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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在桃渚所。是日晴。外人麋至觀臣。王海指壁上一眞像曰。你知此畫乎否。曰。不曉得。海曰。此乃唐朝進士鍾馗也。臣曰。鍾馗平生不得進士。何以謂之進士。海等喧噪大笑。又有白髮老翁來。臣問曰。天台,雁蕩等山。距此地幾里。翁答曰。天台山在天台縣北。距此二日程。天台山之南一日程。有雁蕩山。臣又問此城主山何。曰。石柱山也。引臣出門。指點石柱山。則果石壁作山。當山頂有大石如柱形。臣曰。自此距北京幾里。翁曰。五千八百有餘里。問距揚子大江幾里。翁曰。在北二千有餘里。臣又擧李暹所泊揚州府以問曰。距此幾里。翁曰。在揚子江之北。你去過江。則便是揚州之境也。又問距南京幾里。翁曰。在西北二千餘里。然皆臆料耳。未敢的知云云。有大官人前呵後擁。軍儀整肅而至。坐于皇華館。問之則乃把總松門等處備倭指揮劉澤也。招臣等來前曰。以汝類私越邊境。本當處以軍法。恐其中情有可矜。姑未盡戮。有無侵犯上國情狀。從實供寫施行。臣供曰。姓崔名溥。居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爲國王近臣。去丁未九月十七日。奉 王命爲濟州等處敬差官。濟州在南海中。距羅州水路千餘里。同年十一月十二日。渡海推刷人丁。事未竣。今戊申正月三十日。聞父喪。閏正月初三日。不候風便。顚倒過海。爲風所逆。驚濤掀浪。載沈載傾。飢食渴水。十生九死。以今月十二日到泊名不知海島。有漁船來問曰。你是何國人。答以朝鮮國人漂流之故。因問此何國地面。其人答曰。此大唐國寧波府下山云云。其夜有賊船二十餘人來。以斫刀恐嚇欲斬。攘奪衣粮行裝等物。遂截去艪矴而去。復漂流大洋。十七日。又到泊地名不知海岸。又有漁船六隻列立。恐其如前所遇海賊之類。捨舟緣陸。過二嶺六七里許。有人居。相次遞送。夜至仙岩里。其里人爭以隅杖。亂擊劫奪。遞至一處。遇有官人。驅至于此城。又問曰。你登第何年。歷仕幾官。所帶人住何州縣地。行李有何器械。原有船幾隻。臣曰。我於成化丁酉。格進士試第三人。壬寅。中文科乙科第一人。爲校書館著作。爲博士。爲軍資監主簿。爲成均館典籍。爲司憲府監察。爲弘文館副修撰。爲修撰。丙午。中文科重試乙科第一人。爲弘文館副校理。爲龍驤衛司果。爲副司直。所帶人陪吏四人。光州牧吏程保,和順縣吏金重,羅州牧吏孫孝子,濟州牧吏李孝枝。伴率一人李楨。京都人。鎭撫一人安義。濟州人。驛吏一人崔巨伊山。羅州靑巖驛人。奴子莫金等二人。濟州官奴權松等四人。護送軍金粟等九人。船格軍許尙理等二十人。皆濟州人。所乘船只一大隻。檣帆桅楫。遭風而失。矴艪。遇賊而失。所齎之物。印信一顆。馬牌一隻。紗帽角帶。所治文書。重試榜錄書冊。弓一張。刀一把及各人所穿衣裳外。無他器械。把總官卽點印信等物。又問曰。汝國地方遠近幾何。府州幾何。兵粮約有幾何。本地所產。何物爲貴。所讀詩書。尊崇何典。衣冠禮樂。從何代之制。一一寫述。以憑査考。臣曰。本國地方。則無慮數千餘里。有八道。所屬州府郡縣。總三百有餘。所產則人材五穀馬牛雞犬。所讀而尊崇者。四書五經。衣冠禮樂。則一遵華制。兵粮則我以儒臣。未曾經諳。未詳其數。又問曰。汝國與日本,琉球,高麗相通乎。臣曰。日本,琉球。俱在東南大海中。相距隔遠。未相通信。高麗革爲今我朝鮮。又問曰。汝國亦朝貢我朝廷否。臣曰。我國每歲如聖節正朝。貢獻愈謹。又問曰。汝國用何法度。別有年號乎。臣曰。年號法度。一遵大明。把總官問畢。因曰。汝邦屢歲朝貢。義有君臣之好。旣無侵逆之情。當遇以禮。各宜安心。勿生他慮。轉送赴京。遣還本土。急促行裝。不許稽緩。卽饋以茶果。臣卽做謝詩以拜。把總官曰。不要拜。臣不知所言。敢拜之。把總官亦起。相對答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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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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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왕해(王海)가 벽의 한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왕해(王海)가 벽의 한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 ||
− | “당신은 이 그림을 압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 | <span style="color:red">“당신은 이 그림을 압니까?”라고 하였습니다. </span> |
“모르겠습니다.” | “모르겠습니다.” | ||
− | “이 그림은 곧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 + | <span style="color:red">“이 그림은 곧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랍니다.”</span><ref>[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13/2010041300653.html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 이야기] ④ 귀신 잡는 귀신 이야기 중국판 전우치전, 종규전전(鐘馗全傳), 조선일보, 2010.04.13]</ref><ref>[http://yangco.net/bbs/board.php?bo_table=1china_6&wr_id=68 종규(鐘馗) - 중국의 역신(疫神)]</ref><ref>[http://m.blog.daum.net/hl0ftj/47?np_nil_b=-1]</ref><ref>[http://yonseisinology.org/archives/1667]</ref><ref>[http://www.epochtimes.com/b5/17/1/1/n8655183.htm]</ref><ref>[https://kknews.cc/history/mzj3lz.html]</ref><ref>[http://www.newsancai.com/b5/traditional/culture/2008/10/18/16738-%E9%92%9F%E9%A6%97%E6%8D%89%E9%AC%BC-%E5%9B%BE]</ref><ref>[https://read01.com/zh-hk/8ng0QR.html#.XWYj7ugzY2w]</ref> |
− | “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 + | <span style="color:red">“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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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백발노인이 왔기에 신이 묻기를, “[http://korean.cri.cn/1620/2018/07/31/1s259017.htm 천태산(天台山)]<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aYr&articleno=18311375&categoryId=938086®dt=20090816231610 중국 천태산 지도]</ref><ref>[http://blog.daum.net/yoji88/1035 톈타이산]</ref>과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F66&articleno=15879469&categoryId=574902®dt=20161229151820 안탕산(雁蕩山)]<ref>[http://picpen.chosun.com/view/picpenViewDetail.picpen?picpen_seq=15794 중국 10대 명산으로 꼽히는 절강성 안탕산]</ref> 등은 이곳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또 백발노인이 왔기에 신이 묻기를, “[http://korean.cri.cn/1620/2018/07/31/1s259017.htm 천태산(天台山)]<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aYr&articleno=18311375&categoryId=938086®dt=20090816231610 중국 천태산 지도]</ref><ref>[http://blog.daum.net/yoji88/1035 톈타이산]</ref>과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F66&articleno=15879469&categoryId=574902®dt=20161229151820 안탕산(雁蕩山)]<ref>[http://picpen.chosun.com/view/picpenViewDetail.picpen?picpen_seq=15794 중국 10대 명산으로 꼽히는 절강성 안탕산]</ref> 등은 이곳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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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城)의 주산(主山)은 무슨 산입니까?” | “이 성(城)의 주산(主山)은 무슨 산입니까?” | ||
− | “석주산(石柱山) | + | “석주산(石柱山)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ref>[https://news.joins.com/article/22175278 [차이나 인사이트] 장안과 베이징 … 중국 왕조 도읍은 왜 변두리였나]</ref>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ref>[https://news.joins.com/article/22175278 [차이나 인사이트] 장안과 베이징 … 중국 왕조 도읍은 왜 변두리였나]</ref>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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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2천여 리에 있습니다.” | “북쪽 2천여 리에 있습니다.” | ||
− | 신은 또 | + | 신은 또 <span style="color: red">이섬</span>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ref>[http://m.cafe.daum.net/ansan21/66Jh/39?q=D_LiONZMXRFIg0&]</ref>를 들어 묻기를, “여기에서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ref>[http://m.blog.daum.net/sbo3166/11319999 양주관광.1-수서호(瘦西湖).당성유지박물관.최치원기념관]</ref>입니다.” |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ref>[http://m.blog.daum.net/sbo3166/11319999 양주관광.1-수서호(瘦西湖).당성유지박물관.최치원기념관]</ref>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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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 “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 ||
