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시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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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시
(奉常寺址)
2018년 7월 촬영
표석명칭 봉상시
한자표기 奉常寺址
영문명칭 Site of Bongsangsi Government Office
설치연도 2016년
주소 새문안로3길 15(당주동 128-27)


표석 문안

Quote-left.png 봉상시는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를 관장하고, 시호를 제정하며, 적전(籍田)의 농사를 관리하던 관청이다. 1392년(태조 1)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 32) 봉상사(奉常司)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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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봉상시(奉常寺)는 조선 태조 1년(1392)에 종묘(宗廟)의 제향(祭享)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설치되었다.

Quote-left.png 문무백관의 관제

定文武百官之制: (…) 奉常寺: 掌宗廟、祭享等事。判事二, 正三品; 卿二, 從三品; 少卿二, 正四品; 丞一, 從五品; 博士二, 正六品; 協律郞二, 正七品; 大祝二, 正八品; 錄事二, 正九品; 令史二, 九品去官。

문무백관(文武百官)의 관제(官制)를 정하였다. (…) 봉상시(奉常寺)는 종묘(宗廟) 의 제향(祭享)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정4품이고, 승(丞) 1명 종5품이고, 박사(博士) 2명 정6품이고, 협률랑(協律郞) 2명 정7품이고, 대축(大祝) 2명 정8품이고, 녹사(錄事) 2명 정9품이고, 영사(令事) 2명 9품인데, 거관(去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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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조실록』권1 > 태조 1년(1392) > 7월 28일(정미)


봉상시는 고려 때의 태상부(太常府)를 이어받은 제도로서, 전의시(典儀寺), 봉상시(奉常寺), 태상시(太常寺) 등의 명칭이 있었다.

Quote-left.png 典儀寺掌祭祀贈謚。穆宗朝有太常卿·少卿·博士·司儀·齋郞。文宗以太常府, 爲丙科權務官。使一人三品兼之, 副使一人五品兼之, 錄事四人亦兼官。忠烈王二十四年, 忠宣改太常府, 爲奉常寺, 置卿二人秩正三品, 少卿一人正四品, 丞一人正五品, 博士一人從七品, 太祝一人, 奉禮郞一人, 並正九品。三十四年, 忠宣改爲典儀寺, 置領事二人皆兼官, 改卿爲令, 省一人, 少卿爲副令, 增二人, 丞仍一人, 革博士·太祝·奉禮郞, 置注簿一人正六品, 直長二人正七品, 錄事二人正九品。後置判事正三品, 降令從三品, 丞從五品。恭愍王五年, 改太常寺, 改令爲卿, 副令爲少卿, 革注簿, 復置博士陞正六品, 判事·丞·直長·錄事如故。十一年, 復稱典儀寺, 又改卿爲令, 少卿爲副令, 降從四品, 革博士, 復置注簿, 餘並仍。十八年, 復稱太常寺, 改令爲卿, 副令爲少卿, 陞正四品, 注簿爲博士。二十一年, 復用十一年官制。吏屬, 文宗置記事·書者.

전의시(典儀寺). 제사(祭祀)와 시호를 추증하는 일[贈謚]을 담당하였다. 목종(穆宗) 때에는 (관원으로) 태상경(太常卿)·소경(少卿)·박사(博士)·사의(司儀)·재랑(齋郞)이 있었다. 문종(文宗) 때에 태상부(太常府)를 병과권무관(丙科權務官)으로 삼았는데, 사(使) 1인은 3품관이 겸하고, 부사(副使) 1인은 5품관이 겸하였으며, 녹사(錄事) 4인도 또한 겸하도록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충선왕(忠宣王)이 태상부를 고쳐 봉상시(奉常寺)라 하고, (관원을) 두기를 경 2인은 정3품, 소경 1인은 정4품, 승(丞) 1인은 정5품, 박사 1인은 종7품, 태축(太祝) 1인과 봉예랑(奉禮郞) 1인은 모두 정9품으로 두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이 전의시로 고치고, (관원을) 두기를, 영사(領事) 2인은 모두 겸관이며, 경을 영(令)으로 고치고 1인으로 줄였으며, 소경은 부령(副令)이라 하고 2인으로 증원하였으며, 승은 그전대로 1인으로 하였으며, 박사·태축·봉례랑은 없앴으며, 주부(注簿)를 두었는데 1인으로 정6품, 직장(直長) 2인은 정7품, 녹사 2인은 정9품으로 하였다. 뒤에 판사를 설치하였는데 (관품을) 정3품으로 하였으며, 영은 종3품으로 내리고, 승은 종5품으로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태상시로, 영을 경으로, 부령을 소경이라 고쳤으며, 주부는 없애고, 다시 박사를 두었는데 정6품으로 올렸으며, 판사·승·직장·녹사는 예전과 같이 하였다. (공민왕) 11년(1362)에 다시 전의시라 불렀으며, 또 경을 영으로, 소경을 부령이라 고쳤는데 종4품으로 내렸으며, 박사를 없애고, 다시 주부를 두었으며, 나머지는 이전대로 하였다. (공민왕) 18년(1369)에 다시 태상시라 불렀으며, 영을 경으로, 부령을 소경이라 고쳤는데 정4품으로 올렸으며, 주부는 박사라 하였다. (공민왕) 21년(1372)에 다시 (공민왕) 11년(1362)의 관제를 사용하였다. 이속(吏屬)은 문종 때에 기사(記事)와 서자(書者)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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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사』권76 > 지(志) 권30 > 백관1(百官 一) > 전의시 > 전의시의 기능과 연혁


그런데 종묘 제향을 관장한다는 봉상시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래는 조선전기 봉상시의 활동을 보여주는 실록의 기사들이다.

Quote-left.png 봉상시에 명하여 4대 선조의 신주를 만들게 하다

命奉常寺作四代神主。

봉상시(奉常寺)에 명하여 사대(四代)의 신주(神主)를 만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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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조실록』권1 > 태조 1년(1392) > 8월 9일(무오)


Quote-left.png 봉상시에서 사직·원구단·문묘 제향 때의 악장을 고칠 것을 아뢰다

奉常寺啓: "今當國初, 一新舊制, 已改宗廟樂章。其社稷、圓丘、文宣王等祭樂章, 尙循舊制, 亦宜改作。" 上從之。

봉상시(奉常寺)에서 아뢰었다. "이제 국초(國初)를 당하여 구제(舊制)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미 종묘의 악장(樂章)을 고쳤으나, 사직과 원구단(圜丘壇)과 문묘 제향의 악장은 아직도 옛날대로 하니, 역시 개작(改作)하여야 옳겠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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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조실록』권8 > 태조 4년(1395) > 11월 16일(병자)


Quote-left.png 판한성부사 계림군 정희계의 졸기

至是疽背卒, 上輟朝, 命有司葬以禮, 賜諡。奉常擬諡, 以安荒聞, 上命改之, 乃諡良景。子吉祥。

이에 이르러 등창이 나서 졸(卒)하니, 임금이 조회를 정지하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시호(諡號)를 주게 하매, 봉상시(奉常寺)에서 안황(安荒)으로 시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고치라고 명령하여 양경(良景)이라 시호하였다. 아들은 정길상(鄭吉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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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조실록』권10 > 태조 5년(1396) > 7월 12일(정묘)


Quote-left.png 인재 선발과 천거 방법 등 시무에 관한 사헌부의 상소문

禮曹奉常等官, 職掌禮樂而治神人和上下, 其任重矣, 苟非通古今明禮樂者, 不可虛授。今禮曹典書李和英ㆍ李玄、議郞許衡、奉常判事辛有定ㆍ崔允祐、令朴質等, 漫不知禮樂爲何事, 至若書雲之金天錫ㆍ趙愼言、典醫之李思謹、司譯之金乙雨等, 是皆不適其任者也。(…)

(…) 예조·봉상시(奉常寺) 등의 관사(官司)는 직책이 예악을 맡아서, 신인(神人)을 다스리고 상하를 화(和)하게 하는 것이니, 그 임무가 중합니다. 만일 고금을 통하고 예악에 밝은 자가 아니면, 헛되이 제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예조 전서(禮曹典書) 이화영(李和英)·이현(李玄), 의랑(議郞) 허형(許衡), 봉상 판사(奉常判事) 신유정(辛有定)·최윤우(崔允祐), 영(令) 박질(朴質) 등은 전연 예악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며, 서운관(書雲觀)의 김천석(金天錫)·조신언(趙愼言), 전의감(典醫監)의 이사근(李思謹), 사역원(司譯院)의 김을우(金乙雨) 등은 모두 그 직임에 적당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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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종실록』권2 > 태종 1년(1401) > 11월 16일(경자)


Quote-left.png 제복(祭服)과 악기를 구입코자 하는 자문을 명나라 예부에 보내다

就咨禮部曰: 據議政府狀啓, 備奉常寺呈照得, 本寺所掌四時祖廟、社稷、籍田文廟等祭, 陪臣祭服及樂器等物, 悉皆損舊, 似難應用。理宜赴京收買, 換新備用, 具呈狀啓。得此竊詳, 上項祭服樂器, 不敢擅便赴京收買, 理合咨稟, 煩爲奏達。如蒙允許, 隨後差人齎價赴京收買, 以備應用。

예부(禮部)에 보내는 자문(咨文)은 이러하였다.

