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표해록 권1== | + | ==최원재 프로젝트 2019== |
| | |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lst 성경]=== |
| | | |
− | 상인(喪人)'인 신(臣) 최부(崔薄)는 제주(濟州)로부터 표류해서 구동(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올 6월 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여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 바치나이다.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A1%B0%EC%84%A0%EC%99%95%EC%A1%B0%EC%A4%91%EB%86%8D%EC%A3%BC%EC%9D%98.lst 조선왕조중농주의]=== |
| | |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B%96%A1%EC%82%B4%EB%AC%B8%EC%96%91.lst 떡살문양]=== |
| | | |
− | ===성화(成化)23년 정미년 가을 9월 17일=== | + | ===[[서예]]=== |
− | 신(臣)은 제주3읍 추쇄 경차관'(濟州三邑推刷敬差官)으로서 대궐에서 하직하고 떠나 전라도에 이르러서, 감사(監司)'가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뽑아 보낸 광주목(光州牧)의 아전 정보(程保)', 화순현(和順縣)'의 아전 김중(金重)과 승사랑(承仕郞)17, 이정(李植), 나주(羅州)의 수배리(隨陪吏)' 손효자(孫孝子), 청암역리(靑巖驛吏)' 최거이산(崔巨伊山) 호노(戶奴) 만산(萬山) 등 6인과 사복시(司僕寺)의 안기(安驥)'인 최근(崔根) 등을 거느리고 해남현(海南縣)으로 가서 순풍을 기다렸습니다. 11월 11일 아침에 제주의 신임 목사(牧使)인 허희(許熙)와 함께 관두량(館頭梁)에서 배를 탔습니다. 12일 저녁에 제주의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하여 유숙하였습니다.
| + | ===[http://digerati.aks.ac.kr/dhlab/2019/101/%EC%B5%9C%EC%9B%90%EC%9E%AC/%EA%B0%95%ED%99%94%EB%8F%84%EC%A4%91%EC%95%99%EA%B5%90%ED%9A%8C.html 강화중앙교회 디아스포라]===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A%B0%95%ED%99%94%EC%9E%A0%EB%91%90%EA%B5%90%ED%9A%8C_%ED%95%AD%EC%9D%BC%EC%9A%B4%EB%8F%99%EC%A7%80 강화잠두교회 항일운동지]===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A%B0%95%ED%99%94%EC%A4%91%EC%95%99%EA%B5%90%ED%9A%8C 강화중앙교회]===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A%B0%95%ED%99%94%EA%B0%90%EB%A6%AC%EA%B5%90 강화감리교]=== |
| + | ===[http://digerati.aks.ac.kr/dhlab/2019/101/%EC%B5%9C%EC%9B%90%EC%9E%AC/leemangyu/index.html 이만규]=== |
| + | ===[https://www.youtube.com/watch?v=pB51JChFtec 이만규와 한국근대교육사]===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A7%8C%EA%B7%9C%EC%99%80_%ED%95%9C%EA%B5%AD%EA%B7%BC%EB%8C%80%EA%B5%90%EC%9C%A1%EC%9E%90%EB%A3%8C_%EB%94%94%EC%A7%80%ED%84%B8_%ED%81%90%EB%A0%88%EC%9D%B4%EC%85%94%EB%8B%9D 이만규와 디지털큐레이셔닝1]===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A7%8C%EA%B7%9C%EC%99%80_%ED%95%9C%EA%B5%AD%EA%B7%BC%EB%8C%80%EA%B5%90%EC%9C%A1%EC%9E%90%EB%A3%8C_%EB%94%94%EC%A7%80%ED%84%B8_%ED%81%90%EB%A0%88%EC%9D%B4%EC%85%94%EB%8B%9D.lst 이만규와 디지털큐레이셔닝2]=== |
| + | ===[http://www.yes24.com/Product/Goods/88417811 인문기술자]===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B%94%94%EC%A7%80%ED%84%B8_%ED%81%90%EB%A0%88%EC%9D%B4%EC%85%98 디지털 큐레이션_동국대학교]=== |
| | | |
− | ===홍치(弘治)원년(1488) 무신년 정월 30일=== | + | ==최원재 프로젝트 2020== |
− | 흐렸습니다.
| + | ===[[내러티브_도학교재로서의_금남_최부_『표해록(漂海錄)』_연구_시맨틱_큐레이션_방법을 기반으로]]=== |
− | 해질 무렵에 신의 종 막금(莫金)이 나주(羅州)로부터 제주에 도착하였는데, 상복(喪服)을 가지고 와서 신의 아비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25726 역사 데이터 내러티브]=== |
| + | ===표해록=== |
| + | *[[최부의 인맥]] |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EC%B5%9C%EB%B6%80%EC%9D%98_%EC%9D%B8%EB%A7%A5.lst 최부의 인맥] |
| + | *[[최부표해록 분석 및 클래스 설계]] |
| | | |
− | ===윤 정월 1일=== | + | ===최부의 표해록 노드=== |
− | 비가 내렸습니다.
| + | *[http://dh.aks.ac.kr/Edu/wiki/index.php/DB-2019-F 표해록 노드] |
− | 목사(牧使)가 아침저녁으로 와서 조문(弔問)하였습니다. 수정사(水精寺) 승려 지자(智慈)의 배가 튼튼하고 빨라 관선(官船)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며, 병방진무(兵房鎭撫) 고익견(高益堅)과 오순(吳純) 등에게 별도포 (別刀浦)로 돌려 대도록 명하여, 신이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여 주었습니다. 판관(判官) 정전(鄭益)은 군관(軍官) 변석산(邊石山)을 보내어 조문하였습니다.
| |
| | | |
− | ===2일=== | + | ==최원재 프로젝트2021== |
− | 흐렸습니다.
| + | ===[[다포딜 로드]]=== |
− | 해뜰 무렵에 신은 별도포의 후풍관(候風館)으로 나아갔습니다. 정의현훈도(佐義縣訓導) 최각(崔角), 향교생도(鄕校生徒) 김정린(金鼎隣) 등 20여 명과 내수사전회(內需司典會)34 박중알(朴重幹) 및 최근 등은 모두 걸어 서 15리 남짓 따라왔습니다. 조금 후에는 목사가 말을 달려와 위문하였습니다. 이 날 신이 데리고 간 아전 정보와 김중 등이 어승(御乘) 점마별감(點馬別監)35 목장(牧場)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변별하고, 유이인(流移人)을 추쇄(推刷)하고, 멋대로 반당(伴尙)으로 삼거나 양민(良民)으로 잘못 인준한 자 등을 적발한 것 등의 문적(文籍) 및 가져갔던 전주부(全州府)에서 올린 제주(濟州) 3읍 장적(帳籍) 17책과 또 다른 1책, 제주 3읍의 담당관이 올린 매년의 장적·호적(戶籍)·군적(軍籍) 등의 문서(文書)를 봉하여 목사에게 넘겨주어 영청(營廳)에 보관하도록 하고, 그 문서목록을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 + | ===[[수선화 시인들]]===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95686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문학, ‘수선화 시인들']=== |
| + | ===[[데이터 리터러시, '아하! 순간', 송남잡지]]===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83765 데이터 리터러시 교육과 『송남잡지』]=== |
| + | ===[[유럽의 디지털 인문학]]=== |
| + | ===[[유년필독]]===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03157 이큐레이션(E-curation) 역사 수업 - 『유년필독』을 중심으로 -]=== |
| + | ===[[조선의 몽골 인식과 그 흔적 - 시맨틱 큐레이션]]=== |
| + |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와 불교수행]]=== |
| + | ===[[서예역사]]=== |
| + | ===[[만해 한용운]]=== |
| + | ===[[신흥무관학교]]=== |
| + | ===[[데이터 과학과 성경]]=== |
| + | ===[[개화기 교육학]]=== |
| + | ===[[개화기 미술교육]]=== |
| + | ===[[개화기 해외학교]]=== |
| + | ===[[민화]]=== |
| + | ===[[동남아와 한반도]]=== |
| + | ===[[독립군 무기]]=== |
| + | ===[[지리교육]]=== |
| + | ===[[서예추상]]=== |
| + | ===[[한반도 영어교육과 번역]]=== |
| + | ===[[한국 여성잡지]]=== |
| + | ===[[조선 개화기 과목별 교사일람]]=== |
| + | ===[[조선 천주교 선교사]]=== |
| +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06189354 심리기술자]=== |
| | | |
− | ===3일=== | + | ==최원재 프로젝트2022== |
−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수선화 한국학]]=== |
− | 이 날은 흐리다 비 오다 하며 동풍이 조금 불고, 바다 물빛은 짙은 청색이었습니다. 대정현감(大靜縣監) 정사서(鄭嗣瑞)와 훈도(訓導) 노경(盧警)은 신이 친상 당한 것을 듣고 달려와 조문하고, 최각(崔角)·박중알, 왜학훈도(倭學訓導) 김계욱(金繼郁), 군관(軍官) 최중중(崔仲衆), 진무(鎭撫) 김중리(金仲理) 등 10여 인과 학장(學長) 김존려(金存麗)·김득례(金得禮) 및 향교생도 20여 명과 함께 포구에서 송별해 주었습니다. 존려와 득례 등은 신이 떠나는 것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저희 늙은이들은 섬에서 자라 바닷길을 잘 압니다.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반드시 바람의 변화가 생기니 배를 타서는 안 됩니다. 또 《가례(家禮)》의, '친상(親喪)을 듣자마자 길을 떠나라 4는 조목의 주(註)에도, '하루에 100리를 가되 밤길은 가지 말아야 하니 비록 슬프더라도 몸을 해치는 일은 피해야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밤길을 가는 것도 안 되는데, 하물며 바다 건너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좌중에 권하는 이도 있고 말리는 이도 있어, 해가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와서 알리기를, “동풍이 마침 알맞으니 떠날 만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중알과 최중중 등도 또한 떠나기를 권하였습니다.
| + |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를 통한 창의력 계발 수업 모델 개발 – ‘수선화 한국학’ ]]=== |
− | 신은 마침내 작별을 고하고 배에 올라 노를 저어 5리쯤 가니, 군인(軍人) 권산(權山)과 허상리(許尙理) 등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불다가 잦아들기도 하고, 먹구름이 꼈다가 개기도 하니 이처럼 바람이 고르지 못한 날에 이처럼 파도가 사나운 바다를 건넌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 듯합니다. 청컨대 별도포로 돌아가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하늘의 날씨는 사람이 미리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볼 수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바다를 건넌 사람으로서 민간의 배가 뒤집혀 침몰되는 일은 잇달아 일어났지만, 왕명을 받든 조신(朝臣)으로서는 오직 전 정의현감(産義縣監) 이섬(李)45 외에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된 적이 드물었던 것은, 모두 임금의 덕이 지극히 높음을 실제로 하늘이 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다 보면 일이 끝이 없는 법입니다. 어찌 길을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시일을 천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돛을 펼치고 가도록 소리쳐 명했습니다. 겨우 대화탈도(大火脫島)'를 지났는데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배가 거요량(巨要梁)을 향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올라가서 바람을 따라 추자도(秋子島)에 정박하면 매우 빠르게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으나, 권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키를 잡고 바람 부는 대로 수덕도(秘德島)49를 지나서 서쪽으로 갔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14146 ESG 개념을 활용한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교육 ]=== |
− | 바다가 어두컴컴해지면서 바람은 약해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자도의 배 정박할 곳에 가까이 갈 즈음에 물살이 아주 급해지고 하늘도 캄캄하여졌으므로, 곁군[格軍]을 독려하여 노를 젓도록 하였습니다. 군인들이 모두, “이 같은 날씨에 배를 출발시킨 것은 누구 잘못입니까?”라고 말하고는, 모두가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힘껏 노를 저으라는 말을 따르지 않아, 뒤로 흘러 내려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쪽 해안에 의지해서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습니다. 밤 3경(更)이 되자 허상리가 말하기를, “이 섬은 비록 동풍을 막고 있지만 3면이 트여 있어 배를 정박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지금 또 북풍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데 기댈 곳이 없게 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한 이 배는 처음 정박한 곳에 있지 않고 도리어 점점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으니 내린 닻줄이 이미 끊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닻을 올려 조금 앞으로 나아가 해안에 매어 두었다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노를 저어 추자도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닻을 올려보니 과연 끊어져 있었습니다. 노를 저었으나 미처 해안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북풍을 맞아 기댈 데가 없는 곳으로 몰려나오게 되었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를 않고 풍랑이 사나워 파도를 따라 오르내리니, 향하는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 + | ===[[디지털 데이터 필사]]=== |
| + | ===[[역사 데이터베이스]]=== |
| + | ===[[3D 타임머신]]=== |
| + |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번역, '아저씨, 아가씨']]=== |
| + | ===[[한국삼육고등학교]]=== |
| + | ===[[폭력의 심층기제]]=== |
| + | ===[[성공회 조선 선교사]]=== |
| + | ===[http://www.skh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272 성공회 신문 모닝캄 연재 기사]=== |
| + | ===[[모닝캄(The Morning Calm)]]=== |
| + | ===[[모닝캄 포토(The Morning Calm Photo)]]=== |
| + | ===[[만해 한용운과 기독교]]=== |
| + | ===[https://scholar.kyobobook.co.kr/article/detail/4010036870849 휴타고지 시대의 고등교육 방안: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
| + | ===[http://www.kohisedu.or.kr/notice/view.php?idx=122 2022년 역사와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82918 디지털 데이터 시대의 연구·교육 방안: 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 『모닝캄』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션-]=== |
| + | ===[http://digerati.aks.ac.kr/DhLab/2021/101/WonJe/KHUHERC/KHUHERC.htm HERC]=== |
| + | ===[[한국문화융합학회 추계학술대회]]=== |
| + | ===[https://kaeim.jams.or.kr/co/com/EgovMenu.kci?s_url=/po/community/notice/noticeView.kci&s_MenuId=MENU-000000000061000¬iSeq=000000032074 한국교육정보미디어학회•한국교육공학회 추계공동학술대회]=== |
| + | ===[[창의력 계발 교과목 개발 방안: 디지털 분류술(分流術)]]=== |
| + | ===[http://www.hkb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8108 치명적 독 미세플라스틱]=== |
| + | ===[https://keastwest.or.kr/%EA%B3%B5%EC%A7%80%EC%82%AC%ED%95%AD/11571810 2022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추계 정기학술대회]=== |
| + | ===[[모순 연습: 재즈와 메타버스]]===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13839 메타버스와 재즈의 모순 연습 Metaverse and Contradiction Practice of Jazz]===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99021 메타버스 강의 개발 : 블렌더 활용 ‘3D 타임머신’ 강의]=== |
| + | ===[[메타버스 교육 생태계]]=== |
| + | ===[[조선 후기 실학적 교육서 송남잡지]]=== |
| + | ===[http://www.segyenewsagency.com/news/articleView.html?idxno=488567 송남잡지를 통해 본 신교육 선각자 송남 조재삼]=== |
| | | |
− | 4일 큰 바다 가운데로 표류해 들어갔습니다.
