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적 교육서 송남잡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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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74975 동아시아의 백과전서파 실학과 황윤석]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74975 동아시아의 백과전서파 실학과 황윤석] | ||
− | 유서는 지식 전체를 일정한 부문체계에 따라 재편해 독자에게 제시하는 저술형식이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서는 의리와 이념에 치중된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실을 실용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실학적 풍조가 일어나면서 유서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 | 유서는 지식 전체를 일정한 부문체계에 따라 재편해 독자에게 제시하는 저술형식이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서는 의리와 이념에 치중된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실을 실용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실학적 풍조가 일어나면서 유서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유서와 비슷한 형태의 저술을 서양에서는 백과전서라고 부른다.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다. 양자의 공통점은 기존의 지식의 위계성에서 탈피하거나 해체를 지향한 점이다. 유서 편찬 자체가 지식의 집중과 분류를 통해 대중에게 쉽게 보급하고자 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상업적 출판의 발전과 함께 불특정다수의 독자를 위해 지식의 평준화를 지향하였고, 독자의 요구에 부응해 나갔다. |
− | 유서와 비슷한 형태의 저술을 서양에서는 백과전서라고 부른다.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다. 양자의 공통점은 기존의 지식의 위계성에서 탈피하거나 해체를 지향한 점이다. 유서 편찬 자체가 지식의 집중과 분류를 통해 대중에게 쉽게 보급하고자 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상업적 출판의 발전과 함께 불특정다수의 독자를 위해 지식의 평준화를 지향하였고, 독자의 요구에 부응해 나갔다. | + | |
18세기 조선 사상계의 주요변화상은 도덕담론인 주자성리학에서 지식담론인 고증학․박학으로 변화해 간 것이다. 후자의 지식인들은 경학보다 박학을 중시하였고, 도보다는 기예(지식과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리와 의리보다는 명물도수와 격물치지를 더 중시하였고, 연구방법에서는 고증과 실측을 강조하였다. 백과전서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거대한 학술사적 전환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주자학일변도의 풍토에서 기존의 학문적 위계를 일부 해체하여 자연과학의 독자적 가치를 긍정하였고, 서학의 수용을 통해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 18세기 조선 사상계의 주요변화상은 도덕담론인 주자성리학에서 지식담론인 고증학․박학으로 변화해 간 것이다. 후자의 지식인들은 경학보다 박학을 중시하였고, 도보다는 기예(지식과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리와 의리보다는 명물도수와 격물치지를 더 중시하였고, 연구방법에서는 고증과 실측을 강조하였다. 백과전서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거대한 학술사적 전환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주자학일변도의 풍토에서 기존의 학문적 위계를 일부 해체하여 자연과학의 독자적 가치를 긍정하였고, 서학의 수용을 통해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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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대한 개혁을 도모하였던 실학파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가 백과전서파적인 성향이다. 이것은 그들의 실용적인 학문적 지향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박학성 그 자체로서 이미 그것을 경시하였던 당시의 정통주의적 학문 경향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즉 박학에는 단순한 지식의 집적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 현실에 대한 개혁을 도모하였던 실학파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가 백과전서파적인 성향이다. 이것은 그들의 실용적인 학문적 지향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박학성 그 자체로서 이미 그것을 경시하였던 당시의 정통주의적 학문 경향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즉 박학에는 단순한 지식의 집적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
2022년 12월 15일 (목) 08:18 판
목차
가학(家學)
임천(林川) 조(趙) 가학(家學): 졸수재 조성기부터
백탑파(白塔波)
교육의 실학
유서(類書)
조선 후기 유서(類書)와 서학(西學)―『성호사설』과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중심으로―
유서(類書)는 단편적인 지식들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개별적 지식들에범주를 부여해 분류하고 평가하려는 능동적인 지식 재배치의 결과물이다. 당연히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사회의 변화나 지적 조건의 변화는 지식의 정렬과 재배치, 위상이나 범주의 변경 등의 결과로 이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유서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요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 시대, 한 사회 지식장의 표현형으로서, 이를 통해 시대의지적 조건과 지적 지향이 바뀌는 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類書類 문헌의 儒家 經典 이해―『五洲衍文長箋散稿』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유서류 문헌의 출현은 “지식의 축적”과 “박학 지향”이라는 특성을 보인다. 동아시아에서 축적되어온 방대한 지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유가 경전을 빼놓을 수없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대표적 유서류 문헌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초점을 맞추어, 유가 경전에 대한 지식이 박학적 관심 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며, 나아가 그것이 주자학적 경전 연구가 심화되고 비판적으로 극복되고 있던 조선 학계에 어떠한 형태의 진전된 유가 경전 해석의 시야를 열어주었는지 살펴보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구성된 유가 경전 관련 지식은 중국과 조선의 주자학적 경전 이해를 경학사의 일부로 다룸으로써 결과적으로 그것을 상대화시키는 지평을 열어준다. 19세기초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경학 지식을 통해 우리는 조선 후기 유가 경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확인할 수 있다.
