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영 연습
목차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연구 방법 면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 그리고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성격의 인문학 연구를 포함한다.[1]
이에 따르면 내가 방점 찍어야 할 부분은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일 것이다. 우리 세대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학문연구와 정보들은 이미 디지털화가 상용화 된 이후의 작업이기 때문에 정보에 접근하고 아카이빙 하는 작업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컴퓨터 상용화가 되기 전에 생성된 문헌정보들은 정보의 열람과 확산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특별한 탐색 의도가 있거나 당장 정보를 필요로 하는 전문 분야 종사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에겐 접근성이 낮은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디지털 인문학의 산물인 <조선왕조실록>만 보더라도, 나 혼자서는 원문에 접근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날것의 원문을 해석하는 것 역시 매우 버거울 것이며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등 누군가의 손을 거쳐 가공된 정보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 인문학의 역할은 정보 접근을 효율적이게 만들어서 인문학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쉽게 접근하고 열람할 수 있도록 정보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미 디지털화 된 정보에 대해서도 디지털 인문학의 역할이 존재한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정보가 넘치다 못해 정보의 홍수, 바다라고 표현되는 것과 같이 디지털 상에는 이미 전문가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존재한다. 그러나 전문가의 관여가 없는 정보는 신빈성이 없고 신뢰도가 낮기 때문에 정보의 접근성은 높지만 정보의 가치가 낮은 상태가 된다. 디지털 인문학을 활용한다면, 흩어져 있는 낱개의 정보를 알아보기 쉽고 활용 가치도 높은 정보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이다.
창덕궁에 대한 서술
창덕궁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왔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은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하였다.[2] 조선왕조 내내 가장 오래 존속되었고, 가장 오래 임금들이 임어하였던 공간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창덕궁은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 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 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