? 너희들은 내 말을 기억하고서 키를 바로잡고 가야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권산 등은 “날이 개어 해와 달 그리고 별자리로 헤아린다. 해도 해상에서는 사방을 가리기 힘든데, 지금은 구름과 안개가 짙게 드리운 것이 여러 날 계속되어 새벽인지 저녁인지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바람의 변화만으로 사방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오니, 어찌 바른 방향을 가려내어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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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일=== | + | ===[[역사학과인접학문의융합교육]]=== |
−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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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하늘에 조각구름이 떠 있고 바다 빛깔이 더욱 희어졌습니다. 이제 배는 오랫동안 파도에 부딪혀 양두(梁頭)2 · 풍초(風)3. 비우(鼻偶)4의 세 판자가 모두 흔들거리며 부러지려고 하였고, 물이 또 새어 들면서 저절로 파선이 되려는 조짐이 있었습니다. 근보, 고면, 상리 등이 닻줄을 끊어 뱃머리와 선미를 얽어매고 나무를 깎아 이를 보수하였습니다. 마침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와 같이 배를 수리하면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지만, 굶주림과 목마름이 열흘에 가까우니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손발은 마비되어 몸을 가누지 못해 힘을 다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배를 수리하여도 또한 튼튼하게 할 수 없으니 장차 어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다 갈매기가 떼를 지어 날아갔습니다. 뱃사람들이 이를 바라보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물새는 낮에 바다 위에서 놀다가 밤에 섬 모래톱에서 잔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푸른 바다 만리 밖에서 표류해 와 다행히 이 새를 보게 되었으니 모래톱이 반드시 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갈매기는 한 종류뿐이 아니므로 강가 호수의 모래톱에서 사는 것도 있지만, 바다갈매기는 바다 가운데 떼 지어 있다가 조수를 따라 날고 항상 3월에 바람이 불어야 모래톱과 섬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정월이므로 갈매기가 떼 지어 나는 것이 바로 큰 바다 가운데 있을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바다가마우지 몇 쌍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으므로 신 또한 어쩌면 섬이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오에 남쪽을 바라보니, 구름이 진(陣)을 치듯 퍼져 있고 어렴풋이 산 모양 같은 것이 보였으며 또 인가에서 불 때는 연기 같은 것이 있었으므로, 유구국의 땅이라 여겨 가서 정박하려고 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동풍이 또 일어나서 배는 다시 서쪽으로 향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바람이 더욱 거세어져 배는 나는 듯 빠르게 내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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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일=== | + | ===[[역사학과 빅데이터 2]]=== |
−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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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내리고 동풍이 어제처럼 불었습니다. 오후에는 바다 빛깔이 도로 푸르러졌습니다. 이에 앞서 제주도를 떠날 때 뱃사람이 무지한 탓으로 식수를 거룻배85에 신고 따르게 하였는데, 풍랑에 표류된 뒤로는 서로 어긋나서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타고 있는 배에는 물 한 그릇이 없어 밥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권송이 신에게 말하기를, “보아 하니 배 안의 사람들 가운데는 황감(黃柑) 6과 청주(淸酒)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마구 먹어서 남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청컨대 이를 한 데 모아 배 위의 창고에 운반하여 저장했다가 목마름을 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거이산에게 명하여, 배 안의 행장을 모두 뒤지게 하여 황감 50여 개와 술 두 동이를 얻었습니다. 손효자에게 말하기를, “배를 함께 탔으면 호인(胡人)과 월인(越人)도 한 마음일 터인데, 하물며 우리들은 모두가 한 나라 사람으로서 정은 골육지친(骨肉之親)과 같으니,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이 감과 술은 한 방울이 천금과 같다. 네가 이를 맡아서 함부로 쓰지 말고, 배에 탄 사람의 절박한 목마름을 풀어 주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효자가 사람들 가운데 입술이 타고 입이 마른 사람을 보아서 고루 나누어 마시게 하여 겨우 혓바닥만 적시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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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칠이 지나자 황감과 술이 모두 없어지니 어떤 사람은 마른 쌀을 잘게 씹고 제 오줌을 받아 마셨지만, 얼마 안 가 오줌마저 없어지고 가슴속이 건조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마침 비가 내리니 배 안 사람들이 손으로 봉옥의 처마를 들고 거기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기도 하고, 모자를 그릇삼아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을 모으기도 하고, 돗자리를 구부려 뿌려지는 빗물을 받기도 하고, 돛대와 노를 세워 중간에 종이끈을 묶어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기도 하면서 한 잔 물이라도 기어코 얻어서 혀로 핥았습니다. 안의가 말하기를, “옷에 비를 적셔 이를 짜서 마신다면 얻는 바가 실로 많을 터이지만, 뱃사람의 옷은 모두 바닷물에 젖어 비록 비에 적셔 짜내더라도 마실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간수해 둔 옷 몇 벌을 찾아내어 최거이산에게 비에 적신 뒤 이를 짜게 하니 거의 몇 병이 되었습니다. 김중으로 하여금 숟가락으로 이를 나누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김중이 숟가락을 집어 들면 배 안 사람들이 입을 벌리기를 마치 제비 새끼가 먹이를 먹여주기를 바라는 듯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혀를 움직이고 숨을 쉴 수가 있어 조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 + | ===[[역사학과 빅데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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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일=== | + | ===[[디지털 큐레이션]]=== |
−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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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한 섬에 도착하니 석벽이 우뚝 솟아 매우 험준하였습니다. 바다 물결이 넘실대다 석벽에 부딪치면 거의 1-2장(丈)을 솟구쳤습니다. 배가 물결을 따라 곧장 들어가 부딪쳐 부서질 지경이 되니, 권산은 크게 울부짖다가 마침내 있는 힘을 다하여 배를 몰았습니다. 효자와 정보 등도 또한 돛대 가의 밧줄을 직접 잡고 풍랑을 보아가며 놓아주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물이 바다로부터 섬 쪽으로 들어가고 바람은 섬으로부터 바다 쪽으로 나오니, 배가 바람을 따라 휘돌아 나와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어떤 큰 섬에 도착하였는데 섬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하였으므로, 배를 대려고 해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이복이 옷을 벗고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배를 끌고 헤엄을 쳐서 섬 기슭에 붙들어 매었습니다. 배 안 사람들은 기뻐하며 구르듯이 마구 뛰어 내려가 시냇물을 찾아 손으로 움켜 달콤한 물을 떠 마시고는, 물을 지고 와서 밥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굶주림이 극도에 달하면 오장이 말라붙게 되는데 만약 갑자기 밥을 배부르게 먹는다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먼저 미음을 마신 뒤 죽을 먹되 적당히 먹고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배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끓여서 먹었습니다. 섬에는 바람을 피할 곳이 없었으므로 밤에 또 배를 풀어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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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 | + | ===[[디지털역사문화콘텐츠]]=== |
− | 영파부(寧波府)에서 해적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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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다가 비가 오기도 하더니, 바다 빛깔이 도로 희게 되었습니다. 해질 무렵에 큰 섬에 이르렀는데, 섬이 병풍처럼 잇닿아 있었습니다. 바라보니 중선(中船) 두 척이 모두 거룻배를 매달고서 신의 배를 향하여 똑바로 왔습니다. 정보 등이 신의 앞에 빙 둘러 꿇어앉아 말하기를, “무릇 일에는 경상(經常)도 있고 권변(權變)도 있는 것이니, 청컨대 상복을 벗고 임시로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착용하여 관인(官人)의 위의(威儀)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도적이라고 떠들어 대며 욕을 보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해상에서 표류하게 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여러 번 사지(死地)를 거쳤지만 다시 살아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이 섬에 도착하여 이 배를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다. 천리(天理)는 본래 곧은 법인데, 어찌 천리를 어기면서 거짓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두 배가 점차 가까워져서 서로 만났습니다. 한 배에 약 10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모두 검은 솜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그중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 맨 사람도 있었고, 대나무 잎으로 만든 삿갓과 종려(綜) 껍질로 만든 도롱이를 입은 사람도 있었는데, 요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모조리 중국말이었습니다. 신은 그들이 중국 사람인 줄 짐작하고 정보를 시켜서 종이에 글을 써서 건네기를, 조선국(朝鮮國)의 신(臣) 최부는 왕명을 받들고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바다를 건너가던 도중,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어느 나라 고을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회답하기를, “이곳은 곧 대당국(大唐國)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 지방이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대당(大唐)으로 가는 것이 좋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의 입을 가리켜 보이니, 그 사람들은 먹을 물 두 통을 가지고 와서 주고는 노를 저어 동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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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배 안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노를 저어 한 섬에 들어가서 대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배 한 척도 거룻배를 달고 있고 군인 7-8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앞에 보았던 자들과 같았습니다. 신의 배에 다가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또 정보에게 전과 같이 대답하게 하고는 이어서 물어보기를, “이곳은 어느 나라 땅이오?”라고 하니, 그 사람은 그 섬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곧 대당(大唐) 영파부의 하산(下山)이오. 바람과 물길이 좋으면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타국 사람이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다행스럽게 대국(大國)의 땅에 이르러 다시 살아날 길을 얻게 되어 기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의 성명이 누군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대당의 임대(林大)요. 당신이 만약 대당으로 간다면 데리고 갈 터이니 보화(寶貨)가 있으면 내게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봉명사신(奉命使臣)5이지 장사하는 무리가 아니며 또 바다에 표류하여 물에 떴다 가라앉았다 한 뒤인데 어떻게 보화가 있겠소?”라고 하고, 쌀을 덜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받고 나서 다시 말하기를, “이 산은 배를 매기에 서북풍은 걱정되지 않지만, 다만 남풍이 좋지 않으니 나를 따라와 배를 매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배를 인도하더니 배 댈 만한 섬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댈 만하오, 댈 만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말대로 곧 가서 배를 대었는데 과연 바람이 없었으며, 온 섬 안을 둘러보아 배를 매어 둘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 서쪽의 물가에는 초가집 두 채가 있었는데 보자기의 집 같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초가집 아래에 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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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과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은 오랫동안 굶주리고 목말랐으며 지치고 잠자 지 못한 끝에 먹을 것을 먹게 되고 바람 잔 곳에 배를 대자 피로가 몰려들어 사지가 풀려서 배 안에서 서로를 베개 삼아 이내 곯아 떨어졌습니다. 밤 2경에 자칭 임대(林大)란 자가 그 무리 20여 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창을 쥔 자도 있고 칼을 찬 자도 있었지만 활과 화살은 없이 횃불을 잡고 들이닥쳐 신의 배 안으로 마구 들이닥쳤습니다. 해적의 괴수가 글로 써 보이기를, "나는 관음불(觀音佛)이라 네 마음을 뚫어본다. 네가 금은을 가지고 있으니 찾아보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금은은 본국에서 생산되지 않아서 처음부터 가져온 것이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벼슬아치라면 어찌 금은을 가지고 오지 않았겠는가? 내가 찾아보아야겠다.” 당초 신 및 정보 · 이정 · 김중·손효자 등은, 제주도는 바다 밖의 땅이라 갔다 오는데 기약할 수 없다고 해서 사철 의복 몇 벌을 갖추어 갔습니다. 이 때 와서 해적의 괴수는 곧 그 무리들을 큰 소리로 불러서 신 및 배리(陪吏)들의 보자기 속에 있는 의류와 뱃사람의 양식 등을 샅샅이 뒤져 가지고 가 그들의 배에 실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것은 바닷물에 흠뻑 젖은 옷과 여러 종류의 서책(書冊)뿐이었습니다. 해적 가운데 애꾸눈인 자가 특히 악독하였습니다. 정보가 신에게 말하기를, “해적이 처음 이르렀을 적에는 얌전하였는데, 우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더니 차츰 날강도로 변하였습니다. 청컨대 한 번 온 힘을 다하여 공격하여 사생결단을 내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리 일행은 모두 굶주리고 목말라 거의 죽게 된 뒤이라 해적에게 기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한 형세를 이용하여 포악한 짓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우리들은 모두 해적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행장을 모조리 주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비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의 괴수가 또 신이 가졌던 인신(印信)과 마패를 빼앗아 그의 소매 속에 넣었습니다. 정보가 그 뒤를 따라가서 돌려주기를 청했으나 받지 못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물건은 죄다 가져 가도 되지만, 인신과 마패는 나라의 신표(信標)라 사사로이 쓸 곳이 없으니 나에게 돌려주면 좋겠소”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의 괴수는 인신과 마패를 돌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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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창(蓬窓)을 나서더니, 그 무리들과 뱃전에 죽 늘어서서 한참 동안 떠들다가 배 안으로 도로 들어왔습니다. 먼저 정보의 웃옷과 바지를 벗기고 묶어놓고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 칼로 신의 옷고름을 끊고 옷을 벗겨서 알몸을 만든 뒤, 손을 뒤로 젖히고 무릎을 굽혀 결박하더니, 몽둥이를 가지고 신의 왼팔을 일곱 여덟 차례 때리고 난 뒤에 말하기를, “네가 만약 목숨이 아깝다면 얼른 금은을 내 놓아라”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몸뚱이가 문드러지고 뼈가 가루가 될지라도 어디에서 금은을 가져온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은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므로, 신의 결박을 풀어주고는 그 의미를 글로 쓰게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썼더니 해적의 괴수는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정보를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신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나서 곧 신의 머리채를 끌어당겨 도로 묶어 거꾸로 매달고는 칼을 메고 신의 목을 베려고 하였지만, 칼을 마침 오른쪽 어깨로 잘못 내렸고 칼날이 뒤집혀져 있었습니다. 다시 칼을 메고 신의 목을 베려고 할 때 한 해적이 와서 칼을 멘 자의 팔을 잡아 이를 저지시켰습니다. 해적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 크게 떠들어 댔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뱃사람들은 두려워 제정신을 잃고 쥐새끼처럼 구석구석 숨어버렸습니다. 김중과 최거이산 등만은 손을 모아 절하고 꿇어앉아서 신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해적의 괴수가 신의 몸뚱이를 짓밟고, 뱃사람들을 공갈 협박하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신의 배의 닻, 노 등 여러 가지 기구를 끊어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배로 신의 배를 끌어 큰 바다 가운데 놓은 다음 배를 타고 도망가 버렸는데 밤은 이미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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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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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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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리고 서북풍이 크게 일어서 배는 끝이 없는 바다 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신 및 배에 탄 사람들이 간직했던 솜옷은 모두 해적에게 빼앗겼고, 입은 옷은 바닷물에 절었는데 날씨 또한 계속 흐려서 햇볕에 말리지 못하였으므로 얼어죽을 날이 가까이 왔고, 배에 실은 양식을 해적에게 모두 빼앗겼으니 굶어죽을 날이 닥쳐왔으며, 배는 닻과 노를 도적이 던져버렸고 임시로 만든 돛은 바람에 부서졌으므로, 다만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기도 하고 조수를 따라 나왔다가 들어가기도 하여 사공이 힘을 쓸 수가 없었으니, 침몰될 날 또한 가까이 닥쳐왔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목이 막혀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효지가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의 죽음은 분에 맞는 일이지만 경차관의 죽음만은 매우 애석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죽는 것을 분에 맞는 일이라 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효지가 말하기를 “우리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 수로가 900여 리나 되고 파도는 다른 바다에 비하여 특히 사납습니다. 공선(貢船)99과 상선(商船)의 왕래가 잇달아 끊이지 않는데, 표류되고 침몰되는 것이 10에 5-6척은 되어 제주사람은 일찍 빠져죽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빠져죽곤 합니다. 그런 까닭에 경내에는 남자의 무덤이 매우 적고, 마을에는 여자가 많아서 남자보다 3배나 됩니다. 부모가 된 사람이 딸을 낳으면 반드시 이 애는 나에게 효도할 아이이다'라 하고, 아들을 낳으면 모두 '이 물건은 내 자식이 아니고 곧 고래와 거북의 밥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죽음은 하루살이와 같아서 평소에도 어찌 자기 집에서 죽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조신(朝臣)들이 왕래할 때면 조용히 순풍을 기다리고 선박도 빠르고 견고한 까닭에 풍랑으로 죽은 사람은 예전부터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차관만 을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통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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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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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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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해질 무렵에 배가 표류하여 한 섬에 이르니 동, 서, 남 3면이 탁 터져 있고, 북풍은 피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살펴보니 닻이 없는 것이 근심거리였습니다. 처음에 제주도를 출발할 때는 배가 매우 큰데도 실을 물건이 없었으므로 몇 개의 돌덩이를 배 안에 실어서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 상리 등이 새끼줄로 그 돌 네 개를 얽어매어 합쳐서 임시 닻을 만들어 배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안의는 신(臣)이 들을 수 있도 록 군인 등에게 말하기를, “이번 행차에서 표류하여 죽게 된 까닭을 나는 안다. 옛날부터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신사(神祠)'와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신사이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광양(廣壤)·차귀(遮歸)·천외(川外)·초춘(楚春) 등의 신사2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 떠났던 까닭에 신령님의 도움을 받아 큰 바다를 순조롭게 건너갈 수가 있었다. 지금 이 경차관은 특별히 이를 잘못이라고 큰소리치며 비난하며, 올 때도 무등산과 금성산의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갈 때도 광양 등 여러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신령님을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았으므로, 신령님 또한 돌보지 아니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또한 누구의 잘못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동조하며 모두 신을 탓하였습니다. 권송만은 홀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에 앞서 정의현감 이섬은 3일 동안 재계(齋戒)한 뒤 광양 등의 신령님께 정성껏 제사를 지냈는데도, 표류되어 거의 죽을 뻔하다 다시 살아났다. 경차관 권경우(權景祐)는 아무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왕래가 아주 순조로웠고 아무 탈도 없었다. 결국 바다를 건너는 데 그 안전한가 아니한가는 순풍을 기다리는 여부에 달려 있지, 어찌 신령님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말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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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 또한 일러 말하기를, “천지는 사심이 없고, 귀신은 말없이 운행(運行) 하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니 공평할 따름이다. 악한 사람이 귀신을 아첨해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그에게 복을 내리겠는가? 착한 사람이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않아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그에게 재앙을 내리겠는가? 천지와 귀신이 아첨하는 음식을 올렸다 하여 그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이 일찍이 있었던가? 절대로 그런 이치는 없다. 하물며 제사도 일정한 등급이 있으니, 사대부와 서인(庶人)이 산천에 제사지내는 것은 예에 어긋난 일이다. 예에 어긋난 제사가 바로 음사(淫祀)'인데, 음사로써 복을 얻은 일은 나는 본 적이 없다. 너희들 제주도 사람들은 귀신을 몹시 좋아하여 산택(山澤)과 천수(川數)에 모두 신사를 세워, 광양 등의 신당(神堂) 같은 데는 조석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기를 지극하게 하거늘, 바다를 건너는 데 표류거나 침몰하는 재앙이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은 어느 배가 표류하고 내일은 또 다른 배가 침몰하여,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배가 앞뒤로 서로 잇닿으니, 이것이 과연 신령님의 영험이 있는 셈인가? 제사를 지낸다고 복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지금 함께 배를 탄 우리들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고, 너희 군인들은 모두 정성스런 마음으로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내고 왔는데, 신이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나 한 사람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들 40여명이 재계하고 제사 지낸 정성을 저버릴 수가 있는가? 나의 배가 표류한 것은 오로지 일정을 서두르다, 순풍 기다리기를 잘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도리어 제사 지내지 않은 일로 나를 탓하니, 또한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의 등은 여전히 신의 말을 물정에 어두운 탓이라 하며 옳다고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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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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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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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붉으면서 탁하였습니다. 동풍이 다시 일었으므로 또 바람 부는 대로 키를 서쪽으로 맞추어 갔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박종회, 만산, 이산 등은 병이 나서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보종, 양달해, 고회, 김조회, 임산해 등은 바다에서 표류가 시작된 뒤로 여태까지 드러누워 움직이려 하지 않고, 비록 취로(取露) 등의 일로 이들을 독려하여도 귀담아 듣지도 않았습니다. 정실, 부명동, 김득시, 강유, 송진, 김속, 강내, 오산, 고내을동 등은 열 번 부르면 한 번 대답하였으며, 마지못해 일을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소근보, 김괴산, 고복, 김송, 김석귀, 이효태, 김진산(金眞山)05 등은 낮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밤에는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처음에 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나태하기도 하였습니다. 허상리, 권산, 김고면, 김구질회, 최거이산, 김도종, 고이복, 문회, 현산, 한매산, 권송, 막금 등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배를 운행하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며,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 이효지, 안의 등은 몸소 일하기도 하고, 배를 수리하는 일을 점검하고 독려하기도 하며, 일을 끝내기를 기하였습니다. 해적을 만나 바다에 다시 표류한 이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어 하는 일이 점차 전만 같지 못하여졌습니다. 배가 사나운 파도에 부딪친 지 오래 되자 수많은 구멍과 틈이 생겼고, 막는 즉시 곧 터져 새어 들어오는 물을 이루 다 퍼낼 수 없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물새는 것이 이러하고, 뱃사람들 마음이 흩어진 것이 또 이러하니, 무턱대고 높은 사람이라고 점잔만 빼다가 앉아서 익사 당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정보 등 6명과 함께 몸소 물을 거의 다 퍼내었습니다. 상리 이하 10여명 또한 조금씩 힘을 내어 일어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밤에는 바람은 없었지만 비가 내렸습니다. 어느 큰 섬에 이르렀지만 썰물의 힘에 밀려 정박할 수 없었고 배는 바다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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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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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두(牛頭) 앞 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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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잇닿아 겹친 산봉우리가 하늘을 버티고 바다를 둘러쌌는데 인가(人家)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동풍을 타고 이르러, 산 위에 봉수대(峰燈臺)가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니 기쁘게도 다시 중국 땅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오후에는 풍랑이 더 세고 보슬비가 자욱하게 내리는데, 배는 바람이 모는 방향대로 나아갔습니다. 잠깐 동안에 갑자기 표류하여 두 섬 사이에 이르러 기슭을 옆으로 지나가니, 중선(中船) 6척이 죽 늘어서 정박하고 있는 것이 멀리 보였습니다. 정보 등이 신에게 청하기를, “전일 하산(下山)에 이르렀을 때엔 벼슬아치의 위의(威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해적을 불러들여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권도(權道)'를 따라 관대(冠帶)를 갖춰서 저들의 배에 보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죽음이 임박했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리겠습니까? 일단 권도를 행하여 살길을 찾은 뒤에 예로써 상사(喪事)를 치르더라도 의리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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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효(孝)가 아니고,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孝)와 신(信)이 아닌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나는 마땅히 정당한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와서 청하기를, “제가 일단 이 관대를 착용하여 관인(官人)처럼 보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 된다. 저 배가 혹시 전에 만났던 해적과 같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만약 좋은 사람의 배라면 반드시 우리들을 관부(官府)로 데려가 공술서를 받을 것인데, 너는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저들은 반드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조금 후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와서 신의 배를 둘러쌌는데 한 배에 8-9인이 있었고, 그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하산에서 만났던 해적과 같았습니다. 글을 써서 신 등에게 보이기를, “보아하니 그대들은 다른 나라 사람 같은데 어디에서 왔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또한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 조신(朝臣)으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면서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이곳에 왔소. 이 바다가 어느 나라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 바다가 바로 우두 앞바다로서, 지금의 대당국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속해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켰습니다. 그 사람이 물통을 가져와서 주고, 또 북쪽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산에 샘물이 있으니 당신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먹을 수 있소. 당신들에게 후추가 있으면 우리에게 두세 냥 정도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후추가 산출되지 않아 애초부터 가지고 오지 않았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조금 물러나 신의 배를 포위하여 죽 늘어서 닻을 내리므로, 신의 배도 또한 언덕을 의지하여 정박하였습니다. 안의, 거이산, 상리 등으로 하여금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 인가를 둘러보게 했더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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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 이번에 지나온 바닷물은 비록 동일한 바다지만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신의 배는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면서, 동, 서, 남, 북으로 부평초처럼 표류하여 정처가 없었으니, 그동안에 본 바다 빛깔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빛깔이 흰 데서부터 푸른 데로 되돌아온 이후 바람의 힘은 비록 세지만, 물결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빛깔이 푸른 데서 흰 데로 다시 되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섬이 나타났는데, 섬은 모두 층암절벽에 우뚝 솟은 바위더미로 위에는 흙을 이고 있어 잡초와 향초가 무성하게 푸르렀습니다. 물살은 느리고 약하므로 만약 큰바람만 만나지 않는다면 거센 물결로 인한 재난은 드뭅니다. 