− | 어떤 고관이 앞에선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703701 갈도(喝道/喝導)] | + | 어떤 고관이 앞에선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703701 갈도(喝道/喝導)]하고 뒤에선 옹위하며 엄정하게 군대를 정렬시켜 오더니 황화관(皇華館)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
− | 물어보았더니 곧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 | + | 물어보았더니 곧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 유택(劉澤)이었습니다. |
그는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말하기를, | 그는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말하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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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어왔으니,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혹 불쌍히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을까 싶어 아직 죽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사실대로 공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 “너희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어왔으니,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혹 불쌍히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을까 싶어 아직 죽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사실대로 공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 ||
− | 신이 공술하기를, | + | 신이 공술하기를, “<span style="color:red">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 성내에서 살았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국왕의 근신(近臣)이 되었습니다. 지난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AF%B8 정미년] 9월 17일에 왕명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경차관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남해 가운데 있으므로 나주와는 거리가 수로로 천여 리입니다. 그 해 11월 12일에 바다를 건너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889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일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span>금년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8B%A0_(%EA%B0%84%EC%A7%80) 무신년] 정월 30일에 아비의 상을 듣고 윤정월 3일에 순풍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났습니다. 노도와 격랑 속에 배는 잠겼다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달 12일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섬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어선이 와서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하고 묻기에, 조선국 사람으로서 표류해 온 까닭을 들어 답변하고 이어서 '이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오?'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이곳은 대당국 영파부의 하산이오'라는 등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해적선의 20여 인이 와서 칼로 위협하며 목을 베려다가 의복, 양식, 행장 등의 물건을 빼앗고 마침내 배의 노와 닿을 끊어버리고 떠나가 버려 다시 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7일에는 또 지명을 알 수 없는 해안에 이르러 정박하니, 또 어선 6척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앞서 만났던 해적과 같은 무리인 듯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고개 둘을 넘어 6-7리가량 가니 인가가 있었으며, 서로 차례로 번갈아 가며 다음 마을로 보냈습니다. 밤에 선암리에 이르니 그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각진 몽둥이로 함부로 치면서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체송(遞送)되어 한 곳에 이르자 한 관인을 만났으니 그가 이 성까지 몰아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또 묻기를, “너는 어느 해에 등과하고, 어떠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느 주현에 거주하고, 행장에는 무슨 무기가 있으며, 원래 있던 배는 몇 척인가?”라고 하였습니다. | 또 묻기를, “너는 어느 해에 등과하고, 어떠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느 주현에 거주하고, 행장에는 무슨 무기가 있으며, 원래 있던 배는 몇 척인가?”라고 하였습니다. | ||
− | “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 (乙科) | + | <span style="color:red">“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 (乙科)의 제1등으로 합격하여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병오년(1486)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 제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이 되었습니다. </span> |
− | 데리고 온 사람으로는 배리(陪吏)가 4인으로,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상앗대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과 노는 해적을 만나 잃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169, 서책, 활 1장, 칼 1자루와 각자가 입는 의상 이외에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 + | <span style="color:red">데리고 온 사람으로는 배리(陪吏)가 4인으로,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span>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상앗대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과 노는 해적을 만나 잃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169, 서책, 활 1장, 칼 1자루와 각자가 입는 의상 이외에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
파총관(把總官)은 즉시 인신 등 물건을 점검하고는 또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토는 얼마나 되며, 부·주(府州)는 몇이나 되며, 군량은 대략 얼마나 있으며, 그 땅에서 생산되는 물품에는 어느 물품이 귀한 것이며, 읽는 시서(詩書)는 어느 경전을 존숭하며, 의관과 예악(禮樂)은 어느 시대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낱낱이 써 내어 조사하는데 근거가 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 파총관(把總官)은 즉시 인신 등 물건을 점검하고는 또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토는 얼마나 되며, 부·주(府州)는 몇이나 되며, 군량은 대략 얼마나 있으며, 그 땅에서 생산되는 물품에는 어느 물품이 귀한 것이며, 읽는 시서(詩書)는 어느 경전을 존숭하며, 의관과 예악(禮樂)은 어느 시대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낱낱이 써 내어 조사하는데 근거가 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 ||
− |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ref>[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261185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의 정비에 관한 연구 - 주 (州) 부 (府) 군 (郡) 현 (縣) 을 중심으로]</ref><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3%BC%EB%B6%80%EA%B5%B0%ED%98%84%EA%B0%81%EB%8F%84(%E5%B7%9E%E5%BA%9C%E9%83%A1%E7%B8%A3%E5%90%84%E5%9C%96) 주부군현각도]</ref>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이고,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군량은 내가 유신(儒臣)으로서 일찍이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 + | <span style="color:red">“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ref>[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261185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의 정비에 관한 연구 - 주 (州) 부 (府) 군 (郡) 현 (縣) 을 중심으로]</ref><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3%BC%EB%B6%80%EA%B5%B0%ED%98%84%EA%B0%81%EB%8F%84(%E5%B7%9E%E5%BA%9C%E9%83%A1%E7%B8%A3%E5%90%84%E5%9C%96) 주부군현각도]</ref>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이고,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군량은 내가 유신(儒臣)으로서 일찍이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span> |