| + | ==최원재 프로젝트 2023== |
− | 이 날은 우박이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놀란 파도와 무서운 물결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해면을 내리치니 돛이 모두 부서져 버렸습니다. 배는 높고 큰 돛대 2개 때문에 쉽게 기울어져 뒤집어질 기세였으므로 소근보(肖斤寶)53에게 도끼로 돛대를 제거하게 하고, 고이복(高以福)에게 거적을 읽어 선미(船尾)에 붙여 파도를 막게 하였습니다. 정오가 되어 비는 조금 그쳤으나 동풍이 또 크게 일어나 배는 기울어졌다 떠올랐다 하였으며, 그 가는대로 맡겨두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서해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뱃사공이 동북쪽을 가리키기에 바라보니, 마치 한 점 탄환과 같은 섬이 아득한 곳에 있었습니다. 뱃사공이, “저것이 아마 흑산도(黑山島)54일 것입니다. 이곳을 지나서 앞으로 간다면 사방에 섬이라고는 없고 물과 하늘이 서로 닿아 있는 끝없이 넓은 바다뿐입니다”라고 말하니,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배 안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신이 안의를 시켜 군인들에게 취로(取露)하는 일, 배를 수리하는 일 등을 독려하도록 하였습니다.
| + | 1학기 |
− | 군인 고회(高廻)란 자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제주는 바닷길이 매우 험난해서 왕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여러 달씩 순풍을 기다려! 전 경차관(敬差官) 같은 분으로 말하면 조천관(朝天節)에 있다가 수정사(水精寺)에 있다가 하며 모두 합쳐 석 달이나 기다린 뒤에야 길을 떠났거든, 지금 이 행차는 비바람이 고르지 않은 때 하루의 날씨도 살펴보지 않고 이러한 극한 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자초한 일이야!”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 군인들은 모두,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취로를 하고 배를 수리하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야. 애를 쓰다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편안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편이 나아”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 귀를 막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며, 혹은 때려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송진(宋眞)은 모자라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라, 맞으면서 성내 말하기를, “명도 길구나, 이 배는! 파선되기만을 기다리는데, 왜 빨리 파선되지 않는 거야! 어차피 부서지게 될 것이라면 왜 빨리 부서져 버리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말하기를, “제주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독하며 고집스럽고 사나워, 죽음을 가벼이 여기므로 그들의 말투가 이와 같습니다 56 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또한 물에 빠져 죽을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 하늘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 물에 빠져 죽지 않더라도,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27054 태동기의 메타버스 대학교육 진단]=== |
− | 또 군인들의 게으른 행동에 분개하다가 마침내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종자(從者)인 정보(程保)·김중(金重)·이정(李)·손효자(孫孝子)·최거이산(崔巨伊山)·막금莫金)·만산(山)과 제주목사가 보낸 진무(鎭撫) 안의(安義), 기관(記官)” 이효지(李孝枝), 총패(總牌)58 허상리(許尙理), 영선(領船)59 권산(權山), 사공 김고면(金高面), 곁군 김괴산(金怪山)·소근보(肖近寶)·김구질회(金仇此廻)·현산(玄山)·김석귀(金石貴)·고이복(高以福)· 김조회(金朝廻)·문회(文廻)·이효태(李孝台)·강유(姜有)·부명동(夫命同)·고내을동(高內乙同)·고복(高福)·송진(宋眞)·김도종(金都終)·한매산(韓每山)·정실(鄭實), 호송군(護送軍) 김속(金栗)·김진음산(金眞音山)·고회(高廻)·김송(金松)·고보종(高保終).양달해(梁達海)·박종회(朴終回)·김득시(金得時)·임산해(任山海), 관노(官奴) 권송(權松)·강내(內)·이산(李山)·오산(吳山) 등과 저까지 합해서 모두 43명이었습니다. 신이 안의를 불러 묻기를, “나는 한 상제(喪制)로서 관원의 격식에 따를 처지가 아닌데 종자(從者)가 너무 많아 마음이 몹시 편치 않다. 제주 사람으로서 배를 탄 사람이 35명이나 되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니 안의가 말하기를, “우리 목사(牧使)께서 마음을 다한 것은 경차관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또 큰 배를 부리는 데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힘을 써야만 항해가 가능합니다. 하물며 바닷길이 아득하게 멀 뿐더러 울도(蔚島) 등지와 같은 곳은 해적이 많으니 호송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바다를 건널 때는 배를 부리는 자와 바닷길을 잘 아는 자만 가려 뽑으면 비록 수가 적어도 괜찮다. 지금 이 배를 같이 탄 사람은 모두 게으르고 사나운 자들로서 인원수만 늘려놓았지 그 실속이 없다. 배가 표류되어 사지(死地)에 이르게 되면 통곡 소리만 더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36571 메타버스를 위한 철학과 교육]=== |
− | 소리를 질러 군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초상(初喪)을 당하여 달려가는 몸이라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인 데다 사람들 중에 떠나기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자식 된 자로서 잠깐 동안이라도 지체할 수 있었겠는가? 너희들이 나와 함께 표류를 당한 것은 실로 나 때문이지만, 형세가 또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물며 살고 싶고 죽기 싫은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데 너희들도 어찌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배가 혹시 부서졌거나 뒤집어졌다면 끝장이지만 살펴보건대 지금 배는 단단하여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겠다. 만약 돌섬에만 부딪히지 않는다면 수리해 가며 물을 퍼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잠잠해진다면 비록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이르더라도 살아날 수가 있다. 지금 너희들도 또한 부모와 처자가 있고 형제와 친척도 있어서, 모두가 너희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일찍 죽을까 걱정할 것이다. 너희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 몸도 아끼지 않으며, 오직 나를 탓하는 마음으로 서로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스스로 죽을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제 정신을 잃음이 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상리 등 10여 인이 말하기를, “군인들은 모두 고루하고 우둔하며 무식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씀이 이와 같이 막혔으나, 사람마다 마음가짐이 다르니 저희는 마땅히 죽을 때까지 힘껏 일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밤에도 바람과 비는 그치지 않고 큰 파도는 더욱 심하여 배 안으로 부딪쳐 들어왔으나 물이 들어오는 대로 퍼내었습니다. 밤 2경이 쯤 되니 성난 파도가 출렁대면서 봉옥(蓬屋) 위로 넘나들었습니다. 배는 반쯤 가라앉아 의복과 행장은 모두 물에 젖었습니다. 추위는 뼈를 깎아내는 듯하였고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은 이정의 손을 잡고 정보의 무릎을 베고 누웠습니다. 김중과 효자는 신의 양쪽에서 어지러이 쓰러져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한 사람이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려 할 때 이정이 그 목맨 것을 풀고 보니 바로 오산이었습니다.
| + | ===[[K–컬처가 소환한 가상세계의 환류]]=== |
− | 거이산과 막금 등이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었으나 물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신은 배가 아직 튼튼하므로, 위로 세차게 쏟아져 들어오는 물과 틈에서 새어드는 물을 퍼내지 않는다면 앉아서 배가 침몰되기를 기다리는 셈이겠지만, 물을 퍼낸다면 살아날 길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지로 일어나서 큰 소리로 권송을 불러 부싯돌을 쳐서 불을 지피고 짚자리 를 말아 때게 하였습니다. 또 근보 · 고복·고면 등을 큰 소리로 불러 물이 새는 곳을 직접 찾아낸 다음 이를 막도록 하였습니다. 또 옷가지를 풀어 권산·고면 · 거이산 · 괴산 · 상리 등에게 나누어주며 맡은 일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정보 · 김중·손효자 등도 또한 여러 군인들에게 의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인들 중에 구질회·문회 · 도종·매산 · 현산과 같은 사람은 감격하여 죽을힘을 다해 다투어 물을 거의 다 퍼내니 배가 겨우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배가 또 돌섬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권산은 배를 움직이며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알지 못했고, 상리와 구질회 등은 상앗대를 잡고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바람에 힘입어 내몰려 나와, 부서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 + | ===[https://www.segyenewsagency.com/news/articleView.html?idxno=498132 송남잡지 톺아보기]=== |
− | 이 날은 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서 빗발이 삼대 같았습니다. 밤이 되자 비가 조금 그쳤으나 성난 파도가 산더미와 같아서, 높게 일 때는 푸른 하늘로 솟는 듯했고 내려갈 때는 깊은 못에 빠져 들어가는 듯하여,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찢는 듯하며, 모두 물에 빠져 썩어 문드러질 것이 순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막금과 권송 등은 눈물을 씻으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급박하여 다시 희망이 없으니 청컨대 의복을 갈아입고 죽음을 맞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그 말과 같이 인장(印章)과 마패(馬牌)를 품에 넣고 상관(喪冠)과 상복(喪服)을 갖추고는 벌벌 떨며 손을 비비면서 하늘에 빌기를, “신은 살아오면서 오직 충효와 우애를 마음에 새기고, 마음으로는 속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몸으로는 원수진 일이 없었으며 손으로는 누구를 죽이거나 해친 적이 없었음은 하늘이 비록 높고 높지마는 실로 굽어 살피시는 바입니다. 이번에도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신에게 무슨 죄와 허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신에게 죄가 있으면 신의 몸에만 벌이 미치면 될 것이지, 같이 배를 탄 40여 인은 죄도 없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하늘은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늘께서 만약 이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바람을 거두고 파도를 그치게 하여 신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다시 삶을 얻어, 갓 죽은 신의 아비를 장사지내고 늙으신 신의 어미를 봉양하며 다행히 다시 궁궐의 뜰 아래에 국궁(鞠)할 수 있게 하신다면, 이후에는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미처 마치지 않았는데 막금이 갑자기 신의 몸을 안으면서, “한 집안 사람들이 평생의 고락을 모두 이 분에게 기대기를, 마치 '열 소경에 한 막대처럼 여겼는데,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집안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피 통곡하였습니다. 배리(陪吏) 이하도 소리를 내어 슬피 울면서 손을 모아 하늘의 도움을 빌었습니다.