"의정부(議政府) 장계(狀啓)에 의거하건대, ‘봉상시(奉常寺) 정문(呈文)에 의하면, 「본시(本寺)에서 관장하는 사시(四時)의 조묘(祖廟)와 사직(社稷)·적전(籍田)·문묘(文廟) 등의 제사(祭祀)에 사용하는 배신(陪臣)의 제복(祭服) 및 악기(樂器) 등의 물건이 모두 파손되고 오래 되어서 쓰기 어려울 듯하니, 마땅히 경사(京師)에 가서 구입(購入)하여 새 것으로 바꾸어 써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의정부에서〉 정문(呈文)을 갖추어 장계(狀啓)하였으니, 간절히 생각하건대, 위의 제복(祭服)과 악기(樂器)는 감히 마음대로 경사(京師)에 가서 살 수 없고, 자품(咨稟)함이 이치에 합당하겠기에 번거롭게 주달(奏達)하는 것입니다. 만일 윤허(允許)를 받게 되면, 곧 뒤따라 사람을 보내어 값을 가지고 경사에 가서 매수(買收)하여, 이용에 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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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종실록』권9 > 태종 5년(1405) > 4월 8일(계유)


Quote-left.png 시호를 내리는 책증 의식

策贈儀曰: 前期, 忠扈衛於喪家大門外之西, 設使者幕次南向。執事者設使者位於正廳東北南向, 喪主代授諡號位于廳前北向。至期, 使者以樓子, 奉諡號至喪家 【先是, 奉常寺以其實跡, 議諡報禮曹, 禮曹移吏曹, 吏曹受敎定諡。】

책증의는, "기일 전에 충호위가 초상집 대문 밖 서편에 사자의 막차를 남향으로 설치하고, 집사자는 사자의 자리를 대청 동북쪽에 남향으로 설치하고, 상주에게 대신 시호(諡號)를 주는 자리를 대청 앞에 북향으로 설치한다. 기일에 이르러, 사자가 누자(樓子)로 시호(諡號)를 받들고 상가에 이르러 【이에 앞서 봉상시(奉常寺)에서 그의 행적을 가지고 시호를 의논하여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이조에 넘기고, 이조에서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서 시호를 결정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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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11 > 세종 3년(1421) > 4월 12일(갑진)


Quote-left.png 예조에서 기우에 사용하는 예기에 대해 건의하다

禮曹啓: "圓壇祈雨, 禮器不備, 臨時取辦未便。請令奉常寺造作, 別藏用之。" 從之。

예조에서 계하기를, "원단(圓壇)에서 기우(祈雨)할 예기(禮器)가 갖춰지지 못하여, 임시(臨時)에 주선하는 것이 곤란하니,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만들어서 따로 저장하여 두었다가 사용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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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20 > 세종 5년(1423) > 5월 16일(을미)


Quote-left.png 광효전에 둘 위판독을 《주문공가례》의 신주좌 제도에 따르도록 하다

禮曹據奉常寺牒呈啓: "今廣孝殿奉安位板櫝, 請依《朱文公家禮》內, 神主座制製造。" 從之。

예조에서 봉상시(奉常寺)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이번 광효전에 봉안할 위판독(位板櫝)은,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안의 신주좌(神主座)의 제도에 따라 제조(製造)하기를 청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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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24 > 세종 6년(1424) > 6월 10일(계축)


Quote-left.png 예조에서 단군·기자·고구려 삼전의 제기에 관해 아뢰다

禮曹據平安道監司關啓: "檀君、箕子、高句麗三殿祭器, 初倣圖畫體制造作, 竝不如法。請三位祭器內簠簋等, 改以鑄器; 籩篚, 令奉常寺造送; 瓦㽅, 本道見樣燔造。" 從之。

예조에서 평안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단군(檀君)·기자(箕子)·고구려(高句麗) 삼전(三殿)의 제기(祭器)를 처음에는 도화체제(圖畫體制)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나, 모두 법과 같지 않으니, 청하건대 삼위(三位)의 제기 중에서 보(簠)·궤(簋) 등을 주기(鑄器)로서 고치고, 변(籩)·비(篚)는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고, 와등(瓦㽅)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겨냥하여 구워 만들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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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57 > 세종 14년(1432) > 8월 4일(경인)


나라의 제사에 사용할 신주와 위판의 제작, 제례에 사용할 음악과 악기를 살피는 일, 제사에 소용되는 배신(陪臣)의 제복(祭服)이나 곡식을 담는 그릇 등을 관리하는 것 등이 봉상시가 맡은 일이었다. 봉상시에 대하여 ‘예악’을 맡은 관사라고 한 태종 1년 11월 기사는 봉상시가 제례의 음악을 담당하는 곳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 시호(諡號)를 정하여 올리는 것도 봉상시의 일이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시호 제정의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정부에서 이조로, 이조에서 예조로 사안이 넘어오면 예조에서는 봉상시에 지시하여 그 행적을 논하여 시호를 제정하게 하였다. 그 다음 예조에서 다시 의정부로 보내어 임금의 교지를 받는다. 아래는 이에 관한 절차를 명시해 놓은 세종대의 기록이다.

Quote-left.png 시호를 올리는 절차에 관한 의정부의 상소문

議政府啓: "竊詳先王先后上諡節次, 前此議政府署事時, 本府行移吏曹, 吏曹行移奉常寺, 奉常寺敬依施行, 報禮曹, 本府據禮曹呈, 啓聞受旨。去甲午年, 本府罷署事後, 吏曹直啓受旨。敬惟上諡, 傳示萬世, 事莫重焉。今王世子嬪諡, 乞令吏曹報本府, 本府行移禮曹, 禮曹行移奉常寺, 奉常擬議報禮曹, 本府據禮曹呈, 啓聞受旨施行。" 從之。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그윽이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에게 시호(諡號)를 올리는 절차를 상고하오니, 이 앞서 의정부에서 사무를 서리(署理)할 때에, 본부(本府)에서 이조(吏曹)로 행이(行移)하고 이조에서 봉상시(奉常寺)로 행이(行移)하면, 봉상시에서 그에 의하여 공경히 시행하고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본부에서 예조의 보고에 의거하여 계문(啓聞)해서 교지(敎旨)를 받았는데, 지난 갑오년에 본부에서 서리(署理)하는 것을 혁파한 뒤에 이조에서 바로 아뢰어 교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시호를 올리는 것은 만세(萬世)에 전해 보이는 것으로서, 일이 막중(莫重)한 것입니다. 이제 왕세자빈(王世子嬪)의 시호(諡號)는 이조로 하여금 본부로 보고하게 하고, 본부에서 예조로 행이(行移)하고, 예조에서 봉상시로 행이하며, 봉상시에서 의논하여 예조로 보고하고, 본부에서 예조의 보고에 의거하여 아뢰어 교지를 받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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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93 > 세종 23년(1441) > 8월 15일(기묘)


봉상시에서 시호를 올려도 최종적으로는 임금의 뜻이 중요했다. 또, 시호를 잘못 올렸다고 하여 봉상시 관원이 탄핵을 받거나 구금되는 일도 있었다.