『松南雜識』는 1855년(哲宗 6), 趙在三(1808~1866)에 의해 편찬된 백과전서적 성격의 類書이다. 이 책은 총 14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권마다 5~6부류로 나누어져 33類를 이루고, 각 부류의 세부항목은 총 4,432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항목들은 천문・세시・지리・관혼상제・과거・농경・의식주・음악・종교・사상・언어・동식물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인문학과 관련된 지식뿐만 아니라 민속학이나 종교학, 천문・지리학에서 농학・병학・한의학・복식사・음악사・과학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학계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여 이념적 학술의 범주에서 벗어나 실체를 드러낸 실증적 학문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학문적인 방법으로 名物度數之學을 표방한 많은 지식인들이 博學과 考證學을 전범으로 삼아 박물학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송남잡지』의 학문적 연원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유서라는 형태의 저술이 오래전부터 그 명맥을 유지하며 이어져왔고, 고려 이래 끊임없이 전래된 중국 유서의 영향하에 조선에서는 필기적 특성을 담아낸 고유한 유서문화를 형성해왔다. 『송남잡지』는 중국 유서의 체계적 형식을 유지하고, 전대의 필기류 전통을 계승하면서 조선의 박물학적 지식을 총괄하고 있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송남잡지』는 지식을 활용하고 배치하는 과정에서 『藝文類聚(예문유취)』와 같은 중국 유서의 전형적인 방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국내외의 문헌 자료를 다각적으로 선별하여 폭넓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조선 후기 유서의 지형도 안에서 그 위상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類書란 百科全書式 資料匯集의 특성을 지니는 것을 가리킨다. 본고는 기존의 국내 연구나 목록들이 類書를 넓게 정의하여 왔으나, 본고는 사물의 장실과 기원을 검색하기 위한 공구서[文獻用語事典]만을 類書로 한정한 뒤, 중국의 類書가 국내에 수용된 양상을 개괄하고, 전근대시기 한국의 지식사회에서 類書를 참조하고 新撰한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폈다. 그리고 주로 조선후기의 類書들을 중심으로 ① 어휘 중심의 유서 ② 인물ㆍ일화 중심의 유서 ③ 박물학적 유서 ④ 경학, 성리학 관련 유서 ⑤ 역사 관련 유서 ⑥ 변증을 겸한 유서 ⑦ 국가제도 전고 종합 유서 ⑧ 실용백과전서 ⑨가정지침서의 類書 ⑩ 아동교과서의 소형 類書 등 아홉 종류로 나누어 대표적인 예들을 각각 살펴보았다.
유서는 지식의 회집, 항목화, 분류, 변증이라는 문체 성격을 공유하는 것으로서, 임란 이후 지식의 팽창을 적절히 반영해 낼 수 있었다. 주자학은 원칙적으로 박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박학에 대한 도학적 경계는 지식이 증대하면서 함께 강화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박물 또는 명물도수에 대한 관심이 일부 지식인들에게 확산되면서 양측의 입장과 지향 차이는 좀 더 분명해졌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바로 그런 과정의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 유서는 한편으로 한대 이래의 명물학 전통에 기대어 있었다. 명물학은 고전을 지식 변증의 기준으로 끌어들이고 만물 사이의 위계적 질서 관념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르러 박물학에 대한 관심과 병행하여 만물의 수리 질서에 대한 재인식이 나타났다. 그것은 분명 서학의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상수학의 외피를 걸치고 있었고, 그나마도 아직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학문방법론 차원의 새로운 함의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유서의 ‘물리’는 아직 전통적인 지식체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교육서 송남잡지: 분류, 어원, ‘아하! 순간’, 정체성
참고서 송남잡지
박물학
『오주서종박물고변』저술의 성격과 이규경의 박물관(博物觀)
이 논문에서는 이규경의 저술 중 과학기술서로 분류되는 『오주서종박물고변』의 성격과 책이 집필되었던 시대적 배경을 고찰하여 『오주서종박물고변』의 사전적 전문저술이라는 특징을 확인해보려 한다. 이규경은 『오주서종박물고변』을 쓰면서 자기 학문의 핵심 방법으로 주장했던 박물의 의의를 잘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이규경의 저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책은 백과전서식 저술인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이 책은 다루는 영역이 매우 넓고, 경험적 지식을 넘어 자신의 상상과 주관적 견해가 덧붙여진 부분이 많아, 전문 지식서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반해 『오주서종박물고변』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객관적 측면에서 정확성과 전문성이 높고 당 시대에서 실제 생활과 관련한 실용서로서 가치가 높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이규경의 박물관(博物觀)이 더욱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학문과 교육론은 주희(朱喜)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의 리학적(理學的) 사고에 대한 대항과 이상적인 것을 고(古)에서 찾으려는 고학(古學)에서 비롯된다. 