| + | ===[http://www.skh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41 성공회 모닝캄 연재]=== |
| + | ===[[한국한문교육학회 2023 춘계 학술대회]]=== |
| + | ===[[코로나 세대를 위한 공적 기독교 교육]]=== |
| | | |
− | 16일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게임으로 보는 조선의 가상세계 구현=== |
− | 이 날은 흐렸습니다. 풍랑이 조금 수그러들었습니다. 비로소 구질회 등을 독려하여 조각이 난 돗자리를 기워서 돛을 만들고, 상앗대를 세워서 돛대를 만들고, 그 돛대의 밑둥을 잘라서 닿을 만들었습니다. 바람을 따라 서쪽을 향하여 가는데, 살펴보니 큰 파도 사이에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물 위에 드러난 것만 해도 기다란 행랑채와 같고, 거품을 뿜어 내어 하늘에 솟구치는데 물결이 뒤집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공이 배 안의 사람들에게 경계하며 손을 흔들어 말을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배가 멀리 지나간 후에야 사공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저것이 바로 고래입니다. 큰 것은 배를 삼키고 작은 것도 배를 뒤엎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 서로 마주치지 않아서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풍랑이 다시 강해지므로 배가 가는 속도가 매우
| + | ===[[3D 타임머신 2023]]=== |
| | | |
− | p.43
| + | ===[[역사학과 빅데이터]]=== |
| | | |
− | 있다면 중국은 우리 부모의 나라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모두 하늘이 하는 일이며, 순풍이 불고 역풍이 부는 것도 하늘이 실제로 주재하고 있다. 지금 동풍이 변치 않은 채 이미 여러 날이 지나고 있으니, 아마 하늘이 우리를 꼭 살리실 마음이 있는 듯하다. 너희는 각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힘쓴 다음에 하늘의 명을 기다려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 + | ===[[역사정보데이터베이스]]=== |
− | 해가 저무니 바람은 또 동풍이 변하여 북풍이 부는데, 권산은 그래도 키를 서쪽을 가리켜 향하였습니다. 아직 한밤중이 되지 않았을 때 사나운 물결이 부딪쳐 솟구치고 또 봉옥(蓬屋)으로 밀려들어 사람의 얼굴을 덮쳐버리니 모두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영선(領船)과 사공이 모두 통곡하면서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고 홑이불을 찢어서 몸에 여러 겹을 감아 배 가운데의 빗장나무에 묶어 매니, 이는 죽은 후 시신과 배가 오래도록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함이었습니다. 막금과 거이산도 모두 큰 소리를 내어 울면서 신의 몸을 나란히 감싸고 말하기를, “죽더라도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하고, 안의는 큰 소리로 울면서, “나는 짠 바닷물을 마시고 죽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하며, 활시위로 자기 의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김속이 구해주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은 영선과 사공 등을 큰 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배가 부서졌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키를 잃었는가?” “아닙니다.” 곧 거이산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비록 파도가 험악하고 사세가 급박하지만, 배는 실로 튼튼하여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겠다. 만약 물을 퍼내어 버릴 수만 있다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실로 몸이 건장하니 네가 다시 가서 물을 퍼내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거이산은 곧 명령에 따라 물을 퍼내려고 하였으나, 물푸는 그릇이 이미 모두 부서졌으므로 큰 소리로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안의가 즉시 칼로 작은북의 한 면을 찢어 버리고는 이를 그릇으로 삼아 거이산에게 주었습니다. 거이산은 이효지 · 권송·도종·현산 등과 함께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었지만 그래도 무릎 깊이의 물이 남았습니다. 효자 · 정보 · 이정 · 김중 등이 몸소 물을 퍼내기도 하고, 군인 구질회 등 7-8명을 서서 독려하며 서로 잇달아 물을 다 퍼내어 내니 겨우 침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
| | | |
− | 8일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빅데이터기반 교육 솔루션]]=== |
−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정오를 지나자 서북풍이 또 불었습니다. 배는 다시 뒤로 물러나 동남쪽을 향하여 밤새도록 갔습니다. 신은 권산·고면 · 이복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키를 잡아 배를 바로잡고 있으니 방향을 몰라서는 안 된다. 내가 일찍이 지도를 훑어보니 우리나라 흑산도에서 동북쪽으로 향해 가면 곧 우리 충청도와 황해도의 경계이며, 정북방은 곧 평안도와 중국의 요동(遼東) 등지요, 서북방은 곧 〈우공(禹貢))'에 나오는 청주(靑州)와 연주(州) 지역이며, 정서방은 서주(徐州)와 양주(揚州) 지역이다. 송(宋)나라 때 고려와 교통할 적에 명주(明州)에서 바다를 건너왔으니, 명주는 곧 대강(大江) 이남의 땅이며, 그 서남방은 곧 옛날의 민(聞)지방으로서 지금의 복건로(福建路)요, 서남방을 향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면 곧 섬라(羅)4 점성(占城)5. 만랄가(滿刺加) 등의 나라요, 정남방은 곧 대유구국(大琉球國), 소유구국(小琉球國)이요, 정남방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곧 여인국(女人國)과 일기도(一岐島)요, 정동방은 곧 일본국과 대마주(對馬州)이다. 지금 배가 풍랑에 표류된 지 닷새 동안 밤낮으로 서쪽을 향하여 갔는데, 거의 중국의 땅에 닿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행하게도 또 이 서북풍을 만나서 동남방으로 거슬러 가게 되니, 만약 유구국과 여인국에 이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해(天海) 밖으로 흘러 나가서, 위로 은하수에 닿게 되어 가이없는 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니, 어찌 할 것인가? 너희들은 내 말을 기억하고서 키를 바로잡고 가야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권산 등은 “날이 개어 해와 달 그리고 별자리로 헤아린다. 해도 해상에서는 사방을 가리기 힘든데, 지금은 구름과 안개가 짙게 드리운 것이 여러 날 계속되어 새벽인지 저녁인지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바람의 변화만으로 사방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오니, 어찌 바른 방향을 가려내어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 |
| | | |
− | 9일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Spot Virtual]]=== |
− | 이 날은 하늘에 조각구름이 떠 있고 바다 빛깔이 더욱 희어졌습니다. 이제 배는 오랫동안 파도에 부딪혀 양두(梁頭)2 · 풍초(風)3. 비우(鼻偶)4의 세 판자가 모두 흔들거리며 부러지려고 하였고, 물이 또 새어 들면서 저절로 파선이 되려는 조짐이 있었습니다. 근보, 고면, 상리 등이 닻줄을 끊어 뱃머리와 선미를 얽어매고 나무를 깎아 이를 보수하였습니다. 마침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와 같이 배를 수리하면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지만, 굶주림과 목마름이 열흘에 가까우니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손발은 마비되어 몸을 가누지 못해 힘을 다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배를 수리하여도 또한 튼튼하게 할 수 없으니 장차 어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다 갈매기가 떼를 지어 날아갔습니다. 뱃사람들이 이를 바라보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물새는 낮에 바다 위에서 놀다가 밤에 섬 모래톱에서 잔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푸른 바다 만리 밖에서 표류해 와 다행히 이 새를 보게 되었으니 모래톱이 반드시 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갈매기는 한 종류뿐이 아니므로 강가 호수의 모래톱에서 사는 것도 있지만, 바다갈매기는 바다 가운데 떼 지어 있다가 조수를 따라 날고 항상 3월에 바람이 불어야 모래톱과 섬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정월이므로 갈매기가 떼 지어 나는 것이 바로 큰 바다 가운데 있을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바다가마우지 몇 쌍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으므로 신 또한 어쩌면 섬이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오에 남쪽을 바라보니, 구름이 진(陣)을 치듯 퍼져 있고 어렴풋이 산 모양 같은 것이 보였으며 또 인가에서 불 때는 연기 같은 것이 있었으므로, 유구국의 땅이라 여겨 가서 정박하려고 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동풍이 또 일어나서 배는 다시 서쪽으로 향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바람이 더욱 거세어져 배는 나는 듯 빠르게 내달렸습니다.
| |
| | | |
− | 10일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53808 가상세계 활용 교육을 위한 인지 전환 이론과 실천방안]=== |
− | 이 날은 비가 내리고 동풍이 어제처럼 불었습니다. 오후에는 바다 빛깔이 도로 푸르러졌습니다. 이에 앞서 제주도를 떠날 때 뱃사람이 무지한 탓으로 식수를 거룻배85에 신고 따르게 하였는데, 풍랑에 표류된 뒤로는 서로 어긋나서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타고 있는 배에는 물 한 그릇이 없어 밥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권송이 신에게 말하기를, “보아 하니 배 안의 사람들 가운데는 황감(黃柑) 6과 청주(淸酒)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마구 먹어서 남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청컨대 이를 한 데 모아 배 위의 창고에 운반하여 저장했다가 목마름을 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거이산에게 명하여, 배 안의 행장을 모두 뒤지게 하여 황감 50여 개와 술 두 동이를 얻었습니다. 손효자에게 말하기를, “배를 함께 탔으면 호인(胡人)과 월인(越人)도 한 마음일 터인데, 하물며 우리들은 모두가 한 나라 사람으로서 정은 골육지친(骨肉之親)과 같으니,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이 감과 술은 한 방울이 천금과 같다. 네가 이를 맡아서 함부로 쓰지 말고, 배에 탄 사람의 절박한 목마름을 풀어 주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효자가 사람들 가운데 입술이 타고 입이 마른 사람을 보아서 고루 나누어 마시게 하여 겨우 혓바닥만 적시게 하였습니다.
| |
| | | |
− | 며칠이 지나자 황감과 술이 모두 없어지니 어떤 사람은 마른 쌀을 잘게 씹고 제 오줌을 받아 마셨지만, 얼마 안 가 오줌마저 없어지고 가슴속이 건조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마침 비가 내리니 배 안 사람들이 손으로 봉옥의 처마를 들고 거기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기도 하고, 모자를 그릇삼아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을 모으기도 하고, 돗자리를 구부려 뿌려지는 빗물을 받기도 하고, 돛대와 노를 세워 중간에 종이끈을 묶어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기도 하면서 한 잔 물이라도 기어코 얻어서 혀로 핥았습니다. 안의가 말하기를, “옷에 비를 적셔 이를 짜서 마신다면 얻는 바가 실로 많을 터이지만, 뱃사람의 옷은 모두 바닷물에 젖어 비록 비에 적셔 짜내더라도 마실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간수해 둔 옷 몇 벌을 찾아내어 최거이산에게 비에 적신 뒤 이를 짜게 하니 거의 몇 병이 되었습니다. 김중으로 하여금 숟가락으로 이를 나누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김중이 숟가락을 집어 들면 배 안 사람들이 입을 벌리기를 마치 제비 새끼가 먹이를 먹여주기를 바라는 듯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혀를 움직이고 숨을 쉴 수가 있어 조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 + | ===역사와 교육학회 2023 춘계 학술대회=== |
| + | [http://www.kohisedu.or.kr/notice/view.php?idx=132 역사와 교육학회 2023 춘계 학술대회] |
| | | |
− | 11일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http://terms.tta.or.kr/dictionary/dictionaryView.do?subject=%EA%B0%80%EC%83%81+%EC%84%B8%EA%B3%84 정보통신용어사전 가상세계] |
−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한 섬에 도착하니 석벽이 우뚝 솟아 매우 험준하였습니다. 바다 물결이 넘실대다 석벽에 부딪치면 거의 1-2장(丈)을 솟구쳤습니다. 배가 물결을 따라 곧장 들어가 부딪쳐 부서질 지경이 되니, 권산은 크게 울부짖다가 마침내 있는 힘을 다하여 배를 몰았습니다. 효자와 정보 등도 또한 돛대 가의 밧줄을 직접 잡고 풍랑을 보아가며 놓아주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물이 바다로부터 섬 쪽으로 들어가고 바람은 섬으로부터 바다 쪽으로 나오니, 배가 바람을 따라 휘돌아 나와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어떤 큰 섬에 도착하였는데 섬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하였으므로, 배를 대려고 해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이복이 옷을 벗고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배를 끌고 헤엄을 쳐서 섬 기슭에 붙들어 매었습니다. 배 안 사람들은 기뻐하며 구르듯이 마구 뛰어 내려가 시냇물을 찾아 손으로 움켜 달콤한 물을 떠 마시고는, 물을 지고 와서 밥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굶주림이 극도에 달하면 오장이 말라붙게 되는데 만약 갑자기 밥을 배부르게 먹는다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먼저 미음을 마신 뒤 죽을 먹되 적당히 먹고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배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끓여서 먹었습니다. 섬에는 바람을 피할 곳이 없었으므로 밤에 또 배를 풀어서 떠났습니다.
| |
| | | |
− | 12일 - 영파부(寧波府)에서 해적을 만났습니다.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77220 한자의 가상세계성과 한자 교육 패러다임 시프트]=== |
− | 이 날은 흐렸다가 비가 오기도 하더니, 바다 빛깔이 도로 희게 되었습니다. 해질 무렵에 큰 섬에 이르렀는데, 섬이 병풍처럼 잇닿아 있었습니다. 바라보니 중선(中船) 두 척이 모두 거룻배를 매달고서 신의 배를 향하여 똑바로 왔습니다. 정보 등이 신의 앞에 빙 둘러 꿇어앉아 말하기를, “무릇 일에는 경상(經常)도 있고 권변(權變)도 있는 것이니, 청컨대 상복을 벗고 임시로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착용하여 관인(官人)의 위의(威儀)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도적이라고 떠들어 대며 욕을 보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해상에서 표류하게 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여러 번 사지(死地)를 거쳤지만 다시 살아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이 섬에 도착하여 이 배를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다. 천리(天理)는 본래 곧은 법인데, 어찌 천리를 어기면서 거짓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두 배가 점차 가까워져서 서로 만났습니다. 한 배에 약 10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모두 검은 솜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그중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 맨 사람도 있었고, 대나무 잎으로 만든 삿갓과 종려(綜) 껍질로 만든 도롱이를 입은 사람도 있었는데, 요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모조리 중국말이었습니다. 신은 그들이 중국 사람인 줄 짐작하고 정보를 시켜서 종이에 글을 써서 건네기를, 조선국(朝鮮國)의 신(臣) 최부는 왕명을 받들고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바다를 건너가던 도중,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어느 나라 고을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회답하기를, “이곳은 곧 대당국(大唐國)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 지방이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대당(大唐)으로 가는 것이 좋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의 입을 가리켜 보이니, 그 사람들은 먹을 물 두 통을 가지고 와서 주고는 노를 저어 동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 |
− | 신은 배 안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노를 저어 한 섬에 들어가서 대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배 한 척도 거룻배를 달고 있고 군인 7-8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앞에 보았던 자들과 같았습니다. 신의 배에 다가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또 정보에게 전과 같이 대답하게 하고는 이어서 물어보기를, “이곳은 어느 나라 땅이오?”라고 하니, 그 사람은 그 섬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곧 대당(大唐) 영파부의 하산(下山)이오. 바람과 물길이 좋으면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타국 사람이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다행스럽게 대국(大國)의 땅에 이르러 다시 살아날 길을 얻게 되어 기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의 성명이 누군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대당의 임대(林大)요. 당신이 만약 대당으로 간다면 데리고 갈 터이니 보화(寶貨)가 있으면 내게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봉명사신(奉命使臣)5이지 장사하는 무리가 아니며 또 바다에 표류하여 물에 떴다 가라앉았다 한 뒤인데 어떻게 보화가 있겠소?”라고 하고, 쌀을 덜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받고 나서 다시 말하기를, “이 산은 배를 매기에 서북풍은 걱정되지 않지만, 다만 남풍이 좋지 않으니 나를 따라와 배를 매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배를 인도하더니 배 댈 만한 섬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댈 만하오, 댈 만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말대로 곧 가서 배를 대었는데 과연 바람이 없었으며, 온 섬 안을 둘러보아 배를 매어 둘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 서쪽의 물가에는 초가집 두 채가 있었는데 보자기의 집 같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초가집 아래에 매었습니다.
| |
− | 신과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은 오랫동안 굶주리고 목말랐으며 지치고 잠자 지 못한 끝에 먹을 것을 먹게 되고 바람 잔 곳에 배를 대자 피로가 몰려들어 사지가 풀려서 배 안에서 서로를 베개 삼아 이내 곯아 떨어졌습니다. 밤 2경에 자칭 임대(林大)란 자가 그 무리 20여 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창을 쥔 자도 있고 칼을 찬 자도 있었지만 활과 화살은 없이 횃불을 잡고 들이닥쳐 신의 배 안으로 마구 들이닥쳤습니다. 해적의 괴수가 글로 써 보이기를, "나는 관음불(觀音佛)이라 네 마음을 뚫어본다. 네가 금은을 가지고 있으니 찾아보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금은은 본국에서 생산되지 않아서 처음부터 가져온 것이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벼슬아치라면 어찌 금은을 가지고 오지 않았겠는가? 내가 찾아보아야겠다.” 당초 신 및 정보 · 이정 · 김중·손효자 등은, 제주도는 바다 밖의 땅이라 갔다 오는데 기약할 수 없다고 해서 사철 의복 몇 벌을 갖추어 갔습니다. 이 때 와서 해적의 괴수는 곧 그 무리들을 큰 소리로 불러서 신 및 배리(陪吏)들의 보자기 속에 있는 의류와 뱃사람의 양식 등을 샅샅이 뒤져 가지고 가 그들의 배에 실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것은 바닷물에 흠뻑 젖은 옷과 여러 종류의 서책(書冊)뿐이었습니다. 해적 가운데 애꾸눈인 자가 특히 악독하였습니다. 정보가 신에게 말하기를, “해적이 처음 이르렀을 적에는 얌전하였는데, 우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더니 차츰 날강도로 변하였습니다. 청컨대 한 번 온 힘을 다하여 공격하여 사생결단을 내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리 일행은 모두 굶주리고 목말라 거의 죽게 된 뒤이라 해적에게 기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한 형세를 이용하여 포악한 짓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우리들은 모두 해적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행장을 모조리 주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비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의 괴수가 또 신이 가졌던 인신(印信)과 마패를 빼앗아 그의 소매 속에 넣었습니다. 정보가 그 뒤를 따라가서 돌려주기를 청했으나 받지 못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물건은 죄다 가져 가도 되지만, 인신과 마패는 나라의 신표(信標)라 사사로이 쓸 곳이 없으니 나에게 돌려주면 좋겠소”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의 괴수는 인신과 마패를 돌려주었습니다.