Quote-left.png 정희계의 시호문제로 봉상시의 관원들을 가두다

上召定諡奉常博士崔蠲問曰: "熙啓, 元勳也。贈諡何若是其甚耶? 且但論其過, 不擧其功, 何耶?" 卽下巡軍獄鞫之, 又囚奉常少卿安省、寺丞金汾、大祝韓皐、協律郞閔審言、錄事李士澄。於是, 刑曹劾散騎常侍全伯英、李滉等, 又劾禮曹議郞孟思誠、佐郞趙士秀。不駁奉常寺贈諡之誤也。

(이튿날) 임금이 시호를 정한 봉상 박사(奉常博士) 최견(崔蠲)을 불러서 물었다.

"희계는 원훈(元勳)인데 시호를 왜 이다지도 심하게 하였느냐? 또 단지 그 허물만을 논하고 그 공은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즉시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국문하게 하고, 또 봉상 소경(奉常少卿) 안성(安省)과 봉상시 승(奉常寺丞) 김분(金汾)·대축(大祝) 한고(韓皐)·협률랑(協律郞) 민심언(閔審言)·녹사(錄事) 이사징(李士澄)을 가두었다. 이에 형조에서 산기 상시(散騎常侍) 전백영(全伯英)·이황(李滉) 등을 탄핵하고, 또 예조 의랑(禮曹議郞) 맹사성(孟思誠)·좌랑(佐郞) 조사수(趙士秀) 등의 봉상시에서 시호를 잘못 마련한 것을 반박하지 않은 죄를 탄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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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조실록』권10 > 태조 5년(1396) > 8월 29일(갑인)


Quote-left.png (…) 禮曹及奉常寺以爲: "挺雖出身文科, 然不可得諡以文者也。" 佇復請於上, 得諡文簡, 人皆非之。

이저의 조부 이정에게 시호를 추증하다

(…) 예조(禮曹)와 봉상시(奉常寺)에서 말하기를, "정(挺)이 비록 문과(文科)로 출신(出身)하였으나, 문(文)으로 시호(諡號)할 수는 없습니다."하니, 저(佇)가 다시 임금께 칭하여 문간(文簡)으로 시호(諡號)를 얻으니,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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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종실록』권6 > 태종 3년(1403) > 10월 19일(계해)


태종 때에는 잠시 봉상시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Quote-left.png 전농시를 전사시로, 고쳐 예조에 소속시키고 봉상시를 전농시로 고쳐 호조에 소속시키다

改典農寺爲典祀寺, 奉常寺爲典農寺。上以祭祀, 國之大事, 顧無全掌之官, 但以他官兼之, 於義未安, 以典農寺供祭祀, 未稱其名, 命議政府擬議。政府啓: "典農寺改爲典祀寺, 屬禮曹, 掌供粢盛秬鬯籩豆, 兼掌祭服樂器犧牲齋戒等事。奉常寺改爲典農寺, 屬戶曹, (嘗)[掌]耕籍田, 以供粢盛秬鬯之備, 兼掌勸農屯田等事。舊奉常寺所掌記功贈諡敎樂等事, 移屬禮曹, 舊典農寺所屬奴婢, 量給典祀外, 移屬新典農寺, 庶爲得體。" 從之。

전농시(典農寺)를 고쳐 전사시(典祀寺)로 하고, 봉상시(奉常寺)를 고쳐 전농시(典農寺)로 하였다. 임금이 생각하기를, "제사(祭祀)는 나라의 큰일인데, 전적으로 관장(管掌)하는 관원이 없고, 다른 관원으로 겸임하는 것이 의(義)에 미안(未安)할 뿐만 아니라, 전농시(典農寺)로 제사를 공봉(供奉)하는 것이 이름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전농시(典農寺)를 고쳐 전사시(典祀寺)로 하여 예조(禮曹)에 소속시켜, 자성(粢盛)·거창(秬鬯)·변두(籩豆)를 맡게 하고, 제복(祭服)·악기(樂器)·희생(犧牲)·재계(齋戒) 등의 일을 겸해 맡게 하며, 봉상시(奉常寺)를 고쳐 전농시(典農寺)로 하여 호조(戶曹)에 소속시켜, 적전(籍田)을 경작하여 자성·거창의 준비를 맡게 하고, 권농(勸農)·둔전(屯田) 등의 일을 겸해 맡게 하되, 예전 봉상시가 맡았던 기공(記功)·증시(贈諡)·교악(敎樂) 등의 일은 예조(禮曹)로 이속(移屬)시키고, 예전 전농시에 소속되었던 노비(奴婢)는 적당히 전사시(典祀寺)에 지급하고, 그밖의 것은 새 전농시에 이속(移屬)시키는 것이 거의 사체(事體)에 합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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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종실록』권18 > 태종 9년(1409) > 12월 17일(갑인)


이때 제사 음식의 준비는 전농시에서, 제사 음악과 기물의 관리는 봉상시에서 맡고 있었으므로 제사를 전담하는 관청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농시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쳐서 제사 전담 기구로 만들고, 봉상시를 전농시로 바꿔 적전(籍田) 관리 등을 맡기게 된다. 봉상시가 맡았던 여러 역할들 중 일부(제사 기물 관리)는 전사시로 넘어가고, 일부(증시, 제복과 음악)는 예조의 직접 관할 업무로 편성한 것이다. 봉상시는 전농시로 바뀌면서 소속도 예조에서 호조로 변경된다. 봉상시가 다시 설치된 것은 11년 후인 세종 2년(1420)이다.

Quote-left.png 예조에서 봉상시를 다시 설치할 것을 건의하다

禮曹啓: "奉常寺卽古之太常也。唐制, 太常職掌, 曰御衣院藏祭服曰樂懸院藏祭器; 曰神廚院藏御廩及諸器。歲在己丑, 革奉常, 而設典祀寺, 專掌祀事, 只行神廚院之職, 其祭服樂器, 移於本曹, 奉常之職, 始不如古。自政府庶事, 分于六曹, 本曹事務, 最爲煩劇, 樂懸肄習、祭服修補, 未暇詳察。此非特有廢事之弊, 且無六曹體統之義。乞依國初之制, 復置奉常寺, 其所掌職事, 一如唐制。" 從之, 仍命本寺四品以下官, 竝以文科出身者充差。

예조에서 계하기를, "봉상시(奉常寺)는 곧 옛날의 태상(太常)입니다. 당(唐)나라의 제도에, 태상시가 관할하는 것으로 어의원(御衣院)이라는 것은 제복(祭服)을 간수하며, 악현원(樂懸院)이라는 것은 제기(祭器)를 간수하며, 신주원(神廚院)이라는 것은 왕실의 식량과 모든 그릇을 간수하는 것이었삽더니, 기축년에 와서 봉상시를 폐지하고 전사시(典祀寺)를 설치하여, 주로 제사에 관한 사무를 맡게 하니, 다만 신주원의 직무만을 시행하는 것이요, 그 제복과 악기는 본조(本曹)로 이관되었습니다. 봉상시의 직이 비로소 옛날과 같지 아니하여, 정부에서 모든 일을 육조(六曹)에 분담했는데, 본조의 사무가 가장 복잡하므로, 악기(樂器)를 연습하는 것과 제복(祭服)을 수보하는 것까지 세밀히 살필 겨를이 없사오니, 이는 다만 사무를 폐지하는 폐해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육조로서의 체통을 세울 수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우리나라의 처음 제도에 의하여, 봉상시를 다시 설치하고, 그 곳에서 맡은 임무는 모두 당나라의 제도와 같이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르고, 곧 명을 내리어 봉상시의 4품 이하의 관직은 모두 문과 출신자로 충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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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7 > 세종 2년(1420) > 윤1월 10일(기묘)


예조에서 악공의 교습과 음악의 정비, 제복과 악기의 관리 등을 하나하나 신경 쓸 여력이 없고, 또 육조의 체통을 세우기 어려우니 봉상시를 다시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이다. 세종 대는 특히 조정의 음악 정비에 힘썼던 시기였으므로 봉상시를 부활할 필요성이 커졌던 것이다. 아래는 예악 정비와 관련된 봉상시의 활동을 보여주는 세종 대의 기록들이다. 아악서(雅樂署)와 관습도감(慣習都監)이 있긴 하였으나, 봉상시에서도 악공을 두고 음악을 교습하였으며, 악기를 보관하고 제작하는 일을 관장했음을 알 수 있다.

