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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기쁨,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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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비유: 쓰르라미, 하루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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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불효)-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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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참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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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비유: 오장이 무너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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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비유:부모를 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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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嘉靖《州志》권2, 郵驛, 鋪舍附에는 百間鋪로 되어 있다.  
 
124. 嘉靖《州志》권2, 郵驛, 鋪舍附에는 百間鋪로 되어 있다.  

2019년 10월 18일 (금) 12:49 판

二十七日,至漁陽驛, 遇謝恩使臣,是日陰,夜大雨,過白潤鋪、二十里铺、十里鋪,至漁陽睾,睾在蓟州城南五里許,驛之南有南關遞運所,驛丞乃曹鹏也,蓟州即秦漢漁陽郡,唐安祿山叛據之,後取古薊門關以名,盤龍山在西北,崆峒山在東北,城中有州治及薊州衛、鎮朔衛、營州右中衛治,所治西北隅有張堪廟,堪為漁陽太守時,教民種植,童謠云:“麥秀兩歧’云云,有去思立廟如新,臣等欲起程時,有一人馳報云:’朝鮮國使臣來.’臣語諸張述祖曰:“我本國使臣來在一刻間,若於路上相逢,則不過一辑而 過,我姑留待,以認本國家山之事,”述祖曰:“諾,”日哺,謝恩使知中樞成健、書狀官尹璋及崔自俊、禹雄、成仲溫、金孟敬、張佑奇、韓忠常、韓謹、吳近位、金敬熙、權熙止、成後生、李義山、朴、鄭興祖等來寓驟中. 臣請謁使臣于中庭,使臣下階,亦俯伏語臣曰:“上體平安,國家無事,爾家鄉亦亡悲,上聞爾漂海無歸處,啟下禮曹,令各道觀察使通沿海各官,不輕搜寬,急速啟聞,且於對馬島及日本諸島使送人書契修答時,右辭緣并錄 通識,右承旨慶俊次知啟依允,聖恩何可量哉?”臣拜伏退舍,謂金重等日:“我等,小民也,如媳姑嫂蝶之生死於天地.

p. 442 中,生不為天地之益,死不為天地之損,豈意 聖念及於小民若此若此?聖念若此,我等所以萬死得一生也。”金重等亦感泣,少選,書狀官與崔自俊,借到于臣所寓,備語鄉國潮來之事,因曰:“初聞漂沒之報,人皆以死為嘆,成希顏獨大言曰我心以為崔溥不死海,早晚必生還云云,及今相遇, 果驗其言”當昏,使臣邀臣同坐,饋臣以晚飯,下及陪吏,臣謝曰:“小人 罪逆深重,不自死滅,禍延先人,未及瓣踊于殯側,反為颶(母)[母]所驅,五內分崩,無復望生,幸到閩東,行過六千餘里間,亦顧無親,語音不 曉,悲辛艱楚,欲訴誰因?今遇令公,如見父母,”使臣曰:“我初於東八贴,遇安合公之行,聞爾生到浙江等處,喜氣欲顯,今日邂逅,顧非幸嗽?”又曰:“我之此行,有養馬者,中途斃死,跋涉萬里,俱生實難,爾帶去人,亦有死者否?”臣曰:“凡我四十三人,幸得不死,與之借來。”使臣曰:“天實生之, 天實生之,非徒生之, 實由 上德, 是可喜也.” 臣又承 使臣之間,略陳漂寓之故,所過滄溟之險,山川之勝跡,風俗之有異,使臣曰:“我行過此等地,獨以為壯觀,爾之眼界,難為水也。”

어양역(漁陽驛)에 이르러 사은사신(謝恩使臣)을 만났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밤에는 큰비가 내렸습니다.

백간포(白潤鋪)124. 이십리포(二十里鋪)·십리포(十里鋪)를 지나서 어양역에 이르니, 어양역은 계주성(__州城) 남쪽 5리가량에 있었습니다. 125 어양역의 남쪽에 남관체운소(南關遞運所)가 있었는데 역승(驛丞)은 조붕(曹鵬)이었습니다.