신이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바다가 또한 제주 바다처럼 험했다면 어찌 다시 섬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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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릇 매년 정월은 바로 한창 추울 때로서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큰 물결이 진동하여 부딪치게 되니, 배를 타는 사람들이 꺼리는 때입니다. 2월에 가서야 점차로 바람이 잦아들지만, 제주 풍속은 오히려 연등절(燃燈)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강남의 조주(潮州)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4월에 이르러 매우(梅雨)'09가 지나가고 난 뒤 시원한 청풍(淸風)이 불면 바다를 다니는 큰 배들이 돌아오니, 이를 '박초풍(舶連風)'이라 부릅니다. 신이 표류할 적은 마침 풍랑이 사나울 때로서 바다날씨는 나날이 흐려졌고, 돛과 밧줄과 노가 부러지거나 잃어버렸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받은 것이 열흘이었으며, 하루에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해안에 배를 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빗물에 옷을 적셔 물을 짜내 타는 창자를 적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가 견고하고 빨라 능히 풍랑을 이겨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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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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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를 버려두고 상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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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날이 샐 녘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빙 둘러싸고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당신들은 좋은 사람들 같소. 우리를 따라 오시오. 당신들에게 진기(珍奇)한 물건이 있으면 조금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바다에 표류한 지 이미 오래라, 가졌던 물건은 모두 바다에 버렸소. 만약 우리의 살길을 가르쳐 준다면 타고 온 배와 노는 모두 당신들에게 주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마을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관부(官府)에 가까우니 당신들이 갈 수도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으로 1리만 가면 곧 인가가 있소”라 하고, 한 사람은 “여기는 인가와 먼 곳이니,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오”라 하였습니다. 신이 또 관청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은 "태주부(台州府)는 이곳에서 180리나 떨어졌소”라 하고, 한 사람은 150리오.”라 하고, 한 사람은 “240리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서로 어긋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신의 배에 다투어 들어와, 눈에 보이는 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물건일지라도 모두 빼앗았습니다. 신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를 내고 말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배를 버려두고 그들의 배에 타고 따라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정은 그중 한 사람을 쳐 죽여서 그들을 물리치자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옳지 않다. 살펴보건대 저들은 그 말이 성실하지 못하고 물건을 겁탈하는 것 또한 심하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이 전일의 하산의 해적과 같은 부류라면, 안의의 계책대로 저들을 따라 가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노를 저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이르러 우리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는 흔적을 없애버릴 것이다. 저들이 어선(漁船)이나 방어선(防禦船)이라면, 이정의 계책에 따라 쳐 죽이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한 짓은 숨기고 도리어 우리 이국인(異國人)이 와서 약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할 것이니, 그렇다면 대국(大國)의 변경이 시끄러워지는 결과가 된다. 우리를 도적으로 무고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아 해명하기가 어렵게 되면 반드시 모두가 변장(邊將)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스스로 죽을 길을 취하는 것이니, 임시변통의 말을 하여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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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바다에 떠다닌 지 오래고, 굶주리고 목말라 피곤함이 극도에 이르러, 위태한 목숨은 겨우 한 오라기 실과 같소. 청컨대 밥을 지어먹어 시장기를 면하고 난 후에 같이 가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를, “당신들은 조금 머물렀다가 천천히 가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노를 저어 2-3리가량 조금 물러가더니 다시 신의 배를 둘러싸고 정박하였습니다. 비 때문에 모두 선창(船__)속에 들어갔으므로 망을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은 같이 배를 탄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저 사람들의 말과 거동이 매우 황당하다. 이 산을 살펴보면 육로에 잇닿아 있으니 반드시 인가에 통할 것이므로, 이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목숨은 저들의 손에 달려 있어, 끝내는 반드시 바다 한 모퉁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배리(陪吏) 등을 거느리고 먼저 배에서 내리고, 여러 군인들도 잇달아 내려 비를 무릅쓰고 숲 사이를 뚫고 도망해 숨어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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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는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길 양쪽으로 돌담 을 쌓아 놓았습니다. 6-7리를 가니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신은 배리와 군인들에게 말하기를, “이처럼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재난을 당한다면 함께 구조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돌보아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이니 비록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한 가운데 놓이더라도, 또한 마땅히 위의(威儀)를 보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 같은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배리들은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고, 군인들은 배리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틀림이 없도록 하라. 또 마을 앞에서나 성(城) 안에서나 떼 지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읍()하는 예의를 차리고 감히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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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마을에 이르니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신은 종자(從者)와 함께 앞으로 나아기 음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조선에서 온 연유를 알렸습니다. 용모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두 사람이 신 등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이 조선국 사람이라면 어떤 사연으로 우리나라 국경을 님이 들어오게 되었소? 당신들이 해적인지 진공(進貢)하는 사람인지, 혹은 바람을 만나 정처 없이 표류해 온 사람인지, 낱낱이 써 내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본디 조선국 신하로 왕명을 받들어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던 중, 바다를 건너다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해안에 도착하여 배를 버려두고 육지를 따라 인가를 바라보고 찾아 왔으니, 원컨대 대인(大人)들께서는 관부(官府)에 알려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곧 가지고 온 인신(印信)·관대(冠帶)· 문서(文書)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다 보고 나서, 신의 앞에 진무(鎭撫), 배리 등이 차례로 늘어 꿇어앉고, 말단 군인들도 차례로 부복한 것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라고 하였습니다. 곧 가동(家童)을 불러 미음과 다주(茶酒)를 가져다 접대케 하는데, 군인들에게까지도 두루 마시게 하였습니다. 마을 앞의 불당(佛堂)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들은 이 불당에 머물러 편히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불당에 이르러 젖은 옷을 벗어서 바람을 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은 또 밥을 지어 와 접대했는데 과연 모두 충후(忠厚)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관직과 성명은 잊어버렸습니다. 조금 후에 그 두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떠나야만 하겠습니다. 당신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리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곳이 몇 리나 됩니까?” 그 두 사람은 속여서 말하기를, “2리쯤 더 가면 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지명은 무엇입니까?” “서리당(西里堂)'입니다.” “비가 많이 오고 길이 진흙길인 데다 해가 또 저물어 가는데 어찌하겠습니까?” “가는 곳이 멀지 않으니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신은 그 말에 따라 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니,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와 칼을 집어 들고 징과 북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앞길에서 그 징과 북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소란스럽게 큰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에서 밀려들어 차례로 교대하며 호송하였습니다. 앞마을에서도 뒷마을에서도 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50여 리를 지나니 밤이 벌써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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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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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호(千戶)'14 허청(許淸)을 노상에서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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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한밤중에 신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서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은사(隱土)를 자칭하는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신이 밤에 비를 맞으며 고생스럽게 마을 사람에게 내몰려 온 것을 불쌍히 여겨, 마을 사람을 제지시켜 조금 멈추게 하고는 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신은 풍랑에 표류된 사연을 고하였습니다. 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을원은 마침내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이어서 묻기를, "당신 나라에도 불법(佛法)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을원은 신의 손을 잡고 뒤돌아보면서 작별하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신 등을 몰아 큰 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그 마을에는 큰 다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신 등을 마구 치면서 함부로 겁탈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오산이란 자는 신의 말안장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오산을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신 등은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체송(遞送)되니,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큰 다리가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물었더니, “선암리(仙岩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육지에 오른 이후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을 지어 보였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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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다가 포봉리(蒲峯里)에 이르니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관인(官人)이 군리(軍史)를 거느리고 와서 신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이곳에 도착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곧 조선국 사람으로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18 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친상을 당하여 육지로 나오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서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기갈로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잔명(殘命)을 겨우 이어오다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천신만고 끝에 관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살길을 찾은 듯합니다.” 그 관인은 곧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이어 밥 지을 그릇을 주어 신의 종자들에게도 밥을 지어서 먹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관인의 성명과 직업을 물으니 왕괄(王适)이란 자가 말하기를, “이 분은 곧 해문위'9천호(海門衛千戶) 허청(許淸)인데, 당두채(塘頭寨)를 지키다가 왜적(倭賊)이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잡기 위해 왔으니 당신들은 조심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피곤하여 길가에 드러누워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대당(大唐)의 법도는 엄격하니, 당신들 딴 지방 사람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양민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군리(軍吏) 등에게 신 등을 빨리 내몰게 하였습니다. 5리가량을 가니 관해(官廊)'20가 있었는데 바로 당두채였습니다.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신은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전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중도에서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나의 근력이 다하였으니 곧 죽겠구나. 이럴 줄 일찍 알았더라면 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이하가 신을 마주하고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리들이 심히 독촉하므로 조금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현산 등 몸이 튼튼한 자들이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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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인가가 매우 많고 그 앞에는 불사(佛寺)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허청은 신 등을 불사에 머물러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당신이 비록 걷기가 힘들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밤 2경에 어느 한 냇가에 이르자 이정 등도 또한 힘이 다하여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였으니 신을 업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자들 또한 모두 피곤하여 걷지 못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신의 두 다리가 절룩거려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습니다. 고이복이 크게 성을 내며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미쳐버린 것이겠지! 당신이 그렇게 힘들다면 사지를 뻗어버리고 일어서지도 못해야 할 것 아니겠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굴욕을 느끼고, 내가 차라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여기서 죽으리라' 하고 다시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자들도 모두 쓰러져 여기저기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허청이 군리들을 시켜 독려하기도 하고 구타하기도 했지만 몰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또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갑옷, 창검, 방패의 위세와 쇄납(噴炳)22, 발라()'23, 나팔, 징, 북, 총통(銃痛)의 소리와 함께 갑자기 겹겹 둘러싸더니, 칼을 빼고 창을 써서 치고 찌르는 동작을 해 보였습니다. 신 등은 눈과 귀가 몹시 놀라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관인은 허청과 함께 군사의 위용(威容)을 정돈하고 나서 신 등을 몰았습니다. 3-4리쯤 가니, 큰 옥사(屋舍)가 있고, 성곽이 빙 둘러서 관방(關防)' 24과 같기에 물었더니, 곧 두독장(杜瀆場)25으로 현재 도지소(桃知所)26 라고도 하고 비험소(批驗所)'라고도 하였습니다. 성안에 안성사(安性寺)란 절도 있었는데, 신 등을 절에 머물러 유숙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그 관인이 누구인가 물으니, 어떤 중이 말하기를, “이 분은 곧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를 가지고서 여기에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허천호(許千戶)의 보고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들을 몰고 온 것이오. 그러나 아직 당신 마음이 진실된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내일 도저소에 이르면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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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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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저소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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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천호(千戶)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타고 신 등을 몰아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알리기를, “우리들은 바다에 표류하여, 풍랑과 기갈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 겨우 잔명을 보전하여 귀국의 땅에 도착하게 되어 관인을 만나 어제 아침에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맛비와 진흙길에서 구덩이에 엎어지고 골짜기에 넘어지며 돌에 긁히고 진흙에 빠져, 몸은 얼고 발은 이지러졌으며 가슴이 타고 힘은 다 빠졌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밥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지 못했는데, 또 몰아내어 큰비를 무릅쓰고 떠나게 하니 우리는 아마 도중에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당신들이 관사(官司)에 도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을 자초한 것이오. 이제 관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관에서 지급할 것이니 빨리 빨리 갑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길모퉁이에 넘어져서 땅바닥에 사지를 뻗어버렸습니다.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등이 빙 둘러앉아서 통곡하였습니다. 때마침 소를 끌고 지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정보가 천호에게 고하기를, "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당신들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당신들을 감싸줄 수 없을 뿐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한 성(城)에 이르니,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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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에 이르기 7-8리 앞에서부터 갑옷을 입고 창칼과 총통이나 방패를 든 군졸들이 길거리 양 옆을 꽉 메웠습니다. 그 성에 이르니, 성에는 겹 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성 위에는 경수루(警成樓)가 죽 늘어 있고 성안에는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신 등을 이끌어 한 공관(公館)28에 이르러 유숙케 하였습니다. 신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왕벽(王碧)이란 자가 글을 써서 신에게 보이기를, “어제 이미 상사(上司)에게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신은 정말 왜인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인이 아니라 곧 조선국 문사(文士)요.” 또 노부용(虛夫容)이란 자가 자칭 가난한 선비라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文字)가 같은데 29,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천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백리에 습속이 같지 않은 것이오.30 족하(足下)'는 내 말을 괴이하게 듣고, 나 또한 족하의 말을 괴이하게 듣는 것은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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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하늘이 준 성품을 같이 얻었으니 나의 성품 또한 요(堯)'32 · 순(舜)33 · 공자(孔子)'34 · 안회(顔回)'35의 성품인데, 어찌 말소리가 다름을 의심하겠소?” 그 사람은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나도 마땅히 이를 따라야하는데 다만 역풍을 만나 지금까지 널 앞에 울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오.”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나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을 공부하였지 시사를 배우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소. 먼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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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한 사람이 손바닥 위에 글을 썼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불쌍하오.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할 테니 당신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처신을 잘 하고 부디 다른 사람과 경솔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도록 하시오.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번 우리의 변경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38 와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을 두어 왜적을 방비하게 했소.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이번에 당신이 처음 배를 맨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지인데, 수채관(守寨官)40은 당신을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그러므로 먼저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고 보고했던 것이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을 잡아 목 베려는 참에 당신들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갔던 까닭에 그들은 계략을 펴지 못했던 것이오. 내일은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니 당신은 자세히 해명하시오.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으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을 아끼고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이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갔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하여 바로 정보 등에게 얘기했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 “길가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목 베는 시늉을 했던 것은 모두 이 계략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군요”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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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 저녁 천호 등 관원 7-8인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탁자 가에 죽 둘러서 더니, 정보를 앞에 끌어내어 심문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함께 온 배가 14척이라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아닙니다. 한 척뿐입니다”라 대답하자 손을 휘둘러서 정보를 내보내었습니다. 또 신을 끌어내어 심문하기를, "너희들이 타고 온 원래의 선박이 몇 척이나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한 척뿐입니다.” “우리의 변경에서 왜선 14척이 어제 그 곳 바다에 함께 정박한 것을 분명히 보았고, 내가 수채관(守寨官)의 보고에 따라 이미 상급 관청의 영감님께 보고를 올렸다. 너희 배 13척은 어디에 두었는가?” “우리가 해안에 도착할 때 귀국 사람들이 탄 배 6척이 한 바다에 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6척의 배에 탄 사람을 조사한다면 우리 배의 수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왜인으로 이곳에 상륙하여 약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곧 조선 사람으로서 왜인과는 언어도 다르고 의관도 다르니, 이것으로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인으로서 도적질에 교묘한 놈은 혹 변장을 해서 조선 사람처럼 가장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그 왜인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나의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를 조사한다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호 등이 즉시 신에게 인신 등의 물건을 가져오게 하고는 대조한 뒤, 이어서 묻기를, “네가 왜인으로서 조선 사람에게서 이 물건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선 나를 북경(北京)으로 보내서 조선 통사원(通事員)과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면, 실상이 즉시 드러날 것입니다.” “너는 성은 뭐고, 이름은 뭐며, 어느 주현(州縣) 사람이고, 무슨 관직이며, 무슨 일로 인하여 우리 변경에 도착했는가? 그 정상(情狀)을 쓰되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상사(上司)에게 보고하겠다.” “저는 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성내에 거주하였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조정의 반열에 올라 처음으로 벼슬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네 부친의 이름은 뭐고, 관직은 뭐며, 어느 곳에서 죽었는가?” “아버지 이름은 택(澤)인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키 위하여 벼슬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공초(供招)를 마친 뒤 신을 별관(別館)에 숙박하게 하고,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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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공무로든 사무로든 제주도에 왕래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행방불명된 자가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열 명, 백 명 가운데 겨우 1-2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어찌 모두 바다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표류해서 도이(島夷)들이 사는 섬라(羅), 점성(占城)국과 같은 나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었고, 혹시 표류해서 중국 땅에 이르게 된 사람도 국경지대 사람들이 잘못 왜적으로 무고하고 목을 베어 상을 받는다고 해도 누가 그 실정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 등과 같은 사람도 만약 먼저 스스로 육지에 내려오지 않았거나, 인신과 마패와 같은 신표(信標)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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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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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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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다 개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도저소 천호의 성명을 물으니 진화(陳華)라고 하였습니다. 진화는 한 관인과 함께 신을 보러 와서 신의 갓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무슨 모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립(喪笠) 4 입니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모두 3년 동안 여묘(廬墓) 44를사는데, 불행히 나처럼 바다에 표류하거나, 부득이 멀리 여행하게 된 사람은 감히 하늘과 해를 우러러 보면서는 비통한 마음을 견지할 수 없기 때문에 깊은 상립을 쓰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가 되자, 허청(許淸)은 신을 인도하여 식탁을 같이 하였습니다. 좌중의 어떤 사람이 탁자 위에 젓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묻기를, “당신은 돼지고기를 먹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그릇에 채소 반찬을 담아서 신을 접대하였습니다. 허청은 또 신의 의복이 젖어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햇볕이 있으니 옷을 벗어서 햇볕에 쪼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옷이 모두 젖었으니 이 옷을 벗으면 입을 것이 없으므로 햇볕에 쪼일 수 없습니다.” 허청은 신을 이끌어 햇볕이 드는 곳에 앉히고 옷을 말리게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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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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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관인이 와서 묻기를, “당신 나라의 왕도 황제라 일컫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는데,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황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은 성심껏 대국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 나라의 관인들은 모두 서대(犀帶)를 맵니까?” “1품·2품은 금대(金帶), 3품•4품은 은대(銀帶), 5품 · 6품 이하는 모두 오각대(烏角帶)를 띠지만 서대는 없습니다. 145 “당신 나라에는 금은이 있습니까?” “금은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금대, 은대가 았습니까?” “모두 상국(上씨)에 와서 매입하므로 귀한 것입니다.” 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곧 공문(公文)을 내어 보였는데, 바로 파총관이 먼저 이 관인에게 패문(牌文)을 주어 도저소에 빨리 달려가 신 등을 잡아두고 조시하여 압송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한 자이니 성명은 설민(薛旻)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영파부 정해위(定海衛)148의 사람인데, 이곳 도사(都司)149가 파견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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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곧 묻기를, “영파부에 하산(下山)이란 곳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있습니다.” 신은 이어서 전일 하산에 정박했다가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知府)50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왕해(王海)라고 하였습니다. 