Quote-left.png 명나라에서 새로 보내온 소관을 헌가에 사용하라는 박연의 청을 따르다

禮曹據樂學別坐朴堧呈啓: "今考奉常寺所在中朝所賜樂器內, 有簫管, 卽《樂書》樂器圖說內所謂簫管之制, (足)〔定〕 黃鍾一均聲。或謂之尺八管, 或謂之竪篴, 或謂之中管, 宮懸用之。民間謂之簫管者也。此則律聲皆備焉, 奉常寺以軒架曾有篴, 不用簫管, 然軒架曾用之篴。奉常寺《序例圖》內, 引《周禮圖》云: ‘篴舊四孔, 京房加一孔, 備五音。’ 今笛也。此則形制雖與竪笛相近, 而於律應鍾、無射之聲不足, 不宜用於軒架。請於軒架, 去曾用之笛, 用中朝所賜簫管, 以諧樂聲。" 從之。

예조에서 악학 별좌(樂學別坐) 박연(朴堧)의 말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이제 봉상시(奉常寺)에 있는 중국에서 보낸 악기 가운데 소관(簫管)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곧 악서(樂書)의 악기도설(樂器圖說)에서 소관(簫管)이라 이르는 제도이니, 황종(黃鍾)의 한 음성(音聲)을 고르게 한 것에 족한 것인데, 혹은 이를 척팔관(尺八管)이라고도 하며, 혹은 수적(竪篴)이라고도 하며, 혹은 중관(中管)이라고 하는데, 궁현(宮懸)에서 사용합니다. 민간에서는 이것을 소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음률의 소리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봉상시에서는 과거부터 헌가(軒架)에 적(篴)이 있기 때문에 소관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헌가에 사용한 적은 봉상시 서례도(序例圖)에 주례도(周禮圖)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적은 옛적에는 구멍이 넷이었으나, 경방(京房)004) 이 한 구멍을 더 내어 오음(五音)을 갖추었는데, 오늘에 사용하는 저[笛]가 곧 이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양과 제도가 비록 수적(竪笛)과 비슷하나, 음률에 있어서 응종(應鍾)과 무역(無射)의 소리가 부족하오니 헌가에 사용하기는 부족합니다. 바라옵건대 헌가에 종래에 쓰던 저를 버리고 중국에서 보내온 소관을 사용하여 음악의 소리를 조화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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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31 > 세종 8년(1426) > 1월 10일(을사)


Quote-left.png 악공과 무녀를 늘여 제사의 필요에 충당하자고 이조에서 건의하다

吏曹啓: "奉常寺雅樂署樂工一祭所用, 摠一百四十九人, 竝祭則二百九十八人。前此, 以巫女子姪及良人丁吏等屬之, 元額僅二百人, 而欠九十八人。其元屬者, 亦皆外方殘劣單寒之人, 未能贏糧久留, 逋亡頗多。況因年老喪病雜故, 太半不仕, 每當祀事, 一祭所任, 尙未能贍, 如遇竝祭, 則專以軍器別軍充之, 實爲未便。凡音律之任, 累年學習, 乃得成才, 其遲鈍者, 雖加勸勉, 略無寸進。請於元額二百, 加一百五十, 依舊例以巫女子姪、閑散良民, 擇取年十三歲以上二十歲以下, 京中三十名, 忠淸道三十名, 全羅道三十五名, 慶尙道四十名, 江原道十五名。其祿官則於六品, 加副典樂一, 七品典律二, 八品副典律三, 九品直律三, 以示勸勵。" 從之。

이조에서 계하기를, "봉상시(奉常寺)와 아악서(雅樂署)의 악공(樂工)은 제사 하나에 쓰이는 인원이 모두 1백 49명이요, 함께 합하여 제사하면 2백 98명이 소용되옵는데, 이 앞서 무녀(巫女)의 자질(子姪)과 양인(良人)의 정리(丁吏) 등으로 이에 속하게 하였으나, 원래 정원이 겨우 2백 명으로 오히려 98명이나 부족하오며, 그 본래 속해 있는 자도 또한 모두 외방의 잔열하고 빈한한 사람이온지라, 능히 식량을 가지고 와서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도망하는 자가 꽤 많았사오며, 더욱이 나이 많거나 상고(喪故) 병고(病故) 기타 잡고(雜故)로 말미암아 태반이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매양 제사 때이면 한 제사의 소임(所任)에도 오히려 넉넉지 못한데다가, 만약 함께 합하여 제사할 때이면 오로지 군기시(軍器寺)의 별군(別軍)으로 이를 충당하고 있사오니, 실로 불편한 일입니다. 모든 음률(音律)의 소임이라는 것은 여러 해를 두고 학습하여야만 비로소 그 재능을 가지게 될 것이요, 그 우둔한 자는 아무리 권장 면려를 더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하등의 진보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원래 정원 2백 명에 1백 50명을 더하고, 구례에 의하여 무녀의 자질과 놀고 지내는 양민들로 나이 13세 이상 20세 이하 되는 자를 선택하되, 서울에서 30명, 충청도에서 30명, 전라도에서 35명, 경상도에서 40명, 강원도에서 15명으로 하고, 그 녹관(祿官)은 6품 부전악(副典樂) 1인, 7품 전률(典律) 2인, 8품 부전률(副典律) 3인, 9품 직률(直律) 3인을 늘여, 권장함을 보이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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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43 > 세종 11년(1429) > 3월 22일(무진)


Quote-left.png 아악 연주의 타당함 등에 대해 의논하다

上曰: "奉常習樂者, 不如慣習都監之人, 須令慣習之人, 習熟可也。朴堧、鄭穰, 皆新進之人, 未可專保, 卿其留心焉。"

(…) 임금이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음악을 연습하는 자들이 관습도감(慣習都監)의 사람들만 못할 것이니, 모름지기 관습도감의 사람들로 하여금 익숙하게 익히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연(朴堧)·정양(鄭穰)은 모두가 신진 인사들이라 오로지 그들에게만 의뢰할 수 없을 것이니, 경(卿)은 유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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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49 > 세종 12년(1430) > 9월 11일(기유)


Quote-left.png 《아악보》가 완성되고 정인지가 서를 달다

雅樂譜成。鄭麟趾奉敎序曰: (…) 臣等竊觀今之奉常寺所存樂器者, 在高麗 睿宗時, 宋 徽宗所賜編鍾; 恭愍王時, 高皇帝賜與鍾磬, 共數十枚。(…)

《아악보(雅樂譜)》가 완성되었다. 정인지(鄭麟趾)가 명령을 받들어 서(序)를 짓기를, (…) 신 등이 보면, 지금 봉상시(奉常寺)에 보존된 악기는 고려 예종(睿宗) 때에 송나라 휘종(徽宗)이 준 편종(編鍾)과 공민왕 때에 고황제(高皇帝)가 준 종(鍾)과 경(磬) 수십 개가 있으며, 우리 왕조에 이르러 또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준 종과 경 수십 개가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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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50 > 세종 12년(1430) > 윤12월 1일(정유)


세종 27년(1445)에는 봉상시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Quote-left.png 의정부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봉사시의 체제를 정비할 것을 아뢰다

議政府據吏曹呈啓: "奉常寺, 職掌祭祀, 其任匪輕, 近年以來, 擇人不精, 或在任未久, 一應祭祀, 間有不謹, 以致疎虞, 有違設官敬祀之義。今後判事以下, 依臺諫六曹郞廳例, 精加揀擇, 定爲箇月, 衙門勿兼他務。注簿以上, 待滿三十朔, 陞品遷轉; 判事須以通訓以上者除授, 箇滿則陞授堂上官。革副錄事二人, 增置判官一人。其箇月內, 因寺中公事錯誤, 杖罪三犯、笞罪四犯者, 箇滿當遷時, 毋得陞轉, 仍於本品改差, 若供祭雜物不潔, 一犯罷職。提調一員, 除他務, 常坐本寺, 檢察諸事。前此參外官, 以成均館校書館承文院各二人充差, 今革副錄事二人, 以成均館二人、校書館承文院各一人授之。" 從之。

