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롬반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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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골롬반 외방 선교회는 성 골룸바노(Columbanus)가 죽은 지 약 1300년이 지난 1918년, 선교사로서 일생을 바친 골룸바노 성인을 주보로, 아일앤드 에드워드 갤빈 신부가 설립하였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1918년 6월 29일 교황청 승인을 받았다. 그는 1909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외방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8년 중국에 신학교를 세운 다음 골롬반회를 창설하였다. 이들은 필요한 곳이면 전 세계 어디든지 복음을 전하며,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첫 번째 신념으로 삼았다.

한국진출

골롬반선교회의 한국 진출은 1933년 11월 중국으로 가던 10명의 사제가 장상인 맥골드린 신부의 “한국으로 가라”는 지시를 따르면서 이뤄졌다. 이들은 대구에서 한국어를 익힌 다음 광주 교구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운 뒤 광주·목포·제주·춘천 등지로 흩어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한 골롬반선교회는 선교 사제와 평신도 선교사 양성, 파견에 힘쓰는 한편,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 노동과 빈민 사목 등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

주요활동

1933년 10월 29일 맥폴린(1889∼1963 아일랜드) 신부를 비롯한 신부 10명이 부산항에 도착하면서 한국에 첫발을 내딛고 80년 동안 춘천교구·원주교구 등 9개 교구에 본당 130여 개를 설립했다. 한국에 파견된 최초의 회원들은 대구교구 신학교에서 한국말 공부를 마치고 전라남도로 파견되었다. 당시 그곳에는 6명의 한국인 신부가 3000 여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하고 있었다. 골롬반회는 목포, 노안, 순천, 광주, 제주, 서귀포 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8년에는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그해 11월 2명의 회원이 춘천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강원도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강원도에는 한국인 신부 11명이 9,000여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전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1939년 6명의 골롬반 신부가 합류하여 춘천, 원주, 홍천, 이천, 평강 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3년 11월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천주교 성(聖)골롬반외방선교회 회지(會誌) '극동(The Far East)'은 조선 선교를 시작하는 각오를 담은 사설을 실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합세하면서 신부들을 모두 체포하여 골롬반 회원들 가운데 미국, 호주, 뉴질랜드 출신의 7명의 신부는 본국으로 송환시켰고, 아일랜드 신부들은 가택연금 시켰다. 제주도에서 사목하던 3명의 골롬반 회원들은 첩보활동 및 불온사상 소지자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골롬반 신부들은 항일운동에 참여해 투옥되거나 추방·가택연금당했다. 한국 정부는 1999년 골롬반회 사제 3명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교육관련일화

"조선에서 배움에 대한 경외심은 아주 오래된 시절부터 그 자체로 거의 하나의 신앙에 가까웠다"고 기록되어있다. 학교를 개설하고 신입생을 모집했는데 100명 정원이 다 차자 부모들이 '농성'을 벌이고, '내 자식이 쓸 책상을 직접 사 오겠다'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성당 앞마당에 난데없이 '움막'이 등장했다. 37년간 아내와 자녀와 단란하게 살던 가장(家長)이 7년 전 한센병에 걸려 유랑 걸식하다 성당 앞마당에 깃든 것이다. 어려서 글도 배웠다는 그는 선교사들에게 '읽을거리'를 부탁했다. 천주교 관련 서적을 잔뜩 안겼더니 혼자서 교리서와 기도문을 읽고 외워 세례성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