| |
− | 봉창(蓬窓)을 나서더니, 그 무리들과 뱃전에 죽 늘어서서 한참 동안 떠들다가 배 안으로 도로 들어왔습니다. 먼저 정보의 웃옷과 바지를 벗기고 묶어놓고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 칼로 신의 옷고름을 끊고 옷을 벗겨서 알몸을 만든 뒤, 손을 뒤로 젖히고 무릎을 굽혀 결박하더니, 몽둥이를 가지고 신의 왼팔을 일곱 여덟 차례 때리고 난 뒤에 말하기를, “네가 만약 목숨이 아깝다면 얼른 금은을 내 놓아라”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몸뚱이가 문드러지고 뼈가 가루가 될지라도 어디에서 금은을 가져온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은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므로, 신의 결박을 풀어주고는 그 의미를 글로 쓰게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썼더니 해적의 괴수는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정보를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신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나서 곧 신의 머리채를 끌어당겨 도로 묶어 거꾸로 매달고는 칼을 메고 신의 목을 베려고 하였지만, 칼을 마침 오른쪽 어깨로 잘못 내렸고 칼날이 뒤집혀져 있었습니다. 다시 칼을 메고 신의 목을 베려고 할 때 한 해적이 와서 칼을 멘 자의 팔을 잡아 이를 저지시켰습니다. 해적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 크게 떠들어 댔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뱃사람들은 두려워 제정신을 잃고 쥐새끼처럼 구석구석 숨어버렸습니다. 김중과 최거이산 등만은 손을 모아 절하고 꿇어앉아서 신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해적의 괴수가 신의 몸뚱이를 짓밟고, 뱃사람들을 공갈 협박하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신의 배의 닻, 노 등 여러 가지 기구를 끊어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배로 신의 배를 끌어 큰 바다 가운데 놓은 다음 배를 타고 도망가 버렸는데 밤은 이미 깊었습니다.
| |
| | | |
− | 13일 - 다시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만해 한용운을 통한 근현대문화지형 해석데이터 구축]]=== |
− | 이 날은 흐리고 서북풍이 크게 일어서 배는 끝이 없는 바다 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신 및 배에 탄 사람들이 간직했던 솜옷은 모두 해적에게 빼앗겼고, 입은 옷은 바닷물에 절었는데 날씨 또한 계속 흐려서 햇볕에 말리지 못하였으므로 얼어죽을 날이 가까이 왔고, 배에 실은 양식을 해적에게 모두 빼앗겼으니 굶어죽을 날이 닥쳐왔으며, 배는 닻과 노를 도적이 던져버렸고 임시로 만든 돛은 바람에 부서졌으므로, 다만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기도 하고 조수를 따라 나왔다가 들어가기도 하여 사공이 힘을 쓸 수가 없었으니, 침몰될 날 또한 가까이 닥쳐왔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목이 막혀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효지가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의 죽음은 분에 맞는 일이지만 경차관의 죽음만은 매우 애석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죽는 것을 분에 맞는 일이라 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효지가 말하기를 “우리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 수로가 900여 리나 되고 파도는 다른 바다에 비하여 특히 사납습니다. 공선(貢船)99과 상선(商船)의 왕래가 잇달아 끊이지 않는데, 표류되고 침몰되는 것이 10에 5-6척은 되어 제주사람은 일찍 빠져죽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빠져죽곤 합니다. 그런 까닭에 경내에는 남자의 무덤이 매우 적고, 마을에는 여자가 많아서 남자보다 3배나 됩니다. 부모가 된 사람이 딸을 낳으면 반드시 이 애는 나에게 효도할 아이이다'라 하고, 아들을 낳으면 모두 '이 물건은 내 자식이 아니고 곧 고래와 거북의 밥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죽음은 하루살이와 같아서 평소에도 어찌 자기 집에서 죽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조신(朝臣)들이 왕래할 때면 조용히 순풍을 기다리고 선박도 빠르고 견고한 까닭에 풍랑으로 죽은 사람은 예전부터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차관만 을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통곡할 따름입니다."
| |
| | | |
− | 14일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2학기 |
− | 이 날은 맑았습니다. 해질 무렵에 배가 표류하여 한 섬에 이르니 동, 서, 남 3면이 탁 터져 있고, 북풍은 피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살펴보니 닻이 없는 것이 근심거리였습니다. 처음에 제주도를 출발할 때는 배가 매우 큰데도 실을 물건이 없었으므로 몇 개의 돌덩이를 배 안에 실어서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 상리 등이 새끼줄로 그 돌 네 개를 얽어매어 합쳐서 임시 닻을 만들어 배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안의는 신(臣)이 들을 수 있도 록 군인 등에게 말하기를, “이번 행차에서 표류하여 죽게 된 까닭을 나는 안다. 옛날부터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신사(神祠)'와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신사이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광양(廣壤)·차귀(遮歸)·천외(川外)·초춘(楚春) 등의 신사2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 떠났던 까닭에 신령님의 도움을 받아 큰 바다를 순조롭게 건너갈 수가 있었다. 지금 이 경차관은 특별히 이를 잘못이라고 큰소리치며 비난하며, 올 때도 무등산과 금성산의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갈 때도 광양 등 여러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신령님을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았으므로, 신령님 또한 돌보지 아니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또한 누구의 잘못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동조하며 모두 신을 탓하였습니다. 권송만은 홀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에 앞서 정의현감 이섬은 3일 동안 재계(齋戒)한 뒤 광양 등의 신령님께 정성껏 제사를 지냈는데도, 표류되어 거의 죽을 뻔하다 다시 살아났다. 경차관 권경우(權景祐)는 아무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왕래가 아주 순조로웠고 아무 탈도 없었다. 결국 바다를 건너는 데 그 안전한가 아니한가는 순풍을 기다리는 여부에 달려 있지, 어찌 신령님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말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 + | ===[[빅데이터와 학습분석]]=== |
− | 신 또한 일러 말하기를, “천지는 사심이 없고, 귀신은 말없이 운행(運行) 하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니 공평할 따름이다. 악한 사람이 귀신을 아첨해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그에게 복을 내리겠는가? 착한 사람이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않아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그에게 재앙을 내리겠는가? 천지와 귀신이 아첨하는 음식을 올렸다 하여 그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이 일찍이 있었던가? 절대로 그런 이치는 없다. 하물며 제사도 일정한 등급이 있으니, 사대부와 서인(庶人)이 산천에 제사지내는 것은 예에 어긋난 일이다. 예에 어긋난 제사가 바로 음사(淫祀)'인데, 음사로써 복을 얻은 일은 나는 본 적이 없다. 너희들 제주도 사람들은 귀신을 몹시 좋아하여 산택(山澤)과 천수(川數)에 모두 신사를 세워, 광양 등의 신당(神堂) 같은 데는 조석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기를 지극하게 하거늘, 바다를 건너는 데 표류거나 침몰하는 재앙이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은 어느 배가 표류하고 내일은 또 다른 배가 침몰하여,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배가 앞뒤로 서로 잇닿으니, 이것이 과연 신령님의 영험이 있는 셈인가? 제사를 지낸다고 복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지금 함께 배를 탄 우리들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고, 너희 군인들은 모두 정성스런 마음으로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내고 왔는데, 신이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나 한 사람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들 40여명이 재계하고 제사 지낸 정성을 저버릴 수가 있는가? 나의 배가 표류한 것은 오로지 일정을 서두르다, 순풍 기다리기를 잘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도리어 제사 지내지 않은 일로 나를 탓하니, 또한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의 등은 여전히 신의 말을 물정에 어두운 탓이라 하며 옳다고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 |
| | | |
− | 15일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 ===[[테크놀로지기반학습]]=== |
− |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붉으면서 탁하였습니다. 동풍이 다시 일었으므로 또 바람 부는 대로 키를 서쪽으로 맞추어 갔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박종회, 만산, 이산 등은 병이 나서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보종, 양달해, 고회, 김조회, 임산해 등은 바다에서 표류가 시작된 뒤로 여태까지 드러누워 움직이려 하지 않고, 비록 취로(取露) 등의 일로 이들을 독려하여도 귀담아 듣지도 않았습니다. 정실, 부명동, 김득시, 강유, 송진, 김속, 강내, 오산, 고내을동 등은 열 번 부르면 한 번 대답하였으며, 마지못해 일을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소근보, 김괴산, 고복, 김송, 김석귀, 이효태, 김진산(金眞山)05 등은 낮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밤에는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처음에 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나태하기도 하였습니다. 허상리, 권산, 김고면, 김구질회, 최거이산, 김도종, 고이복, 문회, 현산, 한매산, 권송, 막금 등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배를 운행하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며,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 이효지, 안의 등은 몸소 일하기도 하고, 배를 수리하는 일을 점검하고 독려하기도 하며, 일을 끝내기를 기하였습니다. 해적을 만나 바다에 다시 표류한 이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어 하는 일이 점차 전만 같지 못하여졌습니다. 배가 사나운 파도에 부딪친 지 오래 되자 수많은 구멍과 틈이 생겼고, 막는 즉시 곧 터져 새어 들어오는 물을 이루 다 퍼낼 수 없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물새는 것이 이러하고, 뱃사람들 마음이 흩어진 것이 또 이러하니, 무턱대고 높은 사람이라고 점잔만 빼다가 앉아서 익사 당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정보 등 6명과 함께 몸소 물을 거의 다 퍼내었습니다. 상리 이하 10여명 또한 조금씩 힘을 내어 일어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밤에는 바람은 없었지만 비가 내렸습니다. 어느 큰 섬에 이르렀지만 썰물의 힘에 밀려 정박할 수 없었고 배는 바다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 |
| | | |
− | 16일 -우두(牛頭) 앞 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 + | ===[[역사학과인접학문의융합교육]]=== |
− |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잇닿아 겹친 산봉우리가 하늘을 버티고 바다를 둘러쌌는데 인가(人家)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동풍을 타고 이르러, 산 위에 봉수대(峰燈臺)가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니 기쁘게도 다시 중국 땅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오후에는 풍랑이 더 세고 보슬비가 자욱하게 내리는데, 배는 바람이 모는 방향대로 나아갔습니다. 잠깐 동안에 갑자기 표류하여 두 섬 사이에 이르러 기슭을 옆으로 지나가니, 중선(中船) 6척이 죽 늘어서 정박하고 있는 것이 멀리 보였습니다. 정보 등이 신에게 청하기를, “전일 하산(下山)에 이르렀을 때엔 벼슬아치의 위의(威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해적을 불러들여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권도(權道)'를 따라 관대(冠帶)를 갖춰서 저들의 배에 보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죽음이 임박했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리겠습니까? 일단 권도를 행하여 살길을 찾은 뒤에 예로써 상사(喪事)를 치르더라도 의리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 |
− | 신은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효(孝)가 아니고,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孝)와 신(信)이 아닌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나는 마땅히 정당한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와서 청하기를, “제가 일단 이 관대를 착용하여 관인(官人)처럼 보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 된다. 저 배가 혹시 전에 만났던 해적과 같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만약 좋은 사람의 배라면 반드시 우리들을 관부(官府)로 데려가 공술서를 받을 것인데, 너는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저들은 반드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조금 후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와서 신의 배를 둘러쌌는데 한 배에 8-9인이 있었고, 그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하산에서 만났던 해적과 같았습니다. 글을 써서 신 등에게 보이기를, “보아하니 그대들은 다른 나라 사람 같은데 어디에서 왔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또한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 조신(朝臣)으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면서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이곳에 왔소. 이 바다가 어느 나라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 바다가 바로 우두 앞바다로서, 지금의 대당국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속해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켰습니다. 그 사람이 물통을 가져와서 주고, 또 북쪽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산에 샘물이 있으니 당신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먹을 수 있소. 당신들에게 후추가 있으면 우리에게 두세 냥 정도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후추가 산출되지 않아 애초부터 가지고 오지 않았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조금 물러나 신의 배를 포위하여 죽 늘어서 닻을 내리므로, 신의 배도 또한 언덕을 의지하여 정박하였습니다. 안의, 거이산, 상리 등으로 하여금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 인가를 둘러보게 했더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습니다.
| |
| | | |
− | 신이 이번에 지나온 바닷물은 비록 동일한 바다지만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신의 배는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면서, 동, 서, 남, 북으로 부평초처럼 표류하여 정처가 없었으니, 그동안에 본 바다 빛깔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빛깔이 흰 데서부터 푸른 데로 되돌아온 이후 바람의 힘은 비록 세지만, 물결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빛깔이 푸른 데서 흰 데로 다시 되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섬이 나타났는데, 섬은 모두 층암절벽에 우뚝 솟은 바위더미로 위에는 흙을 이고 있어 잡초와 향초가 무성하게 푸르렀습니다. 물살은 느리고 약하므로 만약 큰바람만 만나지 않는다면 거센 물결로 인한 재난은 드뭅니다. 신이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바다가 또한 제주 바다처럼 험했다면 어찌 다시 섬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 + | ===[[역사학과 빅데이터 2]]=== |
− | 무릇 매년 정월은 바로 한창 추울 때로서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큰 물결이 진동하여 부딪치게 되니, 배를 타는 사람들이 꺼리는 때입니다. 2월에 가서야 점차로 바람이 잦아들지만, 제주 풍속은 오히려 연등절(燃燈)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강남의 조주(潮州)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4월에 이르러 매우(梅雨)'09가 지나가고 난 뒤 시원한 청풍(淸風)이 불면 바다를 다니는 큰 배들이 돌아오니, 이를 '박초풍(舶連風)'이라 부릅니다. 신이 표류할 적은 마침 풍랑이 사나울 때로서 바다날씨는 나날이 흐려졌고, 돛과 밧줄과 노가 부러지거나 잃어버렸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받은 것이 열흘이었으며, 하루에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해안에 배를 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빗물에 옷을 적셔 물을 짜내 타는 창자를 적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가 견고하고 빨라 능히 풍랑을 이겨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
| | | |
− | 17일 - 배를 버려두고 상륙하였습니다.