“너희 나라는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 “너희 나라는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 ||
− |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 + | <span style="color:red">“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span> |
“너희 나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는가?” | “너희 나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는가?” | ||
− |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ref>[https://www.asiae.co.kr/article/2017062315075196237 중국에 하던 조공, 굴욕이었을까 무역이었을까, 아시아경제, 2017.06.23]</ref><ref>[http://china.donga.com/Main/3/all/43/910919/1 조공국은 속국이 아니다]</ref> | + | <span style="color: red">“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ref>[https://www.asiae.co.kr/article/2017062315075196237 중국에 하던 조공, 굴욕이었을까 무역이었을까, 아시아경제, 2017.06.23]</ref><ref>[http://china.donga.com/Main/3/all/43/910919/1 조공국은 속국이 아니다]</ref> </span> |
“너희 나라는 어떤 법도를 사용하며, 별도의 연호가 있는가?” | “너희 나라는 어떤 법도를 사용하며, 별도의 연호가 있는가?” | ||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005 연호]<ref>[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3_0030_0040_0020 신명호]</ref>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 + | <span style="color: red">“[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005 연호]<ref>[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3_0030_0040_0020 신명호]</ref>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span> |
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어서 말하기를, | 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어서 말하기를, | ||
− | "당신 나라가 해마다 조공을 하여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침범하거나 반역한 정상은 없어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이니, 각자 안심하고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급히 행장을 차리고 지체하지 마오”라고 하고 곧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 + | "당신 나라가 해마다 조공을 하여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침범하거나 반역한 정상은 없어 <span style="color: red">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이니</span>, 각자 안심하고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급히 행장을 차리고 지체하지 마오”라고 하고 곧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
− | 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려고 하니, 파총관은 “절할 필요는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 + | <span style="color:red">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려고 하니, 파총관은 “절할 필요는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span> |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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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st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fai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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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ople came in crowds to look at me. | ||
+ | Wang Hai pointed to a portrait on the wall and said, “Do you know that picture?” | ||
+ | I said, “I am not acquainted with i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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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i said, “It is Chung K’uei, a Chin-shih of the T’ang Dynasty.” | ||
+ | I said, “Never in his life did Chung K’uei rise to Chin-shih. How can you call him a Chin-shih?” Wang Hai and the others laughed uproariously. | ||
+ | Then a white-haired old man came, and I asked him, “How many li from here are the T’ien-t'ai and Yen-tang mountains ?”? | ||
+ | The old man answered, “Mt. T’ien-t’ai is north of T’ien-t’ai County, two days' journey from here. Mt. Yen-tang is one day's journey south of Mt. Tien-t'ai. | ||
+ | I then asked, “What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is town?” | ||
+ | He said, “Mt. Stone Pillar.” He led me outside the gate and pointed out Mt. Stone Pillar, which was, indeed, a mountain of stone cliffs, at the peak of which there was a great stone shaped like a pill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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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 sai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o Peking?” The old man said, “Over 5,800 li.”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the Yangtze River.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 | ||
+ | I mentioned Yang-chou Prefecture, at which Yi Sõm had landed, and aske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 ||
+ | The old man said, “After you cross to the north of the Yangtze River, you are in Yang-chou.” | ||
+ |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Nanki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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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west. But all these are only estimates; I should not presume to know.” | ||