계주[1]는 곧 진한(秦漢)시대의 어양군(漁陽郡)인데 당나라 안록산(安祿山)[2]126이 반란을 일으켜 점거했던 곳으로 후에 옛 계문관(__門關)을 따서 '계주(__州)'라고 이름지었던 것입니다.

반룡산(盤龍山)은 서북방에 있고 공동산(__山)은 동북방에 있었습니다.

성안에 계주의 치소와 계주위(__州衛), 진삭위(鎭朔衛), 영주우둔위(營州右屯衛)의 치소가 있었습니다.

치소의 서북 모퉁이에 장감(張堪)의 사당이 있었습니다.

장감이 어양태수(漁陽太守)였을 때 백성들에게 씨뿌리고 심는 법을 가르쳤더니 동요(童謠)에, 보리 이삭 두 가닥이 패었네 운운3했다 하였습니다. 이임할 때 그의 선정(善政)을 기리어 세운 사당이 새 것 같았습니다.

신 등이 길을 떠나려고 할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조선국 사신이 오고 있습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신이 장술조에게 말하기를,

“우리 본국 사신이 곧 도착할 터인데 만약 노상에서 만난다면 읍(駐) 한 번만 하고 지날 수밖에 없으니, 내 잠시 머물러 기다려서 고향 소식을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니 장술조가 “좋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질 무렵 사은사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건(成健)32, 서장관(書狀官)133 윤장(尹__)과 최자준(崔自俊)·우웅(禹雄)·성중온(成仲溫)·김맹경(金孟敬)134 · 장우기(張佑奇)·한충상(韓忠常)·한근(韓)·오근위(吳近位)·김경희(金敬熙)·권희지(權熙止)·성후생(成後生)·이의산(李義山)·박선(朴__)·정흥조(鄭興祖) 등이 와서 어양역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나아가서 사신을 중정(中庭)에서 뵈니 사신이 섬돌에서 내려와 역시 몸을 굽히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성상의 옥체도 평안하시고 나라도 무사하며 그대의 집이 있는 고향도 별 탈이 없소. 임금께서 그대가 표류되어 간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조(禮曹)135에 명을 내려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연해의 각 급 관원에게 널리 알려 수색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고 속히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셨소. 또 대마도와 일본 여러 섬의 사송인(使送人)에게 회답을 쓸 때 위의 사연을 함께 기록해서 널리 알릴 것을 우승지(右承旨)136 경준(慶俊)이 아뢰자 이를 윤허하셨으니 성은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절하고 엎드렸다가 객관으로 물러 나와 김중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미천한 백성이므로 마치 쓰르라미와 하루살이가 천지 간에 살다가 죽는 것과 같아 살아도 천지의 이로움이 되지 못하고 죽어도 천지의 손실됨이 없는데, 어찌 성상의 염려가 미천한 백성에게 미치심이 이와 같을 줄을 생각했겠는가? 성상의 염려하심이 이와 같았으므로 우리들이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중 등도 또한 감격해 울었습니다.

조금 후에 서장관이 최자준과 함께 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와서 고국에서 요즘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처음에 표류되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듣고는 사람들이 모두 그대의 죽음을 탄식하고 있었는데, 성희안(成希顔)139만은 혼자 큰 소리로, '내 생각에 최부는 바다에서 죽지 않고 조만간에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운운하였소. 지금 와서 서로 만나 보게 되니 과연 그의 말이 맞았소"라고 하였습니다.

저녁에 사신이 신을 맞이하여 같이 앉아 신에게 저녁밥을 대접하고 배리(陪吏)들에게까지도 먹였습니다.

신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소인은 죄지은 것이 매우 무거운데도 스스로 죽지 못하여 재앙이 선인(先人)에게 미치게 되었는데, 빈소 곁에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슬퍼하기도 전에 도리어 회오리바람에 몰린 바 되었으니, 오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민동(圃東)140에 도착하여 6천여 리를 지나는데 돌아보아도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말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비참하고 고생한일 을 호소하려고 한들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지금 영공(令公)을 만나니 마치 부모를 뵈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말하기를,

“나도 처음 동팔참(東八站)에서 안(安) 영공의 행차를 만나 그대가 살아서 절강 등지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매우 기뻐했는데, 오늘 서로 만나게 되니 다행이 아니겠소?”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나의 이번 행차에 말을 돌보던 자(養馬]4가 중도에서 죽었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만 리 길을 가노라면 모두 다 살아남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오. 그대가 데리고 간 사람 중에도 죽은 사람이 있지 않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43인은 다행히 죽지 않고 모두 함께 왔습니다.”