의정부에서 이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봉상시(奉常寺)는 직책이 제사(祭祀)를 맡고 있으니 그 책임이 가볍지 않은데, 근년 이래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정(精)하지 못하고, 혹은 재임 기간이 오래지 못하여 모든 제사에 간혹 삼가지 않은 것이 있어 소루(疏漏)하게 되오니, 관사를 설치하여 제사를 공경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는가 합니다. 금후로는 판사(判事) 이하를 대간(臺諫)과 육조 낭청(郞廳)의 예(例)에 따라 정(精)하게 간택하여 개월 아문(箇月衙門)으로 정해서 타무(他務)를 겸하지 말게 하고, 주부(注簿) 이상은 만(滿) 30삭(朔)이 되기를 기다려서 품질(品秩)을 승진하여 전임시키고, 판사(判事)는 반드시 통훈(通訓) 이상인 사람으로 제수하여 기한이 차면 승진시켜 당상관(堂上官)을 제수하고, 부녹사(副錄事) 두 사람을 혁파하여 판관(判官) 한 사람을 더 두고, 그 개월(箇月) 안에 시중(寺中) 공사(公事)의 착오로 인하여 장죄(杖罪)를 세 번 범하였거나, 태죄(笞罪)를 네 번 범한 자는 개만(箇滿)이 되어 옮길 때를 당하였어도 승진하여 전임시키지 말고 본품(本品) 그대로 개차(改差)하고, 만일 제사에 이바지하는 잡물(雜物)이 정결하지 못하되, 한 번 범하면 파직(罷職)하고, 제조(提調)는 한 사람으로 하여 항상 본시(本寺)에 앉아서 여러가지 일을 검찰하게 하소서. 전에는 참외관(參外官)을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승문원(承文院)의 관원 각각 두 사람씩으로 충차(充差)하였는데, 이제 부녹사(副錄事) 두 사람을 없애고 성균관 관원 두 사람, 교서관·승무원 관원 각각 한 사람으로 제수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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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110 > 세종 27년(1445) > 11월 6일(정축)


봉상시는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속했던 당주동 128번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처음 설치된 곳이 아니라 광해군 때 이전된 위치이다. 아래 기록에서 봉상시 이전의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

Quote-left.png 경덕궁의 동궁이 협소하니 이암의 집터를 바치게 하다

傳曰: "慶德宮東宮狹窄, 李馣家使入于東宮內通用矣。 若廣加恢拓, 掌樂院、奉常寺等處, 竝入于闕內, 則事涉不可, 更加察爲事, 言于都監。"

전교하였다. “경덕궁의 동궁이 협소하니 이암(李馣)의 집을 동궁 안에 들이게 해서 통용하도록 하라. 만약 더욱 넓게 하기 위하여 장악원과 봉상시 등처를 모두 궐내에 포함시킨다면 불가할 듯하니, 다시 살펴서 할 것을 도감에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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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해군일기』[중초본] 권41 > 광해 9년(1617) > 9월 7일(기사)


Quote-left.png 봉상시의 위판 봉안소는 그대로 두고, 숙직소는 옮길 곳을 살피게 하다

傳曰: "奉常寺位版奉安處, 則仍設勿移, 而如官員坐起、直宿處, 則宣惠廳有可移處云, 詳察可移處以啓事, 言于都監。" 【時, 撤毁奉常寺, 入于新闕故也。】

전교하기를, "봉상시의 위판(位版)을 봉안해 놓은 곳은 그대로 두어 옮기지 말고, 관원들이 좌기하거나 숙직하는 곳과 같은 경우는 선혜청에 옮길 만한 곳이 있다고 하니, 옮길 만한 곳을 자세히 살펴서 아뢸 일로 도감에 말하라." 하였다. 【이 때에 봉상시를 허물고 새 궁궐로 옮기려 했기 때문에 이런 전교를 내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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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해군일기』[중초본] 권43 > 광해 9년(1617) > 12월 26일(병신)


Quote-left.png 경덕궁에 궁시 별조청을 조성하고 봉상시를 옮기는 일로 전교하다

傳曰: "慶德宮弓矢別造廳, 不可不造, 一依圖形造成。 但奉常寺可移處, 從速議定以啓事, 言于都監。"

전교하였다. "경덕궁에 궁시 별조청을 만들지 않을 수 없으니 일체 도형대로 조성토록 하라. 단 봉상시(奉常寺) 옮길 곳을 속히 논정해서 아뢰라고 도감에 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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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해군일기』[중초본] 권44 > 광해 10년(1618) > 4월 5일(갑오)


Quote-left.png 봉상시 이설 문제를 속히 처치하라고 전교하다

傳曰: "奉常寺移設甚急, 而尙無處置之事, 宜速議處之意, 言于都監。"

전교하였다. "봉상시를 옮겨 설치하는 일이 매우 급한데 아직도 처치하지 않고 있으니 속히 의논해 처치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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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해군일기』[중초본] 권45 > 광해 10년(1618) > 5월 3일(경인)


경덕궁(慶德宮)은 경희궁의 처음 명칭으로, 광해 9년(1617)에 창건되었다. 경덕궁 창건과 함께 본래 경덕궁 부지 내에 속해 있던 봉상시를 다른 곳으로 이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봉상시 이설이 쉽지 않았던지, 광해군이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하라고 독촉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여러 차례 나온다. 결국 『광해군일기』에는 봉상시 이설을 완료했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정확히 어느 시점에 인달방의 새 청사를 쓰게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이후 봉상시의 기능은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종대에 봉상시가 폐지되고 전농시의 업무를 맡게 되면서 적전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봉상시가 다시 설치된 후에도 적전의 관리는 봉상시 소관으로 남게 된다. 다만 본시와 구별하여 분봉상시(分奉常寺)를 따로 설치하여 기존 전농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봉상시는 1894년까지 존속하다가 궁내부 관직 변경과 함께 봉상사(奉常司)로 바뀌게 된다.

Quote-left.png 궁내부에서 관직 제도의 변경과 함께 비용도 줄일 것을 아뢰다

宮內府啓: "職制業經變通, 冗費亦宜減省。開城分奉常司主簿、直長, 竝依奉常司例, 以主事差下, 分敎官、分監役, 竝減下何如?" 允之。

궁내부(宮內府)에서 아뢰기를, "관직 제도가 이미 변경되었으니 쓸데없는 비용도 줄여야 할 것입니다. 개성 분봉상사(開城分奉常司)의 주부(主簿)와 직장(直長)을 모두 봉상사(奉常司)의 규례대로 주사(主事)로 차하하고 분교관(分敎官)과 분감역(分監役)은 모두 감하(減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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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32 > 고종 31년(1894) > 11월 19일(신묘)


Quote-left.png 궁내부 관제를 반포하다

(…) 掌禮院。 【宮中儀式、祭祀及廟、社、殿、宮、各陵、園、墓에 關 事務와 宗室、貴族에 關 事務를 掌理홈。卿一人, 勅任; 掌禮三人以下, 奏任; 主事八人以下, 判任。○奉常司: 祭禮를 掌고 樂工을 監督홈。長一人, 奏任; 主事四人、協律郞二人, 判任。○諸陵司: 陵、園、墓事務를 掌홈。長一人, 奏任; 主事二人, 判任。○宗正司: 宗室事務外御譜修正을 掌홈。長一人, 奏任; 主事四人, 判任。○貴族司: 貴族事務와 爵品을 掌홈。長一人, 奏任; 主事三人以下, 判任。】 (…)

(…) 장례원(掌禮院) 【궁중 의식, 제사 및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전(殿)과 궁(宮), 각 능(陵)과 원(園), 묘(墓)에 관한 사무와 종실(宗室) 귀족에 관한 사무를 맡아 처리한다. 경(卿)은 1인인데 칙임관이고, 장례(掌禮)는 3인 이하인데 주임관이며, 주사는 8인 이하인데 판임관이다. ○봉상사(奉常司)는 제례(祭禮)를 맡고 악공(樂工)을 감독한다. 장(長)은 1인인데 주임관이고, 주사는 4인, 협률랑(協律郞)은 2인인데 판임관이다. ○제릉사(諸陵司)는 능, 원, 묘에 관한 사무를 맡는다. 장은 1인인데 주임관이고, 주사는 2인인데 판임관이다. ○종정사(宗正司)는 종실(宗室) 사무 외에 어보(御譜)의 수정을 맡는다. 장은 1인인데 주임관이고, 주사는 4인인데 판임관이다. ○귀족사(貴族司)는 귀족의 사무와 벼슬과 품계를 맡는다. 장은 1인인데 주임관이고, 주사는 3인인데 판임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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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33 > 고종 32년(1895) > 4월 2일(계묘)