| + | ===[[역사학과 빅데이터]]=== |
−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날이 샐 녘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빙 둘러싸고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당신들은 좋은 사람들 같소. 우리를 따라 오시오. 당신들에게 진기(珍奇)한 물건이 있으면 조금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바다에 표류한 지 이미 오래라, 가졌던 물건은 모두 바다에 버렸소. 만약 우리의 살길을 가르쳐 준다면 타고 온 배와 노는 모두 당신들에게 주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마을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관부(官府)에 가까우니 당신들이 갈 수도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으로 1리만 가면 곧 인가가 있소”라 하고, 한 사람은 “여기는 인가와 먼 곳이니,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오”라 하였습니다. 신이 또 관청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은 "태주부(台州府)는 이곳에서 180리나 떨어졌소”라 하고, 한 사람은 150리오.”라 하고, 한 사람은 “240리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서로 어긋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신의 배에 다투어 들어와, 눈에 보이는 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물건일지라도 모두 빼앗았습니다. 신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를 내고 말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배를 버려두고 그들의 배에 타고 따라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정은 그중 한 사람을 쳐 죽여서 그들을 물리치자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옳지 않다. 살펴보건대 저들은 그 말이 성실하지 못하고 물건을 겁탈하는 것 또한 심하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이 전일의 하산의 해적과 같은 부류라면, 안의의 계책대로 저들을 따라 가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노를 저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이르러 우리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는 흔적을 없애버릴 것이다. 저들이 어선(漁船)이나 방어선(防禦船)이라면, 이정의 계책에 따라 쳐 죽이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한 짓은 숨기고 도리어 우리 이국인(異國人)이 와서 약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할 것이니, 그렇다면 대국(大國)의 변경이 시끄러워지는 결과가 된다. 우리를 도적으로 무고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아 해명하기가 어렵게 되면 반드시 모두가 변장(邊將)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스스로 죽을 길을 취하는 것이니, 임시변통의 말을 하여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 |
− |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바다에 떠다닌 지 오래고, 굶주리고 목말라 피곤함이 극도에 이르러, 위태한 목숨은 겨우 한 오라기 실과 같소. 청컨대 밥을 지어먹어 시장기를 면하고 난 후에 같이 가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를, “당신들은 조금 머물렀다가 천천히 가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노를 저어 2-3리가량 조금 물러가더니 다시 신의 배를 둘러싸고 정박하였습니다. 비 때문에 모두 선창(船__)속에 들어갔으므로 망을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은 같이 배를 탄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저 사람들의 말과 거동이 매우 황당하다. 이 산을 살펴보면 육로에 잇닿아 있으니 반드시 인가에 통할 것이므로, 이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목숨은 저들의 손에 달려 있어, 끝내는 반드시 바다 한 모퉁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배리(陪吏) 등을 거느리고 먼저 배에서 내리고, 여러 군인들도 잇달아 내려 비를 무릅쓰고 숲 사이를 뚫고 도망해 숨어 들어갔습니다.
| |
− | 두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는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길 양쪽으로 돌담 을 쌓아 놓았습니다. 6-7리를 가니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신은 배리와 군인들에게 말하기를, “이처럼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재난을 당한다면 함께 구조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돌보아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이니 비록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한 가운데 놓이더라도, 또한 마땅히 위의(威儀)를 보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 같은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배리들은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고, 군인들은 배리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틀림이 없도록 하라. 또 마을 앞에서나 성(城) 안에서나 떼 지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읍()하는 예의를 차리고 감히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 그 마을에 이르니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신은 종자(從者)와 함께 앞으로 나아기 음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조선에서 온 연유를 알렸습니다. 용모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두 사람이 신 등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이 조선국 사람이라면 어떤 사연으로 우리나라 국경을 님이 들어오게 되었소? 당신들이 해적인지 진공(進貢)하는 사람인지, 혹은 바람을 만나 정처 없이 표류해 온 사람인지, 낱낱이 써 내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본디 조선국 신하로 왕명을 받들어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던 중, 바다를 건너다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해안에 도착하여 배를 버려두고 육지를 따라 인가를 바라보고 찾아 왔으니, 원컨대 대인(大人)들께서는 관부(官府)에 알려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곧 가지고 온 인신(印信)·관대(冠帶)· 문서(文書)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다 보고 나서, 신의 앞에 진무(鎭撫), 배리 등이 차례로 늘어 꿇어앉고, 말단 군인들도 차례로 부복한 것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라고 하였습니다. 곧 가동(家童)을 불러 미음과 다주(茶酒)를 가져다 접대케 하는데, 군인들에게까지도 두루 마시게 하였습니다. 마을 앞의 불당(佛堂)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들은 이 불당에 머물러 편히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불당에 이르러 젖은 옷을 벗어서 바람을 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은 또 밥을 지어 와 접대했는데 과연 모두 충후(忠厚)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관직과 성명은 잊어버렸습니다. 조금 후에 그 두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떠나야만 하겠습니다. 당신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리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곳이 몇 리나 됩니까?” 그 두 사람은 속여서 말하기를, “2리쯤 더 가면 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지명은 무엇입니까?” “서리당(西里堂)'입니다.” “비가 많이 오고 길이 진흙길인 데다 해가 또 저물어 가는데 어찌하겠습니까?” “가는 곳이 멀지 않으니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신은 그 말에 따라 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니,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와 칼을 집어 들고 징과 북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앞길에서 그 징과 북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소란스럽게 큰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에서 밀려들어 차례로 교대하며 호송하였습니다. 앞마을에서도 뒷마을에서도 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50여 리를 지나니 밤이 벌써 깊었습니다.
| |
| | | |
− | 18일 천호(千戶)'14 허청(許淸)을 노상에서 만났습니다.
| + | ===[[디지털 큐레이션]]=== |
− |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한밤중에 신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서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은사(隱土)를 자칭하는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신이 밤에 비를 맞으며 고생스럽게 마을 사람에게 내몰려 온 것을 불쌍히 여겨, 마을 사람을 제지시켜 조금 멈추게 하고는 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신은 풍랑에 표류된 사연을 고하였습니다. 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을원은 마침내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이어서 묻기를, "당신 나라에도 불법(佛法)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을원은 신의 손을 잡고 뒤돌아보면서 작별하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신 등을 몰아 큰 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그 마을에는 큰 다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신 등을 마구 치면서 함부로 겁탈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오산이란 자는 신의 말안장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오산을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신 등은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체송(遞送)되니,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큰 다리가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물었더니, “선암리(仙岩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육지에 오른 이후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을 지어 보였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 |
− | 가다가 포봉리(蒲峯里)에 이르니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관인(官人)이 군리(軍史)를 거느리고 와서 신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이곳에 도착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곧 조선국 사람으로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18 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친상을 당하여 육지로 나오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서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기갈로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잔명(殘命)을 겨우 이어오다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천신만고 끝에 관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살길을 찾은 듯합니다.” 그 관인은 곧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이어 밥 지을 그릇을 주어 신의 종자들에게도 밥을 지어서 먹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관인의 성명과 직업을 물으니 왕괄(王适)이란 자가 말하기를, “이 분은 곧 해문위'9천호(海門衛千戶) 허청(許淸)인데, 당두채(塘頭寨)를 지키다가 왜적(倭賊)이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잡기 위해 왔으니 당신들은 조심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피곤하여 길가에 드러누워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대당(大唐)의 법도는 엄격하니, 당신들 딴 지방 사람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양민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군리(軍吏) 등에게 신 등을 빨리 내몰게 하였습니다. 5리가량을 가니 관해(官廊)'20가 있었는데 바로 당두채였습니다.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신은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전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중도에서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나의 근력이 다하였으니 곧 죽겠구나. 이럴 줄 일찍 알았더라면 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이하가 신을 마주하고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리들이 심히 독촉하므로 조금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현산 등 몸이 튼튼한 자들이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 |
− |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인가가 매우 많고 그 앞에는 불사(佛寺)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허청은 신 등을 불사에 머물러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당신이 비록 걷기가 힘들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밤 2경에 어느 한 냇가에 이르자 이정 등도 또한 힘이 다하여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였으니 신을 업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자들 또한 모두 피곤하여 걷지 못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신의 두 다리가 절룩거려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습니다. 고이복이 크게 성을 내며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미쳐버린 것이겠지! 당신이 그렇게 힘들다면 사지를 뻗어버리고 일어서지도 못해야 할 것 아니겠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굴욕을 느끼고, 내가 차라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여기서 죽으리라' 하고 다시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자들도 모두 쓰러져 여기저기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허청이 군리들을 시켜 독려하기도 하고 구타하기도 했지만 몰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또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갑옷, 창검, 방패의 위세와 쇄납(噴炳)22, 발라()'23, 나팔, 징, 북, 총통(銃痛)의 소리와 함께 갑자기 겹겹 둘러싸더니, 칼을 빼고 창을 써서 치고 찌르는 동작을 해 보였습니다. 신 등은 눈과 귀가 몹시 놀라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관인은 허청과 함께 군사의 위용(威容)을 정돈하고 나서 신 등을 몰았습니다. 3-4리쯤 가니, 큰 옥사(屋舍)가 있고, 성곽이 빙 둘러서 관방(關防)' 24과 같기에 물었더니, 곧 두독장(杜瀆場)25으로 현재 도지소(桃知所)26 라고도 하고 비험소(批驗所)'라고도 하였습니다. 성안에 안성사(安性寺)란 절도 있었는데, 신 등을 절에 머물러 유숙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그 관인이 누구인가 물으니, 어떤 중이 말하기를, “이 분은 곧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를 가지고서 여기에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허천호(許千戶)의 보고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들을 몰고 온 것이오. 그러나 아직 당신 마음이 진실된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내일 도저소에 이르면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 |
− | 19일 - 도저소에 도착하였습니다.
| |
− |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천호(千戶)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타고 신 등을 몰아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알리기를, “우리들은 바다에 표류하여, 풍랑과 기갈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 겨우 잔명을 보전하여 귀국의 땅에 도착하게 되어 관인을 만나 어제 아침에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맛비와 진흙길에서 구덩이에 엎어지고 골짜기에 넘어지며 돌에 긁히고 진흙에 빠져, 몸은 얼고 발은 이지러졌으며 가슴이 타고 힘은 다 빠졌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밥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지 못했는데, 또 몰아내어 큰비를 무릅쓰고 떠나게 하니 우리는 아마 도중에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당신들이 관사(官司)에 도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을 자초한 것이오. 이제 관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관에서 지급할 것이니 빨리 빨리 갑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길모퉁이에 넘어져서 땅바닥에 사지를 뻗어버렸습니다.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등이 빙 둘러앉아서 통곡하였습니다. 때마침 소를 끌고 지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정보가 천호에게 고하기를, "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당신들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당신들을 감싸줄 수 없을 뿐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한 성(城)에 이르니,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였습니다.
| |
− | 성에 이르기 7-8리 앞에서부터 갑옷을 입고 창칼과 총통이나 방패를 든 군졸들이 길거리 양 옆을 꽉 메웠습니다. 그 성에 이르니, 성에는 겹 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성 위에는 경수루(警成樓)가 죽 늘어 있고 성안에는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신 등을 이끌어 한 공관(公館)28에 이르러 유숙케 하였습니다. 신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왕벽(王碧)이란 자가 글을 써서 신에게 보이기를, “어제 이미 상사(上司)에게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신은 정말 왜인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인이 아니라 곧 조선국 문사(文士)요.” 또 노부용(虛夫容)이란 자가 자칭 가난한 선비라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文字)가 같은데 29,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천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백리에 습속이 같지 않은 것이오.30 족하(足下)'는 내 말을 괴이하게 듣고, 나 또한 족하의 말을 괴이하게 듣는 것은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오..
| |
− | 그러나 하늘이 준 성품을 같이 얻었으니 나의 성품 또한 요(堯)'32 · 순(舜)33 · 공자(孔子)'34 · 안회(顔回)'35의 성품인데, 어찌 말소리가 다름을 의심하겠소?” 그 사람은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나도 마땅히 이를 따라야하는데 다만 역풍을 만나 지금까지 널 앞에 울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오.”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나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을 공부하였지 시사를 배우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소. 먼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
| |
− | 또 한 사람이 손바닥 위에 글을 썼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불쌍하오.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할 테니 당신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처신을 잘 하고 부디 다른 사람과 경솔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도록 하시오.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번 우리의 변경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38 와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을 두어 왜적을 방비하게 했소.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이번에 당신이 처음 배를 맨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지인데, 수채관(守寨官)40은 당신을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그러므로 먼저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고 보고했던 것이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을 잡아 목 베려는 참에 당신들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갔던 까닭에 그들은 계략을 펴지 못했던 것이오. 내일은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니 당신은 자세히 해명하시오.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으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을 아끼고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이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갔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하여 바로 정보 등에게 얘기했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 “길가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목 베는 시늉을 했던 것은 모두 이 계략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군요”라고 하였습니다.