“실로 하늘이 살린 것이오! 실로 하늘이 살린 것이오! 그냥 살린 것이 아니라 실로 임금의 덕[3][4] 때문이니 이야말로 기쁜 일이오."

신은 또 사신의 물음을 받고는 표류하고 기거(壽居)한 사유와 지나온 창해의 험한 물결과 산천의 뛰어난 유적과 풍속의 다른 점을 대략 진술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지방을 지나면서도 혼자 장관이라 생각했는데 그대가 보기에는 별 것이 아니겠구료”라고 하였습니다.

27th Day. Arriving at Yü-yang Station and Meeting an Envoy of Thanksgiving. This day was cloudy; at night there was heavy rain.

[We went from Pai-chien Stop to Yü-yang Station, about five li south of Chi-chou.] Chi-chou had been the Yü-yang-chün of Ch’in and Han. When An Lushan of T’ang rebelled [755-763], he occupied it. Later it took the name of the old Chi-men Pass. P’an-lung Mountain is in the northwest and K’ung-t’ung Mountain in the northeast. Inside the wall are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headquarters of Chi-chou Garrison, Chen-shuo Garrison, and Ying-chouyu-t’un Garrison. In the northwest corner of the headquarters is the shrine of Chang K’an. When K’an was Governor of Yü-yang, he taught the people to plant. A children's song says, “Two ears on each stalk of wheat ..."23 That is in memory of him. His shrine is kept like new. When we were about to set out, a man rushed up and reported that an ambassador from Korea was coming. I talked it over with Chang Shu-tsu: “An envoy from my country is coming shortly. If we meet on the road, we must pass with no more than a bow. I should like to stay here a little and hear things about my homeland.” Chang Shu-tsu said, “All right.” That afternoon, Song Kôn, Chief Secretary in the Privy Council and Envoy of Thanksgiving, 24 First Secretary Yun Chang, Ch’oe Cha-jun, Wu Ung, Sống Chung-on, Kim Maeng-gyỏng,25 Chang U-gi, Han Chỉung-sang, Han 23 Kữn, O Kũn-wi, Kim Kyõng-hui, Kwồn Hui-ji, Sông Chun-saeng, Yi Ủi-san, Pak Son, and Chong Hùng-jo came and lodged at the station. When I called on the Envoy in the central garden, he came down the steps, returned my low bow, and said to me, “His Highness is well, the State is without incident. Your home district has also been spared misfortune. When His Highness heard that you had drifted to sea and not returned, he sent down instructions to the Board of Rites to order the governors of all the provinces to notify all officials along the coast to search thoroughly and report back quickly. Moreover, copies of these instructions were sent to Tsushima Island and the islands of Japan by earliest envoys.26 Kyongjun, Right Receiver of the Royal Edicts, in turn made the instructions known accordingly. How impossible it is to measure His Highness's graciousness!” I bowed and left. I said to Kim Chung and others, “We are little people. Like the life and death of cicadas and flies, our life is no gain to Heaven or earth, and our death is no loss. How wonderful that His Highness's thoughts should go out like that to little people! It has been by such royal sympathy that our lives have been saved from certain death as they have.” Kim Chung and the others wept with emotion. In a short while, the First Secretary and Ch'oe Cha-jun came to the place where I was staying and talked more fully about recent affairs at home. They said, “When we first heard