또 바깥사람들이 떼 지어 와서 앞을 다투어 종이와 붓을 가지고 물으니 일일이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관인이 가만히 써 보이기를, “이곳 사람들은 경박하니,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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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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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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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왕해(王海)가 벽의 한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 그림을 압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은 곧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5'랍니다.” “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또 백발노인이 왔기에 신이 묻기를, “천태산(天台山)과 안탕산(僞蕩山) 등은 이곳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천태산은 천태현(天台縣)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이틀 거리이고, 천태산의 남쪽으로 하루 거리에 안탕산이 있습니다.” “이 성(城)의 주산(主山)은 무슨 산입니까?” “석주산(石柱山)52 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5천8백여 리입니다.” “양자강(揚子江)'은 몇 리쯤에 있습니까?” “북쪽 2천여 리에 있습니다.” 신은 또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를 들어 묻기를, “여기에서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입니다.” “남경과는 몇 리나 됩니까?” “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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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고관이 앞에선 갈도(導)54하고 뒤에선 옹위하며 엄정하게 군대를 정렬시켜 오더니 황화관(皇華館)55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물어보았더니 곧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56 유택(劉澤)이었습니다. 그는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말하기를, “너희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어왔으니,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혹 불쌍히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을까 싶어 아직 죽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사실대로 공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공술하기를, “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 성내에서 살았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국왕의 근신(近臣)이 되었습니다. 지난 정미년 9월 17일에 왕명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경차관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남해 가운데 있으므로 나주와는 거리가 수로로 천여 리입니다. 그 해 11월 12일에 바다를 건너가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일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금년 무신년 정월 30일에 아비의 상을 듣고 윤정월 3일에 순풍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났습니다. 노도와 격랑 속에 배는 잠겼다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달 12일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섬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어선이 와서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하고 묻기에, 조선국 사람으로서 표류해 온 까닭을 들어 답변하고 이어서 '이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오?'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이곳은 대당국 영파부의 하산이오'라는 등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해적선의 20여 인이 와서 칼로 위협하며 목을 베려다가 의복, 양식, 행장 등의 물건을 빼앗고 마침내 배의 노와 닿을 끊어버리고 떠나가 버려 다시 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7일에는 또 지명을 알 수 없는 해안에 이르러 정박하니, 또 어선 6척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앞서 만났던 해적과 같은 무리인 듯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고개 둘을 넘어 6-7리가량 가니 인가가 있었으며, 서로 차례로 번갈아 가며 다음 마을로 보냈습니다. 밤에 선암리에 이르니 그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각진 몽둥이로 함부로 치면서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체송(遞送)되어 한 곳에 이르자 한 관인을 만났으니 그가 이 성까지 몰아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또 묻기를, “너는 어느 해에 등과하고, 어떠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느 주현에 거주하고, 행장에는 무슨 무기가 있으며, 원래 있던 배는 몇 척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 (乙科)58의 제1등으로 합격하여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160,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6, 수찬(修撰)65이 되었으며, 병오년(1486)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 제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166,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168이 되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으로는 배리(陪吏)가 4인으로,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상앗대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과 노는 해적을 만나 잃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169, 서책, 활 1장, 칼 1자루와 각자가 입는 의상 이외에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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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총관(把總官)은 즉시 인신 등 물건을 점검하고는 또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토는 얼마나 되며, 부·주(府州)는 몇이나 되며, 군량은 대략 얼마나 있으며, 그 땅에서 생산되는 물품에는 어느 물품이 귀한 것이며, 읽는 시서(詩書)는 어느 경전을 존숭하며, 의관과 예악(禮樂)은 어느 시대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낱낱이 써 내어 조사하는데 근거가 되게 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이고,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군량은 내가 유신(儒臣)으로서 일찍이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 다.” “너희 나라는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너희 나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는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 “너희 나라는 어떤 법도를 사용하며, 별도의 연호가 있는가?” “연호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어서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해마다 조공을 하여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침범하거나 반역한 정상은 없어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이니, 각자 안심하고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급히 행장을 차리고 지체하지 마오”라고 하고 곧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려고 하니, 파총관은 “절할 필요는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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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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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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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파총관은 또 신을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어제의 공술서 가운데 하산에서 해적을 만난 일과 선암에서 구타를 당한 등의 일 및 문장이 번거로운 대목을 삭제하고 신에게 다시 한 장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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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민(薛旻)이 탁자 옆에 섰다가 신에게 말하기를, “이 글은 상사에게 보고하여 황제에게 전달되는 것이니 간결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으리께서 번거로운 것은 지워버리고 간략히 해서 당신에게 고쳐 쓰게 한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쳐 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공술서는 바른 대로 써야 하니 글자가 비록 많다 해도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또 지워 버린 것은 바로 해적을 만났던 일인데, 도리어 한마디를 보태어 군인의 의복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운운하면서 내가 해적을 만났던 사실은 없애 버렸으니 이 또한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설민은 몰래 글을 써서 보이기를, “지금 황제께서 새로 즉위해서 법령이 엄숙하니 만약 당신이 전일에 진술한 공술서를 보신다면 황제께서는 틀림없이 '도적이 횡행하고 있구나'하고 여기시고 변장(邊將)에게 죄를 돌릴 터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 헤아린다면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갈 것만을 염두에 두어야지, 일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여 곧 붓을 들어 몇 곳을 뺀 대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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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민이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했는데, 어째서 군량의 수량을 모른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군자감주부가 된 지 한 달이 채 차기 전에 직책이 바뀌었던 까닭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바다 위에서 밥을 먹지 못한 것이 며칠이나 됩니까?” “3일부터 11일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간혹 마른 쌀을 씹고 오줌을 마시기도 하였으며, 오줌도 없어지면 비 오기를 기다려서 옷을 적셔 짜내어 마시고는 한 가닥 터럭과도 같은 목숨을 이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입니다.” “당신의 나이는 몇입니까?” “35세입니다.” “당신은 집을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습니까?” “여섯 달입니다." "당신은 고향집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이미 별세하셨고 살아 계신 어머니는 슬피 울어 이미 나라의 풍속을 바꾸었고 또 내가 물에 빠져 죽었으리라 여겨 슬퍼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 살아 이국(異國)에 이르렀지만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신하된 사람은 나라만을 위하고 자기 집은 잊어야 한다고 하였습 니다. 당신은 왕사(王事)로 인해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마땅히 효도를 충성으로 옮겨야 할 것인데, 어찌 집을 생각합니까?”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15 하니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않고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물며 나무에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고 해는 서산에 지려 하니, 어찌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아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국왕은 성명이 무엇입니까?” “효자는 타인이 부모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참지 못하니, 타인의 과실을 듣기를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름을 경솔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경을 넘었으니 지장 없을 것입니다.” “나는 조선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신하된 사람이 국경을 넘었다고 나라를 저버리고 행동을 달리하고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설민이 곧 신과 문답한 글을 가져다 파총관에게 바치니 파총관은 읽다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일 관원을 시켜서 당신을 떠나보낼 것입니다. 휴대한 모든 물건은 건수(件數)에 따라 기록해, 앞길에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사관(舍館)으로 물러 나왔습니다. 왕광(王匡)이 란 자는 허청(許淸)의 사나운 앞잡이로서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염치없이 물건을 요구함이 끝이 없었습니다. 신의 행장에는 줄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에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와서 말하기를, “우리 대인(大人)의 은혜는 갚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입었던 솜으로 댄 철릭'을 벗어서 허청의 아들 융(隆)에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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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주(台州)는 옛날 동구국(東歐國)의 땅으로서 민(圃)80 지방의 동쪽과 월(越)지방의 남쪽에 있고, 우두(牛頭) 앞 바다 등지는 임해현(臨海縣) 관할이며 또 태주 동남방으로 가장 먼 변방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고 늘 비가 와서 햇볕은 적었으니 실로 염황장려(炎荒障薦)'의 땅이었습니다. 신은 정월에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기후는 3-4월과 같아서 보리가 이삭이 패려고 하고 죽순 싹이 한창 무성하게 크고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또 산은 높고 내는 크며 수풀은 무성한데다, 인구가 많고 물자는 풍부하며, 주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니 하나의 별천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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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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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저소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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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파총관이 또 신과 종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신에게 이름을 불러 인원을 일일이 세게 하였습니다. 천호 적용(望勇)과 군리(軍火) 20여 인을 차출하여 신 등을 총병관(總兵官) 82에게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신과 배리 등은 모두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양달해는 간교한 자로서 병을 핑계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을 수 없는 척하니 파총관이 또 가마를 타도록 허가하여, 가마 탄 사람이 모두 8인 이었습니다. 적용, 허청, 왕광 등이 신 등과 함께 산장(山場)과 오두(烏頭) 두 고개를 지나가는데 그 사이에 큰 내가 셋이 있었습니다. 오두령(烏頭嶺) 아래에는 또 감계(鑑溪)가 있었는데, 허청이 신 등을 감계 가의 민가로 데려가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또 길을 떠나 당두(塘頭)와 포봉(蒲峯) 등을 지나 밤을 타서 가다가 길가의 한 불사(佛寺)에 이르러 잠을 잤습니다. 그 앞마을이 바로 선암리인데 도저소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곧 신이 전에 내몰리며 지나갔던 길이었습니다. 밤에 허청과 적용이 그곳 이장(里長)을 국문하여 제 말안장을 빼앗은 사람을 잡아서 관사에 보고하고 말안장을 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군인들의 빼앗긴 갓과 망건 등은 모두 찾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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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개 강도질을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84 포학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지금 강남 지방 사람들 중에는 비록 더러 이익을 탐하는 마음 때문에 도적질을 하고 약탈하는 자가 있지만 하산의 해적은 신 등을 죽이지 않았고 또 남겨준 물건도 있었으며, 선암 사람은 약탈한 것을 숨기지 않고 빼앗았던 말안장을 마침내 돌려주었으니, 기풍이 부드럽고 인심이 그다지 포악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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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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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도소(健跳所)185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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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천암리(穿岩里)를 지났습니다. 마을 서쪽에 있는 산 위쪽으로 석벽이 높게 솟아있는데, 홍문(虹門)86처럼 보이는 동굴이 있었기 때문에 천암(穿岩)이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전령(田嶺)을 지나니 전령 위에는 중이 불사(佛舍)를 짓느라 도로를 가로막았으므로, 행인들이 절 가운데로 지나갔습니다. 신 등은 평지에서는 더러 가마도 탔지만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하므로 가마에서 내려 걷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절에 이르러 온갖 모양으로 절룩거리며 걸으니 그 절의 중이 불쌍히 여겨 차를 끓여 대접하였습니다. 조금 머물렀다가 출발해서 바닷가에 이르니 무기를 갖춘 병선(兵船)이 물가를 따라 오르내리며 수전(水戰)을 하는 모습이 보였 습니다. 신은 거룻배를 타고 건넜는데 바로 이곳이 건도소였습니다. 건도소 성(城)은 해안에 붙어 있었습니다. 건도소의 천호인 이앙(李扇)은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준수하였는데, 갑주(甲周)와 무장을 갖추고 신 등을 이끌어 성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은 모두 겹성이었고, 고각(鼓角)7과 총통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습니다. 그 쇄납(噴网) 등 크고 작은 피리는 끝이 모두 위가 굽어 있어 부는 사람의 미간(眉間)을 향하였습니다. 성 안의 사람과 저택은 도저소에 비해 더욱 많았습니다. 이앙은 신을 이끌고 한 객관(客館)에 이르러서, 적용, 허청, 왕광, 왕해 등 및 이름은 잊었지만 성이 장(莊)이니 윤(尹)이니 하는 중후하고 나이 든 건도소 관인들과 함께 탁자의 좌우에 빙 둘러서서 신에게 표류된 까닭을 물었습니다. 신은 대략 그 전말을 진술하였습니다. 이앙은 신에게 당(堂)에 올라서 빈주(賓主)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앙은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고 신은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서 서로 마주보고 두 번 절한 뒤에 이앙이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또 신의 종자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먹여 자못 환대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성이 윤(尹)인 노령의 관인은 정보 등을 이끌고 사저로 가서 음식을 먹이고 이어 그 처첩과 자녀로 하여금 인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 인심의 순박하고 두터움이 이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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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사람이 병오년에 등과(登科)한 소록(小錄)'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과거에 합격한 방록(榜錄)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방록 가운데 '장보(張輔)'189 란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 이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당신 나라에서도 등과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제도는 초야에 있던 선비로서 등과한 사람은 모두 관청에서 봉록을 주고 문가에 정문(陸門)을 세워주며, 명함에도 무슨 과 몇 등으로 진사급 제한 자 등이라고 써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을 이끌고 자기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 앞의 네거리에 과연 용(龍)을 아로새긴 석주(石柱)로 2층 3간의 문을 만들었는데, 노란빛과 푸른빛이 눈이 부시도록 빛났고, 그 위에는 '병오과(丙午科)'9장보(張輔)의 가(家)'라는 글씨가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장보는 자기의 등과를 신에게 과시한 것입니다. 신 또한 떠벌리는 말로 그에게 자랑하며 말하기를, “나는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여 해마다 쌀 200석을 받았고 정문이 3층이나 되니 족하가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신은 “나의 정문은 먼 곳에 있으니 보일 수 없지만, 내게 문과(文科) 중시(重試)의 소록(小錄)이 있습니다”라고 하고 펼쳐 보였습니다. 장보는 소록 속에 신의 관직과 성명이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으며 말하기를, “내가 미치지 못하는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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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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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계순검사(越溪巡檢司)92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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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리고 어두웠습니다. 이앙, 허청, 왕광 및 성이 장이니 윤이니 하는 분들이 모두 신을 바다에서 전송하였습니다. 이앙은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나와 족하는 천 년 만에 만 리 밖에서 한번 만났다가 곧 헤어지니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배 위에서 작별을 고하며 말하기를, “제가 올 적에는 장군께서 수백 내지 천여 명의 군인으로 성을 둘러싸 깃발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에게 위엄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가 사관(舍館)에 머물 적에는 당(堂)에 오르게 하였는데, 예절이 틀림없고 음식을 대접하는 데 뜻이 더욱 두터웠으며 마음을 터놓고 성의를 보여서 처음 보고도 옛 벗과 같이 친밀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신 것입니다. 제가 떠날 적에는 성 서쪽까지 걸어 나오고 멀리 바다 모퉁이까지 전송하며 저를 부축하여 배에 태우고 글을 지어 작별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보내심이 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일개 먼 지방 사람인데 서로 만난 지 하루가 못되었는데도 엄함으로써 위엄을 보이고 관대함으로써 응대하고 두터움으로써 작별하였으니, 그것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대개 우리 조선은, 땅은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의관, 문물은 모두 중국과 같으니 외국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명나라가 통일을 이루어 북방의 호(胡)와 남방의 월(越)도 일가가 되었으니, 한 하늘 아래에서 모두가 형제입니다. 어찌 지역의 거리로 안팎을 나누겠습니까? 하물며 또 우리나라는 천조(天朝)를 정성으로 섬겨 공물 바치는 일을 게을리 아니한 까닭에 천자께서 예절로써 대우하고 인애로써 어루만져 주셨으니, 감싸고 안정시켜 주신 덕화(德化)는 지극하였습니다. 또 저는 조선의 신하요, 장군은 천자(天子)의 지방을 맡은 신하인데 천자의 자소지심(字小之心)을 체현하여 먼 나라 사람을 대우하심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이 또한 충(忠)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의 두터운 온정은 제가 이미 깊이 느낀 바이지만 하루도 장군 및 장(莊), 윤(尹) 두 관인과 함께 조용히 담화하며 회포를 풀 짬을 얻지 못하였으니, 백년 한 평생을 만리 밖에서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어찌 그치겠습니까?"194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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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허청에게 작별하며 말하기를, “장군은 왕광 족하와 함께 나를 포봉(蒲峯)이란 마을에서 만나보고, 지극히 배고프고 목마른 나를 배부르게 먹이고, 나를 죽을 지경에서 살려주고, 두독장과 도저소 및 이 성에 이르기까지 산길이 험준한 수백 리의 땅에서 7-8일 동안을 돕고 보호해 주셨으니, 그 은정(恩情)의 두터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작별한 뒤에는 서로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슬픔이 더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작별을 고하고 적용과 함께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넜습니다. 적용은 신에게, “이 바다를 떠가노라면 서쪽으로 천태산이 보이는데, 지금 마침 구름과 안개로 사방이 막혀서 바라볼 수가 없겠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저녁에 영해현(寧海縣)의 월계순검사 95에 도착하였습니다. 성은 산꼭대기에 있었고, 군졸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바닷가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적용은 그 무리와 함께 배에서 내려서 성에 들어가고 신 등은 해안에 머물게 하였는데,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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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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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해현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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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순검사의 건너편 언덕에 월계포(越溪鋪)96가 있었습니다. 월계포 앞에 배를 놓아두고 육지에 올라 시냇가의 언덕을 따라서 걸었습니다. 시내의 바다로 통하는 어귀는 매우 넓었는데 그 원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다가 서양령(西洋嶺) 허가산(許家山)을 지나서 시오포(市奧鋪)에 이르니, 포(鋪) 안의 사람이 차 몇 사발을 대접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백교령(白嶠嶺)에 이르니, 군졸 20여 인이 가마를 메고 와서 신 등을 맞이하였습니다. 신 등 여덟 사람은 또 가마를 타고 진사방(進士坊)을 지나서 영해현의 백교역(白嶠驛)97에 이르렀습니다. 역은 현치(縣治) 안에 있었습니다. 당(唐)이란 성을 가진 지현(知縣)98이 신 등에게 음식을 배부르게 먹였습니다. 가마를 타고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서 동산포(桐山鋪)', 매림포(梅林鋪), 강격령(江C嶺), 항공포(1空鋪), 해구포(海口鋪)를 지났습니다. 그 중간에 큰 내 셋과 큰 다리 둘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잊었습니다. 밤 2경쯤에 서점역(西店驛)이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서점역에는 갑병(甲兵)202 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방어소(防禦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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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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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점역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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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려서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하는 수습이 없이 서점역에서 묵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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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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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산역(連山驛) 203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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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적용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중국의 법령은 엄정해서 조금이라도 더디고 늦어지면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지금 비록 큰비가 내리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의 군리(軍吏)와 신의 종자들이 모두 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려서 물이 계곡에 넘치므로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이 말하기를, “계곡의 물은 가득 찼다가도 다시 줄어들고 또 이 역에서 지급하는 식량도 한정이 있으니, 어제 머문 것도 이미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신 등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책허포(明墟鋪), 탁개령(拆開嶺), 산황포(山隍鋪)를 지나고, 또 대령(大嶺), 방문포(方門鋪)를 지나서 쌍계포(雙溪鋪)에 이르렀습니다. 쌍계포 북쪽에 쌍계(雙溪)가 있는데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옷을 입은 채 건넜습니다. 상전포(尙田鋪)를 지나서 봉화현(奉化縣)의 연산역에서 유숙하였습니다. 현은 역 동쪽으로 2리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지현의 성명은 두안(杜安)204이었습니다. 역승(驛丞)25은 신 등이 옷이 비에 젖어서 소름이 돋은 것을 보고 건물 앞에서 나무 등걸을 불태워 주었습니다. 신과 종자들은 빙 둘러앉아 불을 쬐어 온기를 취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마구 화를 내며 등걸불을 차고 짓밟았습니다. 신 등은 두려워서 달아나 숨었지만, 적용과 역승은 욕을 당하였습니다. 적용이 신에게 말하기를, “밖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해적이라고 말하면서, 역관(驛官)이 지급해 주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저 분은 글을 읽는 군자라고 말했지만 저 사람은 여전히 횡포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 자가 의복을 빼앗아 갔다는 등의 내용으로 고소장을 써서 지현에게 바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저 사람의 나쁜 짓은 진실로 징계하고 싶지만, 빼앗긴 물건이 없는데도 빼앗겼다고 무고하여 남을 부당한 죄로 덮어씌우는 일은 매우 도리에 어긋납니다. 지금 족하는 우리를 호위해 왔으니 대중을 공갈하고 폭행한 죄로 저 자를 다스린다 해도 말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은 곧 고소장을 작성하여 지현에게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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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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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파부(寧波府)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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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적용과 신 등이 가마를 타고 큰 내를 건넜습니다. 냇가에 절이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앞에는 다섯 개의 부도(浮圖)와 두 개의 큰 탑이 있었습니다. 또 허백관(虛白觀), 금종포(金鐘__), 남도포(南渡鋪)를 지나서 광제교(廣濟橋)209에 이르렀습니다. 광제교는 큰 내에 걸쳐 있었는데 다리 위에는 지붕을 얽었고 다리의 길이는 20여보(步)나 되었습니다. 다리가 있는 땅이 곧 영파부의 영역이니 옛날 명주(明州)였을 적에 세운 것입니다. 또 3리를 가니 큰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의 북쪽이 진사리(進士里)였습니다. 또 10여 리를 가니 다시 큰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 위에는 지붕을 얽었고 광제교와 같으면서 조금 적은 편인데 그 이름은 잊었습니다. 다리의 남쪽에 문수향(文秀鄕)이 있었습니다. 또 상포교(常浦橋)를 넘어 북도강(北渡江)'에 이르러 작은 거룻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우두 앞바다에서 서북쪽으로 연산역에 이르기까지는 뭇 산들의 죽 늘어선 산봉우리가 어지러이 둘러싸여 있고, 시내와 암벽이 서로 얽히고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강에 이르니 평평하고 넓은 들이 넓게 트여 있고, 다만 먼 곳에 있는 산들이 눈썹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강의 북쪽 언덕에 방죽 하나를 쌓았으니, 방죽은 곧 배를 끌어 올려서 지나가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방죽의 북쪽에 제방을 쌓고 강을 파서 작은 거룻배가 강가를 둘러 죽 늘어서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적용이 신 등을 이끌어 그 거룻배를 타고 석교(石橋) 열 셋을 지나 20여 리를 갔습니다. 강의 동쪽 제방에는 민가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서남방에는 사명산(四明山)이 보였습니다. 산의 서남쪽으로는 천태산에 연해 있고, 동북쪽으로는 회계산(會稽山), 진망산(秦望山) 등과 연해 있었으니 곧 하지장(賀知章)이 젊었을 때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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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를 저어 영파부성(寧波府城)에 이르니 물을 가로막아 성을 쌓았는데 성은 모두 겹 문, 문도 모두 겹 층, 문 밖도 겹 성, 그리고 수구(水溝)213 또한 이중이었습니다. 