| |
− | 이 날 저녁 천호 등 관원 7-8인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탁자 가에 죽 둘러서 더니, 정보를 앞에 끌어내어 심문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함께 온 배가 14척이라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아닙니다. 한 척뿐입니다”라 대답하자 손을 휘둘러서 정보를 내보내었습니다. 또 신을 끌어내어 심문하기를, "너희들이 타고 온 원래의 선박이 몇 척이나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한 척뿐입니다.” “우리의 변경에서 왜선 14척이 어제 그 곳 바다에 함께 정박한 것을 분명히 보았고, 내가 수채관(守寨官)의 보고에 따라 이미 상급 관청의 영감님께 보고를 올렸다. 너희 배 13척은 어디에 두었는가?” “우리가 해안에 도착할 때 귀국 사람들이 탄 배 6척이 한 바다에 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6척의 배에 탄 사람을 조사한다면 우리 배의 수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왜인으로 이곳에 상륙하여 약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곧 조선 사람으로서 왜인과는 언어도 다르고 의관도 다르니, 이것으로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인으로서 도적질에 교묘한 놈은 혹 변장을 해서 조선 사람처럼 가장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그 왜인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나의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를 조사한다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호 등이 즉시 신에게 인신 등의 물건을 가져오게 하고는 대조한 뒤, 이어서 묻기를, “네가 왜인으로서 조선 사람에게서 이 물건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선 나를 북경(北京)으로 보내서 조선 통사원(通事員)과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면, 실상이 즉시 드러날 것입니다.” “너는 성은 뭐고, 이름은 뭐며, 어느 주현(州縣) 사람이고, 무슨 관직이며, 무슨 일로 인하여 우리 변경에 도착했는가? 그 정상(情狀)을 쓰되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상사(上司)에게 보고하겠다.” “저는 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성내에 거주하였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조정의 반열에 올라 처음으로 벼슬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네 부친의 이름은 뭐고, 관직은 뭐며, 어느 곳에서 죽었는가?” “아버지 이름은 택(澤)인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키 위하여 벼슬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공초(供招)를 마친 뒤 신을 별관(別館)에 숙박하게 하고,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 |
− |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공무로든 사무로든 제주도에 왕래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행방불명된 자가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열 명, 백 명 가운데 겨우 1-2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어찌 모두 바다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표류해서 도이(島夷)들이 사는 섬라(羅), 점성(占城)국과 같은 나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었고, 혹시 표류해서 중국 땅에 이르게 된 사람도 국경지대 사람들이 잘못 왜적으로 무고하고 목을 베어 상을 받는다고 해도 누가 그 실정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 등과 같은 사람도 만약 먼저 스스로 육지에 내려오지 않았거나, 인신과 마패와 같은 신표(信標)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 | | |
− | 20일-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 + | ===[[디지털역사문화콘텐츠]]=== |
− | 이 날은 흐렸다 개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도저소 천호의 성명을 물으니 진화(陳華)라고 하였습니다. 진화는 한 관인과 함께 신을 보러 와서 신의 갓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무슨 모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립(喪笠) 4 입니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모두 3년 동안 여묘(廬墓) 44를사는데, 불행히 나처럼 바다에 표류하거나, 부득이 멀리 여행하게 된 사람은 감히 하늘과 해를 우러러 보면서는 비통한 마음을 견지할 수 없기 때문에 깊은 상립을 쓰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가 되자, 허청(許淸)은 신을 인도하여 식탁을 같이 하였습니다. 좌중의 어떤 사람이 탁자 위에 젓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묻기를, “당신은 돼지고기를 먹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그릇에 채소 반찬을 담아서 신을 접대하였습니다. 허청은 또 신의 의복이 젖어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햇볕이 있으니 옷을 벗어서 햇볕에 쪼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옷이 모두 젖었으니 이 옷을 벗으면 입을 것이 없으므로 햇볕에 쪼일 수 없습니다.” 허청은 신을 이끌어 햇볕이 드는 곳에 앉히고 옷을 말리게 하였
| |
− | 습니다.
| |
− | 한 관인이 와서 묻기를, “당신 나라의 왕도 황제라 일컫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는데,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황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은 성심껏 대국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 나라의 관인들은 모두 서대(犀帶)를 맵니까?” “1품·2품은 금대(金帶), 3품•4품은 은대(銀帶), 5품 · 6품 이하는 모두 오각대(烏角帶)를 띠지만 서대는 없습니다. 145 “당신 나라에는 금은이 있습니까?” “금은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금대, 은대가 았습니까?” “모두 상국(上씨)에 와서 매입하므로 귀한 것입니다.” 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곧 공문(公文)을 내어 보였는데, 바로 파총관이 먼저 이 관인에게 패문(牌文)을 주어 도저소에 빨리 달려가 신 등을 잡아두고 조시하여 압송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한 자이니 성명은 설민(薛旻)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영파부 정해위(定海衛)148의 사람인데, 이곳 도사(都司)149가 파견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 |
− | 신은 곧 묻기를, “영파부에 하산(下山)이란 곳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있습니다.” 신은 이어서 전일 하산에 정박했다가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知府)50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왕해(王海)라고 하였습니다. 또 바깥사람들이 떼 지어 와서 앞을 다투어 종이와 붓을 가지고 물으니 일일이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관인이 가만히 써 보이기를, “이곳 사람들은 경박하니,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 |
− | | |
− | 21일 -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 |
− |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왕해(王海)가 벽의 한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 그림을 압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은 곧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5'랍니다.” “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또 백발노인이 왔기에 신이 묻기를, “천태산(天台山)과 안탕산(僞蕩山) 등은 이곳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천태산은 천태현(天台縣)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이틀 거리이고, 천태산의 남쪽으로 하루 거리에 안탕산이 있습니다.” “이 성(城)의 주산(主山)은 무슨 산입니까?” “석주산(石柱山)52 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5천8백여 리입니다.” “양자강(揚子江)'은 몇 리쯤에 있습니까?” “북쪽 2천여 리에 있습니다.” 신은 또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를 들어 묻기를, “여기에서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입니다.” “남경과는 몇 리나 됩니까?” “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 |
− | 어떤 고관이 앞에선 갈도(導)54하고 뒤에선 옹위하며 엄정하게 군대를 정렬시켜 오더니 황화관(皇華館)55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물어보았더니 곧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56 유택(劉澤)이었습니다. 그는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말하기를, “너희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어왔으니,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혹 불쌍히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을까 싶어 아직 죽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사실대로 공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공술하기를, “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 성내에서 살았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국왕의 근신(近臣)이 되었습니다. 지난 정미년 9월 17일에 왕명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경차관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남해 가운데 있으므로 나주와는 거리가 수로로 천여 리입니다. 그 해 11월 12일에 바다를 건너가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일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금년 무신년 정월 30일에 아비의 상을 듣고 윤정월 3일에 순풍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났습니다. 노도와 격랑 속에 배는 잠겼다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달 12일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섬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어선이 와서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하고 묻기에, 조선국 사람으로서 표류해 온 까닭을 들어 답변하고 이어서 '이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오?'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이곳은 대당국 영파부의 하산이오'라는 등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해적선의 20여 인이 와서 칼로 위협하며 목을 베려다가 의복, 양식, 행장 등의 물건을 빼앗고 마침내 배의 노와 닿을 끊어버리고 떠나가 버려 다시 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7일에는 또 지명을 알 수 없는 해안에 이르러 정박하니, 또 어선 6척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앞서 만났던 해적과 같은 무리인 듯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고개 둘을 넘어 6-7리가량 가니 인가가 있었으며, 서로 차례로 번갈아 가며 다음 마을로 보냈습니다. 밤에 선암리에 이르니 그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각진 몽둥이로 함부로 치면서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체송(遞送)되어 한 곳에 이르자 한 관인을 만났으니 그가 이 성까지 몰아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또 묻기를, “너는 어느 해에 등과하고, 어떠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느 주현에 거주하고, 행장에는 무슨 무기가 있으며, 원래 있던 배는 몇 척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 (乙科)58의 제1등으로 합격하여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160,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6, 수찬(修撰)65이 되었으며, 병오년(1486)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 제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166,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168이 되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으로는 배리(陪吏)가 4인으로,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상앗대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과 노는 해적을 만나 잃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169, 서책, 활 1장, 칼 1자루와 각자가 입는 의상 이외에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 |
− | 파총관(把總官)은 즉시 인신 등 물건을 점검하고는 또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토는 얼마나 되며, 부·주(府州)는 몇이나 되며, 군량은 대략 얼마나 있으며, 그 땅에서 생산되는 물품에는 어느 물품이 귀한 것이며, 읽는 시서(詩書)는 어느 경전을 존숭하며, 의관과 예악(禮樂)은 어느 시대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낱낱이 써 내어 조사하는데 근거가 되게 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이고,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군량은 내가 유신(儒臣)으로서 일찍이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 다.” “너희 나라는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너희 나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는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 “너희 나라는 어떤 법도를 사용하며, 별도의 연호가 있는가?” “연호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어서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해마다 조공을 하여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침범하거나 반역한 정상은 없어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이니, 각자 안심하고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급히 행장을 차리고 지체하지 마오”라고 하고 곧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려고 하니, 파총관은 “절할 필요는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 |
− | | |
− | 22일 -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 |
− | 이 날은 흐렸습니다. 파총관은 또 신을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어제의 공술서 가운데 하산에서 해적을 만난 일과 선암에서 구타를 당한 등의 일 및 문장이 번거로운 대목을 삭제하고 신에게 다시 한 장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 |
− | 설민(薛旻)이 탁자 옆에 섰다가 신에게 말하기를, “이 글은 상사에게 보고하여 황제에게 전달되는 것이니 간결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으리께서 번거로운 것은 지워버리고 간략히 해서 당신에게 고쳐 쓰게 한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쳐 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공술서는 바른 대로 써야 하니 글자가 비록 많다 해도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또 지워 버린 것은 바로 해적을 만났던 일인데, 도리어 한마디를 보태어 군인의 의복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운운하면서 내가 해적을 만났던 사실은 없애 버렸으니 이 또한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설민은 몰래 글을 써서 보이기를, “지금 황제께서 새로 즉위해서 법령이 엄숙하니 만약 당신이 전일에 진술한 공술서를 보신다면 황제께서는 틀림없이 '도적이 횡행하고 있구나'하고 여기시고 변장(邊將)에게 죄를 돌릴 터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 헤아린다면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갈 것만을 염두에 두어야지, 일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여 곧 붓을 들어 몇 곳을 뺀 대로 썼습니다.
| |
− | 설민이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했는데, 어째서 군량의 수량을 모른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군자감주부가 된 지 한 달이 채 차기 전에 직책이 바뀌었던 까닭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바다 위에서 밥을 먹지 못한 것이 며칠이나 됩니까?” “3일부터 11일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간혹 마른 쌀을 씹고 오줌을 마시기도 하였으며, 오줌도 없어지면 비 오기를 기다려서 옷을 적셔 짜내어 마시고는 한 가닥 터럭과도 같은 목숨을 이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입니다.” “당신의 나이는 몇입니까?” “35세입니다.” “당신은 집을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습니까?” “여섯 달입니다." "당신은 고향집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이미 별세하셨고 살아 계신 어머니는 슬피 울어 이미 나라의 풍속을 바꾸었고 또 내가 물에 빠져 죽었으리라 여겨 슬퍼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 살아 이국(異國)에 이르렀지만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신하된 사람은 나라만을 위하고 자기 집은 잊어야 한다고 하였습 니다. 당신은 왕사(王事)로 인해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마땅히 효도를 충성으로 옮겨야 할 것인데, 어찌 집을 생각합니까?”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15 하니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않고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물며 나무에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고 해는 서산에 지려 하니, 어찌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아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국왕은 성명이 무엇입니까?” “효자는 타인이 부모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참지 못하니, 타인의 과실을 듣기를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름을 경솔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경을 넘었으니 지장 없을 것입니다.” “나는 조선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신하된 사람이 국경을 넘었다고 나라를 저버리고 행동을 달리하고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설민이 곧 신과 문답한 글을 가져다 파총관에게 바치니 파총관은 읽다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일 관원을 시켜서 당신을 떠나보낼 것입니다. 휴대한 모든 물건은 건수(件數)에 따라 기록해, 앞길에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사관(舍館)으로 물러 나왔습니다. 왕광(王匡)이 란 자는 허청(許淸)의 사나운 앞잡이로서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염치없이 물건을 요구함이 끝이 없었습니다. 신의 행장에는 줄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에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와서 말하기를, “우리 대인(大人)의 은혜는 갚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입었던 솜으로 댄 철릭'을 벗어서 허청의 아들 융(隆)에게 주었습니다.
| |
− | 태주(台州)는 옛날 동구국(東歐國)의 땅으로서 민(圃)80 지방의 동쪽과 월(越)지방의 남쪽에 있고, 우두(牛頭) 앞 바다 등지는 임해현(臨海縣) 관할이며 또 태주 동남방으로 가장 먼 변방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고 늘 비가 와서 햇볕은 적었으니 실로 염황장려(炎荒障薦)'의 땅이었습니다. 신은 정월에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기후는 3-4월과 같아서 보리가 이삭이 패려고 하고 죽순 싹이 한창 무성하게 크고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또 산은 높고 내는 크며 수풀은 무성한데다, 인구가 많고 물자는 풍부하며, 주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니 하나의 별천지였습니다.
| |
− | | |
− | 23일 - 도저소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 |
− | 이 날은 흐렸습니다. 파총관이 또 신과 종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신에게 이름을 불러 인원을 일일이 세게 하였습니다. 천호 적용(望勇)과 군리(軍火) 20여 인을 차출하여 신 등을 총병관(總兵官) 82에게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신과 배리 등은 모두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양달해는 간교한 자로서 병을 핑계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을 수 없는 척하니 파총관이 또 가마를 타도록 허가하여, 가마 탄 사람이 모두 8인 이었습니다. 적용, 허청, 왕광 등이 신 등과 함께 산장(山場)과 오두(烏頭) 두 고개를 지나가는데 그 사이에 큰 내가 셋이 있었습니다. 오두령(烏頭嶺) 아래에는 또 감계(鑑溪)가 있었는데, 허청이 신 등을 감계 가의 민가로 데려가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또 길을 떠나 당두(塘頭)와 포봉(蒲峯) 등을 지나 밤을 타서 가다가 길가의 한 불사(佛寺)에 이르러 잠을 잤습니다. 그 앞마을이 바로 선암리인데 도저소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곧 신이 전에 내몰리며 지나갔던 길이었습니다. 밤에 허청과 적용이 그곳 이장(里長)을 국문하여 제 말안장을 빼앗은 사람을 잡아서 관사에 보고하고 말안장을 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군인들의 빼앗긴 갓과 망건 등은 모두 찾지 못하였습니다.
| |
− | 대개 강도질을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84 포학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지금 강남 지방 사람들 중에는 비록 더러 이익을 탐하는 마음 때문에 도적질을 하고 약탈하는 자가 있지만 하산의 해적은 신 등을 죽이지 않았고 또 남겨준 물건도 있었으며, 선암 사람은 약탈한 것을 숨기지 않고 빼앗았던 말안장을 마침내 돌려주었으니, 기풍이 부드럽고 인심이 그다지 포악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 |
− | | |
− | 24일 - 건도소(健跳所)185에 도착하였습니다.