the report that you had drifted away and drowned, everyone lamented your death. Sơng Hi-an alone said loudly, 'I feel that Ch'oe Pu cannot die at sea. Sooner or later he must return alive. Now we meet and prove the truth of what he said.” | At dusk the Envoy invited me to sit with him. He offered me dinner and had some sent to my secondary officials, and I thanked him: “I am an unfilial son, my sins have been great: not having died myself, misfortune extended to my dead father. I have not yet beaten my breast or stamped my feet by the coffin; rather, I have been driven by a typhoon, my insides have collapsed, and I have thought I should not survive. I went east more than six thousand li and fortunately arrived at Min. Still, when I looked around me, I knew no one, and my speech was not understood. I have wanted to tell someone of my grief and suffering; meeting you now, therefore, is like seeing my father and mother.” The Envoy said, “I first heard that you had reached Chekiang and other places alive when I met His Excellency An's party at Tung-pa [Stop?]. I was weak with joy.27 Is it not fortunate that I have met you unexpectedly today?” He then said, “A groom in this group of mine died on the way. It is certainly hard to keep everyone alive over thousands of li. Did some of the men who went with you also die?” I said, “Fortunately, all forty-three of us survived. All of us have come here." The Envoy said, “Heaven really saved you, really saved you. Not only saved you, but did it through His Highness's virtue. We can be happy for that.” I was then questioned by the Envoy and described in general the circumstances of my drifting and staying at places, the dangers of the ocean we crossed, the outstanding geographical sites, and the differences of custom. The Envoy said, “When my party passed some places, I thought we were doing great things. When I have seen what your eyes have beheld, there will be little left to impres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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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嘉靖《州志》권2, 郵驛, 鋪舍附에는 百間鋪로 되어 있다. 125. 民國《縣志》 권8, 故事에 의하면 어양역은 1州城 남문에서 3리의 거리이다. 嘉靖《州志》권2, 郵驛에 의하면 어양역의 舊名은 州驛이다. 126. 唐玄宗 때 반란을 일으킨 무장이다. 6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그는 무역담당관이 되었고, 뒤에 范陽節度使 밑에서 무관으로서 공을 세워 范陽·河東節度使를 지냈다. 황태자와 당시 재상인 楊國忠이 玄宗과의 사이를 이간질하자, 755년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중원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安祿山의 亂'이라 한다. 이듬해 스스로 大燕 황제라 칭하고, 한때 화북지방의 주요부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후계자 문제로 둘째 아들인 安慶緖에게 살해당했다. 127. 秦漢시대에 설치된 漁陽郡은 魏晉시대에는 幽州에 속했는데, 隋代에 다시 漁陽郡을 두었다가 唐 開元18年(730)에 과거의 門關이 있었다는 이유로 1州라 부르게 되었다. 《舊唐書》권39, <志十九地理2;《明一統志》권1, 〈京師등 참조. 128. 盤山의 다른 이름으로 그 외에 田盤山, 徐無山, 四正山 등으로도 불린다. 民國《縣志》권1, 地理, 129. 後漢初의 인물로 16세 때 長安에서 공부하여 聖童이라 불려졌다. 光武帝가 즉위하자 郞中에 임명되었고, 후에 蜀郡太守가 되어 蜀의 公孫述을 평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騎都尉에 임명되어 흉노를 격파하였으며, 漁陽太守가 되어 狐奴 지방에 稻田 8천여 項을 개간케 하고 백성에게 농업을 진작시켰다. 큰 치적을 쌓아 백성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흉노도 더 이상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고 한다. 