Quote-left.png 궁내부 관제를 개정하여 반포하다

(…) 奉常司 【掌祭禮、議諡。都提調一人, 勅任; 提調五人、長一人, 勅任; 副提調十人, 奏任; 主事四人、典事十人, 判任。】 (…)

(…) 봉상사(奉常司) 【제사 의식과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정하는 일을 맡아본다. 도제조(都提調)가 1인인데 칙임관이고, 제조(提調)가 5인, 장(長)이 1인인데 칙임관이며, 부제조(副提調)가 10인인데 주임관이고 주사가 4인, 전사(典事)가 10인인데 판임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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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45 > 고종 42년(1905) > 3월 4일(양력)


1895년 궁내부 관직 규정에서 봉상사는 “제례를 맡고 악공을 감독한다.”고 되어 있고, 1905년 개정된 규정에서는 “제사 의식과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일을 맡아본다.”고 되어 있다. 조선시대 봉상시의 기능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봉상사가 언급된 마지막 실록 기록은 아래와 같다.

Quote-left.png 대제 때의 서계와 의식 연습을 모두 그만두게 하다

二十六日。詔曰: "自今以後로 壇廟殿社宮祭享時所用犧牲을 享日趁期야 收聚於前奉常司야 令掌禮院官으로 看品準尺後卽其地宰殺야 仍爲陪進于祭所라"又詔曰: "自今以後로 壇廟殿社大祭時誓戒肄儀를 竝以停廢고 若値親祭則只行肄儀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지금 이후로는 단(壇), 묘(廟), 전(殿), 사(社), 궁(宮)에 제사 지낼 때 쓸 희생은 제삿날에 맞추어 봉상사(奉常司) 앞에 모아 장례원(掌禮院)의 관리가 품평을 한 뒤에 곧 그곳에서 도살하여 그대로 제사지내는 데 올리게 하라."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지금 이후로는 단, 묘, 전, 사에 대제(大祭)를 지낼 때에 서계(誓戒)와 의식의 연습을 모두 그만두고, 친제(親祭)인 경우에는 의식 연습만을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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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종실록』권2 > 순종 1년(1908) > 8월 26일(양력)


근현대 자료

『동사강목』과 『연려실기술』, 『임하필기』에서 봉상시의 연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목종 문종 충렬왕 충선왕
태상(太常)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았다.
태상부(太常府) 태상시 봉상시(奉常寺)로 고쳤다가 전의시(典儀寺)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는 태상시ㆍ전의시로 섞어 불렀다.
Quote-left.png 봉상시(奉常寺) : 신라에서는 ‘전사서(典祀署)’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태상부(太常府)’라 하였다가 봉상시로 고쳤고, 다시 ‘전의시(典儀寺)’ · ‘태상시(太常寺)’로 고치기도 하였다.

태조는 봉상시를 설치하여 제사와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태종이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는데, 세종이 다시 ‘봉상시’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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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 별집 권7 > 관직전고(官職典故) > 제사(諸司)


Quote-left.png 태조(太祖) 원년(1392)에 봉상시(奉常寺)를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고 시호(諡號)를 논의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9년(1409)에는 전사시(典祀寺)로 고쳤고, 세종(世宗) 3년(1421)에는 다시 봉상시라고 칭하고 판사(判事) 이하를 모두 문관으로 제수하도록 명하였으며, 세조(世祖) 11년(1465)에는 도제조(都提調) 1원(員)을 개정(改定)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하필기』권24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봉상시(奉常寺)


『연려실기술』과 『임하필기』에서는 분봉상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Quote-left.png 분봉상시(分奉常寺)는 고려에서는 사농경(司農卿)을 두어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는 ‘전농사(典農司)’란 것이 있어서, 사자(使者)가 나가면 ‘무농염철사(務農鹽鐵使)’라 일컬었다. 곧 고쳐서 ‘적저창(績儲倉)’이라 하였으며, 다시 사농시를 설치하였고, 또 적전관(籍田官)을 두어서 본시(本寺 분봉상시)에 예속시켰다.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를 설치하여 적전(籍田)에 경작(耕作)한 곡식 및 사당 제사에 소용되는 술ㆍ단술과 희생(犧牲)을 진설하는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이 전농시(典農寺)라 고쳐 일컫고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다가, 뒤에는 봉상시에 병합하여 ‘분봉상시’라 일컬었으며, 동서 적전을 예속시켰다.

세종조에 내시별감(內侍別監) 김원효(金元孝)가 순곡(舜穀) 30이삭을 진상(進上)하므로, 각궁(角弓) 한 장을 하사하였다. 원효가 조회에 들어오자 어떤 사람이 종자를 얻어 가꾸어 바쳤는데, 줄기는 조대[秫莖]와 같고, 이삭은 포황(蒲黃)과 같으며, 열매는 조와 같았다. 임금이 내농소(內農所) 동서 적전에 심어서 가꾸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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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 별집 권7 > 관직전고(官職典故) > 제사(諸司)


Quote-left.png 태조(太祖) 원년에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여 적전(籍田) 및 제사에 쓰는 주온(酒醞)과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원년(1401)에는 전농시(典農寺)라 칭하였고, 뒤에 봉상시에 합병되어 분봉상시(分奉常寺)라고 칭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하필기』권24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분봉상시(分奉常寺)


분봉상시는 봉상시의 기능 일부를 맡은 관청인데, 그 역할이 적전의 관리에 한정되어 있으며 봉상시의 주 기능을 나눠 맡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분예빈시를 설치하여 예빈시의 접대 기능을 분담시킨 것과는 다르다. 봉상시가 한때 전농시로 바뀌면서 전농시의 업무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전농시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봉상시에 병합되고 봉상시 관원을 파견하여 해당 업무를 감독하게 한 것이다. 이 분봉상시는 봉상시와 별개로 혁파되기도 하고 재설치되기도 하였다.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봉상시의 위치를 서부 여경방이라고 하였으며, 제사와 증시 업무 외에 적전의 관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Quote-left.png 봉상시(奉常寺)【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으며 제사(祭祀)와 시호(諡號)를 정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동적전(東籍田)과 서적전(西籍田)이 소속되어 있다.

정(正)ㆍ부정(副正)이 각각 1명씩이고, 첨정(僉正)ㆍ판관(判官)ㆍ주부(主簿)가 각각 2명씩이며, 직장(直長)ㆍ봉사(奉事)가 각각 1명씩이고, 부봉사가 1명인데 정9품이며, 참봉이 1명이다. 부봉사의 관품(官品)은 다른 관청과 같다.