| |
− |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천암리(穿岩里)를 지났습니다. 마을 서쪽에 있는 산 위쪽으로 석벽이 높게 솟아있는데, 홍문(虹門)86처럼 보이는 동굴이 있었기 때문에 천암(穿岩)이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전령(田嶺)을 지나니 전령 위에는 중이 불사(佛舍)를 짓느라 도로를 가로막았으므로, 행인들이 절 가운데로 지나갔습니다. 신 등은 평지에서는 더러 가마도 탔지만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하므로 가마에서 내려 걷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절에 이르러 온갖 모양으로 절룩거리며 걸으니 그 절의 중이 불쌍히 여겨 차를 끓여 대접하였습니다. 조금 머물렀다가 출발해서 바닷가에 이르니 무기를 갖춘 병선(兵船)이 물가를 따라 오르내리며 수전(水戰)을 하는 모습이 보였 습니다. 신은 거룻배를 타고 건넜는데 바로 이곳이 건도소였습니다. 건도소 성(城)은 해안에 붙어 있었습니다. 건도소의 천호인 이앙(李扇)은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준수하였는데, 갑주(甲周)와 무장을 갖추고 신 등을 이끌어 성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은 모두 겹성이었고, 고각(鼓角)7과 총통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습니다. 그 쇄납(噴网) 등 크고 작은 피리는 끝이 모두 위가 굽어 있어 부는 사람의 미간(眉間)을 향하였습니다. 성 안의 사람과 저택은 도저소에 비해 더욱 많았습니다. 이앙은 신을 이끌고 한 객관(客館)에 이르러서, 적용, 허청, 왕광, 왕해 등 및 이름은 잊었지만 성이 장(莊)이니 윤(尹)이니 하는 중후하고 나이 든 건도소 관인들과 함께 탁자의 좌우에 빙 둘러서서 신에게 표류된 까닭을 물었습니다. 신은 대략 그 전말을 진술하였습니다. 이앙은 신에게 당(堂)에 올라서 빈주(賓主)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앙은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고 신은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서 서로 마주보고 두 번 절한 뒤에 이앙이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또 신의 종자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먹여 자못 환대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성이 윤(尹)인 노령의 관인은 정보 등을 이끌고 사저로 가서 음식을 먹이고 이어 그 처첩과 자녀로 하여금 인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 인심의 순박하고 두터움이 이와 같았습니다.
| |
− | 어떤 사람이 병오년에 등과(登科)한 소록(小錄)'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과거에 합격한 방록(榜錄)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방록 가운데 '장보(張輔)'189 란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 이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당신 나라에서도 등과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제도는 초야에 있던 선비로서 등과한 사람은 모두 관청에서 봉록을 주고 문가에 정문(陸門)을 세워주며, 명함에도 무슨 과 몇 등으로 진사급 제한 자 등이라고 써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을 이끌고 자기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 앞의 네거리에 과연 용(龍)을 아로새긴 석주(石柱)로 2층 3간의 문을 만들었는데, 노란빛과 푸른빛이 눈이 부시도록 빛났고, 그 위에는 '병오과(丙午科)'9장보(張輔)의 가(家)'라는 글씨가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장보는 자기의 등과를 신에게 과시한 것입니다. 신 또한 떠벌리는 말로 그에게 자랑하며 말하기를, “나는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여 해마다 쌀 200석을 받았고 정문이 3층이나 되니 족하가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신은 “나의 정문은 먼 곳에 있으니 보일 수 없지만, 내게 문과(文科) 중시(重試)의 소록(小錄)이 있습니다”라고 하고 펼쳐 보였습니다. 장보는 소록 속에 신의 관직과 성명이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으며 말하기를, “내가 미치지 못하는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
− | | |
− | 25일 - 월계순검사(越溪巡檢司)92에 도착하였습니다.
| |
− | 이 날은 흐리고 어두웠습니다. 이앙, 허청, 왕광 및 성이 장이니 윤이니 하는 분들이 모두 신을 바다에서 전송하였습니다. 이앙은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나와 족하는 천 년 만에 만 리 밖에서 한번 만났다가 곧 헤어지니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배 위에서 작별을 고하며 말하기를, “제가 올 적에는 장군께서 수백 내지 천여 명의 군인으로 성을 둘러싸 깃발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에게 위엄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가 사관(舍館)에 머물 적에는 당(堂)에 오르게 하였는데, 예절이 틀림없고 음식을 대접하는 데 뜻이 더욱 두터웠으며 마음을 터놓고 성의를 보여서 처음 보고도 옛 벗과 같이 친밀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신 것입니다. 제가 떠날 적에는 성 서쪽까지 걸어 나오고 멀리 바다 모퉁이까지 전송하며 저를 부축하여 배에 태우고 글을 지어 작별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보내심이 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일개 먼 지방 사람인데 서로 만난 지 하루가 못되었는데도 엄함으로써 위엄을 보이고 관대함으로써 응대하고 두터움으로써 작별하였으니, 그것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대개 우리 조선은, 땅은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의관, 문물은 모두 중국과 같으니 외국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명나라가 통일을 이루어 북방의 호(胡)와 남방의 월(越)도 일가가 되었으니, 한 하늘 아래에서 모두가 형제입니다. 어찌 지역의 거리로 안팎을 나누겠습니까? 하물며 또 우리나라는 천조(天朝)를 정성으로 섬겨 공물 바치는 일을 게을리 아니한 까닭에 천자께서 예절로써 대우하고 인애로써 어루만져 주셨으니, 감싸고 안정시켜 주신 덕화(德化)는 지극하였습니다. 또 저는 조선의 신하요, 장군은 천자(天子)의 지방을 맡은 신하인데 천자의 자소지심(字小之心)을 체현하여 먼 나라 사람을 대우하심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이 또한 충(忠)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의 두터운 온정은 제가 이미 깊이 느낀 바이지만 하루도 장군 및 장(莊), 윤(尹) 두 관인과 함께 조용히 담화하며 회포를 풀 짬을 얻지 못하였으니, 백년 한 평생을 만리 밖에서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어찌 그치겠습니까?"194라고 하였습니다.
| |
− | 또 허청에게 작별하며 말하기를, “장군은 왕광 족하와 함께 나를 포봉(蒲峯)이란 마을에서 만나보고, 지극히 배고프고 목마른 나를 배부르게 먹이고, 나를 죽을 지경에서 살려주고, 두독장과 도저소 및 이 성에 이르기까지 산길이 험준한 수백 리의 땅에서 7-8일 동안을 돕고 보호해 주셨으니, 그 은정(恩情)의 두터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작별한 뒤에는 서로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슬픔이 더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작별을 고하고 적용과 함께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넜습니다. 적용은 신에게, “이 바다를 떠가노라면 서쪽으로 천태산이 보이는데, 지금 마침 구름과 안개로 사방이 막혀서 바라볼 수가 없겠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저녁에 영해현(寧海縣)의 월계순검사 95에 도착하였습니다. 성은 산꼭대기에 있었고, 군졸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바닷가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적용은 그 무리와 함께 배에서 내려서 성에 들어가고 신 등은 해안에 머물게 하였는데,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 |
− | | |
− | 26일 - 영해현을 지났습니다.
| |
− | | |
−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순검사의 건너편 언덕에 월계포(越溪鋪)96가 있었습니다. 월계포 앞에 배를 놓아두고 육지에 올라 시냇가의 언덕을 따라서 걸었습니다. 시내의 바다로 통하는 어귀는 매우 넓었는데 그 원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다가 서양령(西洋嶺) 허가산(許家山)을 지나서 시오포(市奧鋪)에 이르니, 포(鋪) 안의 사람이 차 몇 사발을 대접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백교령(白嶠嶺)에 이르니, 군졸 20여 인이 가마를 메고 와서 신 등을 맞이하였습니다. 신 등 여덟 사람은 또 가마를 타고 진사방(進士坊)을 지나서 영해현의 백교역(白嶠驛)97에 이르렀습니다. 역은 현치(縣治) 안에 있었습니다. 당(唐)이란 성을 가진 지현(知縣)98이 신 등에게 음식을 배부르게 먹였습니다. 가마를 타고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서 동산포(桐山鋪)', 매림포(梅林鋪), 강격령(江C嶺), 항공포(1空鋪), 해구포(海口鋪)를 지났습니다. 그 중간에 큰 내 셋과 큰 다리 둘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잊었습니다. 밤 2경쯤에 서점역(西店驛)이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서점역에는 갑병(甲兵)202 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방어소(防禦所) 같았습니다.
| |
− | | |
− | 27일 - 서점역에 머물렀습니다.
| |
− | 이 날은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려서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하는 수습이 없이 서점역에서 묵었습니다.
| |
− | | |
− | 28일 - 연산역(連山驛) 203에 도착하였습니다.
| |
− |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적용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중국의 법령은 엄정해서 조금이라도 더디고 늦어지면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지금
| |
− | | |
− | 비록 큰비가 내리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의 군리(軍吏)와 신의 종자들이 모두 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려서 물이 계곡에 넘치므로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이 말하기를, “계곡의 물은 가득 찼다가도 다시 줄어들고 또 이 역에서 지급하는 식량도 한정이 있으니, 어제 머문 것도 이미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신 등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책허포(明墟鋪), 탁개령(拆開嶺), 산황포(山隍鋪)를 지나고, 또 대령(大嶺), 방문포(方門鋪)를 지나서 쌍계포(雙溪鋪)에 이르렀습니다. 쌍계포 북쪽에 쌍계(雙溪)가 있는데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옷을 입은 채 건넜습니다. 상전포(尙田鋪)를 지나서 봉화현(奉化縣)의 연산역에서 유숙하였습니다. 현은 역 동쪽으로 2리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지현의 성명은 두안(杜安)204이었습니다. 역승(驛丞)25은 신 등이 옷이 비에 젖어서 소름이 돋은 것을 보고 건물 앞에서 나무 등걸을 불태워 주었습니다. 신과 종자들은 빙 둘러앉아 불을 쬐어 온기를 취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마구 화를 내며 등걸불을 차고 짓밟았습니다. 신 등은 두려워서 달아나 숨었지만, 적용과 역승은 욕을 당하였습니다. 적용이 신에게 말하기를, “밖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해적이라고 말하면서, 역관(驛官)이 지급해 주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저 분은 글을 읽는 군자라고 말했지만 저 사람은 여전히 횡포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 자가 의복을 빼앗아 갔다는 등의 내용으로 고소장을 써서 지현에게 바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저 사람의 나쁜 짓은 진실로 징계하고 싶지만, 빼앗긴 물건이 없는데도 빼앗겼다고 무고하여 남을 부당한 죄로 덮어씌우는 일은 매우 도리에 어긋납니다. 지금 족하는 우리를 호위해 왔으니 대중을 공갈하고 폭행한 죄로 저 자를 다스린다 해도 말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은 곧 고소장을 작성하여 지현에게 보냈습니다.
| |
− | | |
− | 29일 - 영파부(寧波府)를 지났습니다.
| |
−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적용과 신 등이 가마를 타고 큰 내를 건넜습니다. 냇가에 절이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앞에는 다섯 개의 부도(浮圖)와 두 개의 큰 탑이 있었습니다. 또 허백관(虛白觀), 금종포(金鐘__), 남도포(南渡鋪)를 지나서 광제교(廣濟橋)209에 이르렀습니다. 광제교는 큰 내에 걸쳐 있었는데 다리 위에는 지붕을 얽었고 다리의 길이는 20여보(步)나 되었습니다. 다리가 있는 땅이 곧 영파부의 영역이니 옛날 명주(明州)였을 적에 세운 것입니다. 또 3리를 가니 큰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의 북쪽이 진사리(進士里)였습니다. 또 10여 리를 가니 다시 큰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 위에는 지붕을 얽었고 광제교와 같으면서 조금 적은 편인데 그 이름은 잊었습니다. 다리의 남쪽에 문수향(文秀鄕)이 있었습니다. 또 상포교(常浦橋)를 넘어 북도강(北渡江)'에 이르러 작은 거룻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우두 앞바다에서 서북쪽으로 연산역에 이르기까지는 뭇 산들의 죽 늘어선 산봉우리가 어지러이 둘러싸여 있고, 시내와 암벽이 서로 얽히고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강에 이르니 평평하고 넓은 들이 넓게 트여 있고, 다만 먼 곳에 있는 산들이 눈썹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강의 북쪽 언덕에 방죽 하나를 쌓았으니, 방죽은 곧 배를 끌어 올려서 지나가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방죽의 북쪽에 제방을 쌓고 강을 파서 작은 거룻배가 강가를 둘러 죽 늘어서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적용이 신 등을 이끌어 그 거룻배를 타고 석교(石橋) 열 셋을 지나 20여 리를 갔습니다. 강의 동쪽 제방에는 민가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서남방에는 사명산(四明山)이 보였습니다. 산의 서남쪽으로는 천태산에 연해 있고, 동북쪽으로는 회계산(會稽山), 진망산(秦望山) 등과 연해 있었으니 곧 하지장(賀知章)이 젊었을 때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 |
− | 노를 저어 영파부성(寧波府城)에 이르니 물을 가로막아 성을 쌓았는데 성은 모두 겹 문, 문도 모두 겹 층, 문 밖도 겹 성, 그리고 수구(水溝)213 또한 이중이었습니다. 성에는 모두 홍문(虹門)을 설치했는데 문에는 쇠 빗장이 있었고 배 한 척이 드나들 만하였습니다. 노를 저어 성안으로 들어가서 상서교(尙書橋)14에 이르니 다리 안의 강의 너비는 100여 보(步)였습니다. 다시 혜정교(惠政橋)5와 사직단(社稷壇)을 지났습니다. 성안에서 지나간 큰 다리 또한 10여 곳이었고, 높고 큰 집들이 언덕 좌우에 죽 이어져 있었으며, 자석(紫石)으로 기둥을 만든 것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기이한 광경과 좋은 경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노를 저어 북문으로 나오니 북문 또한 남문과 같았습니다. 성 주위의 둘레를 알 수 없었습니다. 부치(府治), 영파위(寧波衛), 은현(縣)의 현치(縣治)와 사명역(四明驛)이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과대득교(過大得橋)에 이르니 다리에는 홍문 세 개가 있었습니다. 비가 세차게 내려 강에서 유숙하였습니다.
| |
− | | |
− | 2월 1일 - 자계현(慈溪縣)을 지났습니다.