+ | A great official came, heralds before him and throngs behind, troops impressively drawn up in display. He sat in the Huang-hua-kuan, and I asked about him. He was Liu Tse, Anti-Japanese Commander for Sung-men and Other Places.41 He called us before him and said, “Since you crossed the border illegally, you ought to be judged by military law, but because I think that some of the circumstances in the case may warrant sympathy, I have not, for the time being, put you to death. State truthfully whether or not you encroached on China, so that we can act accordingl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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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 stated, “My name is Ch’oe Pu, and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was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n the 17th Day,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be a Commissioner for Cheju and other places. Cheju is in the South Sea and is over one thousand li from Naju by sea. On the 12th Day, Eleventh Month of the same year I crossed the sea. I was correcting entries on registers and the work was not completed when I heard, on the 30th Day of this First Month, that my father had died. On the 3rd Day, Intercalary First Month, not waiting for a favorable wind, I set out in confusion to cross the sea. We were driven off course by the wind and in the terrible, mountainous waves, would first almost sink and then almost capsize. We hungered for food, thirsted for water, and almost died. On the 12th Day of this month we arrived at an island,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moored there. Fishing boats came and asked, “What country are you from?' We answered that we were Koreans and [told] how we came to have gone adrif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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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n we asked, 'What country's territory is this?' "The men answered, 'It is Hsia-shan, Ning-po Prefecture, China.' | ||
+ | "That night pirate boats and over twenty men came. They scared us with their swords and wanted to cut off our heads. They seized our clothing, rations, and baggage and then cut away our oars and anchor and left, and we drifted again in the open oce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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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n the 17th Day we came again to land and moored on a shore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gain there were fishing boats, six in a row, and I was afraid that they were of the type of the pirates we had met previously. We left the boat, went ashore, and crossed two ranges. In about six or seven li there was a settlement, from which we were passed along successively, reaching Hsien-yen Village at night. The villagers fought to beat us with crooked sticks and rob us. They turned us over to a place where we met an official, and he drove us on to this town.” | ||
+ | He then asked, “What was the year in which you placed on the examination list? What offices have you held? In what departments and districts do the men who accompany you live? What articles are in your baggage? How many boats did you have originall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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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 said, “I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 in third place in 1477, and 1482 I was the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 have been writer and Doctor of Learning in the Printing Office, Auditor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Archivist in the National Academy, Supervisor in the Office of the Inspector-General, and Assistant Writer and Writer in the Oslice of Special Counselors. In 1486 I was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Second Examination. I was Junior Fifth Counselor in the Ollice of Special Counselors, and Lieutenant and Assistant Captain of the Yongyang Garris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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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f the men with me, there are four secondary officials – Chòng Po,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Kwangju; Kim Chung, an official of Hwasun District; Son Hyo-ja,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Naju; and Yi Hyo-ji,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Cheju. There is one companion, Yi Chòng, from the capital. There is one Security Officer, An Úi, from Cheju; one Station Master, Ch’oe Kõisan, from Ch’ongam Station, Naju; and two slaves, Makkům and another. There are four Cheju public slaves, Kwon Song and others; nine loyal escort troops, Kim Sok and others; and twenty marine privates, Hồ Sang-ni and others. They are all from Cheju. | ||
+ | “We sailed in only one large boat. Masts, sails,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wind, and anchor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pirates. | ||
+ | “As to the things we have, there are one seal, one horse permit, silk gauze hats, horn girdles, pertinent documents, an examination list for my Second Examination, books, one bow, one knife, and the clothes worn by the individual men. There is nothing else.” | ||
+ | The Commander checked over the seal and other things. He asked, “How far away is your country? How many prefectures and departments are there? About how great are the military supplies? What things produced in your country do you prize? Which of the books you read do you revere? Y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follow the styles of what dynasty? Answer in writing, one by one, as a basis for verification.” | ||
+ | I said, “My country is some several thousand li away. It has eight provinces, in which the prefectures, departments, counties, and districts total more than three hundred. Our products are talented men, the five grains, horses, oxen, fowls and dogs. The things read and revered are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ll 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honor the Chinese styles. As to military supplies, being a Confucian minister, I have had no experience with them and do not know the figures exactly.” | ||