윤자영(尹子濚)이 지은 제명기에, “봉상(奉常)은 곧 옛날 태상(太常)이다. 직책이 제사를 관장하였으니, 위임의 중함이 다른 유사(有司)에 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벼슬을 둔 지가 오래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관제를 정하였는데, 판사는 정3품이고, 경(卿)은 종3품이며, 소경(少卿)은 정4품이고, 승(丞)은 종5품이며, 박사(博士)는 정6품이고, 협률랑(協律郞)은 정7품이며, 대축(大祝)은 정8품이고, 녹사(錄事)는 정9품이다. 태종 원년에 박사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또 경을 영(令)으로, 소경을 부령(副令)으로, 승을 판관(判官)으로 고쳤고, 9년에는 봉상시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다. 14년에는 영을 윤(尹)으로, 부령을 소윤(少尹)으로 고치고, 세종 3년에는 다시 봉상시로 개칭하였으며, 뒤에 또 소윤 이하는 모두 문관으로 제수(除授)하고, 위로 판사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오래도록 재직(在職)하게 하고, 임기가 만료되어 옮겨 주어야 할 사람은, 판사는 당상관으로 제수하고 그 외의 관원도 모두 관품을 고쳐 주었다. 지금까지도 이대로 따라서 길이 제도화하였으니, 이는 그 직임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 벼슬을 거쳐서 경상(卿相)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이가 전후에 많이 있으니, 진실로 후세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상상해 보고 사모할 바를 알게 하려면, 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송(唐宋) 이후로 비록 궁벽한 작은 고을이라도 그 관청의 벽에 전임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인데, 하물며 예의(禮儀)를 맡고 있는 태상(太常)에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최숙정(崔淑精)이 지은 〈세심당기(洗心堂記)〉에 “동료(同僚) 무송(茂松) 윤선생(尹先生)이 봉상시에 두 번째로 들어와서, 그가 일을 하는 청사(廳舍)를 세심(洗心)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창녕(昌寧) 성중경(成重卿 성임(成任)) 선생이 큰 글자로 편액(扁額)을 써서 붙였고, 진산(晉山) 강경순(姜景醇 강희맹(姜希孟)) 선생과 달성(達城) 서강중(徐剛中 서거정(徐居正)) 선생이 서로 시를 지었는데, 글씨와 글이 난새와 봉황처럼 아름다운 광채가 벽상에 빛나고 있다. 무송이 공사를 다스리는 여가에 조용히 앉아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당에 있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할 것이니, 마음에 조금이라도 누가 있으면 이 당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란 실로 형체가 없으니, 이 관직에 있는 자로 뒤에 와서 지금을 잇는 자가 당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과 마음을 씻는 방법을 혹 모르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는 글을 엮어서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마음이란 신명(神明)의 집이며, 한 몸의 주재(主宰)이다. 아직 사물과 접촉이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거울처럼 비고 저울처럼 공평한 것이 깨끗하고 맑아서 비록 귀신도 엿볼 수 없지만 외물과 접하게 되면 선과 악이 기미를 따라서 생기게 되어 기품(氣稟)의 구속과 물욕(物慾)의 가리움을 면할 수 없어서, 어두워지고 더러워지는 것이 거의 다 그러하다.’ 옛날에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한다.’ 하고, 또는 '욕심을 적게 하라.’ 하였으니, 이는 더러운 물욕을 씻어 버리고 양심을 기르는 공부가 천리(天理)의 바름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현이라도 이 공부에 종사하면서 오히려 중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목욕통과 그릇에 새기고, 서재에 써서 마음속으로 수양한 것이 비록 성성(惺惺)한 경지에 이르더라도, 밖에서 경계하는 것도 애썼다. 이것은 마음이 물욕에 따라서 옮겨지는 것이 있으면 닳아지고 검어지기가 쉽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마치 보배로운 구슬이 탁한 흙탕물에 빠지고 맑은 거울이 티끌 속에 묻힌 것처럼 되니, 진실로 빛을 회복하거나 다시 비출 수 있는 기약이 없게 되어, 오관(五關)이 한번 열리면 사지와 몸의 모든 부분이 드디어 풀어져서 본체(本體)의 밝음이 날로 어두워져 외부에서 오는 물욕을 막아낼 수 없게 되고, 끝내는 천지와 귀신까지도 함부로 대하여, 그 몸을 해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군자가 그 마음을 씻기를 마지 않은 바이다. 우리 무송 선생이 세심(洗心)이라고 그 당의 이름을 지은 것은 벗과 동료들과 같이 경계하고 반성하려는 것이다. 동료들이나 뒤에 이 당에 오는 이들이 이 당의 이름을 따라 그 본뜻을 연구하여 사욕을 이기고 공심으로 돌아가서 날마다 새롭게 하여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소리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눈을 즐겁게 하는 채색이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입을 즐겁게 하는 고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코를 즐겁게 하는 향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려서 모든 외부의 물건이 내 마음을 유혹하고, 내 진심을 해롭게 하는 것은 다 씻어 버린다면 마음속이 탁 트이고 밝아져서 사욕이 깨끗이 없어지고 천리가 유행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가 곧장 반명(盤銘)과 같이 날로 새로워지며, 강한(江漢)의 물로 씻는 것과 같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확장하여 가게 되면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힐 수도 있는데, 하물며 이 자그마한 관청의 일이랴? 그런 즉 이 당이 어찌 우리들의 한때의 경계하는 장소만이 될 것이랴? 뒤에 오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 무궁할 것이다. 보는 분들은 여기에 뜻을 다하기 바란다.” 하였다. 무송 선생의 이름은 자영(子濚)이고, 자(字)는 담수(淡叟)로, 현재 봉상시 부정(副正)이라 한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직장(直長)과 봉사(奉事) 각 1명씩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혁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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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권2 > 경도 하(京都下)


위 기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심당기>는 봉상시 관해(官廨)의 하나였던 세심당에 붙인 기문이다. 최숙정(崔淑精)의 문집 『소요재집(逍遙齋集)』권2에 수록된 글이다. 세심당에 관한 글은 강희맹, 서거정, 심의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Quote-left.png 봉상시세심당(奉常寺洗心堂)

族兄淡叟氏。博雅君子也。以才擢置太常亞正。莅事以勤。御官以廉。連捷復試,拔英兩科。聲名藉甚。爲時輩所服。扁其所居廨宇曰洗心堂。其有旨哉。凡吏之怠于職。荒于政者。皆心有所汚故也。心旣有汚則去其汚復其潔。可也。心無形也。非浣濯澡雪之所可施也。將如何哉。洗之其必有方焉。其必有術焉。淡叟氏其知方術而欲接乎目耶。抑慮其難防而豫爲之所歟。是未可知也已。謹矢之以詩。

澹寂本虛靈。愚智共圓明。慾因氣稟生。氛翳蝕大淸。繁興亂七情。逐一互紛爭。耳之欲淫聲。目之耽美形。外交中不寧。貪濁沒惺惺。如珠墮穢坑。滌穢還晶熒。欲洗渴滄溟。難除一點腥。執之如奉盈。本自有權衡。請君試靜聽。防意信如城。爲吏保令名。事上竭忠誠。敬以爲律令。洗濁還淸冷。寫此贈厖兄。揭爲座右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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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희맹(姜希孟),『사숙재집(私淑齋集)』권3 > 오언고시


Quote-left.png (…)文職公署奉常寺崔淑精洗心堂記曰。僚友茂松尹先生。再入太常也。名其所處廨宇。曰洗心。昌寧成先生重卿。書大字以扁之。晉山姜先生景醇,達城徐先生剛中。相與詩之。鸞章鳳彩。輝暎壁上。而 治事之暇。翛然宴坐。乃謂余曰。凡處于是堂者。須先洗其心。心苟有累。是辱吾堂也。然心實無形。則同職者。後來繼今者。亦無迷其名之之義。洗之之方歟。子其爲文以記之。余惟心者云云。(…) Quote-right.png
출처: 강희맹,『사숙재집』> 부록(附錄)


Quote-left.png 洗心堂謌。爲尹大常。戱作。

세심당가(洗心堂歌). 윤 태상(尹太常)을 위하여 장난삼아 짓다.
세심당 앞에는 술이 흡사 회수와 같고 / 洗心堂前酒如淮
세심당 북쪽에는 오만 꽃이 만발했는데 / 洗心堂北花滿開
태상 선생이 마음 깨끗이 하고 앉았으니 / 太常先生洗心坐
추수 같은 정신이요 빙설 같은 회포로다 / 秋水精神氷雪懷
백 년이라 삼만하고도 육천 일에 / 百年三萬六千日
한 달이면 이십구 일 동안을 재계하여 / 一月二十九淸齋
아내가 있어도 일생을 서로 가까이 않고 / 有妻一生不相親
술이 있어도 한 방울 입술에 대지 않는데 / 有酒一滴不入脣
꽃을 대하면 바라만 볼 뿐 말을 못 해라 / 對花脈脈不得語
때때로 담장 넘어가는 나비만 볼 뿐이네 / 時見蜂蝶過墻去 그대는 보지 못했나 이원 제자 삼천 인이 / 君不見梨園弟子三千人
노래하고 춤추고 눈짓하며 청춘을 뽐낼 제 / 歌舞顧盻生靑春
두릉의 후신은 눈마저 길이 썰렁한 채로 / 杜陵後身眼長寒
담장 모서리서 곁눈질로 등 뒤만 보던 걸 / 牆角睥睨背後看
이때엔 마음 씻기가 길이 마음에 괴로워 / 此時洗心長苦心
때때로 상사의 시구를 읊조려 내나니 / 有時吟出相思吟
청컨대 그대는 마음보다 먼저 눈을 씻어서 / 請君洗心先洗眼
온갖 번뇌가 끊어지도록 하게나 / 能令煩惱斷
그대는 못 보았나 남궁 선생은 하얀 귀밑털로 / 君不見南宮先生鬢如霜
소년 태상같이 광기는 부리지 못하지만 / 不如少年太常狂
마음은 또한 안 씻어도 갠 날처럼 빛나고 / 心亦不洗光似霽
눈은 역시 안 씻어도 씻은 듯이 말끔하고 / 眼亦不洗淨如灑
술 있으면 취하고 술 없으면 깨곤 하면서 / 有酒則醉無則醒
세상에 헛된 이름 날리길 바라지 않는다네 / 不要世上流虛名
나는 지금 손뼉 치며 크게 껄껄 웃으면서 / 我今拍手笑呵呵
그대를 위하여 세심가를 한 번 노래하노라 / 爲君一歌洗心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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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거정(徐居正),『사가집(四佳集)』권13 > 제11 시류(詩類)