소라이는『政談』과 <學寮了簡書>에서 안사이의 강석주의(講釈主義)의 비판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은 리학의 극복과 고학의 지향이 강석주의 비판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소라이의 학습론은 고문사(古文辞)를 체득하기 위한 방대한 독서에서 시작된다. 독서를 위한 회독(會読)과 간서(看書)가 중요한 학습방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편 소라이의 교육론은 후천적인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교육으로 인성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 때의 변화는 이미 <육경(六経)>에 확정되어 있는 성인(聖人)의 도(道)로의 습숙(習熟)을 통해 가능해진다. 모방과 습숙이 교육의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방과 습숙에 의한 지의 체득 방법은 어떤 정해진 틀에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가두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정해진 틀이라는 것을 확장한다면 정치권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소라이의 교육론은 정치권력에 좌우될 수 있는 ‘인간’의 교육에 시선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The 19th Century Korean Novel: An Exhibition Center of Knowledge
이 논문은 19세기 한국 고소설과 ‘지식’의 관련성에 초점을 두고 연구된 것이다. 18,19세기가 되면 淸과의 교류로 서적이 많이 유입되고, 그를 토대로 지식과 박학에 대한 열망이 생겨난다. 지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식을 담은 서적이 간행되면서 소설에도 지식이 수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식을 수용한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먼저 <삼한습유>와 <옥선몽>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에는 당대의 책에 담겨 있거나 지식인들이 갖고 있었던 거의 모든 지식들이 수용되어 있다. 이러한 지식 소설이 창작된 것은 지식을 과시하고 지식을 습득하려는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었다. 지식은 한글소설에도 수용되었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명행정의록>과 <삼강명행록>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궁중여성이나 양반여성들이 향유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언해 한시, 지리서, 각종 생활백과 등이 대량으로 삽입되어 있어서, 여성 독자들에게 폭넓은 지식과 교양을 제공할 수 있었다. 지식에 대한 관심이 확산됨에 따라 <두껍전>이나 <춘향전>처럼 한글을 깨우친 일반 대중들이 향유했던 소설에도 지식이 수용되었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관심이 사회 전 계층에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지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식을 담은 소설이 창작 유통된 것은 지식의 ‘힘’에 대한 믿음이 19세기 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적 이념으로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유서는 지식 전체를 일정한 부문체계에 따라 재편해 독자에게 제시하는 저술형식이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서는 의리와 이념에 치중된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실을 실용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실학적 풍조가 일어나면서 유서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유서와 비슷한 형태의 저술을 서양에서는 백과전서라고 부른다.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다. 양자의 공통점은 기존의 지식의 위계성에서 탈피하거나 해체를 지향한 점이다. 유서 편찬 자체가 지식의 집중과 분류를 통해 대중에게 쉽게 보급하고자 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상업적 출판의 발전과 함께 불특정다수의 독자를 위해 지식의 평준화를 지향하였고, 독자의 요구에 부응해 나갔다.
18세기 조선 사상계의 주요변화상은 도덕담론인 주자성리학에서 지식담론인 고증학․박학으로 변화해 간 것이다. 후자의 지식인들은 경학보다 박학을 중시하였고, 도보다는 기예(지식과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리와 의리보다는 명물도수와 격물치지를 더 중시하였고, 연구방법에서는 고증과 실측을 강조하였다. 백과전서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거대한 학술사적 전환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주자학일변도의 풍토에서 기존의 학문적 위계를 일부 해체하여 자연과학의 독자적 가치를 긍정하였고, 서학의 수용을 통해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현실에 대한 개혁을 도모하였던 실학파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가 백과전서파적인 성향이다. 이것은 그들의 실용적인 학문적 지향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박학성 그 자체로서 이미 그것을 경시하였던 당시의 정통주의적 학문 경향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즉 박학에는 단순한 지식의 집적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