+ |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relations with Japan, Ryukyu and Koryo?”: | ||
+ | I said, “Japan and Ryukyu are in the great sea to the southeast. They are far away, and we do not communicate with them. Koryo has become our present Choson.” | ||
+ | He asked, “Does your country, too, pay tribute to our Cour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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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 said, “Every year at such times as the Imperial Birthday and the New Year, we most respectfully pay tribute.” | ||
+ | He asked, “What regulations does your country have? Do you have your own reign-titles?” | ||
+ | I said, “In our reign-titles and regulations we follow Ming completely.” | ||
+ | When the Commander had ended his questioning, he said, “Your state has paid tribute for years; you have acted as a good subject state. Since there is nothing to indicate seditious intent, you shall be treated courteously. Be at ease, each of you, and do not worry; we shall send you to the capital and let you go home. Hurry with your baggage. I will permit no delay.” He served us tea and cakes. | ||
+ | I wrote a poem of thanks and bowed. The Commander said, “You need not bow," but I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and ventured to continue bowing. The Commander rose, too, and returned the courtes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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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二十一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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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在桃渚所。是日晴。外人麋至观臣。王海指壁上一真像曰:“你知此画乎否?”曰:“不晓得。”海曰:“此乃唐朝进士钟馗也。”臣曰:“钟馗平生不得进士,何以谓之进士?”海等喧噪大笑。又有白发老翁来。臣问曰:“天台、雁荡等山距此地几里?”翁答曰:“天台山在天台县北,距此二日程。天台山之南,一日程,有雁荡山。”臣又问:“此城主山何?”曰:“石柱山也。”引臣出门,指点石柱山,则果石壁作山,当山顶有大石如柱形。臣曰:“自此距北京几里?”翁曰:“五千八百有余里。”问:“距扬子大江几里?”翁曰:“在北二千有余里。”臣又举李暹所泊扬帅府以问曰:“距此几里?”翁曰:“在扬子江之北。你去,过江则便是扬州之境也。”又问:“距南京几里?”翁曰:“在西北二千余里,然皆臆料耳,未敢的知云云。有大官人,前嗬后拥,军仪整肃而至,坐于皇华馆。问之则乃把总松门等处备倭指挥刘泽也。招臣等来前曰:“以汝类私越边境,本当处以军法,恐其中情有可矜,姑未尽戳。有无侵犯上国情状,从实供写施行。”臣供曰:“姓崔名溥;居朝鲜国全罗道罗州城中。再登文科,为国王近臣。去丁未九月十七日,奉王命为济州等处敬差官。济州在南海中,距罗州水路千余里。同年十一月十二日,渡海推刷人丁,事未竣。今戊申正月三十日,闻父丧。闰正月初三日,不候风便颠倒过海,为风所逆,惊涛掀浪,载沉载倾,饥食渴水,十生九死。以今月十二日,到泊名不知海岛,有渔船来问曰:‘你是何国人?’答以朝鲜国人漂流之故。因问:‘此何国地面?’其人答曰:‘此大唐国宁波府下山’云云。其夜有贼船二十余人来,以斫刀恐吓欲斩,攘夺衣、粮、行装等物,遂截去橹碇而去,复漂流大洋。十七日,又到泊地名不知海岸,又有渔船六只列立。恕其如前所遇海贼之类,舍舟缘陆,过二岭六七里许,有人居。相次递送,夜至仙岩里。其里人争以隅杖乱击劫夺。递至一处,遇有官人,驱至于此城。”又问曰:“你登第何年?历仕几官?所带人住何州县地?行李有何器械?原有船几只?”臣曰:“我于成化丁酉格进士试第三人;壬寅中文科乙科第一人,为校书馆著作,为博士,为军资监主簿,为成均馆典籍,为司宪府监察,为弘文馆副修撰,为修撰;丙午中文科重试乙科第一人,为弘文馆副校理,为龙骧卫司果,为副司直。所带人陪吏四人——光州牧吏程保、和顺县吏金重、罗州牧吏孙孝子、济州牧吏李孝枝;伴率一人李桢,京都人;镇抚一人安义,济州人;驿吏一人崔巨伊山,罗州青岩驿人;奴子莫金等二人、济州官奴权松等四人、护送军金粟等九人、船格军许尚理等二十人,皆济州人。所乘船只一大只,樯帆桅楫遭风而失,碇橹遇贼而失。所赍之物:印信一颗、马牌一只、纱帽、角带、所治文书、重试榜录、书册、弓一张、刀一把及各人所穿衣裳外,无他器械。”把总官即点印信等物。又问曰:“汝国地方远近几何?府州几何?兵粮约有几何?本地所产何物为贵?所读诗书尊崇何典?衣冠礼乐从何代之制?一一写述,以凭查考。”臣曰:“本国地方则无虑数千余里;有八道,所属州府郡县总三百有余;所产则人材、五谷、马牛鸡犬;所读而尊崇者,四书五经;衣冠礼乐则一遵华制;兵粮则我以儒臣未曾经谙,未详其数。”又问曰:“汝国与日本、琉球、高丽相通乎?”臣曰:“日本、琉球俱在东南大海中,相距隔远,未相通信。高丽革为今我朝鲜。”又问曰:“汝国亦朝贡我朝廷否?”臣曰:“我国每岁如圣节、正朝贡献愈谨。”又问曰:“汝国用何法度?别有年号乎?”臣曰:“年号、法度一遵大明。”把总官问毕,因曰:“汝邦屡岁朝贡,义有君臣之好,既无侵逆之情,当遇以礼。各宜安心,勿生他虑。转送赴京,遣还本土。急促行装,不许稽缓。”即馈以茶果。臣即做谢诗以拜。把总官曰:“不要拜!”臣不知所言,敢拜之。把总官亦起,相对答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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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 *역사-조선: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 ||
*시-조선: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 *시-조선: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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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3일 (일) 10:57 기준 최신판
在桃渚所。是日晴。外人麋至觀臣。王海指壁上一眞像曰。你知此畫乎否。曰。不曉得。海曰。此乃唐朝進士鍾馗也。臣曰。鍾馗平生不得進士。何以謂之進士。海等喧噪大笑。又有白髮老翁來。臣問曰。天台,雁蕩等山。距此地幾里。翁答曰。天台山在天台縣北。距此二日程。天台山之南一日程。有雁蕩山。臣又問此城主山何。曰。石柱山也。引臣出門。指點石柱山。則果石壁作山。當山頂有大石如柱形。臣曰。自此距北京幾里。翁曰。五千八百有餘里。問距揚子大江幾里。翁曰。在北二千有餘里。臣又擧李暹所泊揚州府以問曰。距此幾里。翁曰。在揚子江之北。你去過江。則便是揚州之境也。又問距南京幾里。翁曰。在西北二千餘里。然皆臆料耳。未敢的知云云。有大官人前呵後擁。軍儀整肅而至。坐于皇華館。問之則乃把總松門等處備倭指揮劉澤也。招臣等來前曰。以汝類私越邊境。本當處以軍法。恐其中情有可矜。姑未盡戮。有無侵犯上國情狀。從實供寫施行。臣供曰。姓崔名溥。居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爲國王近臣。去丁未九月十七日。奉 王命爲濟州等處敬差官。濟州在南海中。距羅州水路千餘里。同年十一月十二日。渡海推刷人丁。事未竣。今戊申正月三十日。聞父喪。閏正月初三日。不候風便。顚倒過海。爲風所逆。驚濤掀浪。載沈載傾。飢食渴水。十生九死。以今月十二日到泊名不知海島。有漁船來問曰。你是何國人。答以朝鮮國人漂流之故。因問此何國地面。其人答曰。此大唐國寧波府下山云云。其夜有賊船二十餘人來。以斫刀恐嚇欲斬。攘奪衣粮行裝等物。遂截去艪矴而去。復漂流大洋。十七日。又到泊地名不知海岸。又有漁船六隻列立。恐其如前所遇海賊之類。捨舟緣陸。過二嶺六七里許。有人居。相次遞送。夜至仙岩里。其里人爭以隅杖。亂擊劫奪。遞至一處。遇有官人。驅至于此城。又問曰。你登第何年。歷仕幾官。所帶人住何州縣地。行李有何器械。原有船幾隻。臣曰。我於成化丁酉。格進士試第三人。壬寅。中文科乙科第一人。爲校書館著作。爲博士。爲軍資監主簿。爲成均館典籍。爲司憲府監察。爲弘文館副修撰。爲修撰。丙午。中文科重試乙科第一人。爲弘文館副校理。爲龍驤衛司果。爲副司直。所帶人陪吏四人。光州牧吏程保,和順縣吏金重,羅州牧吏孫孝子,濟州牧吏李孝枝。伴率一人李楨。京都人。鎭撫一人安義。濟州人。驛吏一人崔巨伊山。羅州靑巖驛人。奴子莫金等二人。濟州官奴權松等四人。護送軍金粟等九人。船格軍許尙理等二十人。皆濟州人。所乘船只一大隻。檣帆桅楫。遭風而失。矴艪。遇賊而失。所齎之物。印信一顆。馬牌一隻。紗帽角帶。所治文書。重試榜錄書冊。弓一張。刀一把及各人所穿衣裳外。無他器械。把總官卽點印信等物。又問曰。汝國地方遠近幾何。府州幾何。兵粮約有幾何。本地所產。何物爲貴。所讀詩書。尊崇何典。衣冠禮樂。從何代之制。一一寫述。以憑査考。臣曰。本國地方。則無慮數千餘里。有八道。所屬州府郡縣。總三百有餘。所產則人材五穀馬牛雞犬。所讀而尊崇者。四書五經。衣冠禮樂。則一遵華制。兵粮則我以儒臣。未曾經諳。未詳其數。又問曰。汝國與日本,琉球,高麗相通乎。臣曰。日本,琉球。俱在東南大海中。相距隔遠。未相通信。高麗革爲今我朝鮮。又問曰。汝國亦朝貢我朝廷否。臣曰。我國每歲如聖節正朝。貢獻愈謹。又問曰。汝國用何法度。別有年號乎。臣曰。年號法度。一遵大明。把總官問畢。因曰。汝邦屢歲朝貢。義有君臣之好。旣無侵逆之情。當遇以禮。各宜安心。勿生他慮。轉送赴京。遣還本土。急促行裝。不許稽緩。卽饋以茶果。臣卽做謝詩以拜。把總官曰。不要拜。臣不知所言。敢拜之。把總官亦起。相對答禮。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왕해(王海)가 벽의 한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 그림을 압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은 곧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랍니다.”[1][2][3][4][5][6][7][8]
“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또 백발노인이 왔기에 신이 묻기를, “천태산(天台山)[9][10]과 안탕산(雁蕩山)[11] 등은 이곳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천태산[12][13][14][15][16][17][18]은 천태현(天台縣)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이틀 거리이고, 천태산의 남쪽으로 하루 거리에 안탕산이 있습니다.”