성에는 모두 홍문(虹門)을 설치했는데 문에는 쇠 빗장이 있었고 배 한 척이 드나들 만하였습니다. 노를 저어 성안으로 들어가서 상서교(尙書橋)14에 이르니 다리 안의 강의 너비는 100여 보(步)였습니다. 다시 혜정교(惠政橋)5와 사직단(社稷壇)을 지났습니다. 성안에서 지나간 큰 다리 또한 10여 곳이었고, 높고 큰 집들이 언덕 좌우에 죽 이어져 있었으며, 자석(紫石)으로 기둥을 만든 것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기이한 광경과 좋은 경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노를 저어 북문으로 나오니 북문 또한 남문과 같았습니다. 성 주위의 둘레를 알 수 없었습니다. 부치(府治), 영파위(寧波衛), 은현(縣)의 현치(縣治)와 사명역(四明驛)이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과대득교(過大得橋)에 이르니 다리에는 홍문 세 개가 있었습니다. 비가 세차게 내려 강에서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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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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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계현(慈溪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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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신청교(新淸橋)와 진사향(進士鄕)을 지나서 송(宋)나라 석장군(石將軍)의 사당19에 이르렀습니다. 사당의 크기는 관부(官府)처럼 컸고, 정표(佐表)20하는 문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부성(府城)에서 이곳까지 10여 리 사이에 강의 양쪽 언덕에는 상점과 큰 배가 구름처럼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난 뒤에는 소나무, 대나무, 등자나무, 귤나무가 언덕 좌우에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 다정(茶亭), 경안포(景安鋪), 계금향(繼錦鄕), 유씨정절문(兪氏貞節門)을 지나서 서진교(西鎭橋)에 이르니 다리가 높고 컸습니다. 또 두개의 큰 다리를 지나갔습니다. 서파청(西鬪廳)에 이르니, 방죽의 양쪽 언덕은 돌로 제방을 쌓아, 물을 가로막아 보[堰]를 만들어 바깥 강과는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양쪽 옆에 기계(機械)를 설치하고 대로 만든 새끼로 밧줄을 만들어 배를 당겨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서여향(西嶼鄕)의 신언(新堰)에 이르니, 신언은 옛날 찰자항(刹子港)과 안공언(顔公堰)으로서 후에 찰자항을 막고 안공언을 없애어 전지(田地)를 만들고 물을 끌어 동쪽으로 합류시켜 광리교(廣利橋)의 남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방죽을 설치하여 밖으로 강호(江湖)를 막고 관선(官船)을 당겨 건너게 하고 이를 '신언'이라 불렀는데, 대개 서파(西)와 같았습니다. 이곳에 이르러 또 배를 당겨 지나야 하였습니다. 신교(新橋), 개희교(開禧橋)222, 요평(姚平) 23 처사(處士)의 무덤을 지나서 자계현(慈溪縣)에 이르렀습니다. 노를 저어 그 안으로 들어가니 경원문(經元門), 종영문(鍾英門), 도당리문(都堂里門), 도헌교(都憲橋)224, 진사문(進士門), 덕성교(德星 橋)225, 보봉문(寶峯門)이 있었고, 임청정(臨淸亭) 앞에 이르러 배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밤에 또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가서 닭이 울 무렵 언덕에 정박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강 이름을 물으니 바로 요강(姚江)226 이었습니다. 강가에 역(驛)이 있으니 거구역(車廢驛)27이고, 역승(驛丞)은 진고(秦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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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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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요현(餘姚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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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아침 일찍이 배를 출발시켜 서북방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강과 산은 크고 높았고 들판은 평평하게 펼쳐 있으며 인가는 빽빽하고 경치는 천태만상이었습니다. 저녁에 오령묘(五靈廟), 역전포(驛前鋪), 요강역(姚江驛)228, 강교(江橋) 29를 지나서 여요현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이 성을 안고 서쪽으로 흐르니 연금향(聯錦鄕)의 조서교(曹『橋)가 있었는데 다리에는 홍문(虹門) 세 개가 있었습니다. 또 등과문(登科門)과 장씨광명당(張氏光明堂)을 지나 밤 3경에 하신파(下新婦)에 이르니 하신파도 또한 앞서 본 신언과 같았습니다. 또 배를 당겨 하신파를 지나 큰 다리를 지나니, 큰 나무 수십 그루가 강 가운데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때 중파(中)에 이르니 중파 또한 하신파와 같았습니다. 또 배를 당겨 거슬러 강으로 올라가니 곧 상우강(上虞江)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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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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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우현(上虞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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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큰 다리 둘을 지나 올라갔습니다. 강 남쪽에서 어떤 관인이 가마를 타고 왔는데 바로 상우지현(上虞知縣) 30이 현성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상우현성은 강 언덕에서 2-3리가량 떨어져 있었습니다. 또 황포교(黃浦橋), 화도포(華渡鋪), 채묘포(蔡墓鋪), 대판교(大板橋), 보청운문(步靑雲門), 신교포(新橋鋪)를 지나 조아역(曹娥驛)에 이르렀는데 역승은 서심(徐深)이었습니다. 역 북쪽에 방죽이 있었습니다. 배를 놓아두고 방죽을 지나 도보로 조아강(曹熊江)에 이르러 강을 가로질러 건넜습니다. 건너편 언덕에 또 방죽이 있었습니다. 방죽과 양호순검사(梁湖巡檢司)는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또 배를 놓아두고 방죽을 지나 서쪽으로 2리를 걸어서 동관역(東關驛)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문창교(文昌橋), 동관포(東關鋪), 경령교(景靈橋), 황가언포(黃家嘎鋪), 과산포(瓜山鋪), 도가언포(陶家堰鋪), 모양포(茅洋鋪)를 지났습니다. 밤 4경233에 이름을 모르는 강기슭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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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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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흥부(紹興府)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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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감수(鑑水)로 노를 저어 올라갔습니다. 물은 경호(鏡湖)34의 한 갈래로부터 와서 성안을 둘렀습니다. 해 뜰 무렵 소흥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성 남쪽에서부터 감수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창안포(昌安鋪)를 지나 노를 저어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에는 홍문이 수문(水門)의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네 겹으로 되었는데 모두 쇠로 만든 문짝을 설치하였습니다. 광상교(光相橋) 등 큰 다리 다섯과 경괴문(經魁門), 연계문(聯桂門), 우성관(佑聖觀), 회수칙비(會水則碑) 등을 거쳐서 10여 리쯤 가니 관부(官府)가 있었습니다. 적용은 신 등을 이끌고 기슭에 내리니, 그 저자의 번화함과 인구의 많음은 영파부의 3배나 되었습니다.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35 황종(黃宗),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36 오문원(吳文元), 포정사분수우참의(布政司分守右參議) 38 진담(陳潭) 39 이 징청당(淸堂)240 북벽(北壁)에 죽 늘어앉았는데, 병갑(兵甲)', 태장(杖)이 그 앞에 삼엄하게 늘여져 있고 탁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신을 인도하여 탁자 옆에 이르러서 서쪽을 향해 서게 하였습니다. 신의 성명, 살던 지방, 역임한 관직, 그리고 표류하게 된 까닭, 상륙하여 약탈한 일이 없었는지의 정상, 가지고 온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신은 파총관에게 답하던 말로 답하고 난 뒤 하산에서 해적을 만나고, 선암에서 몽둥이를 맞았던 일을 더 보태고, 가져온 행장에는 말안장 1벌을 또 첨가하였습니다. 세 사상(使相)42 은 곧 파총관이 보고한 문서를 내어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공술서의 앞뒤의 상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소?”라고 하였습니다. “파총관이 처음 심문할 적엔 표류하여 정박하게 된 사정만을 답했을 뿐이었고, 오늘 포정삼사(布政三司)243가 다시 심문하시니 해적을 만났던 일 등을 상세히 거론했던 것입니다.” 세 사상은 모두 신에게 천천히 말하기를, “공술서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당신에게 실로 죄가 되오. 당신은 마땅히 앞서 쓴 말을 베껴 쓰되 한 글자도 가감이 없어야 하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곧 베껴 썼습니다. 세 사상은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다음날 당신이 항주(杭州)에 도착하면 진수태감(鎭守太監)244 ·수의(誘衣)245삼사(三司)의 대인(大人) 46께서, 북경에 도착하면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에서 다시 당신의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 때에도 또한 이대로 답해야 하오. 조금이라도 서로 어긋나면 절대로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처음에는 당신들을 왜선(倭船)을 타고 와서 겁략하는 무리들이라고 여겨, 잡아다 죽이려고 했소. 당신이 만약 조선인이라면 당신 나라의 역대 연혁과 도읍 산천 · 인물·속상(俗尙) 247. 사전(祀典)48. 상제(喪制)·호구(戶口)·병제(兵制)·전부(田賦)·관상(冠裳)의 제도를 자세히 써 내면 여러 사서(史書)에 맞추어 보고 옳고 그름을 가리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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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진술했습니다. “연혁과 도읍은 처음에 단군(檀君)49께서 당요(唐堯)와 같은 시대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여 세대(世代)를 천여 년이나 지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250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고, 평양에 도읍하여 8조252로 백성을 가르쳤으니, 지금 나라 사람들이 예의(禮義)로 풍속을 이룸이 이때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53이 망명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기자의 후손인 기준(箕準)254을 내쫓으니 기준은 마한(馬韓)으로 달아나서 그 곳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그 중간에 구한(九韓) 55이 되기도 하고, 이부(二府)56가 되기도 하고, 사군(四郡) 57이 되기도 하고, 삼한(三韓)258이 되기도 했는데, 연대가 멀고 오래되었으므로 다 기술할 수 없습니다.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59 때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박씨(朴氏)260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高句麗)의 고씨(高氏)와 백제(百濟)의 부여씨(扶餘氏)가 서로 잇달아 일어나서 옛 조선 땅을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신라는 동남지방을 점거하여 경주(慶州)에 도읍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서북 지경을 점거하여 요동(遼東) 그리고 평양에 도읍했으며, 또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겼는데 그 지명은 잊었습니다. 백제는 중부의 서남지역을 점거하여 직산(稷山)에 도읍 했다가 뒤에 광주(廣州), 한양(漢陽), 공주(公州), 부여(夫餘)에 도읍하였습니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 때에 와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당군(唐軍)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 백제도 멸망시켜 삼국을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뒤에 견훤(甄萱)262이 반란을 일으켜 전주(全州)를 점거하고, 궁예(弓裔)263가 반란을 일으켜 철원(鐵原)을 점거했으나, 고려(高麗)의 왕씨(王氏)264가 공적이 높고 덕망이 많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니, 궁예는 스스로 도망했고 견훤은 스스로 항복했으며, 신라왕은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장부에 기재하여 와서 항복했으니, 재차 삼국을 통합하여 개성(開城)에 도읍하고 대대로 전한 지 거의 500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조선으로 바뀌어, 한양에 도읍한 지 약 100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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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천은, 장백산(長白山)은 동북방에 있는데 백두산(白頭山)이라고도 합니다. 가로는 천여 리 뻗쳤고 높이는 200여 리 되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 둘레가 80여 리 됩니다.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북으로 흘러서 속평강(速平江)이 되고, 서북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이 되는데, 송화강 하류가 곧 혼동강(混同江)입니다.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에 있고, 금강산(金剛山)은 동쪽에 있는 데 1만2천여 봉우리가 있으며, 지리산(智異山)은 남쪽에 있고 구월산(九月山)은 서쪽에 있는데, 이상 네 산은 매우 높고 험하며 기이한 유적이 많습니다. 삼각산(三角山)은 곧 국도(國都)의 진산(鎭山)65입니다. 대동강(大同江)·살수(薩水)·임진도(臨津渡)·한강(漢江)·낙동강(洛東江)·웅진(熊 津)·두치(豆恥津) · 영산진(榮山津) 등은 큰 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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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은 신라의 김유신(金碩信)266 . 김양(金陽)267. 최치원(崔致遠)268. 설총(薛聰)269, 백제의 계백(階伯)70 ,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최충(崔沖) 12. 강감찬(姜郡贊)273 . 조충(趙沖)274김취려(金就順)275·우탁(禹悼) 276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우리 조선은 일일이 셀 수도 없습니다. 속상은 예의(禮義)를 숭상하고 오륜(五倫)을 밝히고 유술(儒術)을 존중합니다. 해마다 봄가을에 양로연(養老宴)278 향사례(鄕射禮)219.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합니다. 사전(祀典)은 사직(社稷)28, 종묘(宗廟)292,석전(釋奠)283과 여러 산천에 대한 제사가 있습니다. 형제(刑制)는 《대명률(大明律)》284에 따릅니다. 상제(喪制)는 주자(朱子)의 《가례》에 따릅니다. 관상(冠)은 중화의 제도를 따릅니다. 호구(戶口), 병제(兵制), 전부(田賦)는 내가 유신(儒臣)이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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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정을 추쇄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오?”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있어 수로가 매우 험하고 멀기만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들어가 피하여 오랫동안 도망범의 소굴이 되었으니, 그런 까닭에 가서 이들을 잡아 오는 것입니다.” “제주도는 우리 중국과 거리가 몇 리나 되오?" 신은 수로가 먼 것을 부풀려서 말하기를,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대개 배가 큰 바다에서 순풍을 만난다면 하루에 천리도 갈 수 있는데, 지금 나는 제주도로부터 바다에 뜬 것이, 주야를 따져 본다면 무릇 29일이나 되며, 큰바람에 몰려서 나는 듯이 빨리 달려 중국의 해안에 도착 정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제주도로 가는 길은 대개 수만 여 리나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오?” “전해 듣기로는 우리나라 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지나 황도(皇都)285에 도착하자면 3천9백여 리나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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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병관 등의 세 사상은 곧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이어서 단자를 써서 내려 주었습니다. 단자 속에는 “최관(崔官)에게 예물로 돼지고기 1쟁반, 거위 2마리, 닭 4마리, 물고기 2마리, 술 1동아리, 쌀 1쟁반, 호두 1쟁반, 채소 1쟁반, 죽순 1쟁반, 국수 1쟁반, 대추 1쟁반, 두부 1쟁반을 보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 반찬과 식량 등 물품을 배리(陪吏)와 군인에게 차등있게 내려주었습니다. 신은 곧 사례하는 시를 지어 두 번 절하니 세 사상들도 일어나 공손스레 답례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사례하는 시를 보건대 이 지방 산천을 어찌 그리도 자세히 알고 있소? 이는 필시 이곳 사람이 말해 준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사방을 돌아봐도 친한 사람이라곤 도무지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얘기하겠습니까? 내가 일찍이 중국의 지도를 훑어보았기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여 기억나는 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답을 마치고 나서, 신은 서너 명의 관인들과 함께 탁자 가에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었습니다. 적용의 군리(軍吏) 한 명이 밖에 있다가 신의 종자인 김도종을 구타하여 상처를 입혔습니다. 신은 이 사실을 글로 써서 여러 관인들에게 보였더니 한 관인이 달려가서 총병관에게 알렸습니다. 총병관이 구타한 사람을 잡아와서 죄를 다스려 곤장을 치고 또 적용에게 부하를 통솔치 못한 죄로 곤장을 쳤습니다. 신 등은 물러 나와 다시 호수를 따라서 노를 저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영은교(迎恩橋)를 지나 봉래역(蓬驛)86 앞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저녁에 지부(知府) 주(周)287라는 사람과 회계현, 산음현 두 지현(知縣)88이 모두 식량과 반찬을 넉넉히 보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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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해록 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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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일 서흥역(西興驛)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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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총병관 등 세 사상(使相)이 함께 나란히 교자를 타고 새벽에 봉래역에 도착한 뒤 다시 신과 종자(從者)들을 불러 행장을 앞으로 가져오게 하고는 이리저리 뒤적이며 점검하였습니다. 신이 가진 것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개, 말안장 1벌, 여러 문서와 책이 든 크고 작은 상자 2개, 의복 · 이불 · 갓 갓끈 · 구리그릇을 넣은 작은 가죽 부대 1개, 관모(冠帽)와 관모집뿐이었습니다. 정보 · 김중 · 손효자 · 이정 · 안의 · 이효지 · 최거이산과 총 2인은 가진 것이 없어 군인과 보자기를 함께 썼습니다. 군인들이 가진 것은 보자기에 싸기도 하고 부대에 넣기도 하고 짐이 없기도 하였습니다. 점검을 마치고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먼저 항주(杭州)에 가게 될 터인데 진수태감(鎭守太監), 수의(誘衣), 삼사(三司)의 대인(大人)이 다시 물을 것이니, 일일이 해명하고 대답하되 어긋남이 없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하직하고 물러 나왔는데, 총병관은 지휘첨사(指揮僉事)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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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흥부(紹興府)는 곧 월왕(越王) 의 옛 도읍으로 진한(秦漢) 시대에는 회계군(會稽郡)이었는데, 절강(浙江)의 동쪽 하류에 있었습니다. 부치(府治), 회계·산음의 두 현 및 소흥위의 치소(治所)와 와룡산(臥龍山) 은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회계산(會稽山)은 성 동쪽 10여 리에 있고, 그 밖에 진망산(秦望山) 과 같은 높은 산들이 겹겹이 솟아있고,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가 동·서·남 3방에서 빼어남을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북쪽은 큰 바다에 연해서 평탄하고 넓었으며 구릉이 없었습니다. 난정(蘭亭) 은 누공부(婁公婢) 위쪽에 있는 천장사(天章寺)의 앞에 있었으니 바로 왕희지(王羲之) 가 수계(修) 한 곳이었습니다. 하가호(賀家湖) 는 성 서남쪽 10여 리에 있었고, 하지장(賀知章)의 천추관(千秋觀) 옛 터가 있었습니다. 섬계(溪)는 진망산 남쪽 승현(晦縣)의 땅에 있었으니 부(府)와는 거리가 100여 리나 되었는데, 바로 왕자유(王子獄) 가 대규(戴達) 를 찾아갔던 시내였습니다. 강은 네 갈래로 나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갈래는 태주(台州)의 천태산(天台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신창현(新昌縣)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승현에 이르러 북쪽으로 회계현과 상우현(上虞縣)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동소강(東小江)입니다. 한 갈래는 산음현 서북쪽에서 나와 소산현(蕭山縣) 동쪽을 거쳐 산음현으로 되돌아와서 회계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서소강(西小江)입니다. 한 갈래는 상우현 동쪽에서 나와 여요현(餘姚縣)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자계현(慈溪縣)을 거쳐 정해현(定海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서 여요강(餘姚江)이 되는데 이것이 신이 지나온 강입니다. 한 갈래는 금화현(金華縣)의 동양(東陽)에서 나와 포강(浦江)과 의오강(義烏江)과 합류하여 제기현(諸誓縣)에 이르고 산음현을 거쳐 소산현에 이르러서 절강(浙江)으로 돌아가니, 이것이 제기강(諸誓江)입니다. 그 중간에 천원(泉源)의 지류가 돌아가다가 제방에 막히고 모였다가 따라 들어간 것이, 마치 혈맥이 서로 연결되고 등나무가 얽혀 끊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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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또 감수(鑑水)를 거슬러 서쪽으로 가서 운전포(田鋪) · 엄씨정절문(嚴氏貞節門) · 고교포(高橋鋪)를 거쳐 매진교(梅津橋)에 이르렀습니다. 언덕에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산이 불쑥 솟았는데, 동쪽에 깎아지른 석벽이 있고 앞에는 큰 석인(石人) 두개가 서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도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였습니다. 또 융광교(融光橋)를 지나 가교포(柯橋鋪)에 이르니 그 남쪽에 작은 산이 있고, 산등성마루에는 옛 정자 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채옹(蔡邑) 이 연죽(竹)을 보고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었던 가정(亭)의 유적’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원사교(院社橋)·백탑포(白塔鋪)·청강교(淸江橋)를 지나 전청역(錢淸驛)에 이르니 강 이름은 일전강(一錢江)이었습니다. 밤에 염창관(鹽倉館) · 백학포(白鶴鋪) · 전청포(錢淸鋪) · 신림포(新林鋪) · 소산현(蕭山縣) 지방을 지나 서흥역에 이르니 날이 새었습니다. 강 이름은 서흥하(西與河)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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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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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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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서흥역의 서북방은 평탄하고 넓었는데 곧 전당(錢塘) 이었습니다. 강물은 조수가 불어나면 호수가 되고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되었습니다. 항주 사람들이 매년 8월 18일에 조수가 크게 밀려오면 파도에 맞부딪치기도 하며, 조수를 구경하던 곳이었습니다. 신 등은 서흥역 앞에서 배를 버려두고 언덕에 올라 수레를 타고 10여 리를 가다가 절강(浙江)에 이르러서는 다시 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강의 흐름이 산을 끼고 구불구불 굽이치고, 또 거꾸로 물결치는 형세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절강이라 부르는데 절(浙)은 또 '절(制)'이라 쓰기도 하였습니다. 강의 너비는 8-9리이고 길이는 서남쪽으로 복건로(福建路)에 이르고, 동북쪽은 바다로 통하였습니다. 조수를 막기 위해 화신(華信) 이 쌓은 제방은 단어취(團魚嘴)로부터 범촌(范村)까지 대략 30리이고, 또 부양현(富陽縣)까지 합계 60여 리입니다. 석축(石築)이 새것처럼 아직 견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또 강을 전당강(錢塘江)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신은 그 제방에 이르러 다시 언덕을 따라 걸어가니 서쪽으로 강가에 세워진 육화탑(六和塔) 보였습니다. 걸어서 연성사(延聖寺)와 절강역(浙江驛)을 지나 항주성의 남문에 이르니 겹 성에다 이중문이었고 문에는 3층의 누각이 있었습니다. 그 성에 들어가 문괴문(文魁門)·영순궁(靈順宮)·숙헌문(肅憲門)·징청문(澄淸門)·남찰원(南察院) ·우성전(佑聖殿)·토지묘(土地廟)·지송방포(芝松坊鋪)를 지나서 무림역(武林驛)에 이르렀습니다. 성문으로부터 이 역에 이르기까지는 대략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적용(望勇)은 신 등을 이끌고 비로 인해 하루를 머무른 것 이외에는 지체한 적이 없고 밤길을 가기까지 하면서 천여 리의 땅을 거쳐 왔지만, 진수태감(鎭守太監) 장경(張慶)은 오히려 적용에게 더디게 왔다는 죄를 물어 곤장을 쳤습니다. 저녁에 역승(驛丞) 양수록(楊秀祿)이 찬거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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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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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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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태감(太監) 이 관인(官人)을 시켜 묻기를, “정인지鄭麟趾)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김완지(金荒之) · 조혜(惠) . 이사철(李思哲) . 이변(李邊) . 이견(李堅)은 모두 조선의 인물들인데, 이들이 어떤 관직에 있었는가를 일일이 적어 알려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정인지 · 신숙주 · 이사철은 모두 관위(官位)가 1품까지 이르렀고, 성삼문은 3품에 이르렀으며, 이변 · 김완지 · 조혜 · 이견은 내가 후배 로서 그 사람들의 벼슬 품계를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역중(驛中)의 사무를 맡은 고벽(顧壁)이란 자가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먹는 물품은 조정에서 주는 것인데, 지출하려면 1년을 기다려야 문부(文簿)가 부(部)에 도착할 것입니다. 본 역승은 귀주(貴州)의 이인(夷人) 으로서 물정을 전혀 모르는 것이 꼭 어린애와 같고 상사(上司)에게 상신할 줄을 몰라서 당신들이 먹을 것을 넉넉하게 장만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고, 또 “이곳에 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과 이야기해서 원기를 떨어뜨리지 마십시오”라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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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에 안찰제조학교부사(按察提調學校副使) 정(鄭)대인이 어떤 대인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묻기를, “당신 나라의 과거 제도는 어떠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진사시(進士試) 생원시(生員試) · 문과시(文科試) ·무과시(武科試) 가 있고, 또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중시(重試)가 있습니다.” “사인(士人)의 시험은 어떻게 치룹니까?” “인년(寅年)·신년(申年)·사년(巳年)·해년(亥年)의 가을마다 유생(儒生)으로서 학업에 정통한 사람을 모아서 삼장(三場)으로써 시험을 봅니다. 초장(初場)에는 의(疑) · 의(義). 논(論) 중에서 2편(篇)을 시험하고, 중장(中場)에는 부(賦) · 표(表) · 기(記) 중에서 2편을 시험하고, 종장(終場)에는 대책(對策) 1도(道)를 시험하여 몇 사람을 뽑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또 합격한 사람을 모아서 삼장을 시험합니다. 초장에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외우게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사람을 뽑고, 중장(四書五經)을 외우게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사람을 뽑고, 중장에는 부 · 표 기 중에서 2편을 시험하고, 종장에는 대책 1도를 시험하여 33인을 뽑습니다. 다시 그 33인을 모아서 대책 1도를 시험하여 등급을 나누는데, 이를 일러 문과급제'라 하며 방방(放榜)을 허가하여 홍패(紅牌)를 내리고 화개(花蓋)를 주어 3일 동안 유가(遊街)하게 한 뒤에 또 은영연(恩榮宴). 영친연(榮親宴). 영분연(榮墳宴)을 내린 다음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합니다.” “문체(文體)는 어떠하오?” “표(表)는 송원(宋元)의 파방(播芳)을, 기(記)와 논(論)은 당송(唐宋)을 본보기로 하고, 의(義)는 오경(五經)의 글을, 의(疑)는 사서(四書)의 글을 집어내어 제목으로 짓되 모두 중화의 체제를 따르고, 대책은 《문선(文選)》의 대책을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서를 공부하였소?” “사서와 오경을 비록 정밀히 연구하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대강은 섭렵하였습니다.” “당신은 경서의 이름을 낱낱이 셀 수 있겠소?” “ 《중용(中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가 사서이고, 《역경(易經)》 ·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춘추(春秋)》 · 《예기(禮記)》가 오경입니다.” “역(易)'자는 무슨 뜻이오?” “역(易)은 글자 모양으로 말한다면 일(日)과 월(月)을 합친 것이고, 글자 뜻으로 말한다면 바뀌고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역의 방위(方位)와 괘수(卦數)는 무엇에 근거하였소?” “황하(黃河)에서 도(圖)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오니, 성인(聖人)이 이를 본보기로 삼은 것입니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아니면 역을 지을 수 없는 것이오?” “천하의 만물에는 모두 수(數)가 있으니, 토끼를 파는 사람이 토끼를 보는 것만으로도 역 속의 방위와 패수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두 대인은 서로 돌아보고 눈짓을 하고는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실로 글을 읽은 선비라는 것을 이 지방 사람들이 잠시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소” 라고 하였습니다. 정 대인의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호는 동원자(東園子), 재명(齋名)은 복재(復齋)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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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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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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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고벽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듣건대 당신들의 일은 사람을 시켜 밤낮으로 달려 북경에 가서 아뢰게 하고 회보(回報)를 받은 뒤에야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이 성에서 북경에 이르기는 수로(水路)가 거의 5천여 리나 되니, 그대는 이곳에 여러 날 머물러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도착해서는 언어가 달라 실로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같은데, 족하께서는 지금처럼 듣고 본대로 즉시 얘기 해 주어 먼 나라 사람을 돌보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벽은, “국법이 매우 엄하고 율조(律條)가 아주 무거우니, 이인(夷人)에게 사정을 누설하면 새 법령에는 군호(軍戶)로 충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말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어서는 안 되고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라 하고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갔습니다. 두 관인이 와서, “도총태감(都總太監)께서 총병관이 점검한 당신의 활 1장과 칼 1자루를 찾아 살펴보시겠다고 하오” 운운하면서 결국 거두어 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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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경태(景泰) 연간에 우리나라 급사중(給事中) 벼슬을 한 장녕(張寧)이 귀국에 사신으로 가서 <각금정시(金亭詩)〉를 지어 《황화집(皇華集)》에 실렸다는데 알고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장(張) 급사(給事)가 우리나라에 와서 《황화집을 지었는데 그중 한강(漢江) 이라는 제목의 시에, “햇빛은 청작(靑雀)배를 흔들고, 그림자 떨어지는 백구(白鷗)의 모래톱. 저 멀리 바라보니 하늘은 끝이 없고, 공중으로 솟구쳐 땅이 문득 뜨려하네”라고 한 글귀는 더욱 칭송이 자자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기쁜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또 말하기를, “장 급사는 벼슬을 그만 두고 집에 있는데 집이 가흥부(嘉興府)의 해염현(海鹽縣)에 있으므로 이곳과의 거리가 100리입니다. 장공(公)이 이곳 항주성에 도착하여 조선의 문사(文士)가 바다로 표류하여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선의 사정을 묻고자, 여러 날 머물러 기다리다가 하루 전에 돌아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성명을 물으니 왕개(王恥)였는데, 장 급사의 생질이었습니다. 자칭 진양(陳梁)이란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변변치 못한 내가 일찍이 정지(靖之) 대인과 함께 당신 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소”라 하였습니다. 