| |
− |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신청교(新淸橋)와 진사향(進士鄕)을 지나서 송(宋)나라 석장군(石將軍)의 사당19에 이르렀습니다. 사당의 크기는 관부(官府)처럼 컸고, 정표(佐表)20하는 문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부성(府城)에서 이곳까지 10여 리 사이에 강의 양쪽 언덕에는 상점과 큰 배가 구름처럼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난 뒤에는 소나무, 대나무, 등자나무, 귤나무가 언덕 좌우에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 다정(茶亭), 경안포(景安鋪), 계금향(繼錦鄕), 유씨정절문(兪氏貞節門)을 지나서 서진교(西鎭橋)에 이르니 다리가 높고 컸습니다. 또 두개의 큰 다리를 지나갔습니다. 서파청(西鬪廳)에 이르니, 방죽의 양쪽 언덕은 돌로 제방을 쌓아, 물을 가로막아 보[堰]를 만들어 바깥 강과는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양쪽 옆에 기계(機械)를 설치하고 대로 만든 새끼로 밧줄을 만들어 배를 당겨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서여향(西嶼鄕)의 신언(新堰)에 이르니, 신언은 옛날 찰자항(刹子港)과 안공언(顔公堰)으로서 후에 찰자항을 막고 안공언을 없애어 전지(田地)를 만들고 물을 끌어 동쪽으로 합류시켜 광리교(廣利橋)의 남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방죽을 설치하여 밖으로 강호(江湖)를 막고 관선(官船)을 당겨 건너게 하고 이를 '신언'이라 불렀는데, 대개 서파(西)와 같았습니다. 이곳에 이르러 또 배를 당겨 지나야 하였습니다. 신교(新橋), 개희교(開禧橋)222, 요평(姚平) 23 처사(處士)의 무덤을 지나서 자계현(慈溪縣)에 이르렀습니다. 노를 저어 그 안으로 들어가니 경원문(經元門), 종영문(鍾英門), 도당리문(都堂里門), 도헌교(都憲橋)224, 진사문(進士門), 덕성교(德星 橋)225, 보봉문(寶峯門)이 있었고, 임청정(臨淸亭) 앞에 이르러 배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밤에 또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가서 닭이 울 무렵 언덕에 정박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강 이름을 물으니 바로 요강(姚江)226 이었습니다. 강가에 역(驛)이 있으니 거구역(車廢驛)27이고, 역승(驛丞)은 진고(秦高)였습니다.
| |
− | | |
− | 2일 - 여요현(餘姚縣)을 지났습니다.
| |
− | 이 날은 흐렸습니다. 아침 일찍이 배를 출발시켜 서북방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강과 산은 크고 높았고 들판은 평평하게 펼쳐 있으며 인가는 빽빽하고 경치는 천태만상이었습니다. 저녁에 오령묘(五靈廟), 역전포(驛前鋪), 요강역(姚江驛)228, 강교(江橋) 29를 지나서 여요현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이 성을 안고 서쪽으로 흐르니 연금향(聯錦鄕)의 조서교(曹『橋)가 있었는데 다리에는 홍문(虹門) 세 개가 있었습니다. 또 등과문(登科門)과 장씨광명당(張氏光明堂)을 지나 밤 3경에 하신파(下新婦)에 이르니 하신파도 또한 앞서 본 신언과 같았습니다. 또 배를 당겨 하신파를 지나 큰 다리를 지나니, 큰 나무 수십 그루가 강 가운데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때 중파(中)에 이르니 중파 또한 하신파와 같았습니다. 또 배를 당겨 거슬러 강으로 올라가니 곧 상우강(上虞江)이었습니다.
| |
− | | |
− | 3일 - 상우현(上虞縣)을 지났습니다.
| |
− | 이 날은 맑았습니다. 큰 다리 둘을 지나 올라갔습니다. 강 남쪽에서 어떤 관인이 가마를 타고 왔는데 바로 상우지현(上虞知縣) 30이 현성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상우현성은 강 언덕에서 2-3리가량 떨어져 있었습니다. 또 황포교(黃浦橋), 화도포(華渡鋪), 채묘포(蔡墓鋪), 대판교(大板橋), 보청운문(步靑雲門), 신교포(新橋鋪)를 지나 조아역(曹娥驛)에 이르렀는데 역승은 서심(徐深)이었습니다. 역 북쪽에 방죽이 있었습니다. 배를 놓아두고 방죽을 지나 도보로 조아강(曹熊江)에 이르러 강을 가로질러 건넜습니다. 건너편 언덕에 또 방죽이 있었습니다. 방죽과 양호순검사(梁湖巡檢司)는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또 배를 놓아두고 방죽을 지나 서쪽으로 2리를 걸어서 동관역(東關驛)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문창교(文昌橋), 동관포(東關鋪), 경령교(景靈橋), 황가언포(黃家嘎鋪), 과산포(瓜山鋪), 도가언포(陶家堰鋪), 모양포(茅洋鋪)를 지났습니다. 밤 4경233에 이름을 모르는 강기슭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 |
− | | |
− | 4일-소흥부(紹興府) 도착하였습니다.
| |
− | 이 날은 맑았습니다. 감수(鑑水)로 노를 저어 올라갔습니다. 물은 경호(鏡湖)34의 한 갈래로부터 와서 성안을 둘렀습니다. 해 뜰 무렵 소흥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성 남쪽에서부터 감수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창안포(昌安鋪)를 지나 노를 저어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에는 홍문이 수문(水門)의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네 겹으로 되었는데 모두 쇠로 만든 문짝을 설치하였습니다. 광상교(光相橋) 등 큰 다리 다섯과 경괴문(經魁門), 연계문(聯桂門), 우성관(佑聖觀), 회수칙비(會水則碑) 등을 거쳐서 10여 리쯤 가니 관부(官府)가 있었습니다. 적용은 신 등을 이끌고 기슭에 내리니, 그 저자의 번화함과 인구의 많음은 영파부의 3배나 되었습니다.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35 황종(黃宗),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36 오문원(吳文元), 포정사분수우참의(布政司分守右參議) 38 진담(陳潭) 39 이 징청당(淸堂)240 북벽(北壁)에 죽 늘어앉았는데, 병갑(兵甲)', 태장(杖)이 그 앞에 삼엄하게 늘여져 있고 탁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신을 인도하여 탁자 옆에 이르러서 서쪽을 향해 서게 하였습니다. 신의 성명, 살던 지방, 역임한 관직, 그리고 표류하게 된 까닭, 상륙하여 약탈한 일이 없었는지의 정상, 가지고 온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신은 파총관에게 답하던 말로 답하고 난 뒤 하산에서 해적을 만나고, 선암에서 몽둥이를 맞았던 일을 더 보태고, 가져온 행장에는 말안장 1벌을 또 첨가하였습니다. 세 사상(使相)42 은 곧 파총관이 보고한 문서를 내어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공술서의 앞뒤의 상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소?”라고 하였습니다. “파총관이 처음 심문할 적엔 표류하여 정박하게 된 사정만을 답했을 뿐이었고, 오늘 포정삼사(布政三司)243가 다시 심문하시니 해적을 만났던 일 등을 상세히 거론했던 것입니다.” 세 사상은 모두 신에게 천천히 말하기를, “공술서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당신에게 실로 죄가 되오. 당신은 마땅히 앞서 쓴 말을 베껴 쓰되 한 글자도 가감이 없어야 하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곧 베껴 썼습니다. 세 사상은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다음날 당신이 항주(杭州)에 도착하면 진수태감(鎭守太監)244 ·수의(誘衣)245삼사(三司)의 대인(大人) 46께서, 북경에 도착하면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에서 다시 당신의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 때에도 또한 이대로 답해야 하오. 조금이라도 서로 어긋나면 절대로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처음에는 당신들을 왜선(倭船)을 타고 와서 겁략하는 무리들이라고 여겨, 잡아다 죽이려고 했소. 당신이 만약 조선인이라면 당신 나라의 역대 연혁과 도읍 산천 · 인물·속상(俗尙) 247. 사전(祀典)48. 상제(喪制)·호구(戶口)·병제(兵制)·전부(田賦)·관상(冠裳)의 제도를 자세히 써 내면 여러 사서(史書)에 맞추어 보고 옳고 그름을 가리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 |
− | 신은 진술했습니다. “연혁과 도읍은 처음에 단군(檀君)49께서 당요(唐堯)와 같은 시대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여 세대(世代)를 천여 년이나 지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250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고, 평양에 도읍하여 8조252로 백성을 가르쳤으니, 지금 나라 사람들이 예의(禮義)로 풍속을 이룸이 이때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53이 망명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기자의 후손인 기준(箕準)254을 내쫓으니 기준은 마한(馬韓)으로 달아나서 그 곳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그 중간에 구한(九韓) 55이 되기도 하고, 이부(二府)56가 되기도 하고, 사군(四郡) 57이 되기도 하고, 삼한(三韓)258이 되기도 했는데, 연대가 멀고 오래되었으므로 다 기술할 수 없습니다.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59 때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박씨(朴氏)260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高句麗)의 고씨(高氏)와 백제(百濟)의 부여씨(扶餘氏)가 서로 잇달아 일어나서 옛 조선 땅을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신라는 동남지방을 점거하여 경주(慶州)에 도읍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서북 지경을 점거하여 요동(遼東) 그리고 평양에 도읍했으며, 또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겼는데 그 지명은 잊었습니다. 백제는 중부의 서남지역을 점거하여 직산(稷山)에 도읍 했다가 뒤에 광주(廣州), 한양(漢陽), 공주(公州), 부여(夫餘)에 도읍하였습니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 때에 와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당군(唐軍)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 백제도 멸망시켜 삼국을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뒤에 견훤(甄萱)262이 반란을 일으켜 전주(全州)를 점거하고, 궁예(弓裔)263가 반란을 일으켜 철원(鐵原)을 점거했으나, 고려(高麗)의 왕씨(王氏)264가 공적이 높고 덕망이 많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니, 궁예는 스스로 도망했고 견훤은 스스로 항복했으며, 신라왕은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장부에 기재하여 와서 항복했으니, 재차 삼국을 통합하여 개성(開城)에 도읍하고 대대로 전한 지 거의 500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조선으로 바뀌어, 한양에 도읍한 지 약 100년이 됩니다.
| |
− | 산천은, 장백산(長白山)은 동북방에 있는데 백두산(白頭山)이라고도 합니다. 가로는 천여 리 뻗쳤고 높이는 200여 리 되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 둘레가 80여 리 됩니다.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북으로 흘러서 속평강(速平江)이 되고, 서북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이 되는데, 송화강 하류가 곧 혼동강(混同江)입니다.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에 있고, 금강산(金剛山)은 동쪽에 있는 데 1만2천여 봉우리가 있으며, 지리산(智異山)은 남쪽에 있고 구월산(九月山)은 서쪽에 있는데, 이상 네 산은 매우 높고 험하며 기이한 유적이 많습니다. 삼각산(三角山)은 곧 국도(國都)의 진산(鎭山)65입니다. 대동강(大同江)·살수(薩水)·임진도(臨津渡)·한강(漢江)·낙동강(洛東江)·웅진(熊 津)·두치(豆恥津) · 영산진(榮山津) 등은 큰 강입니다.
| |
− | 인물은 신라의 김유신(金碩信)266 . 김양(金陽)267. 최치원(崔致遠)268. 설총(薛聰)269, 백제의 계백(階伯)70 ,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최충(崔沖) 12. 강감찬(姜郡贊)273 . 조충(趙沖)274김취려(金就順)275·우탁(禹悼) 276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우리 조선은 일일이 셀 수도 없습니다. 속상은 예의(禮義)를 숭상하고 오륜(五倫)을 밝히고 유술(儒術)을 존중합니다. 해마다 봄가을에 양로연(養老宴)278 향사례(鄕射禮)219.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합니다. 사전(祀典)은 사직(社稷)28, 종묘(宗廟)292,석전(釋奠)283과 여러 산천에 대한 제사가 있습니다. 형제(刑制)는 《대명률(大明律)》284에 따릅니다. 상제(喪制)는 주자(朱子)의 《가례》에 따릅니다. 관상(冠)은 중화의 제도를 따릅니다. 호구(戶口), 병제(兵制), 전부(田賦)는 내가 유신(儒臣)이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을 모르겠습니다.”
| |
− | “인정을 추쇄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오?”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있어 수로가 매우 험하고 멀기만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들어가 피하여 오랫동안 도망범의 소굴이 되었으니, 그런 까닭에 가서 이들을 잡아 오는 것입니다.” “제주도는 우리 중국과 거리가 몇 리나 되오?" 신은 수로가 먼 것을 부풀려서 말하기를,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대개 배가 큰 바다에서 순풍을 만난다면 하루에 천리도 갈 수 있는데, 지금 나는 제주도로부터 바다에 뜬 것이, 주야를 따져 본다면 무릇 29일이나 되며, 큰바람에 몰려서 나는 듯이 빨리 달려 중국의 해안에 도착 정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제주도로 가는 길은 대개 수만 여 리나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오?” “전해 듣기로는 우리나라 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지나 황도(皇都)285에 도착하자면 3천9백여 리나 된다고 합니다.”
| |
− | 총병관 등의 세 사상은 곧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이어서 단자를 써서 내려 주었습니다. 단자 속에는 “최관(崔官)에게 예물로 돼지고기 1쟁반, 거위 2마리, 닭 4마리, 물고기 2마리, 술 1동아리, 쌀 1쟁반, 호두 1쟁반, 채소 1쟁반, 죽순 1쟁반, 국수 1쟁반, 대추 1쟁반, 두부 1쟁반을 보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 반찬과 식량 등 물품을 배리(陪吏)와 군인에게 차등있게 내려주었습니다. 신은 곧 사례하는 시를 지어 두 번 절하니 세 사상들도 일어나 공손스레 답례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사례하는 시를 보건대 이 지방 산천을 어찌 그리도 자세히 알고 있소? 이는 필시 이곳 사람이 말해 준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사방을 돌아봐도 친한 사람이라곤 도무지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얘기하겠습니까? 내가 일찍
| |
− | 이 중국의 지도를 훑어보았기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여 기억나는 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답을 마치고 나서, 신은 서너 명의 관인들과 함께 탁자 가에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었습니다. 적용의 군리(軍吏) 한 명이 밖에 있다가 신의 종자인 김도종을 구타하여 상처를 입혔습니다. 신은 이 사실을 글로 써서 여러 관인들에게 보였더니 한 관인이 달려가서 총병관에게 알렸습니다. 총병관이 구타한 사람을 잡아와서 죄를 다스려 곤장을 치고 또 적용에게 부하를 통솔치 못한 죄로 곤장을 쳤습니다. 신 등은 물러 나와 다시 호수를 따라서 노를 저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영은교(迎恩橋)를 지나 봉래역(蓬驛)86 앞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저녁에 지부(知府) 주(周)287라는 사람과 회계현, 산음현 두 지현(知縣)88이 모두 식량과 반찬을 넉넉히 보내주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