“이 성(城)의 주산(主山)은 무슨 산입니까?”
“석주산(石柱山)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19]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5천8백여 리입니다.”
“양자강(揚子江)[20][21]은 몇 리쯤에 있습니까?”
“북쪽 2천여 리에 있습니다.”
신은 또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22]를 들어 묻기를, “여기에서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23]입니다.”
“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고관이 앞에선 갈도(喝道/喝導)하고 뒤에선 옹위하며 엄정하게 군대를 정렬시켜 오더니 황화관(皇華館)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물어보았더니 곧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 유택(劉澤)이었습니다.
그는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말하기를,
“너희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어왔으니,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혹 불쌍히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을까 싶어 아직 죽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사실대로 공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공술하기를, “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 성내에서 살았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국왕의 근신(近臣)이 되었습니다. 지난 정미년 9월 17일에 왕명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경차관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남해 가운데 있으므로 나주와는 거리가 수로로 천여 리입니다. 그 해 11월 12일에 바다를 건너가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일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금년 무신년 정월 30일에 아비의 상을 듣고 윤정월 3일에 순풍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났습니다. 노도와 격랑 속에 배는 잠겼다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달 12일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섬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어선이 와서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하고 묻기에, 조선국 사람으로서 표류해 온 까닭을 들어 답변하고 이어서 '이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오?'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이곳은 대당국 영파부의 하산이오'라는 등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해적선의 20여 인이 와서 칼로 위협하며 목을 베려다가 의복, 양식, 행장 등의 물건을 빼앗고 마침내 배의 노와 닿을 끊어버리고 떠나가 버려 다시 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7일에는 또 지명을 알 수 없는 해안에 이르러 정박하니, 또 어선 6척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앞서 만났던 해적과 같은 무리인 듯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고개 둘을 넘어 6-7리가량 가니 인가가 있었으며, 서로 차례로 번갈아 가며 다음 마을로 보냈습니다. 밤에 선암리에 이르니 그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각진 몽둥이로 함부로 치면서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체송(遞送)되어 한 곳에 이르자 한 관인을 만났으니 그가 이 성까지 몰아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는 어느 해에 등과하고, 어떠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느 주현에 거주하고, 행장에는 무슨 무기가 있으며, 원래 있던 배는 몇 척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 (乙科)의 제1등으로 합격하여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병오년(1486)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 제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이 되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으로는 배리(陪吏)가 4인으로,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상앗대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과 노는 해적을 만나 잃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169, 서책, 활 1장, 칼 1자루와 각자가 입는 의상 이외에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파총관(把總官)은 즉시 인신 등 물건을 점검하고는 또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토는 얼마나 되며, 부·주(府州)는 몇이나 되며, 군량은 대략 얼마나 있으며, 그 땅에서 생산되는 물품에는 어느 물품이 귀한 것이며, 읽는 시서(詩書)는 어느 경전을 존숭하며, 의관과 예악(禮樂)은 어느 시대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낱낱이 써 내어 조사하는데 근거가 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26][27]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이고,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군량은 내가 유신(儒臣)으로서 일찍이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너희 나라는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너희 나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는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28][29]
“너희 나라는 어떤 법도를 사용하며, 별도의 연호가 있는가?”
“연호[30]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어서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해마다 조공을 하여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침범하거나 반역한 정상은 없어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이니, 각자 안심하고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급히 행장을 차리고 지체하지 마오”라고 하고 곧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려고 하니, 파총관은 “절할 필요는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21st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fair.
People came in crowds to look at me. Wang Hai pointed to a portrait on the wall and said, “Do you know that picture?” I said, “I am not acquainted with it.”
Hai said, “It is Chung K’uei, a Chin-shih of the T’ang Dynasty.” I said, “Never in his life did Chung K’uei rise to Chin-shih. How can you call him a Chin-shih?” Wang Hai and the others laughed uproariously. Then a white-haired old man came, and I asked him, “How many li from here are the T’ien-t'ai and Yen-tang mountains ?”? The old man answered, “Mt. T’ien-t’ai is north of T’ien-t’ai County, two days' journey from here. Mt. Yen-tang is one day's journey south of Mt. Tien-t'ai. I then asked, “What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is town?” He said, “Mt. Stone Pillar.” He led me outside the gate and pointed out Mt. Stone Pillar, which was, indeed, a mountain of stone cliffs, at the peak of which there was a great stone shaped like a pillar.
I sai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o Peking?” The old man said, “Over 5,800 li.”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the Yangtze River.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 I mentioned Yang-chou Prefecture, at which Yi Sõm had landed, and aske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he old man said, “After you cross to the north of the Yangtze River, you are in Yang-chou.”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Nanking.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west. But all these are only estimates; I should not presume to know.” A great official came, heralds before him and throngs behind, troops impressively drawn up in display. He sat in the Huang-hua-kuan, and I asked about him. He was Liu Tse, Anti-Japanese Commander for Sung-men and Other Places.41 He called us before him and said, “Since you crossed the border illegally, you ought to be judged by military law, but because I think that some of the circumstances in the case may warrant sympathy, I have not, for the time being, put you to death. State truthfully whether or not you encroached on China, so that we can act accordingly.”