신이, “장공은 어느 벼슬까지 하셨으며, 무엇 때문에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장공은 관직이 도급사(都給事)에 이르렀고 후에는 도어사(都御史)에 임명되었는데, 아들이 없기 때문에 벼슬하지 않고 42세에 집으로 돌아와 병을 요양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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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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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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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어제 활과 칼을 가져 간 관인이 또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활과 칼은 진수(鎭守) 나으리께서 남겨두었다가 살펴보려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벽이 또 와서 말하기를, “해상의 군관(軍官)이 보내온 문서는 당신이 배 14척을 가지고 바다에서 겁략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순안어사(巡按御史)는, '이미 배 14척이 있었다면 당초에 어찌 잡아오지 않았는가?'라 하면서 이 일로 그에게 죄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진수와 삼사(三司)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으나 당신의 공술이 명확하여 왜적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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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은 이미 의논이 정해져 지휘(指揮) 양왕(楊班)을 시켜 당신을 북경으로 보낸 뒤 귀국시키기로 하고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3-4일 동안은 이곳에 있어야 하겠지만 당신은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포정사(布政司)의 대인 서규(徐圭)와 안찰사부사(按察司副使) 위복(魏福)이 역의 객관(客館)에 함께 앉아서 신 등을 불러 말하기를, “당신을 보내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할 터이니, 당신은 돌아갈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곧 시를 지어 사례하고 사관으로 물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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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경 사람 이절(李節)이 와서 신의 의복이 남루하고 얼굴에 때가 묻은 것을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은 용모 가꾸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들을 보면 모두 놀라고 비웃으면서 조선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다고 생각할 것이니, 양지바른 곳에서 당신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곧 종자들에게 명하여 각자 스스로 몸을 씻도록 하고, 드디어 정보 등과 함께 볕을 향하여 빙 둘러앉아서 먼지와 때를 씻어내었습니다. 이절은 또 와서 신의 피부가 모두 벗겨지고 발톱이 빠진 것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환란에 시달려서 몸을 돌볼 수 없었던 표가 되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바다에 있을 때 목구멍에서 피를 두어 움큼이나 토하고 입에는 침이 마른 지가 3일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또 피부가 짠물에 찌들어 벗겨졌고, 발은 맨발로 험한 땅을 밟아 다친 것입니다. 일찍이 '몸과 모발과 피부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이라 들었지만 나의 몸과 피부의 상처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불효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절이 말하기를, “그럴 것 없습니다. 당신이 상처를 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실로 당신을 상하게 한 것이니 비록 상처가 났더라도 뭐 상심할 게 있겠습니까? 상심할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명은 잊었지만 이절의 벗이 《소학(小學)》 1부를 소매 속에 넣어 이절을 통하여 신에게 주고 시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공로도 없으면서 남이 주는 것을 받는다면 이는 염치없는 짓이므로 감히 사양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시가(詩歌) 한 장을 구하여 기념으로 삼고자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여, “시를 잘 짓지도 못하고 글씨도 또한 좋지 못한데 좋지 못한 것으로서 남의 좋은 것과 바꾸는 일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책을 도로 소매 속에 넣고 가버렸습니다. 이절이 신에게 말하기를, “도리로써 사귀고 예절로써 대접하면 공자(孔子)께서도 또한 받았사온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물리치시는 것인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책을 기꺼이 주려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시를 얻는 데 있었습니다. 도리로써 사귐이 아니고 예절로써 대접함이 아니니, 내가 만약 한번 받는다면 이는 시를 값을 받고 파는 셈이므로 이를 물리친 것입니다.” 이절은 “예, 예, 그렇습니다.” 하면서 물러갔습니다. 저녁에 이절은 그의 벗 김태(金太) 등 3인과 함께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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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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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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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고벽이 와서 말하기를, “당신이 경사에 가려면 앞길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소주(蘇州)·항주 및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 지역에서 바다로 장사하러 가는 사선(私船)들이 점성국(占城國)과 회회국(回回國) 지역에 이르러 홍목(紅木), 후추, 번향(番香)을 사들이느라 배가 끊이지 않는데, 열이 가면 다섯만 돌아오게 되니 그 길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경사(京師)로 가는 수로만은 매우 좋기 때문에 유구(琉球), 일본(日本), 섬라(羅), 만랄가(滿刺加) 등의 나라에서 공물을 바칠 적엔 모두 복건포정사에서 배를 정박한 뒤 이 항주부에 도착하였다가 가흥(嘉興)을 지나 소주에 이르게 되니, 천하의 사라단필(紗羅段匹)과 여러 가지 값진 물건이 모두 소주에서 산출되는 것입니다. 소주에서 상주(常州)를 지나 진강부(鎭江府)에 이르러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게 되니 양자강은 이 부(府)와의 거리가 천여 리나 됩니다. 강의 이 구간은 물이 세차고 험악하므로 풍랑이 없어야만 건널 수 있습니다. 양자강을 건너 곧장 경하(京河)에 이르기까지는 약 40일 걸리는 노정입니다. 당신들은 봄이어서 다행이지 여름철이라면 찌는 듯한 무더위에 병이 날 터이니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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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산동(山東), 산서(山西), 섬서(陝西)의 세 포정사에서는 해마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사람이 인육을 먹고 백성들이 그 터전을 잃었습니다. 양자강을 지나서 천여 리를 가면 곧 산동 땅에 도착하는데 당신들은 스스로 깊이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죽순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소식(素食)이니 드십시오. 귀국에도 죽순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남방에 죽순이 있는데, 5월이 되어서야 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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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麗寺與高麗王子》에 실린 고려사 전도(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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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지방에서는 겨울과 봄에 나서 정월이 한창인데 큰 것은 10여 근이나 됩니다. 귀국은 이곳의 풍토와 다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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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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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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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양수록(楊秀祿)과 고벽이 함께 신을 보러 왔습니다. 고벽이 말하기를, “우리 항주성 서쪽 산인 팔반령(八盤嶺)에 고찰이 있는데 이름을 고려사(高麗寺)라 합니다. 절 앞에 2개의 비(碑)가 있어 옛 사적을 기록했는데 이곳과는 15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곧 송나라 때 고려의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치고 세운 것입니다. 당신 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와서도 힘써 절을 지었으니 불교를 숭상하는 뜻을 알 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는 고려 사람이 세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은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유도(儒道)를 높이어 사람마다 모두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에게 공손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머리를 깎은 자가 있으면 모두 군역(軍役)에 편입시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사람들은 부처를 섬기지 않으면 반드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데, 그렇다면 당신 나라는 귀신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사당을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당연히 섬겨야 할 귀신만 섬기고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양수록은 하직하고 나갔습니다. 고벽이 공문(公文) 한 장을 신에게 보여주었는데 바로 항주부에서 앞으로 가야할 각 부·현·역(府縣驛)에 신 등의 호송을 통지하는 공문이었습니다. 그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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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부 : 〈해양 상황에 관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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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의 차부(箚付)를 받았는데 내용은 이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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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흠차진수절강사설감태감(欽差鎭守浙江司設監太監) 장경(張慶)과 순안절강감찰어사(巡按浙江監察御史) 창형(楊亭)의 전사(前事)에 대한 공동의안(議案)을 받들었는데, “총독절강비왜서도지휘첨사(摠督浙江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黃宗), 순시해도절강안찰사부사(巡視海道浙江按察司副使) 오문원(吳文元)의 정문(呈文)과 아울러 정해위(定海衛), 창국위(昌國衛) 등 및 태주부(台州府) 등 아문(衙門)이 각기 올린 보고서는, 홍치(弘治) 원년 윤정월 17일에 해문위(海門衛) 도저천호소(桃渚千戶所)의 우두산(牛頭山) 앞 바다에 배가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 사자채(師子寨)로 들어오도록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해양의 선박에 관한 중대한 일이므로 곧 총독(總督)·순해(巡海)·분수(分守)·분순(分巡)의 관원에게 아울러 이첩하여, '파총(把總) 및 소속 연해(沿海) 군위(軍衛)의 순사(巡司)·출해(出海) 등 관원을 독려하여 군선(軍船)을 거느리고 정찰하며 빈틈없이 방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이어서 받은 도저천호소의 보고서가 첨부된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 황종 등의 정문(呈文)에 해당 천호(千戶)·백호(百戶) 유춘(柳春) 등이 기군(旗軍)을 거느리고 임해현(臨海縣) 20도(都)로 가서 그 곳 화갑(火甲)과 함께 사람과 배를 붙잡아 유치하고, 도저소로 압송하여 심문했으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하며, 성명과 내력 및 사유를 쓴 초단(抄單)을 보내왔다. 순안절강감찰어사 창형과 회동하여 논의하며 초단을 살펴보니, 이인(夷人) 최부를 심문하여 공술에 의거, <조선 사람으로 제주 등지의 섬에 갔다가 폭풍을 만나 천자가 다스리는 대국(大國) 땅에 도착한 것'이라는 사정을 써 놓았지만, 이인(夷人)들은 속임이 많아 사실인지 거짓인지 헤아리기 어렵고, 더구나 정박한 배 안에 무기나 별도의 행장 등을 점검했는지 여부를 보고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모두 실지 조사를 해야할 것이다. 다시 공문을 보내고 나서 받은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과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 오문원 · 분수우참의(分守右參議) 진담(陳潭)·분순부사(分巡副使) 양준(楊竣)의 정문(呈文)은 '해당 파총송문등위소(把摠松門等衛所) 비왜지휘동지(備倭指揮同知) 유택(柳澤)이 이인(夷人) 43명을 정문과 함께 보내 왔으므로, 회동하여 심사하고 한 사람씩 이름을 써서 ... 운운하였다. 두세 차례 모여 심사해 보았으나 별 이상이 없었고, 바로 인신(印信)·마패(馬牌)·방록(榜錄)·문적(文籍)· 관모(冠帽)·의포(衣袍) 등을 하나씩 점검해 보아도 분명하였으므로 최부 등에게 내주어 수령하게 하였다. 압류한 이인(夷人)의 선박은 선거(船渠)로 끌어다 올려두는 한편 사유서를 갖춘 관련 인원을 칼 한 자루, 활 한 장(張) 딸려서 본직(本職)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절강 도(都) · 포(布)·안(按) 삼사(三司)의 장인도지휘사(掌印都指揮僉事) 최윤(崔__), 좌포정사(左布政使) 서규(徐圭), 부사(副使) 위복(魏福)과 회동하여 복심(覆審)해 보아도 앞뒤가 서로 동일하였다. 사연이 풍랑을 만난 외이(外夷)의 사람과 배에 관한 사항이므로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인원 인수의 건을 초록(抄錄)한 다음 포정사사(布政使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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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 의안(議案)의 사리(事理)에 따라 최부 등은 곧 본사(本司)에서 비문(批文)으로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王)을 차출하여 북경으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지나는 각지의 역체(驛遞)에 이첩하여 파견 관원의 늠급(豪給) · 참선(站船)과 아울러 호송 군여(軍餘) 및 최부 등의 구량(口糧)· 홍선(紅船). 각력(脚力)을 지급하게 하라. 앞길의 관사(官司)도 이첩하여 모든 것을 제공하게 하라. 보내는 칼 한 자루와 활 한 장은 전송(轉送)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하도록 하고, 창고에서 꺼낼 때는 보관증을 받도록 하라. 직접 상주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먼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초안(抄案)을 갖추니 각기 따로 보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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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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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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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신이 정보 등에게 말하기를, “고벽이 성심껏 나를 대하여 보고 듣는 바를 숨김없이 죄다 알려주어 나를 헷갈리지 않도록 하였다. 심히 두터운 은정을 신물(信物)로 표시하고자 나의 행장을 돌아보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가진 것은 이 옷뿐이니 내가 벗어서 주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 “전일에 옷 한 벌을 벗어 허(許)천호(千戶)에게 주었는데, 오늘 또 옷을 벗어 고공(顧公)에게 준다면 입고 있는 옷은 다만 한 벌뿐입니다. 머나먼 만 리 길에 옷이 해지면 누가 고쳐 만들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 가운데 옷 한벌로 30년을 입은 이가 있었다. 내가 타향에서 손 노릇 하는 것은 다만 1년 동안뿐이며, 지금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고 있으니, 베옷 한 벌로도 감당할 수 있다. 또 뱀과 물고기도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를 갚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라 하고, 즉시 옷을 벗어 고벽에게 주니, 고벽은 손을 휘둘러 물리쳤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벗이 주는 것은 비록 거마(車馬)일 지라도 배례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이런 보잘 것 없는 옷이겠소? 옛날 한퇴지(韓退之)는 옷을 남겨 두어 대전(大廟)에게 작별하였으니, 작별에 임하여 옷을 남겨 두는 것은 곧 옛 사람의 뜻이오”라고 하였습니다. 고벽은, “원래는 물리치려고 했는데 두터운 은정을 막을까 두렵군요”라고 하면서 받아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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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강포정사는 동남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복건의 경계에 이르러 11개의 부 · 주를 관할하고 76개의 현을 통할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항주가 제일인데 곧 오대(五代) 때의 오월국(吳越國)이고, 송나라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너 도읍을 옮겼던 땅으로서 이른바 임안부(臨安府)입니다. 부치(府治)와 인화현(仁和縣)·전당현(錢塘縣) 두 현의 현치(縣治)와 진수부(鎭守府)·도사(都司)·포정사(布政司)·염운사(鹽運司)·안찰원(按察院)·염법찰원(鹽法察院) · 중찰원(中察院)·부학(府學)·인화학(仁和學)·전당학(錢塘學)·무림역(武林驛)이 모두 성안에 있습니다. 성안에 또 오산(吳山)이 있는데 그 경치가 가장 좋습니다. 산 위에는 오자서묘(伍子胥廟) · 삼모관(三觀) ·사성묘(四聖廟) 등 10묘(廟)가 있습니다. 또 정(井)과 3담(潭)이 있으니, 오산의 대정(大井) 이 상등이고, 곽파(郭婆)의 상팔안(上八眼) · 하팔안(下八眼)·중팔안(中八眼), 서사(西寺) 등의 우물이 다음이고, 또 작은 도랑으로 서호(西湖)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부의 진산(鎭山)은 무림산(武林山)입니다. 서호는 성 서쪽 2리에 있는데 남북은 길고 동서의 직경이 10리나 되고, 산천이 수려하므로 노래와 연주 소리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죽각(竹閣)은 광화원(廣化院)에 있었으니 백낙천(白樂天)이 세운 것입니다. 백낙천의 시에, '밤에는 죽각 사이에서 졸았다’는 곳이 곧 이곳입니다. 악악왕(岳王)의 무덤은 서하령(棲霞嶺) 입구에 있습니다. 냉천정(冷泉亭)은 영은사(靈隱寺) 앞의 비래봉(飛來峯)이 아래에 있으니, 고지(古誌)에, '허유(許由)가 일찍이 영은간(靈隱澗)에서 물을 마셨다’는 곳이 이곳입니다. 표충관(表忠觀)은 용산(龍山)의 남쪽에 있는데,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비문이 있습니다. 풍황령(風掌嶺)은 방목하는 마장(馬場) 서쪽에 있으니, 곧 소동파가 변재(辨才)를 찾아보았던 곳입니다. 남병산(南屛 山)은 흥교사(興敎寺)의 뒤에 있습니다. 낭떠러지가 벗겨져 떨어진 나머지에 다만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예서(隸書) 가인괘(家人卦)와 미원장(米元章)이 쓴 금대(琴臺)'란 두 글자가 남았는데, 소동파의 시에, ‘내가 남병산의 금직어를 안다’는 곳이 곧 이곳입니다. 소공제(蘇公滉)는 흥교사와 서로 마주보고 있으니 소동파가 항주의 지주(知州)로 있을 때'쌓은 것으로 길이가 10여 리나 되었고, 가운데에 6교(橋)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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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덕관(佐德觀)은 소공제의 제일교(第一橋) 아래에 있습니다. 원소(袁韶)가 주청(奏請)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전당(錢塘)의 명인 허유(許由)로부터 장구성(張九成) 및 절부(節婦) 5인 등 39인을 취하여 전기(傳記)를 적고 사당을 세웠습니다. 풍악루(豊樂樓)는 성 서쪽의 용금문(湧金門) 밖 서호(西湖)의 언덕에 있는데, 그 북쪽에 환벽원(環碧園)이 있습니다. 옥련당(玉蓮堂)은 용금문(浦金門)에 있고, 성의 북문 안에 또 용금지(源 金池)가 있습니다. 옥호원(玉壺園)은 전당문(錢塘門) 밖에 있으니, 소동파가 남의당(南淸堂)의 두견화(杜鵑花)를 읊은 곳 이 곧 이곳입니다. 전당문 서쪽에는 선득루(先得樓)가 있습니다. 운동원(雲洞園)은 소경사(昭慶寺) 북쪽에 있는데, 꽃과 버들이 들쭉날쭉 섞여 있고, 가운데는 부인(婦人)의 무덤이 있습니다. 석함교(石函橋)는 수마두(水磨頭)에 있는데, 백낙천의 〈호석기(湖石記)〉에, 전당을 또한 상호(上湖)라 부르니 북쪽에 석함(石函)이 있다'고 한 곳이 곧 이곳입니다. 총의원(摠宜園)은 덕생당(德生堂) 서쪽에 있는데, 소동파 시의, 아담하고 짙은 분장이 모두 서로 알맞다’에서 '총의(摠宜)’ 두 글자를 따서 어필(御筆)로 당(堂)의 편액(扁額)에 썼던 것입니다. 단교(斷橋)는 총의원의 서쪽에 있으니 이른바 '단교의 지는 해에 오사모(烏紗帽)를 젖혀 쓴다고 한 곳이 곧 이곳입니다. 서석두(西石頭)는 석함교의 서쪽에 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다에 떠서 배를 닻줄로 매었던 곳입니다. 고산(孤山)은 서호의 고산로 (孤山路) 서쪽에 있는데 고산의 동쪽에 임화정(林和靖)이 숨어살던 초려(草廬)의 옛터와 무덤이 있습니다. 삼현사(三賢祠)는 소공제 제삼교아래에 있으니, 곧 백문공(白文公)·임화정(林和靖) · 소문충공(蘇文忠公) 의 사당이었습니다. 이상의 고적들은 모두 고벽이 신에게 얘기해 준 것입니다. 항주는 곧 동남방의 큰 도회(都會)로서, 가옥이 잇달아 행랑을 이루고 치맛자락이 이어져 장막을 이뤘으며, 저자에는 금은이 쌓여 있고 사람마다 비단옷을 걸쳤습니다. 그리고 만장(橋), 해박(海舶)이 빗살처럼 죽 늘어서 있고, 거리에는 주렴(酒帝)과 가루(歌樓)가 가깝게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며, 사철에 시들지 않는 꽃이 있고, 팔절(八節)에 늘 봄과 같은 경치가 있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별천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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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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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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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지휘 양왕이 신 등을 호위하여 무림역(武林驛)에서 길을 떠나 20여 리를 가서 성의 북문에 이르니, 문은 3층 겹성이었고 외문(外門) 또한 2층이었는데, ‘무림지문(武林之門)'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성안에서 층문(門) 14개, 대교(大橋) 10여 개, 묘(廟) 3개, 포(鋪) 2개 등을 지나왔습니다. 신은 당나귀를 타고 빨리 달려갔으므로, 더러 그 이름을 적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수정공관(水亭公館)·해원문(解元門)·진교사(眞敎寺) · 등영주문(登流洲門)·운봉문(雲鳳門)·관광문(觀光門)·진사방(進士坊)·공원(貢院). 형구문(亨衛門)·천승묘(千勝廟)·안공묘(公廟)뿐입니다. 겹 성 밖에 오산역(吳山驛)이 있고, 오산역 앞에는 오산포(吳山鋪)가 있었는데 그 밖의 세 대교(大橋)와 네 문은 모두 그 이름을 잊었습니다. 문 밖으로 10여 리 가는 동안 상점이 서로 잇따라 있어 또한 성 안과 같았습니다. 가다가 천비궁(天妃宮)에 이르니, 천비궁 앞이 곧 덕승파하(德勝鬪河)였습니다. 강가에 화방(畵)이 연달아 있어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양왕은 그 아우 양승(楊昇)과 송문위천호(松門衛千戶) 부영(傅榮), 전당 사람 진훤(陳萱)과 종자 이관(李寬)·하빈(夏__)·당경(唐敬)·두옥(杜玉) 등 7-8인과 한 배를 같이 타고, 신은 배리(陪吏) 등과 북경 사람 이절 · 김태와 한 배를 타고, 신이 데리고 간 허상리 등이 한 배에 탔습니다. 보제교(普濟橋)를 지나니 다리에는 홍문(虹門) 세 개가 있었고 다리 위쪽으로 화광사(華光寺)와 강창교(江張橋)가 있었습니다. 강창교 다리에는 네 개의 홍문이 있고, 강창교 위에는 강창포(江웠鋪)가 있었습니다. 향적사(香積寺)앞에 이르러 조금 머물렀는데, 절에는 병방리(兵房吏)와 전부리(典簿吏)가 있었으며, 이 절은 곧 소동파가 노닐던 곳이었습니다. 덕승파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온주(溫州)·처주(處州)·태주(台州)·엄주(嚴州)·소흥(紹興)·영파(寧波) 등 절강 이남의 상선이 모두 모였는데, 돛대가 총총 잇닿아 있었습니다. 밤에 통시교(通示橋) 등 세 다리를 지났는데, 강이 넓은 까닭으로 다리에는 모두 다섯 개의 홍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매우 높고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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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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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덕현(崇德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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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사촌하(謝村河)를 거슬러 동쪽으로 가니, 그 남쪽은 돌로 쌓은 새 제방으로서 길이가 30여 리나 되었습니다. 물어 보니 도지휘사, 포정사, 안찰사 등 삼사(三司)에서 새로 쌓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십이리양(十二里洋)·견제교(堅濟橋)·보안교(普安橋)· 대윤묘(大尹廟)를 지나니 강은 곧 홍려하(鴻麗河)이고, 홍려하 위의 관해(官海)는 당서진(棲鎭)이었습니다. 관인(官人) 한신(韓神)이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어머님께서 당신이 이곳에 도착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바다 위의 하늘이 망망한데 기러기는 아득하고 물고기는 가라앉았으니, 어머니께서는 필시 내가 이미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으리라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으니, 나처럼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없습니다. 지금 대국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게 된다면 모자가 서로 보게 됨이 수도(遂道) 밑에서 서로 만나는 기쁨보다 더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과당교(塘橋)·만수교(萬壽橋)·복록수교(福祿壽橋) ·복덕교(福德橋)·보제교(普濟橋)·팽화교(彭和橋)를 지나서, 그 물 이름을 물으니 승침하(丞沈河)였습니다. 또 은영문(恩榮門)·대덕신교(大德新橋) 삼리교(三里橋) · 산천단(山川壇)·어계교(語溪橋)를 지나서 숭덕현(崇德縣)에 도착하니, 자(字)가 요경(堯卿)인 지현 조희현(趙希賢)이 양식과 반찬을 매우 넉넉하게 보내왔습니다. 수부(水夫)가 신에게 말하기를, “지나온 곳에 장안역(長安驛)이 있었는데 대인께서는 알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몰랐소.” “이는 양(楊) 지휘의 종자 진훤이 지급하는 양식과 반찬을 착복하고는, 대인이 알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또 숭덕하(崇德河)에서 배를 끌고 올라가 종교(終橋), 세과국(稅課局), 영안교(永安橋), 양제원(濟院), 삭의문(湖義門)을 지났는데, 지나온 곳에는 큰 홍교(虹橋) 예닐곱 개가 있었습니다. 밤 3경에 조림역(自林驛)을 지나 밤새도록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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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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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흥부(嘉興府)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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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삼탑만(三塔灣)을 거슬러 올라가 삼탑포(三塔鋪)를 지나 경치 좋은 용연(龍淵) 앞에 이르니, 큰 탑 셋이 강가에 있었습니다. '삼탑'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 용왕묘(龍王廟), 가화체운소(嘉禾遞運所), 조씨정절문(趙氏貞節門), 사직단(社稷壇), 향주교(香珠橋)를 지나 서수역(西水驛)에 이르렀습니다. 서수역 앞에 돌기둥을 세워 강 가운데에다 100여 보쯤에 행랑집을 지었는데, 배를 행랑 아래에 닻줄로 매어 두었습니다. 역승 하영(何榮)이 시 세 절구를 지어 주므로 신도 화답하였습니다. 하영은 채찬(菜饌), 건계(乾雞), 팔대어(八帶魚) 등 물품을 특별히 가져다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정의 낭중(郞中) 기순(部順)과 행인(行人) 장근(張)이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황화집(皇華集)》을 지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서거정(徐居正)166이 맨 첫줄에 있었습니다. 그의 시에, 영명한 황제께서 삼한(三韓)의 일을 묻는다면, 문물과 의관은 상국(上國)과 같다고 하오'라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족하를 뵈니, 진실로 천년 동안에 한 번 만나게 되는 좋은 기회인데, 저를 내치지 않으시고 다시 화답하는 시를 얻는 은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삼가 변변치 못한 예물을 드리오니 배 안에서 드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눈에 찬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기(郁) 낭중의 문장과 고매한 덕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바인데, 지금은 무슨 관직이며, 장(張) 행인은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기 낭중은 귀주(貴州) 석천부(石F府)의 지부(知府)로 폄직(反職)을 당하였는데, 지금은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장 행인은 죄를 받아 지금은 금의위(錦衣衛)의 군인으로 충당되었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서거정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168입니다.” 하영이 말하기를, “서거정은 문장가로서 해동의 인물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서수역에서 큰 다리 하나를 지나 가흥부에 이르니, 곧 옛날의 휴리성(携李城)으로서 월(越) 나라가 오(吳) 나라를 격퇴시켰던 땅이었습니다. 성 안에 부치와 수수현(秀水縣), 가흥현(嘉興縣) 두 현의 치소가 있었습니다. 강은 성을 둘러싸, 동남쪽에서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 가옥의 크고 웅장함과 문물의 번화함은 또한 영파부와 같았습니다. 신은 성 남쪽에서 삼청갑(杉靑)을 지나 당 나라 승상 육지(陸)19가 옛날에 살던 마을에 이르니, 마을은 성의 서쪽에 있었으며, 정문(産門)은 강가에 있었습니다. 또 안양문(安洋門)· 운정문(雲程門)·단병교(丹兵橋)·영복교(永福橋)·송청순검사(松靑巡檢司)를 지났습니다. 밤에 또 비를 무릅쓰고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가서 새벽에 평망역(平望驛)'에 도착하여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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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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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강현(吳江縣)을 지나 소주부(蘇州府)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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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배를 당겨 평망하(平望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영은문(迎恩門)·안덕교(安德橋)' · 대석교(大石橋)·장로포(長老鋪)' - 야호(野湖)·앵두호(陰虛湖)를 지났습니다. 호수가 언덕에 제방을 돌로 쌓았는데 10여 리 정도 되었습니다. 또 오강호(吳江湖)의 석당(石塘)·대포교(大浦橋)·철포교(徹浦橋)'를 지나서 구리석당(九里石塘)74에 이르니, 석당(石塘)은 태호(太湖)를 가두고 있었습니다. 태호는 곧 우공(禹貢)>의 '진택(震澤)이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곳과 《주례(周禮)》의 〈직방(職方)〉에 '양주(楊州)의 호수를 구구(具區)'라 한다'는 곳이 이곳입니다. 어떤 이는 '오호(五湖)'라고도 부르는데 그 길이가 500여 리가 되는 까닭에 이름 지어진 것으로 범려(范義)'가 노닐던 곳입니다. 19 호수 안에 동정동산(洞庭東山)과 동정서산(洞庭西山) 두 산이 있는데 '포산(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눈앞이 천리나 되었고, 높은 바위와 첩첩한 계곡이 광활한 물 사이에 점을 찍은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호수의 동북방에 영암산(靈岩山)'이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연석산(視石山)'이라고도 불렀으니, 곧 오나라에서 관와궁(館娃宮)'을 연석산에 건축한 곳이 이곳입니다. 연석산은 고소산(姑蘇山)과의 거리가 10리인데, 산세가 서로 이어져 태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태호의 북쪽에는 또 산 하나가 있었는데, 이를 바라보면 한없이 넓어 아득했으니 바로 횡산(橫山)이었습니다. 태호 방죽에 이르니 방죽은 돌로 쌓은 것으로서 호수의 남북으로 가로질러 있었습니다. 50여 리쯤 가니 곧 수홍교(垂虹橋)였는데 홍문은 400여 개의 구멍이 촘촘히 서로 잇따라 있었습니다. 그 큰 것으로는 목장교(木莊橋)·만경교(萬頌橋)' 84 등과 같은 다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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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호방죽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용왕묘(龍王廟)·태호묘(太湖廟)85 · 축성문(祝聖門)을 지났습니다. 축성문(祝聖門) 앞에 큰 탑이 있었는데, 탑은 14층으로서 층마다 모두 지붕을 얽었으므로, 이를 바라다보니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 같았습니다. 또 주절문(駐節門)을 지나서 송릉역(松陵驛)'에 이르러 배를 잠시 멈추었다가 지나갔습니다. 은영문(恩榮門)·회원문(會元門)·도실조사문(都室造士門)·진사문(進士)·예모문(譽聖門)·유학(儒學)·대명교(大明橋) · 등과문(登科門)을 거쳤습니다. 이른바 태호방죽은 또 역 앞의 마을 가운데를 통해서 바로 오강현(吳江縣)에 이어졌는데, 그 사이에 또 돌로 만든 큰 다리가 있어 홍문이 모두 70여 구멍이나 되었습니다. 역과 현이 모두 태호의 섬 안에 있었으며, 옥사(屋舍)가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아래에 주춧돌을 놓고 위에 돌기둥을 세워 호수를 둘러싸 돛대가 여염() 속에 나뭇단처럼 서 있었으니, 이른바 '사면으로 어가(漁家)가 현성을 둘렀다"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노를 저어 삼리교(三里橋)', 영은암(迎恩養)을 지나 윤산호(尹山湖)를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서쪽에 바라다 보이는 한 산을 물으니 사자산(絲子山)이었습니다. 그 북쪽에 산이 있었으니 고소산(姑蘇山)89 이었습니다. 송강(松江)'은 윤산호(尹山湖)의 동쪽에 있었습니다. 또 노를 저어 윤산포(尹山鋪)', 윤산교(尹山橋)를 지나가니, 왼쪽에 배로 만든 부교(浮橋)가 있었는데 3리 정도 되었습니다. 