《後漢書》 권31, 列傳제20. 130. 班固의 《東觀漢記》권15, 張甚에 장감이 漁陽太守였을 때 선정을 베풀어 稻田 8천여項을 정비하는 한편 경작 방법을 가르쳐주어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지자 “桑無附 枝, 麥穗兩岐, 張君爲政, 樂不可支”라는 동요가 생겼다고 한다. 원문의 '麥秀兩岐가 바로 麥穗兩岐'로서 풍년의 조짐을 상징한다. 후대에는 지방관의 선정을 뜻하는 말 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131. 中樞府는 朝鮮前期 王命의 출납, 兵器, 軍政, 宿衛 등의 일을 맡았다. 1392년에 中樞院을 설치하였고, 정종2년(1400)에 三軍府로 고쳤다가 태종9년(1409)에 중추원으로 복구하였으나, 세조12년(1466) 중추부로 고쳐 文武 堂上官으로서 任職이 없는 자를 일정한 사무를 맡기지 않고 우대하는 의미로 두게 되었다. 정원은 領事(정1품) 1명, 判事 2명, 知事 2명, 同知事 7명, 僉知事 8명, 經歷 1명, 都事 1명을 두었다. 知中樞府事는 바로 위의 知事를 말한다. 13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昌寧이고, 자는 子强이며 시호는 文惠이다. 세조8년 (1462)에 司馬試에 합격하고 146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檢閱, 典籍, 持平, 掌令, 執義 등 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486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에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1488년 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후에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면서 각 부의 判書職을 두루 거쳤다. 133. 중국에 보내던 朝鮮 使節의 일행인 正使, 副使, 書狀官 등의 세 使臣 가운데, 書狀官은 기록관을 말하며 외교문서에 관한 직무를 분담하였다. 사행 중 매일 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돌아온 후에 왕에게 見聞한 바를 보고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정사나 부사보다 지위는 낮았으나 行臺御史를 겸하여 일행을 감찰하고, 강을 건널 때에는 일행의 人馬와 下 등을 점검하였다. 134. 조선 전기의 驛官이다. 성종 원년(1470) 명나라에서 姜浩라는 사신이 와서 태평관에 머물러 있을 때 사신이 앵두를 보고 서로 對句를 짓자고 청했는데 여기에서 거침없이 응대하여 찬사를 받았다. 명나라 사신과의 聯句를 잘 지었다 하여 韓明로부터 鹿皮 한 장을 상으로 받았다. 1486년 賀正使 柳子光을 따라 통사로 北京에 다녀왔다. 135. 조선시대의 관청으로 南宮 혹은 春官이라고도 한다. 庶政을 집행하던 중앙 행정관청인 六曹의 하나이다. 禮樂, 祭祀, 宴享, 외교, 학교, 科擧 등을 맡아 관장하였다. 관원으 로는 判書(정2품), 參判(종2품), 參議 각 1명을 두어 이를 三堂上 또는 禮堂이라 하였으며, 正郞(정5품), 佐郞(정6품) 등 堂下官 각 3명을 두어 이를 郞官이라 하였다. 136.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承政院에 소속되어 있던 정3품의 당상관직이다. 태종 원년(1401)에 승정원 소속 정3품 堂上官이었던 右承旨의 이름을 바꾼 것이며, 정원은 1명이다. 우승지는 禮曹와 그 부속 아문에 관련한 王命의 출납과 보고 업무를 맡아보 았으나, 右代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戶口, 貢賦, 田稅 및 유통관계 사무와 관련한 戶房의 업무를 담당했다. 세종15년(1433)에 명칭이 다시 우승지로 환원되었다. 137.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善이다. 세조12년(1466) 강원도 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고, 承政院注書, 工曹佐郞, 司諫院司諫 등을 거쳐 忠州牧 使로 나갔다가 이어 掌諫院判決事, 承政院左副承旨·右副承旨를 거쳐 中樞府僉知事에 이르렀다. 138 출전은 다음과 같다. “朝萬不知晦깨, 應站不知春秋”《莊子》권1, 〈內篇 逍遙遊); “春夏之月, 有网者, 因雨而生, 見陽而死” 《列子》 권5, (湯間). 139. 조선의 문신으로, 호는 仁齋이다. 成宗11년(1480) 생원이 되고 148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正字를 지냈다. 燕山君11년(1504) 이조참판 겸 부총관 때 양화도(楊花渡) 놀이에서 연산군의 횡포를 풍자한 시를 지어 바쳤다가 미움을 사 吏曹參判에서 종9품 副司勇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연산군의 정치가 더욱 난폭해지자, 그는 燕山君13년 (1506) 박원종 등과 中宗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우고 형조판서 가 되었다. 이어 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反正의 불가피성을 납득시켰다. 귀국한 뒤 우의정을 거쳐, 中宗5년(1513) 영의정에 이르렀다. 140. 복건의 동부 지역을 뜻한다. 그러나 최부 일행이 도착한 곳은 鬪東이 아닌 浙東 즉浙江이므로 이는 착오이다.

141. c馬는 말을 돌보는 직책
  1. 무오기행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2. 양귀비, 현종·안록산과 '양다리 사랑놀음'…唐을 파산시킨 그 치명적 유혹, 한국경제, 2011.03.25
  3. [우리말바루기 승은/성은 중앙일보, 2008.03.31]
  4. 드라마 속의 동어 반복과 부적절한 어휘 선택, 김희진(金希珍), 국립국어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