I stated, “My name is Ch’oe Pu, and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was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n the 17th Day,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be a Commissioner for Cheju and other places. Cheju is in the South Sea and is over one thousand li from Naju by sea. On the 12th Day, Eleventh Month of the same year I crossed the sea. I was correcting entries on registers and the work was not completed when I heard, on the 30th Day of this First Month, that my father had died. On the 3rd Day, Intercalary First Month, not waiting for a favorable wind, I set out in confusion to cross the sea. We were driven off course by the wind and in the terrible, mountainous waves, would first almost sink and then almost capsize. We hungered for food, thirsted for water, and almost died. On the 12th Day of this month we arrived at an island,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moored there. Fishing boats came and asked, “What country are you from?' We answered that we were Koreans and [told] how we came to have gone adrift.
“Then we asked, 'What country's territory is this?' "The men answered, 'It is Hsia-shan, Ning-po Prefecture, China.' "That night pirate boats and over twenty men came. They scared us with their swords and wanted to cut off our heads. They seized our clothing, rations, and baggage and then cut away our oars and anchor and left, and we drifted again in the open ocean.
"On the 17th Day we came again to land and moored on a shore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gain there were fishing boats, six in a row, and I was afraid that they were of the type of the pirates we had met previously. We left the boat, went ashore, and crossed two ranges. In about six or seven li there was a settlement, from which we were passed along successively, reaching Hsien-yen Village at night. The villagers fought to beat us with crooked sticks and rob us. They turned us over to a place where we met an official, and he drove us on to this town.” He then asked, “What was the year in which you placed on the examination list? What offices have you held? In what departments and districts do the men who accompany you live? What articles are in your baggage? How many boats did you have originally?”.
I said, “I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 in third place in 1477, and 1482 I was the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 have been writer and Doctor of Learning in the Printing Office, Auditor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Archivist in the National Academy, Supervisor in the Office of the Inspector-General, and Assistant Writer and Writer in the Oslice of Special Counselors. In 1486 I was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Second Examination. I was Junior Fifth Counselor in the Ollice of Special Counselors, and Lieutenant and Assistant Captain of the Yongyang Garrison.
"Of the men with me, there are four secondary officials – Chòng Po,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Kwangju; Kim Chung, an official of Hwasun District; Son Hyo-ja,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Naju; and Yi Hyo-ji,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Cheju. There is one companion, Yi Chòng, from the capital. There is one Security Officer, An Úi, from Cheju; one Station Master, Ch’oe Kõisan, from Ch’ongam Station, Naju; and two slaves, Makkům and another. There are four Cheju public slaves, Kwon Song and others; nine loyal escort troops, Kim Sok and others; and twenty marine privates, Hồ Sang-ni and others. They are all from Cheju. “We sailed in only one large boat. Masts, sails,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wind, and anchor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pirates. “As to the things we have, there are one seal, one horse permit, silk gauze hats, horn girdles, pertinent documents, an examination list for my Second Examination, books, one bow, one knife, and the clothes worn by the individual men. There is nothing else.” The Commander checked over the seal and other things. He asked, “How far away is your country? How many prefectures and departments are there? About how great are the military supplies? What things produced in your country do you prize? Which of the books you read do you revere? Y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follow the styles of what dynasty? Answer in writing, one by one, as a basis for verification.” I said, “My country is some several thousand li away. It has eight provinces, in which the prefectures, departments, counties, and districts total more than three hundred. Our products are talented men, the five grains, horses, oxen, fowls and dogs. The things read and revered are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ll 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honor the Chinese styles. As to military supplies, being a Confucian minister, I have had no experience with them and do not know the figures exactly.”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relations with Japan, Ryukyu and Koryo?”: I said, “Japan and Ryukyu are in the great sea to the southeast. They are far away, and we do not communicate with them. Koryo has become our present Choson.” He asked, “Does your country, too, pay tribute to our Court?”.
I said, “Every year at such times as the Imperial Birthday and the New Year, we most respectfully pay tribute.” He asked, “What regulations does your country have? Do you have your own reign-titles?” I said, “In our reign-titles and regulations we follow Ming completely.” When the Commander had ended his questioning, he said, “Your state has paid tribute for years; you have acted as a good subject state. Since there is nothing to indicate seditious intent, you shall be treated courteously. Be at ease, each of you, and do not worry; we shall send you to the capital and let you go home. Hurry with your baggage. I will permit no delay.” He served us tea and cakes. I wrote a poem of thanks and bowed. The Commander said, “You need not bow," but I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and ventured to continue bowing. The Commander rose, too, and returned the courtesy.