보대교(寶帶橋)에 이르니 다리에는 또 홍문 55개92가 있어 배와 수레가 왕래하는 요충이었으며, 담대호(濬臺湖)'93 건너 아름다운 호수와 산의 경치는 바라보면 허리띠를 두른 것과 같았으니 바로 추응박(鄒應博)이 다시 세운 것이었습니다. '94 밤 3경에 소주성 동쪽에 가까이 가서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돌아 고소역(姑蘇驛)'95 앞에 이르렀습니다. 보대교에서 이 역에 이르기까지의 양쪽 언덕에 시점(市店)이 서로 잇닿아 있고 상선(商船)이 한 곳으로 몰려드니 참으로 이른바 동남방의 큰 도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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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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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소역 앞에서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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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소주는 곧 옛날 오왕(吳王) 합려(固)96가 오자서(伍子昏)에게 성을 쌓게 하여 도읍으로 정했던 곳입니다. 성 둘레는 항주와 같았으며, 부치와 오현(吳縣), 장주현(長洲縣)의 치소도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성의 서문(胥門)'97에 옛날에는 고소대(姑蘇臺)98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역이 되었습니다. 물속에 나무를 세워 황주(滉柱)'를 만들고 돌 제방을 3면으로 만들었는데, 황화루(皇華樓)는 그 앞에 기대 있고, 소양루(昭陽樓)는 뒤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이 부영(薄榮)에게 묻기를, "이 역이 고소대의 터라면 바로 옛날 오왕이 대(臺)를 축조했던 곳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아닙니다. 옛날의 이른바 고소대는 고소산(姑蘇山)에 있었으니, 오왕 합려가 산에 의거하여 대를 만든 것을 부차(夫差)가 다시 넓힌 것인데 허물어진 집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소흥(紹興) 연간에 또 대를 이곳에 축조하고는 고소대라 명칭하여 고사(故事)를 보존했는데, 지금 또 없어지고 역이 되었던 것을 다시 성안에 대를 축조하고는 '고소'란 명칭으로 액자를 붙였던 것입니다" 운운하였습니다. 동쪽에는 체운소(遞運所)가 있고, 또 산해진(山海鎭)이 있었는데, 태호의 물은 석당(石塘)을 거쳐 운하로 흘러 들어가고, 성 동쪽을 거쳐 서쪽으로 가서 역에 이르게 됩니다. 오자서가 살았기 때문에 또 '서호(胥湖)'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호수의 너비는 100여 보나 되는데, 북쪽으로는 시가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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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간 사이로 광선이 반사하니, 빛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듯하였습니다. 성서쪽의 여러 산 가운데 천평산(天平山)이 한 봉우리를 군(郡)의 진산(鎭山)이라 하였습니다. 그 군에서 경치 좋은 산은 영암산(靈巖山)202, 오오산(五鳥山), 앙천산(仰天山)203, 진대산(秦臺山)204 으로서 질서 정연하게 벌여 있었는데, 역이 적당히 위치하고 있어 참으로 경치가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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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오에 성이 왕(王)과 송(宋)인 안찰어사(按察御史) 두 대인이, 역 안에 와서 저를 예빈관(禮賓館)에서 대접하고는, “당신 벼슬은 무슨 품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5품 벼슬입니다.” “당신은 시를 잘 짓습니까?”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모두 경학의 궁리(窮理)로 업을 삼고 풍월을 농(弄)하는 것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저도 시와 사(詞)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는데 지금도 후손이 있습니까? 또한 사당과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기자의 후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서 마한(馬韓)으로 달아나 도읍을 정했는데, 후에는 백제에게 멸망을 당하고 지금은 후사가 없습니다. 기자의 사당은 평양에 있는데, 국가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에 분향을 하고 생폐(性幣)205를 올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귀국은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스런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적절하였고, 병졸은 모두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따르고 그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오히려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던 것입니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物産)은 많고 땅은 크며,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성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두 대인은 다 묻고 나서 외랑(外郞)을 시켜서 쌀 1쟁반, 두부 1쟁반, 국수사리 1쟁반을 받들고 와서 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시를 지어 사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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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정(鄭)씨 성을 가진 관원이 약헌(約軒)'의 시(詩)에 화운(和)해 주기를 청하기에 바로 차운(次韻)해 주었더니, 그 관인이 또 쌀 6되, 거위 1마리, 채소 1쟁반, 호두 1쟁반을 보내왔습니다. 또 나(羅) 태감의 가동(家o)으로 유(柳)씨 성을 가진 자는 나이 겨우 15-16세인데도 말씨가 맑고 단아하였습니다. 그는 성 안에서 와서 음식을 접대하였는데 종자들에게도 두루미쳤습니다. 이절과 김태도 반찬을 사 가지고 와서 대접하였습니다. 밤 3경에 또 달빛을 이용하여 노를 저어 북쪽으로 가서 창문(門)을 지나니, 창문 밖에는 통파정(通波亭)08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예전 이름은 '고려정(高麗亭)'이라 합니다. 송나라 원풍(元豊) 연간209에 건축하여 고려에서 조공하던 사신을 대접했던 곳이었습니다. 고려정 앞에는 집과 담이 잇닿아 있으며, 배들이 빗살처럼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 접관정(接官亭)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접관정의 서쪽에 큰 탑이 보였는데 이곳이 곧 한산선사(寒山禪寺)로서 이른바 고소성 밖의 한산사'라는 곳입니다. 그 땅 이름을 물으니 풍교(楓橋)라 하고, 그 물 이름을 물으니 사독하(射흰河)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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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주는 옛날에 오회(吳會)라 불렸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바다에 연하고, 삼강(三江)을 끼고 오호(五湖)를 둘렀으며 비옥한 들판이 천 리나 되고, 사대부들이 많이 모인 곳입니다. 사라능단(紗羅綾殺), 금은주옥과 같은 바다와 육지의 진귀한 보물과 온갖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들과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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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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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장하고 있었는데, 지금 또한 소주를 지나 북경을 향해 가면서 먼저 와서 이곳에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어사(御史) 세 대인이 와서 배 위에서 전송하다가 신을 맞이하여 앞에 오게 하고는 예절로 대우하고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의 좋은 사람이므로, 우리들 모두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묻기를, “천순(天順), 성화(成化) 연간에 태감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당신 나라에 사신 갔었는데, 당신은 성명을 차례대로 댈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천순 연간에는 제가 강보 속에 쌓여 있었던 까닭에 나랏일을 알지 못합니다. 성화 연간에는 태감 정동(鄭同)22 · 강옥(玉)223. 김흥(金興)224 이 서로 잇달아 사신으로 왔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글을 써서 보이기를, “정 태감과 강 태감은 모두 이미 작고(作古)하고, 김 태감만이 북경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작고'란 두 글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일러 작고라 하니,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어서, “당신나라에서는 무엇이라 이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고(物故)'라고 합니다.” “물고'는 무슨 뜻입니까?” “물(物)은 일이고 고(故)는 없음이니, 죽은 사람은 다시 일을 할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나라에서는 어떤 경서를 높이고 있습니까?” “유사(儒士)들은 모두 사서와 오경만 배워 익히고 다른 기예(技藝)는 배우지 않습니다.” “당신 나라에도 학교가 있습니까?” “국도(國都)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또 종학(宗學)225과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 26이 있고, 주(州)·부(府)·군(郡)·현(縣)에도 모두 향교(鄕校)와 향학당(鄕學堂) 28이 있고, 또 집집마다 모두 국당(局堂)이 있습니다.” “옛날의 어떤 성현을 숭상합니까?” “대성지 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30을 숭상합니다.” “당신 나라에서는 상례(喪禮)를 몇 해나 행합니까?”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를 따르고, 참최(斬衰)와 자최(齊衰)는 모두 3년을 행하며, 대공(大功)232 이하의 상복(喪服)도 모두 등급이 있습니다.” “당신나라의 예절에는 몇 조목이 있으며, 형벌에는 어떤 조목이 있습니까?" “예절에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233가 있고, 형벌에는 참형(斬刑)·교형(敍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刑) 34 이 있어 한결같이 《대명률(大明律)》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당신나라는 어떤 정삭(正朔) 35을 사용하며, 어떤 연호를 사용합니까?” “한결같이 대명(大明)의 정삭과 연호를 따릅니다.” “금년은 무슨 연호입니까?” “홍치(弘治) 원년입니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대명이 해상에 처음 돋아서 만방에 비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대국과 한 집안이 되어 공물을 헌납함이 끊어지지 않는데,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당신나라의 관복(冠服)도 중국과 같습니까?” “무릇 조복(朝服)236 · 공복(公服)37. 심의(深衣) 38 원령(圓領)39은 한결같이 중화의 복제와 같으나, 다만 철릭의 주름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이어서 신으로 하여금 배리(吏) 이하 종자들을 불러 와서 상하의 주례(酒禮)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 이하 종자들에게 명령하여 읍양(駐讓)240으로 예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태감은 세 대인과 함께 눈짓을 하며 담소하고는 이어 쌀 20되, 돼지고기 1쟁반, 채소 1쟁반, 약과(藥果) 1쟁반, 술 5동이를 주었습니다. 신 등은 사례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드디어 배를 타고 보원교(普圓橋)·보은교(普恩橋)·호서포(清單鋪)·오가점(吳家店)·장공포(張公鋪)·불평득승교(不平得勝橋) 42. 통병교(通兵橋) 243망정순검사(望亭巡檢司)·마묘포(馬墓鋪)·순안교(純安橋)를 지나, 밤을 타서 가다가 4경에 석산역(錫山驛)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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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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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주부(常州府)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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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아침에 성명은 잊은 무석현(無錫縣)의 지현244이 와서 찬거리를 주었습니다. 석산역에서 건도교(建渡橋)를 지나 무석현치(無錫縣治)의 안으로 들어왔는데, 무석현은 곧 옛날 구오(句吳) 태백(太伯)245이 도읍했던 곳이었습니다. 건홍교(建虹橋)·도헌문(都憲門)·소사구제(少司寇第)46. 억풍교(億豊橋)·진사방(進士坊)을 지나 석산(錫山)의 아래에 이르렀는데, 석산은 무석현의 서쪽과 북쪽 사이에 있었습니다. 또 석산에서 십리포(十里鋪)·고교순검사(高橋巡檢司) 47. 반봉포(潘q鋪) 48. 낙사포(洛社鋪)·석독교(石潭橋)·횡림진포(橫林鎭鋪)·횡림교(橫林橋)·척서포(戚墅鋪)·흥명교(興明橋)를 지나 검정(劍井)에 이르렀습니다. 검정은 동쪽 언덕에 있었는데 지붕을 만들어 덮었으니, 곧 상서로운 기운이 올라오는 곳이었습니다. 해질 무렵 마안포(行爲鋪)249, 대교(大橋)를 지나 채릉교(采__橋)에 이르렀습니다. 채릉교의 동쪽, 서쪽에는 모두 2층 누각을 지어서 길을 막고 있으니 곧 진사패루(進士牌樓)였습니다. 또 큰 홍교(虹橋) 셋을 지나 상주부에 이르러서 동수관(東水關)250으로부터 성에 들어갔습니다. 상주부의 부치와 무진현(武進縣)의 현치는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지나온 홍교 또한 7-8개나 되었습니다. 10여 리를 가서 비릉역(此陵驛)에 이르러 조금 머물렀다가 다시 서수관(西水關)으로 나왔습니다. 상주부는 곧 연릉군(延陵郡)이므로, 오나라 계자(季子)252의 채읍(采邑) 53 으로서, 호수와 산의 아름다움과 정(亭)과 대(臺)의 설치는 예로부터 명성이 자자합니다. 또 체운소(遞運所)254와 패하교(流河橋)를 지나 분우대파(奪牛大廟)에 이르러, 배를 당겨 매고 언덕으로 끌어올려 겨우 방죽의 끝을 지나니 날이 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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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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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역(城驛)을 지나 진강부(鎭江府)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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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다가 오후에는 구름이 끼어 어둠침침하였습니다. 아침에 장점포(長店鋪), 여성진순검사(呂城鎭巡檢司)55, 태정교(泰定橋)256를 지나서 여성역에 이르렀습니다. 여성파(呂城) · 여성갑(呂城聞) · 여성포(呂城鋪)·청휘관(淸徽觀)·청룡교(靑龍橋)·당가구(唐家溝)·책구포(口鋪) ·육조포(陸朝鋪)·자운사(慈雲寺)257. 성서포(聖聖鋪)·칠성교(七星橋)·장락포(長樂鋪)·정선원(定善院)·혜정교(惠政橋)25%를 지나서 운양역(雲陽驛)에 이르니, 강의 이름은 윤하(潤河)였습니다. 또 운양교(雲陽橋)259.승은문(承恩門)·귀신단(鬼神壇)·영진관(寧眞觀)·신교(新橋)260신하교(新河橋)를 지나서 단양현(丹陽縣)에 이르니, 단양현은 윤하 가에 있었습니다. 단양현을 지나서 신묘(新廟)·광복교(廣福橋)·칠성묘(七星廟)261.백강묘(柏岡廟)를 거쳐, 밤에 감수갑(減水) 62 . 만경호(萬景湖)·신풍진(新豊鎭)을 지났습니다. 큰비가 내리는데 밤새도록 가서 진강부(鎭江府)의 신문(門)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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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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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자강(揚子江)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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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신 등은 남수관(南水關)263에서 전성하(甄城河)를 거슬러 올라가 진강부성(鎭江府城)을 끼고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서 신파(新鬪)를 지나 경구역(京口驛)에 이르러 머물렀습니다. 저녁에 걸어서 경구갑(京口)264을 지나 통진체운소(通津遞運所)에 이르니, 통진은 물이 얕아서 반드시 조수가 이르기를 기다려야 대강(大江)과 통할 수 있는 까닭에 배를 바꾸어 타고 머물러 조수가 이르기를 기다려 강을 건너갈 준비를 하였 습니다. 이절과 김태 등은 신에게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길을 따라 다니면서 거듭 보살핌을 받았는데 오늘 서로 헤어져 당신은 양주(揚州)를 향하고 나는 의진(儀眞)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늦은 봄에 또 북경을 향하여 갈 것이니 바로 회동관(會同館)265 으로 당신을 찾아뵙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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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강부는 곧 윤주성(州城)이니 손권(孫權)266이 단도(丹徒)로 옮겨 철옹성(鐵瓷城)을 쌓고 이를 경성(京城)이라 불렀던 곳입니다. 진강부의 부치와 단도현의 현치는 성안에 있었습니다. 성 동쪽에 또 철옹지(鐵瓷地)가 있었으나 그 성은 없었습니다. 향오정(向吳亭)은 성 서남쪽에 있고, 북고산(北固山)은 서북쪽에 있었으니 곧 양무제(梁武帝)269가 명명한 것입니다. 대공산(戴公山)은 서남쪽에 있었으니 곧 송무제(宋武帝)가 노닐던 곳이었습니다. 감로사(甘露寺)와 다경루(多景樓)는 모두 성 동북방에 있었습니다. 초산(焦山)74과 은산(銀山)75에는 모두 거찰(巨刹)을 세웠는데 성 북쪽에 있었습니다. 금산(金山)은 대강(大江)의 가운데에서 은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며, 위에는 용연사(龍延寺)가 있었으니 곧 송진종(宋眞宗)이 꿈에 노닐던 곳278이었습니다. 부성(府城)의 동북 모퉁이는 강 언덕에 접해 있었으니 강은 곧 양자강으로서 속칭 '양자강(洋子江)'이라 하였습니다. 강의 너비는 20여 리나 되는데, 민산(眠山)에서 발원하여 한수(漢水)와 만난 다음, 남경을 거쳐 이 진강부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가니, 곧 우공>의 '민산(眠山)에서 강(江)이 발원하여'라는 곳이 이곳입니다. 동쪽으로 오군(吳郡)과 회계군(會稽郡)에 통하고, 서쪽으로 한수(漢水)와 면수(酒水)에 접하며, 북쪽으로 회수(淮水)와 사수(四水)에 이르고, 남쪽으로 복건과 절강에 도달하니 참으로 사방에서 모두 모여드는 큰 도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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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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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릉역(廣陵驛)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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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수부신사(水府神祠)19에서 배를 출발시켜 양자강에 이르니, 강가의 5-6리 사이에는 육지에서 배를 손으로 밀고 가는 사람이 앞뒤에 잇따라 있었습니다. 신 등이 돛을 달고 강 가운데에 이르니 금산아래의 강돈(江豚)280이 물결을 희롱하는 것이 마치 전마(戰馬)가 떼를 지어 달리는 듯하였습니다. 서진도(西津渡)의 마두석제(馬頭石堤)에 이르니, 나무 기둥을 물속에 세워서 긴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리 아래에 배를 매고는 다리를 따라 석제(石堤)의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강회승개루(江崔勝槪樓)282는 길을 막고 솟아 있어, 신 등은 누각 아래를 걸어 과주진(瓜洲鎭)283을 지나 일명 진상하(鎭上河)라고도 하는 시례하(是禮河)에 이르러서 다시 배를 타고 갔습니다. 양왕이 부영(傅榮)을 시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한노로(韓老老)284란 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아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한씨(韓氏)가 대국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왕이 말하기를, “바로 이 한씨가 귀국의 부인(婦人)으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대행황제(大行皇帝)285의 유모가 되었소. 지금은 이미 작고하여 천수사(天壽寺)에 무덤을 만들었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이 지휘(指揮)가 바로 한씨의 장례를 감독한 분인 까닭에 물어 보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반계문(攀桂門), 남경전창(南京甄r), 기구우택사(祈求雨澤祠), 칠전보(七錢鋪), 화가원포(花家園鋪), 어정포(魚井鋪), 금성택(城澤), 양자포(揚子鋪)를 지나서 양자교(揚子橋)에 이르니, 다리는 없어졌고 표지가 달린 각(閣)과 교창(橋倉)이 있었을 뿐입니다. 날이 저물녘에 청량포(淸凉鋪)를 지나 밤에 광릉역(廣陵驛)에 이르렀습니다. 광릉역 북쪽으로 1리쯤 가면 곧 양주부성(揚州府城)입니다. 성안에 양주부치(揚州府治)와 양주위(揚州 衛)286, 강도현치(江都縣治), 양회운염사(兩進運鹽司)287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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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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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부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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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아침에 광릉역을 떠나 양주부성을 지났습니다. 양주부는 곧 옛날 수(隋)나라 강도(江都)의 땅으로서 강좌(江左)288의 큰 진(鎭)이었습니다. 10리의 주렴(珠簾)289, 24교(橋)90, 36피(陵)'의 경치는 여러 군(郡) 가운데 제일이었으니, 이른바 '봄바람이 성곽을 흔들고, 귓전에 가득한 노랫가락' 292 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신 등은 배를 타고 지났기 때문에 구경할 수가 없었으니, 볼 수 있는 것은 진회루(鎭准樓)뿐이었습니다. 진회루는 곧 성의 남문으로서 3층이었습니다.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하국공(夏國公)의 신도묘(神道廟)·관음당(觀音堂)·회원장군(懷遠將軍) 난공(蘭公)의 무덤 · 안공묘(晏公廟)·황건파(黃巾)·북래사(北來寺)·죽서정포(竹西亭鋪)·수정청(收釘廳)·양자만순검사(揚子灣巡檢司)·만두관황묘(灣頭關荒廟)·봉황교돈(鳳凰橋數)·회자하포(子河鋪)·하박팔탑포(河泊八塔鋪)294. 제오천포(第伍淺鋪)·세과국(稅課局)·사리포(四里鋪)·소백보공사(卽伯寶公寺)·영은문(迎恩門)을 지났는데, 지나온 곳에 갑(開) 2개가 있었습니다. 소백역(邵伯驛)에 이르니 역 북쪽에는 소백태호(邵伯太湖)가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 호수를 따라 2-3리가량을 가서 소백체운소(邵伯遞運所)에 이르렀는데, 물이 불어나고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 밤에 호수를 지나갈 수가 없으므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항주성 이후부터는 지나온 위소(衛所)95에서 또한 백호를 번갈아 차출하여 호송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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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위백호(揚州衛百戶) 조감(趙鑑)이란 자가 신에게 말하기를, “6년 전에 당신 나라의 이섬296 이란 분이 또한 이곳에 표류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이섬이 표착했다 돌아간 전말을 물으니 조감이 말하기를, “이섬이 처음에 바람을 만나 양주 굴항채(掘港)에 도착하니, 수채관(守寨官) 장승(張昇)이 백호 상개(桑愷)'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아와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어느 순검(巡檢)이 '서방사(西方寺) 98에 편히 묵게 하라’라 말하고, 배를 타고 지나온 길을 심문하느라 1개월 가까이 머물렀는데, 연해비어도지휘(沿海備禦都指揮) 곽(郭) 대인 99이 이섬에게 '돛 열 폭이 바람을 막아내지 못했네'라는 글귀가 있음을 보고는 그가 좋은 사람임을 깨닫고 손님과 벗의 예로 대접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신에게 묻기를, “당신이 배를 댔던 해안에서 이곳까지는 모두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두 앞 바다에서 도저소에 이르고, 항주를 거쳐서 또 양주에 이르렀으니, 지나온 길이 무려 2천5백여 리는 될 것입니다.” 조감이 말하기를, “이섬은 이곳에 이르러 오히려 고향이 멀다고 근심했는데, 지금 당신의 근심은 이섬보다 배는 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섬은 단순히 길이 멀다고 근심했지만, 내가 괴로운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염습도 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늙어 살아 계시지만 자식의 직분을 못했으며, 나그네의 길은 멀기만 하니, 비통한 마음은 천지가 캄캄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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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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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성역(孟城驛)301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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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소백체운소郡伯遞運所)에서 소백호(邵伯湖) 신당(新塘)을 따라 소백순검사(郡伯巡檢司)·소백진(郡伯鎭)302. 마가도포(馬家渡鋪)·삼구포(三溝鋪)·요포(腰鋪)·노근열녀사(露筋烈女祠)03. 노근포(露筋鋪)·왕금포(王琴鏞)·팔리포(八里鋪)304를 지났습니다. 신당(新塘)의 석축은 길이가 30여 리나 되었습니다. 또 신개호(新開湖)를 따라 밤 2경에 우성역에 이르렀는데, 우성역은 고우주(高郵州) 성 남쪽 3리 밖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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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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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우주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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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첫 닭이 울 무렵 우성역을 떠나 고우주를 지났는데, 고우주는 곧 옛날의 한주(印州)였습니다. 한구(溝)는 한강(寒江)이라고도 부르는데, 남북의 수로를 둘러싸고 있는 요충이었습니다. 고우주의 성은 큰 호수에 임해 있으니 호수는 곧 고우호(高郵湖)였습니다. 강호의 경치가 뛰어나고 사람과 재물은 많아 또한 강북의 수향(水鄕)305 이었습니다. 대개 하(夏)나라 우왕(禹王)306 때는 양자강과 회수가 서로 통하지 못했던 까닭에 우공에는 강과 바다를 따라서, 회수와 사수(泗水)에 도달한다'30고 했고, 오왕 부차(夫差) 때에 이르러 비로소 한구(弔構)를 개통했으며, 수나라 사람이 이를 넓혀서 뱃길이 비로소 개통되었던 것입니다. 또 서하당(西河塘)에 이르니 서하당은 호숫가에 있었는데 목책(木)의 길이가 70여 리나 되었습니다. 호수 가운데에는 섬이 있고 섬에는 칠공묘(七公廟)가 있었는데, 바라보니 아득하게 바라보이는 것이 도관(道觀)과 같아 보였습니다. 또 번장군묘(樊將軍廟)308·전총포(前總鋪)·당두포(塘頭鋪)·순검사(巡檢司)·장가포(張家鋪)309. 정정포(井亭鋪)·당만포(塘灣鋪)를 지나서 계수역(界首驛)에 이르니, 역은 체운소와 동쪽 서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진훤은 군리(軍吏)로서 양왕을 따라왔는데, 조금 문자를 터득했기 때문에 양왕이 서수(書手)를 맡겼습니다. 진훤은 욕심 많기가 비할 데 없었고 아주 간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우리 군인 김속(金喪)에게 노염을 품어 양왕에게 호소하니, 양왕이 김속을 잡아다 곤장 10대에 처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서 양왕에게 고하기를, “지휘께서는 우리들을 호송하면 될 뿐인데, 마음대로 우리 이국인에게 곤장을 때리니 그런 법규가 있습니까? 우리 군인들은 실로 장님과 벙어리 같습니다. 더러 잘못이 있더라도 알도록 깨우쳐 주며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인데 도리어 구타하니 상국(上國)이 먼 나라 사람을 호송하는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양왕은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몰래 알려주기를, “양공(楊公)은 본디 북경사람으로서 항주위(杭州衛)로 배치되었는데 글을 읽지 못하여 사리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여러 번 그에게 간하였으나 그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행하니, 책망할 거리도 못 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비를 무릅쓰고 가서 자영천(子要淺)을 지나 계수대호(界首大湖)를 따라가니, 호숫가에 또한 긴 제방이 있었습니다. 순검사(巡檢司), 괴각루(槐角樓)를 지나서 밤에 범수포(가水鋪) 앞에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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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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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음역(淮陰驛)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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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범광대호(가光大湖)와 보응대호(寶應大湖)를 지나서 안평역(安平驛)에 이르고, 또 보응현치(寶應縣治)를 지나고 백마대호(白馬大湖)와 백마포(白馬鋪), 황포포(黃浦鋪), 평하교(平河橋), 이경하(里8河), 진점(鎭店), 십리정포(十里亭鋪)를 지나서 밤에 회음역(淮陰驛)에 정박하였습니다. 범수포(1水鋪)에서 이곳까지 100여 리 사이에 동쪽 언덕에는 긴 제방을 쌓았는데, 돌로 쌓기도 하고 말뚝을 박아 울을 만들기도 하여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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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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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안부(淮安府)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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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회음역의 건너편 언덕 마두성문(馬頭城門) 밖에는 표모사(漂母祠)가 있고, 그 북쪽에는 과하교(下)가 있었으니, 곧 한신(韓信)이 밥을 얻어먹고 욕을 당했던 곳이었습니다. 회음역은 또 체운소와 접해 있고 체부창(遞夫r)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회음역에서 노를 저어 회안부에 다가가니, 회안부는 곧 옛날의 동초주(東楚州)로서 실로 동남방의 중요한 진(鎭)이었습니다. 그 구성(舊城)의 안에 회안부치(淮安府治)·산양현치(山陽縣治)·회안위(淮安衛)와 도당부(都堂府)· 총병부(總兵府)·어사부(御史府) 등의 여러 관사(官司)가 있었습니다. 구성의 동쪽에 또 신성(新城)을 쌓았는데, 신성의 안쪽에 대하위(大河衛)316가 있었으며, 나머지 관사는 미처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성과 구성은 사이가 1리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호수가 두 성의 안팎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성과 인가는 모두 평도(平島)안에 있었습니다. 남도문(南渡門)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회하(淮河)에 이르니, 그 사이에 금룡사대왕묘(金龍四大王廟)17·부교정(浮橋亭)·용흥탑(龍興塔)·종루전(鐘樓殿)·뇌신점(雷神店)·서호하취(西湖河嘴)·노화상탑(老和尙塔)·초청(廳)·판갑(板開)·이풍갑(移風間)·봉저문(鳳門)·공부창(工部v)18. 청강갑(淸江間)19, 등교기봉문(騰蚊起鳳門)·청강폭주문(淸江輻藤門)·청강갑(淸江間)·상영창문(盈倉門)·천비묘(天起廟)· 동악인성궁(東嶽仁聖宮)·영자궁(靈慈宮)20 · 평강공양후묘(平江恭襄侯廟)·조운부(遭運府)322. 총창동가(總r東街)·총창서가(總r西街)·복흥갑(福興間)·현제사(玄帝祠)323.우성사(佑聖祠)·신장갑(新藏間)324 이 있었습니다. 또 그 사이에 봉양중도(鳳陽中都)·봉양좌위(鳳陽左衛)·용호우위(龍虎右衛)·용강좌위(龍江左衛)·표도위(韜衛)·표도전위(霜前衛)·회안위(安衛)·대하위(大河衛)·진강위(鎭江衛)·고우위(高郵衛)·양주위(楊州衛)·의진위(儀眞衛)·수군좌위(水軍左衛)·수군우위(水軍右衛)·부군전위(府軍前衛)·사주위(泗州衛)·비주위(亞州衛)·수주위(壽州衛)·장회위(長淮衛)·여주위(廬州衛) 등이 있었습니다. 회남(淮南)·강북·강남의 여러 위(衛)가 이곳에 모여 배를 만드는데 모두 선창(船廠)이 있었습니다. 무릇 장강과 회하(淮河)의 400-500리 사이의 땅은 소백호(邵伯湖)·고우호(高郵湖)·계수호(界首湖)·백마호(白馬湖) 등과 같은 큰 호수에 침식당했으니, 큰 호수는 4면으로 끝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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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 큰비를 무릅쓰고 회하를 건넜는데 황하(黃河)라고도 불렀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묻기를, “우공)을 살펴보면, 황하는 적석(積石)·용문(龍門)·화음(華陰)·저주(底柱)·대비(大죠) 등 여러 산을 지나고, 또 홍수(降水)와 대륙(大陸)을 지나 구하(九河)가 되고, 역하(逆河)325가 되어 동북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고, 회수는 동백산(桐柯山)을 지나 사수(泗水)와 기수(淨水)를 만나 동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게 됩니다. 임지기(林之奇)326는, '황하의 하류는 연주(州)가 받고, 회수의 하류는 서주(徐州)가 받는다'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회수와 황하는 연원도 같지 않고 지류의 갈림도 같지 않고, 바다에 들어간 땅도 또한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회하가 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우리 명나라 조정이 황하의 수로를 파서 회수에 유입시켜, 합류해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으므로 황하는 옛 길을 잃게 되었으니 <우공>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회하는 실로 여러 물이 모이는 강입니다. 황하와 회수가 합류하여 서하(西河)가 되고, 제수(濟水)·탑수(深水)·문수(汶水)가 수수(洙水)·사수(泗水)와 합류하여 또 변수(沐水)를 만나고, 다시 동으로 흘러 기수(所水)를 만나 동하(東河)가 됩니다. 서하는 물 빛깔이 누렇기 때문에 황하라 이르고, 동하는 물 빛깔이 푸르기 때문에 청하(淸河)라 이릅니다. 두 강물이 합하여 이곳으로 흐르니 회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강의 너비는 10여 리나 되고 깊이는 끝이 없으며, 물의 흐름은 사납고 급하였습니다. 강가에는 경칠공신사(秋七公神祠)가 있었고, 또 귀산(龜山)이 강과 접해 있었습니다. 조감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산 밑에는 신물(神物)이 있는데, 모양은 원숭이와 같으며 주름진 코, 높은 이마, 푸른 몸뚱이, 흰 머리털에 눈빛이 번개와 같습니다. 전해 오는 속담에,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큰 새끼로 이 신물을 잡아매어 이곳에 살면서 회수가 편안히 흐르게 하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 신물의 형상을 그려서 갖고 있으면 풍랑의 조난을 면한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터무니없고,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니 믿을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감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신 등은 회하를 거쳐 동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청구역(淸口驛)에 이르렀습니다. 