二十一日
在桃渚所。是日晴。外人麋至观臣。王海指壁上一真像曰:“你知此画乎否?”曰:“不晓得。”海曰:“此乃唐朝进士钟馗也。”臣曰:“钟馗平生不得进士,何以谓之进士?”海等喧噪大笑。又有白发老翁来。臣问曰:“天台、雁荡等山距此地几里?”翁答曰:“天台山在天台县北,距此二日程。天台山之南,一日程,有雁荡山。”臣又问:“此城主山何?”曰:“石柱山也。”引臣出门,指点石柱山,则果石壁作山,当山顶有大石如柱形。臣曰:“自此距北京几里?”翁曰:“五千八百有余里。”问:“距扬子大江几里?”翁曰:“在北二千有余里。”臣又举李暹所泊扬帅府以问曰:“距此几里?”翁曰:“在扬子江之北。你去,过江则便是扬州之境也。”又问:“距南京几里?”翁曰:“在西北二千余里,然皆臆料耳,未敢的知云云。有大官人,前嗬后拥,军仪整肃而至,坐于皇华馆。问之则乃把总松门等处备倭指挥刘泽也。招臣等来前曰:“以汝类私越边境,本当处以军法,恐其中情有可矜,姑未尽戳。有无侵犯上国情状,从实供写施行。”臣供曰:“姓崔名溥;居朝鲜国全罗道罗州城中。再登文科,为国王近臣。去丁未九月十七日,奉王命为济州等处敬差官。济州在南海中,距罗州水路千余里。同年十一月十二日,渡海推刷人丁,事未竣。今戊申正月三十日,闻父丧。闰正月初三日,不候风便颠倒过海,为风所逆,惊涛掀浪,载沉载倾,饥食渴水,十生九死。以今月十二日,到泊名不知海岛,有渔船来问曰:‘你是何国人?’答以朝鲜国人漂流之故。因问:‘此何国地面?’其人答曰:‘此大唐国宁波府下山’云云。其夜有贼船二十余人来,以斫刀恐吓欲斩,攘夺衣、粮、行装等物,遂截去橹碇而去,复漂流大洋。十七日,又到泊地名不知海岸,又有渔船六只列立。恕其如前所遇海贼之类,舍舟缘陆,过二岭六七里许,有人居。相次递送,夜至仙岩里。其里人争以隅杖乱击劫夺。递至一处,遇有官人,驱至于此城。”又问曰:“你登第何年?历仕几官?所带人住何州县地?行李有何器械?原有船几只?”臣曰:“我于成化丁酉格进士试第三人;壬寅中文科乙科第一人,为校书馆著作,为博士,为军资监主簿,为成均馆典籍,为司宪府监察,为弘文馆副修撰,为修撰;丙午中文科重试乙科第一人,为弘文馆副校理,为龙骧卫司果,为副司直。所带人陪吏四人——光州牧吏程保、和顺县吏金重、罗州牧吏孙孝子、济州牧吏李孝枝;伴率一人李桢,京都人;镇抚一人安义,济州人;驿吏一人崔巨伊山,罗州青岩驿人;奴子莫金等二人、济州官奴权松等四人、护送军金粟等九人、船格军许尚理等二十人,皆济州人。所乘船只一大只,樯帆桅楫遭风而失,碇橹遇贼而失。所赍之物:印信一颗、马牌一只、纱帽、角带、所治文书、重试榜录、书册、弓一张、刀一把及各人所穿衣裳外,无他器械。”把总官即点印信等物。又问曰:“汝国地方远近几何?府州几何?兵粮约有几何?本地所产何物为贵?所读诗书尊崇何典?衣冠礼乐从何代之制?一一写述,以凭查考。”臣曰:“本国地方则无虑数千余里;有八道,所属州府郡县总三百有余;所产则人材、五谷、马牛鸡犬;所读而尊崇者,四书五经;衣冠礼乐则一遵华制;兵粮则我以儒臣未曾经谙,未详其数。”又问曰:“汝国与日本、琉球、高丽相通乎?”臣曰:“日本、琉球俱在东南大海中,相距隔远,未相通信。高丽革为今我朝鲜。”又问曰:“汝国亦朝贡我朝廷否?”臣曰:“我国每岁如圣节、正朝贡献愈谨。”又问曰:“汝国用何法度?别有年号乎?”臣曰:“年号、法度一遵大明。”把总官问毕,因曰:“汝邦屡岁朝贡,义有君臣之好,既无侵逆之情,当遇以礼。各宜安心,勿生他虑。转送赴京,遣还本土。急促行装,不许稽缓。”即馈以茶果。臣即做谢诗以拜。把总官曰:“不要拜!”臣不知所言,敢拜之。把总官亦起,相对答礼。
- 기후: 맑았습니다
- 지명: 도저소, 천태현(天台縣), 양주부(揚州府), 대당국 영파부 하산, 북경, 남경, 선암리
- 지리: 천태산, 안탕산, 북쪽, 석주산, 5천8백여 리, 양자강(揚子江), 서북 2천여 리
- 언어(어원):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 인명: 왕해(王海), 종규(鍾道), 유택(劉澤)
- 풍습: 부적(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 역사: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
- 심리: 즐거움(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 건축물: 황화관(皇華館),
- 제도(관직): 진사(進士),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
- 사회: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갈도(喝道/喝導), 해적선, 약탈
- 행정: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체송(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 기물: 초상화
- 제도(교통): 어선 6척
- 유학: 갈도(喝道/喝導),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 인물: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 심리(안심)
- 비유: 기둥처럼 생긴 큰 돌,
- 제도(외교):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 의전: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 인명-조선: 이섬, 최부,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
- 제도(관직)-조선: 경차관,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이 되었습니다,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
- 제도(시험)-조선: 두 번 문과에 올라,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乙科)의 제1등으로 합격,
- 지명-조선: 조선국 전라도 나주, 제주
- 유학-조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
- 시간-조선: 정미년 9월 17일, 11월 12일, 무신년 정월 30일,윤정월 3일, 이 달 12일, 17일,
- 지리-조선: 남해,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 행정-조선: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주(州).부(府)·군(郡)·현(縣)이 300이 넘고,
- 사건-조선: 부친상,
- 역사-조선: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
- 제도(교통)-조선: 큰 배 1척
- 기물-조선: 돛대, 상앗대, 노, 닻,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 서책, 활 1장, 칼 1자루, 각자가 입는 의상
- 모화: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 연호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 제도(외교)-조선: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
- 역사-조선: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 시-조선: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 ↑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 이야기 ④ 귀신 잡는 귀신 이야기 중국판 전우치전, 종규전전(鐘馗全傳), 조선일보, 2010.04.13]
- ↑ 종규(鐘馗) - 중국의 역신(疫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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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천태산 지도
- ↑ 톈타이산
- ↑ 중국 10대 명산으로 꼽히는 절강성 안탕산
- ↑ 천태산 국청사, 법보신문, 2011.06.08
- ↑ 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
- ↑ 천태산과 한국불교의 깊은 인연
- ↑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킨 의통법사義通法師, 관문사, 2018.06 Vol.234]
- ↑ ⑨보운존자(寶雲尊者) 의통(義通), 금강신문, 2011.05.04
- ↑ 중국 대륙에 산재한 해동 구도자의 자취를 찾아서, 불교신문, 2006.01.08
- ↑ 대각국사 의천의 해동 천태종 창시
- ↑ [차이나 인사이트 장안과 베이징 … 중국 왕조 도읍은 왜 변두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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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강과 양자강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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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관광.1-수서호(瘦西湖).당성유지박물관.최치원기념관
- ↑ 중국 도시 이야기 ⑪ 난징(南京), 중앙일보, 201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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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의 정비에 관한 연구 - 주 (州) 부 (府) 군 (郡) 현 (縣) 을 중심으로
- ↑ 주부군현각도
- ↑ 중국에 하던 조공, 굴욕이었을까 무역이었을까, 아시아경제, 2017.06.23
- ↑ 조공국은 속국이 아니다
- ↑ 신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