밤에 청하현(淸河縣)을 지나서 인가가 없는 기슭에 정박하였습니다. 청하현치(淸河縣治)에 한신성(韓信城)과 감라성(甘羅城)328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으나, 밤에 지나가 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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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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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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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를 끌어 바람을 맞받으면서 청하구(淸河口)를 거슬러 올라가 삼차천포(三叉淺鋪)를 지났습니다. 또 백양하(白洋河)를 거슬러 올라가 밤중에 강가에 정박했는데, 지명은 알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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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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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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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에 길을 떠나서 장사충천(張泗沖淺)과 백묘천(白廟淺)을 지나 도원역(桃源驛)329에 이르렀습니다. 도원역 서쪽에 위치한 삼결의묘(三結義廟)330가 바로 유비(劉備)331·관우(關羽)332 · 장비(張飛)33의 사당이었습니다. 도원역 안에 또 거사비(去思碑)334가 있었습니다. 용구하(龍溝河)를 거슬러올라가서 도원현(桃源縣)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또 최진(崔鎭)을 지나 저녁에 고성역(古城驛)335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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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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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천현(宿遷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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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아침에 고성역에서 무가구(武家溝)를 지나 백양하, 육가돈(陸家數), 소하구(小河口)를 거슬러 올라가서 종오역(鐘吾驛)36에 이르렀습니다. 역 앞에 황화문(皇華門), 비영문(基英門), 쌍계문(雙桂門) 등이 있었고, 역의 북쪽은 숙천현이었습니다. 또 체운소를 지나 순풍에 돛을 펼치니 마치 나는 듯이 빠르게 갔습니다. 조하(河), 청돈(靑數), 사방(沙)337 등의 천포(淺鋪)를 지나 밤 3경에 직하역(直河驛)38에 이르렀습니다. 5경에 큰 천둥소리가 나고 번개가 번쩍이며 우박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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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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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주(州)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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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직하역에서 용강(龍江)·시두만(起頭灣)·합기(合所)등의 천포(淺鋪)를 지나갔는데, 기수(淨水)가 동북쪽에서 흘러와서 이 강과 합해졌습니다. 가다가 하비역(下区驛)339에 이르니 하비역은 비주성(亞州城)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비주는 옛날에 섬자국(子國)340인데, 성의 동쪽에는 섬자묘(子廟)341가 있었으니, 곧 중니(仲尼)가 관명(官名)에 대하여 물었다342는 곳입니다. 서쪽에 애산(艾山)343이 있었으니 곧 노공(魯公)344과 제후(齊侯)345가 서로 만났던 곳346 입니다. 또 반하산(半河山)이 있고, 반하산 위에는 양산사(羊山寺)가 있었습니다. 또 석경산(石塔山)347이 있었는데, 강 언덕에서 6-7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공>의 '사수(泗水) 물가에 뜬 경쇠'348라는 구절의 주(註)에 '하비(下区)에 석경산이 있는데 혹자는 옛날에 경쇠를 취했던 곳이라고 한다' 했으나, 이 말이 옳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항주에서 북쪽은 땅이 모두 평편한 들판으로 간혹 먼 산이 있었습니다. 양자강(洋子江)349에서 북쪽은 구릉 하나 없었는데, 이곳에 이르러 이런 산을 보았지만 높고 크지 않아서 우리나라의 남산만 하였습니다. 비주의 지주(知州)인 성이 이(李)350 라는 사람과 비주위지휘(邪州衛指揮)인 성이 한(韓)이란 사람이 와서 신을 보고 예로 대우하며, 국수사리 1쟁반, 두부 1쟁반, 소채(素榮) 2쟁반을 대접하였습니다. 하비역(下谷驛) 앞에서 서쪽으로 가서 비주성(亞州城)을 지나고, 또 한 나루를 거쳐서 백랑구(白였口), 건구아(乾溝兒)를 건넜습니다. 첫 닭이 울 무렵 신안체운소(新安遞運所)를 지나 날이 밝을 무렵에 신안역(新安驛)351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 등이 동하를 거슬러 올라온 이후에는 강이 매우 넓고 양쪽 언덕이 높고 가파르기 때문에 때때로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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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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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촌역(房__驛)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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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조금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신안역에서 마가천(馬家淺)·쌍구(雙溝)·풍현(豊縣)·패현(流縣)·소현(蕭縣)·탕현(陽縣) 등 4현의 부창(夫r)352과 방촌집(房村集)353을 지나고, 또 금룡현성령묘(金龍顯聖靈廟)를 거쳐 여량소홍(呂梁小洪)54에 이르러 대로 만든 새끼로 배를 끌고 올라가서 이타사(尼陀寺)를 지나니, 서쪽 언덕에 관우(關羽)와 울지공(尉遲公)355과 조앙(趙鬪)356의 사당이 있었습니다. 또 방촌역(房村驛)을 지나 여량대홍(呂梁大洪)에 이르니, 홍은 여량산(呂梁山)의 사이에 있었습니다. 홍(洪)의 양쪽 가의 물밑에는 여기저기 흩어진 돌과 가파른 바위가 높이 서 있었는데, 일어나서 높이 솟은 것도 있고 엎드려 죽 늘어선 것도 있었습니다. 강의 흐름이 꼬불꼬불하다가 이곳에 와서야 언덕이 탁 트여서 세차게 흐르는데, 세찬 기세는 바람을 뿜고 소리는 우레와 같아 지나가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간혹 배가 뒤집힐까 걱정했습니다. 동쪽 언덕에는 돌 제방을 쌓았는데 서로 어긋나게 파내어 물살을 터놓았습니다. 비록 작은 거룻배일지라도 반드시 대로 만든 새끼를 사용하여 소 열 마리라야만 배를 당겨서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신 등은 청산용신사(靑山龍神祠)357 앞에서 홍수(洪水)를 거슬러 형승루(形勝樓)를 지나서 밤에 공부분사(工部分司)·왕가교(王家橋) · 이가교(李家橋)·노담묘(老聃廟)를 지나 수수묘(水首廟) 앞에 이르렀습니다. 홍의 여울이 급한 곳은 8-9리나 되었습니다. 진훤은, “이것이 여량홍입니다. 우왕이 땅을 뚫어 막힌 물을 통하게 한 이후에 진숙보(秦叔寶)359 란 사람이 이 홍을 맡아 수리하였습니다” 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공〉의 ‘양(梁)과 기(岐)를 다스린 다'는 구절의 주에, 양은 여량산이다'라 했으며, 역도원(鄭道元)은, 여량의 돌이 우뚝 솟았으므로, 강물이 이에 부딪쳐서 천지를 진동시킨다'고 했으니, 이 홍이 그게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과연 그럴 듯합니다. 다만 우공>의 여량은 기주(州)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 홍은 서주(徐州)에 관할되어 있어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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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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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주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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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새벽에 구녀총(九女塚)과 자방산(子房山)을 지나 운룡산(雲龍山)362에 이르렀습니다. 운룡산 위에는 석불사(石佛寺)가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그 서쪽에는 희마대(戱馬臺)363와 발검천(拔劍泉)64 이 있었습니다. 또 황충집(堤蟲集)·부창(夫廠)·광운창(廣雲倉)·국저문(國儲門)·화성묘(火星廟)365를 지나 팽성역(彭城驛)에 이르렀는데 등용문(登庸門), 진사주헌(進士朱軒)은 팽성역 앞에 있었습니다. 서주부성(徐州府城)은 팽성역 서북방의 2-3리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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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주는 옛날의 대팽씨국(大彭氏國)으로, 항우(項羽)366가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자칭하고는 이곳에 도읍을 정했었는데367, 성의 동쪽에는 성을 보호하는 제방이 있었습니다. 또 황루(黃樓)의 옛터가 있었으니, 이는 소식(蘇故)이 서주의 지주(知州)였을 때 68 세운 것이었습니다. 369 소철(蘇轍)370에겐 〈황루부(黃樓賦)>가 있어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신 등은 팽성역(彭城驛)에서 부창(夫v)을 지났는데, 부창은 두 강물이 서로 만나서 흐르는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백보홍(百步洪)을 지나가니 사수(泗水)·수수(洙水)·제수(濟水)·문수(汶水)·패수(流水)가 합류하여 동북방으로부터, 변수(沐水)·수수(唯水)는 합류하여 서북방으로부터 서주성 북쪽에 이르렀습니다. 사수는 맑고 변수는 흐렸으나 한곳에 모여 흘러 남쪽으로 이홍에 들어가는데, 홍의 물이 빨리 흐르는 곳이 비록 여량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 험준한 것이 더욱 심하여 난잡한 돌이 뒤섞여 많이 쌓여서 범의 머리나 사슴의 뿔과 같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배를 뒤집어엎는 바위[飜船石]'라고 불렀습니다. 물 흐르는 기세가 급하게 흐르다가 꺾이어 구부러지면서 막히기도 하고 세차게 부딪치면서 빠르게 흐르고 솟아오르면서 급류가 되어 벼락 치는 소리처럼 진동하고 물보라를 뿜어내며 맞부딪치며 뚫려 흐르다 엎어져 쏟아지니 배를 움직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신의 배는 공부분사(工部分司) 청풍당(淸風堂)의 앞에서 인부 100여 명을 써서 양쪽 언덕의 좁은 길을 따라 대로 꼰 새끼로 배를 얽어매어 당기면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신은 부영 등과 함께 언덕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걸어 가다가 돌을 단단하고 가지런히 깔아 놓은 것을 보고 부영에게 묻기를, “이 길을 닦은 사람은 후세에 공로를 남긴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 길이 지형이 낮고 좁아서 조금만 물이 불어도 길을 찾을 수가 없으며, 물이 물러가면 흙은 사라지고 돌이 솟아나와 걸어가기가 고생이었습니다. 근년에 곽승(郭昇)과 윤정용(尹庭用)이 서로 잇달아 보수하여 석판(石板)을 깔고 이어 철정(鐵銃)을 두드려 박고 석회로 땜질을 한까닭에 이같이 단단하고 굳게 된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밤에 변수와 사수가 서로 만나 흐르는 곳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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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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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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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를 끌어 체운소에 이르니, 체운소 앞에 기봉문(起鳳門)과 목욕당(沐浴堂)이 있었습니다. 또 배로 다리를 만들어 강을 가로지르게 하니 이를 대부교(大浮橋)라 불렀습니다. 다리의 위아래에는 돛대가 나뭇단처럼 섰는데 다리 가운데의 두 배를 빼서 왕래하는 배를 통행시키고, 배가 지나고 나면 도로 뽑아냈던 배로 다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신의 배는 이 다리와 탑응부창(塔應夫r)을 지나서 소현(蕭縣)의 수차창(水大倉)372 앞의 강가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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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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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성진(留城鎭)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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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배를 출발시켜 구리산(九里山)을 지나 동산(洞山)에 이르니, 산에는 시왕전(十王殿)74 이 있었습니다. 또 진량홍포(秦梁洪鋪)375, 다성점(茶城店), 양산사(梁山寺)를 지나서 경산시진(境山市鎭)에 이르렀습니다. 경산(境山)에는 상사(上寺)와 하사(下寺)가 있는데 모두 큰절이었습니다. 또 집전(集殿), 백묘아포(白廟兒鋪)378 협구천(夾溝淺)을 지나 협구역(夾溝驛)에 이르렀는데, 성명은 잊었지만 어떤 역승이 진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신 등에게 음식을 매우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두옥(杜玉)에게도 쌀 한 말을 주었는데, 진훤과 두옥은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다가 두옥이 진훤의 이마를 쳤습니다. 협구역에서 황가갑(黃家間)에 이르니, 황가갑 위에 미산만익비(眉山萬翼碑)380가 있었습니다. 신이 정보를 시켜 양왕에게 보기를 청하였습니다. 양왕은 내켜하지 않았지만 강하게 조르니 허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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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회전(句)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통일하고 남경에 도읍을 세워서 천하에 군림하셨다.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에 이르러 큰 제업(帝業)을 계승하여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셨다. 당시에 방악(方嶽)과 제진(諸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과 공부(貢賦)가 해마다 모두 기내(畿內)383로 모였다. 그리고 전촉(蜀)·형초(荊楚)·구월(歐越)·민절(__浙)이 모두 양자강을 경유하여 동해에 떠서 물의 흐름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천진(天津)에 들어와 노하(路河)를 건너서 경사에 이르렀다. 그 강해(江海)의 광활함과 풍파의 험난함으로 경사로의 운반 수송이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우리 태종문황제께서 동남방의 해운이 곤란함을 염려하여 이에 고굉대신(股肱大臣)84을 불러 서주, 양주, 회남, 제남(濟南)에 가서 지세를 헤아리고, 물길을 따라 동쪽은 과주(瓜洲)로부터, 서쪽은 의진(儀眞)으로부터 모두 제방을 만들어서 물을 막아 장강으로 새지 않도록 하셨다. 이어서 근세(近世)의 구규(舊)385를 따라 뱃길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강을 만들어 모두 양주에 모이게 했으므로, 양주를 경유하여 회안(淮安)에 이르고, 회안을 경유하여 서주에 이르고, 서주를 경유하여 제남에 이르게 하였다. 제남에서 남쪽은 수세(水勢)가 남쪽으로 흘러내려 황하와 접하여 회수를 만나 바다로 들어가고, 제남에서 북쪽은 수세가 북쪽으로 흘러 위하(衛河)에 접하여 백하(白河)를 만나 또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황제께서는 다시 지형의 남쪽과 북쪽이 높고 낮음이 같지 않아 물길이 나뉘어져 물을 모아놓을 수 없는 것은 장기적인 계책이 못된다는 이유로 곧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갑(間)을 두되, 5-7리에 1갑을 두기도 하고 십 수리에 1갑을 두기도 해서 물을 모아 배를 건너게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의 연원이 마르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방악(方嶽)과 번진(蕃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와 회동(會同)86, 군민(軍民)의 공부(貢賦) 수송, 상고(商賈)의 무역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게 되고, 배의 이로움이 비로소 천하에 통하여 만민을 구제하고 다시는 장강과 바다에 풍랑의 재액이 없게 되었다. 우리 태종께서 하신 이 일은 실로 우왕(禹王)의 공적을 계승하여 하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만세의 태평을 열어놓은 성대한 사업이었다. 하물며 서주는 곧 옛 팽성(彭城)으로서 동방의 큰 군(郡)이며, 회수를 끼고 제수(濟水)를 둘러싸 남경과 북경의 길목이 되었음에랴! 서주의 북쪽 황가촌(黃家村)의 동쪽에 산에서 흐르는 시냇물 한 가닥이 남쪽으로 흘러 갑문으로 들어가는데, 수세가 용솟음치고 돌아 흐르는 곳이 많아 모래가 밀려 내려와 쌓여 하천을 막으니, 배가 이곳을 지나는데 항상 장애가 되어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 봄에 유사가 자세히 상소하여 조정에 알리니, 우리 영종예황제(英宗睿皇帝)께서 유업을 계승하여 이를 빛내고 전대의 공업(功業)을 더욱 두터이 하려고, 이에 유사를 불러 갑문을 세워서 이를 통하게 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이를 관리하게 하셨다. 이로부터 배가 왕래하면서 다시는 예전과 같은 우환이 없어지게 되었다.” 갑관(官)이 갑문을 열더니 인부로 하여금 신의 배를 들어 올려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의정(義井)·황가포(黃家鋪)87 · 후촌포(侯村鋪)·이가중포(李家中鋪)88. 신흥갑(新興間)·신흥사(新興寺)·유성진(留城鎭)을 지나서 밤 3경에 사구갑(謝溝間)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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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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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현(流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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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고두하갑(活頭下間)·고두중갑(活頭中間)의 상·중·하 세 곳을 지나서 패현에 이르니, 패현은 곧 한고조(漢高祖)89의 고향이었습니다. 패현의 동북방에 강이 있었으니 곧 포하(泡河)였습니다. 포하의 건너편 언덕에 높은 돈대(數臺)가 있었는데, 그 앞에 정문(推門)을 세워 '가풍대(歌風臺)'란 이름을 붙였으니 곧 한고조가 대풍(大風)을 노래390 한 곳이었습니다. 패현의 동남방에는 사정역(四亭驛)이 있었으니 곧 한고조가 젊었을 때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 있던 곳이었습니다. 포하의 서쪽 언덕에는 이교(橋)가 있었으니 곧 장량(張良)이 신을 주워 준 곳 392이었습니다. 비운갑(飛雲間)은 포하의 어구에 있었습니다. 신 등은 그 포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을 지나 대(臺)를 구경하고 다리를 찾아보고 사정역 앞에 이르니, 사정역은 포하에서 30보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족하는 우리 대국의 제도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남으로부터 북도(北都)에 이르기까지는 옛날에는 강의 수로가 없었는데, 지정(至正)93 연간으로부터 비로소 수로를 개통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394 우리 태종대에 와서 평강후(平江侯)395를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여 청원(淸源)을 소통시키고, 제수(濟水)·패수(流水)를 깊이 치고 회음(淮陰)의 땅을 파서 대강(大江)에 도달하게 하니, 한 줄기 맥락이 만 리나 되는 수로로 통하여 배가 다니는 데 안전을 보장하여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어 만세에 길이 힘입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이 강의 수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기구한 만 리 길에 온갖 고통을 겪었을 것인데 지금 배 가운데 편안히 누워서 먼 길을 오면서 전복의 근심을 알지 못했으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사정역에서 수모신묘(水母神廟)96를 지나 밤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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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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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렸다 비가 내렸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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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에 묘도구(廟道口), 호능성갑(湖陵城)을 지나서 연주부(州府)지방에 이르니, 연주는 곧 옛날의 노국(魯國)이었습니다. 사하역(沙河)을 지나서 조금 정박했다가 또 맹양박갑(孟陽泊間)을 지나 팔리만갑(八里灣間)에 이르니, 팔리만갑의 서쪽은 곧 어대현(魚臺縣)의 땅이었습니다. 어대현의 앞에는 관어대(觀魚臺)가 있었으니 곧 노은공(魯隱公)98이 물고기를 구경99했던 곳이므로 현이 '어대'란 명칭을 얻은 것 또한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 상천포(上淺鋪), 하천포(下淺鋪)의 두 포와 하서집장(河西集場)400을 지나 곡정갑(毅亭間)에 이르러 강의 언덕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동북으로 아득히 바라보이는 사이에 산이 있었는데 그다지 높고 가파르지는 않았습니다. 부영이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이 바로 이구산(尼丘山)으로 공자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구산 아래에 공리(孔里)와 수수(洙水)·사수(泗水)·기수(淨水)가 있습니다. 또 동북쪽으 로 바라보니 높은 산이 수백 리를 이어져 있었는데 마치 구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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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영은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이 태산(泰山)이니 바로 옛날의 대종산(俗宗山)입니다. 우(虞) 나라 순(舜) 임금과 주(周) 나라 천자께서 동쪽으로 순수(巡游)하던 곳입니다. 이번 걸음이 만약 육로로 연주 곡부현(曲阜縣)을 경유하게 된다면 이구산도 지날 수 있고 수수와 사수도 건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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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 있고 공리도 구경할 수 있고 태산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옥황묘(玉皇廟)를 지나 남양갑(南陽間)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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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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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교역(魯橋驛)40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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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남양갑에서 조림갑(義林)403을 지나 노교역에 이르니 노교역 앞에 노교갑(魯橋間)이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제로(齊魯) 지방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거야현(鍾野縣)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회초(淮楚)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경사에 이르게 되니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었습니다. 노교갑 서쪽에는 흑연지(黑視池)가 있었는데 흑연지의 물은 검었습니다. 성이 유(劉)라는 태감이 왕을 봉하고 북경으로 갈 때, 정기(産旗), 갑주(甲骨), 종고(鍾鼓), 관현(管絃)의 성대함이 천지를 진동시켰는데, 이 갑문에 와서는 유(劉) 태감이 탄환으로 뱃사람을 향해 함부로 쏘니 그의 난폭한 행동이 이와 같았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이 배의 내관(內官)404 이 이같이 못된 짓을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신에게 묻기를, “귀국에도 이런 태감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내관들은 궁중에서 청소하는 일과 왕명을 전달하는 일만 맡고 관부의 일은 맡지 않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태상황제(太上皇帝)께서 환관을 신임했던 까닭에 이 같은 궁형(宮刑)을 받은 사람들이 막중한 권력을 쥐고 근시(近侍)가 되어 문· 무관들이 모두 이에 빌붙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의술, 도교, 불교의 세 가지 가운데 귀국에서는 어떤 것을 중하게 여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술(儒術)을 중히 여기고 의방(醫方)은 그 다음이며, 불교는 있지만 좋아하지 않고 도법(道法)은 없습니다." “성화황제(成化皇帝)께서는 도교, 불교의 두 가지 법을 가장 중하게 여겼는데, 지금 신황제(皇帝)께서 일절 이를 금지시켰습니다.” 신이 묻기를, “귀국은 지금 대명(大明)의 시대를 당했는데도 모두 대당(大唐)이라 일컫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이는 다름이 아니라 대당 시대부터 전습되어 오던 대로 일컫는 것이니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귀국에 도착한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우리들을 가리켜 '높으신 오야지[大大的鳥也機]라 말하니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는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대인(大人)'을 그렇게 부르는 훈(訓)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당신들이 일본에서 왔을까 하여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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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 등이 노교갑에서 통리왕묘(通利王廟), 노진교(魯津橋)를 지나 오루교(五樓橋)에 이르니, 동로(東魯) 지방의 여러 갈래의 물이 서로 만나 이곳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 사가장(師家莊)의 상포(上鋪)·하포(下鋪)405, 중가포(仲家鋪)406, 중가천갑(仲家淺間)을 지나서 신갑(新聞)에 이르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였습니다. “이 수문은 곧 도수감승(都水監丞) 야선불화(也先不華)가 세운 것입니다. 회통하(會通河)가 이곳에 이르면 모래 섞인 흙이 물에 밀리고 수세가 흩어져서 배를 띄울 수 없었으므로 앞뒤에 수문을 설치하였습니다. 신점(新店)에서 사씨장(師氏莊)까지는 오히려 물이 얕아 어려운 곳이 있으므로, 조운 선박이 이곳을 지날 적마다 상하가 힘을 다해서 종일 부르짖어도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를 물러나게 되므로 반드시 육지에서 수레를 이용하여 운반하여야 했는데, 이렇게 새 수문을 만든 이후로는 배의 운행이 안전하고 순조롭게 되었습니다.” 수문의 동쪽에는 하신사(河神祠)409가 있고 서쪽에는 공서(公署)가 있었으며 공서의 남쪽에는 하관대(觀臺)가 있었습니다. 하관대 위에는 정자를 건축하여 동쪽으로 추역산(鄒山)과 마주보게 하고는 편액을 첨추(瞻鄒)'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그 수문을 지나서 밤에 신점갑(新店開)을 거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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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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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녕주(濟寧州)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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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때 수문을 지나니 곧 석불갑(石佛聞)이었습니다. 또 조촌갑(趙村間)을 지나 남성역(南城驛)에 이르러 조금 배를 정박시켰다가 길을 떠났습니다. 또 진무묘(眞武廟)'를 지나 하신갑(下新開)에 이르니 하신갑은 월하(越河) 어구에서 서쪽으로 800여 척이 되었습니다. 월하는 동쪽으로 천정갑(天井間)과 매우 가깝고, 북쪽으로 회통하(會通河)와 마주보고 있었는데 두 물이 가로 세로로 '십(十)자와 같았습니다. 갑(間)과 하(河)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가는 것은 흘러가다가 뒤집어지곤 하고 월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거슬러 당기기가 어려워 이 갑문을 양쪽 어귀의 아래에 설치하고서 물이 차고 줄어드는 것을 보아 이를 닫고 열고 하였습니다. 갑 서북쪽 20리가량에 획린퇴(獲麟堆)가 있었으니 곧 '서쪽으로 사냥 가서 기린(麒麟)을 잡았다'413는 곳으로 지금의 가상현(嘉祥縣)지방입니다. 신 등이 그 갑문을 지나서 제녕주성(濟寧州城)에 이르니 동북쪽에 사수(泗水)는 곡부로부터, 황하(光河)는 조래(요양)로부터 노성(魯城)의 동쪽에서 서로 합류하여 조하(遭河)에 들어가 회수에 도달하여 바다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회수를 넘어가면 남경이 되고 서북쪽에 거호(鍾湖)가 있어 동쪽으로 갈린 것은 조하에 들어가고, 북쪽으로 갈린 것은 임청(臨淸)에서 위하(衛河)를 나와 바다에 도달하여 바다를 건너면 북경이 되니, 남경과 북경은 3천여 리 밖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강물은 모두 제녕(濟寧) 성중에서 갈라져 성의 동쪽 경계는 황하(河)이고 서쪽 경계는 제하(濟河)인데, 두 강이 빙 둘러서 있어서 제녕성 남쪽 밑에서 합류하고 있었습니다. 두 강물의 복판에 토산(土山)이 있었으니 토산은 동북방에서 일어나 구불구불하면서 길게 이어진 것이 거의 천여 리나 되었습니다. 토산의 위에 관란정(觀í亭)이 있었으니 곧 손번(孫菴)이 세운 것이었습니다. 관란정 아래를 경유하여 통진교(通津橋)에 이르니 통진교는 성 남문의 길이었습니다. 통진교 남쪽에 영원홍제왕묘(靈源弘濟王廟)가 있었으며 묘의 서북쪽 강 언덕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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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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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하역(開河驛)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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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으나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새벽에 제녕성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분수갑(分水間)을 지나서 남왕호(南旺湖)에 이르니, 남왕호는 물이 가득차 끝이 없고 다만 서쪽으로 먼 산만 바라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동쪽에는 푸른 풀이 우거진 평지가 있었으니, 곧 〈우공>의 '대야(大野)에 물이 고이니4 15라는 못입니다. 지금은 메워져 있었는데 호수 복판에 돌로 긴 제방을 쌓고 명칭을 '관언(官恨)'이라 하였습니다. 신 등은 제방의 언덕을 따라 바람이 부는 대로 북쪽으로 가서 마장파(馬長坡)·안민(安民)·뇌정(牢正) ·조정(曹井) 등 포를 지나서 거야현(鍾野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화두만(火頭灣)·백취아(白嘴兒)·황사만(黃沙灣)·소장구(小長溝) 등 포와 대장만집(大長滿集)을 지나서 다시 가상현(嘉祥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대장구(大長溝)·십자하(十字河)·사전(寺前)·손촌(孫村) 등 포를 지나서 또 문상현(上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계수포(界首鋪)416 · 노파갑(老坡間)을 지나서 분수용왕묘(分水龍王廟)에 이르니, 큰 강물이 동북쪽에서 용왕묘 앞에 이르러 남쪽 갈래와 북쪽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남쪽 갈래는 곧 신이 이미 물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강이고, 북쪽 갈래는 곧 신이 장차 물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갈 강이었습니다. 용왕묘는 그 두 갈래 물이 나뉜 곳에 있는 까닭에 분수(分水)라고 명명한 것이었습니다. 그 동북쪽에서 온 큰 강물을 물으니 사람들은 제하(濟河)의 연원이다'라 하였지만 사실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양왕은 그 무리와 함께 용왕묘 안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용신(龍神)에게 배례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신 등에게도 또한 절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제후의 일로서 사서인(士庶人)은 조고(祖考)에게만 제사를 올릴 따름입니다. 조금이라도 그 분수를 넘으면 예절에 어긋난 일입니다. 예절에 어긋난 제사는 사람들이 아첨으로 보고 귀신도 제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본국에 있을 때 산천의 신에게는 절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사당에 절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이 사당은 곧 용왕사(龍王祠)로서 영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공경스럽게 절하고 제사지낸 뒤에야 길을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풍랑의 조난을 당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다를 구경한 사람 앞에선 강물은 물이라 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417 나는 이미 수만 리나 되는 큰 바다에서 거센 파도의 험난함을 겪었으니, 이와 같은 중원의 강물은 두려워할 것도 못 됩니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진훤은 양왕에게, “이 사람은 절하려 하지 않으며 또 그의 뜻을 굽힐 수도 없겠습니다" 운운하였습니다. 또 감성포(闕城鋪)를 지나서 개하역(開河驛)에 이르니 밤이 벌써 3경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관언(官倭)'이란 것도 감성포에 이르러 끊어졌습니다. 관언 가운데 있는 갑문은 8-9리 혹은 10여 리 간격으로 모두 14개가 있었고, 관언의 길이 또한 100여 리가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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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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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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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하진(開河鎭)·유가구(劉家口)·표가구(表家口)·개거(開渠)·두산진(頭山津)·장팔구(張入口)·보가구(步家口) 등 포를 지나서 동평주(東平州) 지방에 이르니 동평은 〈우공>의 '동원(東原)이 평안해졌다'419는 곳으로 모래 섞인 흙이 물에 밀리고 습기가 많은 땅이었습니다. 또 근가구(家口)·율가장(栗家莊)·이가구(李家口)·유가장(劉家莊)·왕충구(王忠口)·풍가장(馮家莊)·장장구(長張口) 등 포를 지나 안산갑(安山間)에 이르러서 언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이 서북방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물어보니 양산(梁山)419·토산(土山)·효당산(孝堂山) 20 등이었습니다. 효당산은 곽거(郭巨)가 자식을 묻다가 금을 얻었던 산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밤에 안산역(安山驛)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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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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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창부(東昌府)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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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보량창(堡糧倉)·안산보(安山保)·역가화(譯家花)·적수호구(積水湖口)·소가장(蘇家莊)·형가장(家莊)·사고퇴(沙孤堆) 등 포422와 대가묘(戴家廟)를 지나서 금선갑체운소(金線閘遞運所)에 이르니, 체운소 앞에 경괴문(經魁門)이 있었습니다. 이 경괴문 오른편의 인가에는 새장을 걸어놓고 새를 기르는데, 그 형상은 비둘기 같고 그 주둥이는 붉으면서 기다랗고, 그 입가는 조금 누르스름하면서 구부러졌고, 그 꼬리는 길이가 8-9치나 되었으며, 눈은 누르스름하고 등은 푸르며, 머리와 가슴은 먹 빛깔이었습니다. 그 새는 사람의 뜻을 잘 알아듣고, 말소리는 맑고 부드러워 음절이 분명하여 사람이 말을 하면 이에 응답하곤 하였습니다. 신은 부영과 함께 가서 보고는 부영에게 말하기를, “이 새가 말을 하니 앵무새가 아닙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농서(隴西) 23의 새이고, 나는 곧 해동(海東)의 사람입니다. 농서와 해동은 거리가 수만여 리나 되는데, 오늘 이곳에서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나와 이 새는 타향에서 손 노릇한 것도 같고, 고국을 생각하는 것도 같고, 모습이 초췌한 것도 또한 같아서 이 새를 보니 비탄한 심정이 더할 뿐입니다.” “이 새는 새장 속에 오래 갇혀 있다가 마침내 타국에서 죽겠지만 지금 족하는 귀국으로 잘 돌아가서 임금과 어버이에게 본분을 다 할 수 있는데 어찌 이 새와 같다고 하겠습니까.” 앵무새 또한 말을 하여 알아들은 듯하였습니다. 또 수장현(壽張縣)424 지방에 이르러 대가묘(戴家廟)·유가구(劉家口)·대양(戴洋) 장가장(張家莊)·사만(沙灣) 등 포425와 감응사(感應祠)를 지나서 동아현(東阿縣) 26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사만천포(沙灣淺鋪)·대하신사(大河神祠)427. 안가구포(安家口鋪)·북부교(北浮橋)·패검포(掛劍鋪)·통변량(通汴梁)·통제갑(通濟間)·차하(定河)·사만순검사(沙灣巡檢司)·양하구(兩河口)·종루각(鍾樓閣)·고루각(鼓樓閣)·운진문(雲門)을 지나서 형문역(前門驛)에 이르니, 역승이 신과 부영을 황화당(皇華堂) 앞에 인도하여 차를 접대하였습니다. 또 평하수포(平河水鋪)·신첨포(新添鋪)·형문상갑(荊門上)과 하갑(下間)을 지나서 양곡현(陽穀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밤에 만동포(灣東鋪) 28. 장가구포(張家口鋪)·칠급상갑(七級上開)과 하갑(下間) 29.주가점갑(周家店) · 아성상갑(阿城上開)과 하갑430. 이해무갑(李海務間)을 지나서 숭무역(景武驛)에 이르니, 밤 5경431이었습니다. 동창부(東昌府)는 곧 옛날 제(齊) 나라의 요성(聊城)과 섭성(城)으로서 성은 역 북쪽의 3-4리쯤 되는 강 언덕에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부치·요성현치(聊城縣治)와 안찰사(按察司)·포정사(布政司)·남사(南司)·평산위(平山衛)·예비창(預備倉)432. 선성묘(宣聖廟)·현(縣學)433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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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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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양역(淸陽驛)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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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통제교갑(通濟橋)·동악묘(東岳廟)434. 진사문(進士門)·동창체운소(東昌遞運所)·태량창(糧r)을 지나고, 또 제구(堤口), 초장갑(稍長)·유행구(柳行口)·방가장(房家莊)·백묘(白廟)·쌍도아(雙渡兒)·여가만(呂家灣) 사제(堤) 등 포를 지났습니다. 강의 동쪽은 당읍현(堂邑縣) 지방이고 서쪽은 박평현(博平縣) 지방이었습니다. 435또 홍가구(洪家口)·양가구(梁家口) 등 포와 양가갑(梁家間)·감응신사(感應神祠)를 지났습니다. 다시 표가만(表家灣)-36. 마가만(馬家灣)·노제두(老提頭)·중갑구(中間口) 등 포와 토교갑(土橋間)·신개구포(新開口鋪)·함곡동(函谷洞)·감수갑(減水間)을 지나서 청평현(淸平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또 조가구포(趙家口鋪)를 지나서 청양역에 이르렀습니다. 또 주가만(朱家灣)·정가구(丁家口)·십리정(十里井)·이가구(李家口)437 등 포와 대가만갑(戴家灣)을 지나서 달밤을 이용하여 날이 샐 때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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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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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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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청현(臨淸縣)의 관음사(觀音寺)에 이르니 관음사는 두 강이 만나는 끝에 있었고 동쪽 서쪽에 갑문 넷을 설치하여 물을 모아 두었습니다. 관음사 동쪽에는 배로 부교(浮橋)를 만들어 임청현으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현성(縣城)은 강의 동쪽 언덕 반 리가량에 있었으며 현치와 임청위치(臨淸衛治)는 모두 성안에 있었는데, 양경(兩京) 사이의 요충이며 상인이 몰려드는 곳이었습니다. 그 성 안팎 수십 리 사이엔 누대가 빽빽하고 상점이 성대하며 재화가 풍부하고 선박이 모여들어 비록 소주와 항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산동에서 제일가고 천하에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신 등은 청천하(淸泉河)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누부관(漏浮關)·약국(藥局)438 . 신개상갑(新開上岡)·위하창(衛河r)·판하갑(板下間)439 · 대부교(大浮橋)를 지나서 청원역(淸源驛) 앞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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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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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에 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가 오후에 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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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동 사람 진기(陳)·왕찬(王讚)·장경(張景)·장승(張昇)·왕용(王用)·하옥(何玉)·유걸(劉傑) 등이 장사하는 일로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가 신등이 이른 것을 듣고, 청주 3병 · 엿 1쟁반 · 두부 1쟁반·떡 1쟁반을 가지고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고 말하기를, “우리 요동성(遼東城)은 귀국과 접했으므로 정의(情義)가 한 집안과 같습니다.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만나게 되었으므로 감히 약소한 물품을 가져와서 예를 차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귀지(貴地)는 곧 옛날 고구려의 고도(故都)입니다. 고구려가 지금은 우리 조선의 땅이 되었으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실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만리 밖에서 표류 정박하여 사방을 돌아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족하를 만나게 되고 또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한집안 골육의 친족을 본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기는, “제가 정월에 길을 떠나서 2월 초길(初吉)440에 이곳에 도착했고 4월 초순쯤에 돌아가게 될 것이니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할 듯합니다. 만약 먼저 제가 사는 지방을 지난다면 안정문(安定門)안에 유학(儒學) 진영(陳婦)이란 자가 있는데, 제 아들이니 저의 소식을 전해 주기 바랍니다" 운운하고는 서로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신 등은 노를 저어 하진창(下津r)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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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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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성현(武城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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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위하(衛河)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배가권포(喪家圈鋪)에 이르니 동쪽은 하진현(夏津縣) 지방, 서쪽은 청하현(淸河縣) 지방이었습니다. 순검사(巡檢司)·손가(孫家)·신개구(新開口)·초묘(草廟)·황가구(黃家口)·평하구(平河口) 등 포를 지나서 도구역(渡口驛)에 이르고, 또 상가도포(商家道鋪)를 지나서 무성현에 이르니 강이 성 서쪽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진사문(進士門) 둘이 있고 또 기우당(祈雨堂)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가서 갑마영역(甲馬營驛)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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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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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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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에 정가구(鄭家口)·하구포(河口鋪)·진가구포(陳家口鋪)를 지나서 은현(恩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백마하구포(白馬河口鋪)를 지나고 또 하방천무곡사(下方遷無谷寺)·하구포(河口鋪)를 지나서 양가장역(梁家莊驛)에 이르러 노를 저어 종각(鐘閣)을 지나 저녁에 고성현(故城縣)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말하기를, “오늘밤은 달이 밝고 바람이 순한데 어찌 가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당신은 강 한복판에 3구의 시체가 떠다니는 것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보았습니다.” “이는 모두 도적이 죽인 것입니다. 이 지방은 연이은 흉년으로 서로 이끌어 도적이 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또 당신들이 표류해서 행장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은 반드시 귀중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여겨 모두 탐내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또 앞길에는 인가가 적고 도적은 많이 횡행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이번 길에 영파부(寧波府)에서 도적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평생에 서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도적입니다.” “무릇 중국의 인심은 북방은 억세고 남방은 유순합니다. 영파부의 도적은 강남 사람인 까닭에 비록 도적은 되었을지라도 대부분 약탈만 하고 사람은 죽이지 않으므로 당신이 그 몸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북방 사람들은 약탈하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서 산골짜기에 던져 버리거나 강과 바다에 떠내려 보내기도 합니다. 오늘 떠다니는 시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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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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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주(德州)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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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으나 큰바람이 모래를 날렸습니다. 새벽에 맹가구(孟家口)·병하구(兵河口)·마가(馬家) 등 포와 사녀수(四女樹)·문영문(文英門)·유피구포(劉皮口鋪)·득의문(得意門)·대부교(大浮橋)를 지나서 안덕역(安德驛)에 이르니 진훤이 신에게 묻기를, “귀국에서는 손님을 접대할 적에 차를 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술을 쓰지 차는 쓰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님을 접대할 적엔 모두 차를 습니다. 만약 인정이 두텁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술을 쓰기도 합니다.” 신이 부영에게 상국(上國)의 산(傘), 개(蓋), 관(冠), 대(帶), 대패(帶牌)의 제도를 물으니 부영이 말하기를, “산(傘)과 사모(紗帽)는 등급이 없습니다. 개(蓋)44는 1품과 2품은 겉이 다갈라(茶褐羅)442이고 안이 홍초(紅箱)443로서 삼첨은부도(三舊銀浮屠)444이고, 3품과 4품은 앞의 것과 같지만 부도(浮屠)가 홍색이고, 5품은 겉이 청라(靑羅)이고 안이 홍초(紅)로서 이첨홍부도(二簷紅浮屠)이고, 7품 · 8품 · 9품은 겉이 청유초(靑油箱)이고 안이 홍초(紅狗)로서 단첨홍부도입니다. 띠는 1품은 옥대(玉帶), 2품은 서대(犀帶), 3품은 화금(花金), 4품은 광금(光金), 5품은 화은(花銀), 6품은 광 은(光銀), 7품 · 8품 · 9품은 각대(角帶)입니다. 패(牌)는 문관직(文官職)은 1품에서 9품까지는 모두 석패(錫牌)를 갖는데, 한 면에는 임명받은 위문(衛門)을 해서(楷書)로 쓰고, 한 면에는 '상천현대(常川懸帶)445란 네 글자를 전서(篆書)로 써서 조예(自隸)446가 이를 짊어지고, 무관직(武官職)으로 조예(自隸)와 아문(衙門)이 있는 자 모두 이를 차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달단(薩)447이 침범하여 오기도 합니까?”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각 변방에서 구역을 나누어 진수(鎭守)가 군마(軍馬)를 통할하며 늘 지키고 있기 때문에 침범하지 못합니다.” 밤에 덕주성(德州城)을 지났는데 강은 성 서쪽을 둘러싸서 북쪽으로 흘렀습니다. 덕주성은 곧 옛날의 평원군(平原郡)으로서 토지는 넓고 사람은 조밀하였으며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이름을 모르는 강 언덕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태상황제(太上皇帝)의 동모제(同母弟)가 덕망이 높았는데 노(魯) 지방에 봉함을 받고 노왕(魯王)이라 칭하여 이 덕주의 300여 리의 땅에 있었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이 '덕왕(德王)448'이라 불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덕왕은 무슨 이유로 경사에 있지 않고 외지에 있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친왕(親王)449 이 경사에 있으면 다른 뜻이 있을까 염려하는 까닭에 그들의 나이 16세 이상이 되기를 기다려서 모두 왕으로 봉하여 외지로 내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산동에 있는 덕왕이 관할하는 곳은 복심(腹心)의 땅인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까?” “왕부(王府)의 각 관사(官司)의 관원이 정사를 관장하고 교수(敎授)하는 관원도 있고 호위하는 관원이 있어, 왕은 그들과 함께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사열할 뿐입니다. 정사를 호령하는 일은 왕이 할 수 없고 모두 조정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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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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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정역(良店驛)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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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일찍 출발하여 피구포(皮口鋪)·고가봉포(高家鳳鋪)鋪)를 지나서 오교현(吳橋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나가구(羅家口)·고관창(高官廠) 등 포와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제남부(濟南府) 지방의 양점역(良店驛)에 이르렀습니다. 또 상원아(桑園兒)·박피구포(薄皮口鋪)·낭가구포(狼家口鋪)·곽가구포(郭家口鋪)·구련와포(舊連窩鋪)를 지나서 연와역(連高驛)에 이르렀다가 다시 연와체운소(連窩遞運所)에 이르러 숙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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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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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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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에 왕가구포(王家口鋪)를 지나서 경주(景州) 지방의 임가구포(任家口__)에 이르렀습니다. 또 동광현(東光縣)을 지났는데 현치는 강의 동쪽 언덕에 있었습니다. 또 유방구포(油房口鋪)·북하구포(北下口鋪)를 지나서 남피현(南皮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북하천포(北下淺鋪)를 지나서 또 교하현(交河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조도만(曹道灣)·박두진(薄頭鎭)450을 지나서 신교(新橋)에 이르고 또 진무묘(眞武廟) · 약왕묘(藥王廟)452. 척가언군둔(戚家堰軍屯)을 지나서 밤 2경에 설가와리(薛家窩里) 앞에 이르러 숙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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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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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주(滄州)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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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아침 일찍 삼진도(三鎭道)·풍가구(馮家口)·양교구(楊橋口)·전하남(磚河南)·전하남구(磚河南口) 등 포를 지나서 전하역(III河驛)에 이르렀습니다. 또 왕가권구(王家圈口)·나가권구(羅家圈口)·홍피구(紅技口)·남관(南關) 등 포와 장로순검사(長蘆巡檢司)·염운사(鹽運司)453. 체운소(遞運所)·종무과문(腫武科門)을 지나서 창주발부창(滄州撥夫r)에 도착하였습니다. 창주성(滄州城)은 강의 동쪽 언덕에 접하여 있으니 곧 한(漢) 나라 때의 발해군(渤海郡)이었습니다. 운하가에는 장대 위에 사람의 머리를 매달아 놓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바라보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저것은 강도의 머리입니다. 한(漢)나라의 공수(襄遂)454가 단거(單車)로 이 지방에 들어와서 도적 떼를 평정하여 '칼을 팔아 소를 산다455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 도적이 사람을 약탈하고 죽이는 일이 많은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연방문(聯芳門)·응규문(應奎門)·사간문(司諫門) 등을 지나서 장로체운소(長盧遞運所)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은 부영에게 묻기를, “회하를 지난 뒤부터 병부 · 형부 · 이부 각 관사(官司) 관원의 배가 계속 이어지고 끊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천자께서 영명하시어 조신(朝臣)들 중 지난날의 잘못된 행위나 작은 과오를 범한 자들도 모두 강직(降職)하거나 폄출(貶點)시키고 있습니다. 운하에서 석패(錫牌)를 차고 돌아가는 사람은 모두 폄직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조신들입니다. 전일에 소흥부에서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심문했던 총병관 황종도 평직되어 돌아갔습니다.” “조신들 중에는 폄직된 사람이 많은데, 어찌하여 환관의 무리들을 물리치지 않아 마음껏 행세하게 합니까?” “환관들 중에도 죽임을 당하고 강직되고 폄출된 사람 또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 운하로 경사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선제(先帝)께서 파견하셨던 자들이지만 돌아가면 또한 보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일에 만났던 태감 나공(羅公)과 섭공(公)도 모두 늦게 돌아갔다는 이유로 봉어(奉御)456의 직으로 평직되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다시 요순(堯舜) 같은 군주를 만나서 원개(元凱)457 같은 이가 등용되고 사흉(四凶)458 같은 이가 폄출되어 조정은 맑아지고 사해(四海)는 편안해졌으니 또한 경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우리 황제께서 멀리하시는 자는 소인과 환관입니다. 날마다 경연(經筵)459에 몸소 나아가 꾸준히 각로학사(老學士)460들과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정사(政事)를 의논해 마지 않으십니다. 지난 3월 9일에는 몸소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하여 선성(先聖)462에게 석전례(釋奠禮)를 거행하셨으니 유교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는 뜻이 또한 지극합니다.” 신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천자께서도 열국(列國)의 신하에게 절을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만세의 스승인데 어찌 신하의 예절로 대우하겠습니까? 다만 천자가 석전례를 거행할 때에 찬례관(贊禮官)463이 몸을 굽혀 절하시오'라 하면 천자께서 절하시려 합니다. 그럴 때 옆에 있는 또 다른 찬례관이 공자는 일찍이 노나라 사구(司寇)였습니다'라 하면, 찬례관이 또 소리를 높여 몸을 펴시오(平身]라고 합니다. 예(禮)로는 당연히 절해야 하는데도 실상은 절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선사(先師)를 높이고 천자를 높이는 예로서, 양 쪽 모두 어긋나지 않은 것입니다.” “공자의 도(道)는 천지보다 크고 일월보다 밝으며 사시보다 믿음성이 있어 천하 만세로 두루 미쳐서 다함이 없습니다.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그 도를 배워서 몸을 닦고, 제후는 그 도를 배워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는 그 도를 배워서 천하를 다스리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땅히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대하는 예절로 섬겨야 할 것인데, 또한 노나라 사구란 칭호를 들어서 당연히 절해야 할 것인데도 어찌 절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사구를 들어서 공자를 일컫는다면 공자는 한 소국의 배신(臣)465인데 또한 어찌 천자의 존엄함을 굽혀서 그에게 제사하겠습니까?” 부영은 말이 없었습니다. 밤에 부영이 또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방금 북경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이 '어느 상서(尙書)와 어느 학사(學士)가 마주서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데, 교위(校尉)467가 천자께 알리니 천자께서 금의위(錦衣衛)에 내리어 무슨 말을 했는지 심문하도록 명하셨다고 합니다. 학사는 몸이 내각(內閣)에 있으며 지존(至尊)68께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그와 더불어 의논하시는데, 지금 상서와 서로 마주 서서 말하니 사사로운 청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여 이를 심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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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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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제현(興濟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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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안도채포(安都寨鋪)469 - 청수왕가구포(淸水王家口鋪)470를 지나서 건녕역(乾寧驛)에 이르니 흥제현의 현청은 건녕역(乾寧驛) 뒤에 있었습니다. 건녕역 앞에 큰집이 있었는데 진훤이 말하기를, “이것은 새 황후 장씨(張氏)의 사저입니다. 전에 새 황제께서 황태자로 있을 적에 흠천감(欽天監)이, 황후의 별이 황하의 동남방에 비칩니다'라 아뢰니 선제께서 황하 동남방의 양가 규수 300여 인을 뽑아 모두 경사에 모이도록 명하셨습니다. 선제께서 황태후와 함께 다시 선발한 결과 장씨가 이에 뽑혀 정후(正后)가 되었습니다. 황후의 조부는 봉양지부(鳳陽知府)이 었고 부친은 관직은 없고 전에 국자감생(國子監生)473이었는데, 지금은 특별히 도독(都督)으로 배수되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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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부가 소흥에서 보았다는 것과 같은 종류의 수차 그림(출전:《天工開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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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위포(左衛鋪)·유항구포(柳巷口鋪)·삼성사(三聖祠)474. 반고묘(盤古廟)·고토강(高土崗)을 지나서 노대(蘆臺)의 옛 성476에 이르니, 성은 북쪽으로 청현(靑縣)의 현청에 접해 있으며 모두 강의 서북쪽 언덕에 있었습니다. 청현의 앞은 통진하(通眞河)·보정하(保定河)·호타하(淳施河)47의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이므로 삼차(三叉)'라고 불렀습니다. 또 종루각(鐘樓閣)·사직단(社稷壇)·초범정(啪帆亭)·중주집(中州集)을 지나서 하간부(河間府) 지방에 이르니 하간부성(河間府城)은 강의 북쪽 7-8리쯤에 있었습니다. 또 유하역(流河驛)에 이르니 날이 벌써 어두웠습니다. 유하포(流河鋪)를 지나서 밤 2경에 하관둔(夏官屯)478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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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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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해현(靜海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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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축시(丑時)419에 배를 출발시켜 조대포(釣臺鋪)·남가구포(南家口鋪)·쌍당포(雙塘鋪)를 지나서 봉신역(奉新驛)에 이르니 봉신역은 정해현치(靜海縣治) 앞에 있었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말하기를, “수차(水車)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디에서 수차란 것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소흥부를 지날 때 어떤 사람이 호수 언덕에서 수차를 운전하여 논에 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힘을 적게 들이면서 물을 많이 퍼 올리니 가뭄 시에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제작 방법은 목공이 아는 바로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과거 가우(嘉祐)480 연간에 고려에 신속(臣屬)된 탁라도(E羅島)81 사람이 돛대가 부러져 표류되어 연안에 도착한 뒤 소주의 곤산현(混山縣)에 이르렀습니다. 지현 한정언(韓正彦)482은 그에게 술과 음식을 접대하였는데, 돛대가 배에 박혀 움직일 수 없음을 보고는 공인(工人)을 시켜서 돛대를 수리하여 전축(轉軸)을 만든 다음 그 일으키고 넘어뜨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기뻐하면서 두 손을 맞잡고 감사해 마지않았습니다. 483 탁라는 곧 지금의 우리 제주입니다. 내가 제주에 갔다가 표류를 당하여 이곳에 왔으니 그 사람과 똑같습니다. 족하께서 또한 한공(韓公)처럼 마음을 쓰시어 수차의 제작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면 나도 또한 두 손을 맞잡으며 기뻐할 것입니다.” “수차는 물을 푸는 데만 시용될 뿐이니 배울 것이 못됩니다.” “우리나라는 논이 많은데 가뭄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만약 이 제작법을 배워 동방 백성에게 가르쳐서 농사짓는 일에 도움을 준다면 족하의 한 번 말하는 수고가 우리 동방 사람의 천만대의 무궁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 제작법을 잘 알아보시되 미진한 점이 있으면 수부(水夫)에게 물어서 나에게 명백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북방은 사토가 많고 논이 없는 까닭에 수차가 소용이 없으니 수부들이 어찌 그 제작법을 알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끼 밥을 먹을 동안에 부영이 기계의 형태와 운용 방법을 대략 이야기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본 것은 발로 움직이던데 이것은 손으로 움직이고 또 그 형태도 조금 다르니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본 것은 도차(蹈車)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가장 간편해서 한 사람만으로도 운전할 수 있습니다.” “소나무로 만들 수 있습니까?” “소나무는 가벼워서 만들 수 없습니다. 틀은 위아래를 통하므로 삼나무를 쓰고, 장골(腸骨)은 느릅나무를 사용하고, 판(板)은 녹나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수레의 중심은 대쪽을 사용하여 묶고, 앞 뒤 네 기둥은 커야 하고, 가운데 기둥은 조금 작아야 하며, 그 수레바퀴와 중심의 판자(板子)는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해야 합니다. 만약 삼나무, 느릅나무, 녹나무를 얻지 못하면 모름지기 나무 결이 단단하고 질긴 것을 사용해야만 될 것입니다. 484 또 독류순검사(獨流巡檢司)·사령포(沙寧鋪)를 지나서 무청현(武淸縣) 지방에 이르고, 양청체운소(楊靑遞運所)를 지나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시각에 양청역(楊靑驛)에 이르렀는데, 지명은 모두 양유청(楊柳靑)이었습니다. 정박했다가 3경에 다시 배를 출발시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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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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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진위(天津衛)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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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직고성(直古城)485을 지났는데 강의 이름은 고수(活水)였습니다. 천진위성(天津衛城)에 이르렀는데 위하(衛河)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니 곧 신이 흐름을 따라온 강의 순류였으며, 백하(白河)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니 곧 신이 거슬러 가야 할 강의 역류였습니다. 두 강이 성의 동쪽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성은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임해 있었습니다. 바다는 성의 동쪽 10여 리에 있었으니 곧 옛날 강회(江C) 이남의 조운이 모두 큰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이곳에 모인 뒤 경사로 가곤 하였습니다. 지금은 수로를 뚫어 열고 갑문을 설치하여 열고 닫으니 선박의 편리함이 천하에 통하게 되었습니다. 성안에 위사(衛司)와 좌위사(左衛司)· 우위사(右衛司)486의 관사(官司)가 있어 해운 등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였습니다. 성 동쪽에는 큰 사당이 강 언덕에 접해 있어 그 편액을 큰 글자로 썼는데, 신이 먼 데서 바라보니 그 위는 '천(天)'자, 그 아래는 '묘(廟)'자였지만 중간의 한 글자는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487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정자고(丁字法)·해구리(海口里)·하동순경소(河東巡更所)·도화구(桃花口)·윤아만(尹兒灣)·포구아(蒲름兒)488. 하로미점(下老米店)을 지나서 양촌역(楊村驛)에 이르니 양촌역 서쪽에는 또 순검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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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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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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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일찍 상로미점(上老米店)·백하리(白河里)·남채촌(南蔡村)·북채촌(北蔡村)·왕가무(王家務)·두구(杜口)·쌍천(雙淺) 몽촌(蒙村)·백묘아(白廟兒)·하서순검사(河西巡檢司)를 거쳐서 하서역(河西驛)에 이르니, 하서역은 체운소와 7-8보 거리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절강삼사(浙江三司)에서 당신들의 표류한 일을 아뢰었는데, 표문(表文)은 원래 4월 1일까지가 시한입니다. 내가 표문을 받들고 와서 시한에 맞추지 못할까 하여, 이 역에서 역마(驛馬)를 타고 먼저 경사로 가겠습니다. 훗날에 병부 앞에서 만날 때 습례(揖禮)를 하여 서로 아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되니, 이는 새 천자의 법도가 엄숙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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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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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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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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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바람이 불어 모래 섞인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여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순풍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 요아도구(要兒渡口), 하마두(下馬頭), 납초청(納廳), 천비묘(天妃廟), 중마두(中馬頭), 거영아(車榮兒)', 상마두(上馬U), 하서무(河西務), 토문루(土門樓), 엽청점(葉靑店), 왕가파도구(王家木混渡口), 노가오(魯家烏), 반증구(攀繪口)를 지나서 소가림리(蕭家林里) 앞 강가의 건너편 언덕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의 배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10여 인이 위에 지붕을 얹은 뗏목을 타고 와서 대었습니다. 도적이 와서 겁탈하니 뗏목을 탄 사람도 또한 건장한 자라서 서로 치고 때렸습니 다. 진훤은, “도적이 멋대로 때리고 빼앗기를 이와 같이 하니, 당신의 무리에 게 분부하여 각자가 경계하도록 하고 조심스럽게 밤을 지내도록 하십시오"라 운운하였습니다. 천진위(天津衛)로부터 북쪽은 고르게 깔린 흰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빈 들판에 풀이 없고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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