고전번역서

『동사강목』과 『연려실기술』, 『임하필기』에서 봉상시의 연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목종 문종 충렬왕 충선왕
태상(太常)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았다.
태상부(太常府) 태상시 봉상시(奉常寺)로 고쳤다가 전의시(典儀寺)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는 태상시ㆍ전의시로 섞어 불렀다.
Quote-left.png 봉상시(奉常寺) : 신라에서는 ‘전사서(典祀署)’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태상부(太常府)’라 하였다가 봉상시로 고쳤고, 다시 ‘전의시(典儀寺)’ · ‘태상시(太常寺)’로 고치기도 하였다.

태조는 봉상시를 설치하여 제사와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태종이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는데, 세종이 다시 ‘봉상시’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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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 별집 권7 > 관직전고(官職典故) > 제사(諸司)


Quote-left.png 태조(太祖) 원년(1392)에 봉상시(奉常寺)를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고 시호(諡號)를 논의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9년(1409)에는 전사시(典祀寺)로 고쳤고, 세종(世宗) 3년(1421)에는 다시 봉상시라고 칭하고 판사(判事) 이하를 모두 문관으로 제수하도록 명하였으며, 세조(世祖) 11년(1465)에는 도제조(都提調) 1원(員)을 개정(改定)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하필기』권24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봉상시(奉常寺)


『연려실기술』과 『임하필기』에서는 분봉상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Quote-left.png 분봉상시(分奉常寺)는 고려에서는 사농경(司農卿)을 두어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는 ‘전농사(典農司)’란 것이 있어서, 사자(使者)가 나가면 ‘무농염철사(務農鹽鐵使)’라 일컬었다. 곧 고쳐서 ‘적저창(績儲倉)’이라 하였으며, 다시 사농시를 설치하였고, 또 적전관(籍田官)을 두어서 본시(本寺 분봉상시)에 예속시켰다.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를 설치하여 적전(籍田)에 경작(耕作)한 곡식 및 사당 제사에 소용되는 술ㆍ단술과 희생(犧牲)을 진설하는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이 전농시(典農寺)라 고쳐 일컫고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다가, 뒤에는 봉상시에 병합하여 ‘분봉상시’라 일컬었으며, 동서 적전을 예속시켰다.

세종조에 내시별감(內侍別監) 김원효(金元孝)가 순곡(舜穀) 30이삭을 진상(進上)하므로, 각궁(角弓) 한 장을 하사하였다. 원효가 조회에 들어오자 어떤 사람이 종자를 얻어 가꾸어 바쳤는데, 줄기는 조대[秫莖]와 같고, 이삭은 포황(蒲黃)과 같으며, 열매는 조와 같았다. 임금이 내농소(內農所) 동서 적전에 심어서 가꾸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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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 별집 권7 > 관직전고(官職典故) > 제사(諸司)


Quote-left.png 태조(太祖) 원년에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여 적전(籍田) 및 제사에 쓰는 주온(酒醞)과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원년(1401)에는 전농시(典農寺)라 칭하였고, 뒤에 봉상시에 합병되어 분봉상시(分奉常寺)라고 칭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하필기』권24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분봉상시(分奉常寺)


분봉상시는 봉상시의 기능 일부를 맡은 관청인데, 그 역할이 적전의 관리에 한정되어 있으며 봉상시의 주 기능을 나눠 맡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분예빈시를 설치하여 예빈시의 접대 기능을 분담시킨 것과는 다르다. 봉상시가 한때 전농시로 바뀌면서 전농시의 업무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전농시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봉상시에 병합되고 봉상시 관원을 파견하여 해당 업무를 감독하게 한 것이다. 이 분봉상시는 봉상시와 별개로 혁파되기도 하고 재설치되기도 하였다.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봉상시의 위치를 서부 여경방이라고 하였으며, 제사와 증시 업무 외에 적전의 관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Quote-left.png 봉상시(奉常寺)【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으며 제사(祭祀)와 시호(諡號)를 정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동적전(東籍田)과 서적전(西籍田)이 소속되어 있다.

정(正)ㆍ부정(副正)이 각각 1명씩이고, 첨정(僉正)ㆍ판관(判官)ㆍ주부(主簿)가 각각 2명씩이며, 직장(直長)ㆍ봉사(奉事)가 각각 1명씩이고, 부봉사가 1명인데 정9품이며, 참봉이 1명이다. 부봉사의 관품(官品)은 다른 관청과 같다.

윤자영(尹子濚)이 지은 제명기에, “봉상(奉常)은 곧 옛날 태상(太常)이다. 직책이 제사를 관장하였으니, 위임의 중함이 다른 유사(有司)에 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벼슬을 둔 지가 오래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관제를 정하였는데, 판사는 정3품이고, 경(卿)은 종3품이며, 소경(少卿)은 정4품이고, 승(丞)은 종5품이며, 박사(博士)는 정6품이고, 협률랑(協律郞)은 정7품이며, 대축(大祝)은 정8품이고, 녹사(錄事)는 정9품이다. 태종 원년에 박사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또 경을 영(令)으로, 소경을 부령(副令)으로, 승을 판관(判官)으로 고쳤고, 9년에는 봉상시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다. 14년에는 영을 윤(尹)으로, 부령을 소윤(少尹)으로 고치고, 세종 3년에는 다시 봉상시로 개칭하였으며, 뒤에 또 소윤 이하는 모두 문관으로 제수(除授)하고, 위로 판사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오래도록 재직(在職)하게 하고, 임기가 만료되어 옮겨 주어야 할 사람은, 판사는 당상관으로 제수하고 그 외의 관원도 모두 관품을 고쳐 주었다. 지금까지도 이대로 따라서 길이 제도화하였으니, 이는 그 직임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 벼슬을 거쳐서 경상(卿相)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이가 전후에 많이 있으니, 진실로 후세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상상해 보고 사모할 바를 알게 하려면, 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송(唐宋) 이후로 비록 궁벽한 작은 고을이라도 그 관청의 벽에 전임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인데, 하물며 예의(禮儀)를 맡고 있는 태상(太常)에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최숙정(崔淑精)이 지은 〈세심당기(洗心堂記)〉에 “동료(同僚) 무송(茂松) 윤선생(尹先生)이 봉상시에 두 번째로 들어와서, 그가 일을 하는 청사(廳舍)를 세심(洗心)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창녕(昌寧) 성중경(成重卿 성임(成任)) 선생이 큰 글자로 편액(扁額)을 써서 붙였고, 진산(晉山) 강경순(姜景醇 강희맹(姜希孟)) 선생과 달성(達城) 서강중(徐剛中 서거정(徐居正)) 선생이 서로 시를 지었는데, 글씨와 글이 난새와 봉황처럼 아름다운 광채가 벽상에 빛나고 있다. 무송이 공사를 다스리는 여가에 조용히 앉아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당에 있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할 것이니, 마음에 조금이라도 누가 있으면 이 당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란 실로 형체가 없으니, 이 관직에 있는 자로 뒤에 와서 지금을 잇는 자가 당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과 마음을 씻는 방법을 혹 모르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는 글을 엮어서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마음이란 신명(神明)의 집이며, 한 몸의 주재(主宰)이다. 아직 사물과 접촉이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거울처럼 비고 저울처럼 공평한 것이 깨끗하고 맑아서 비록 귀신도 엿볼 수 없지만 외물과 접하게 되면 선과 악이 기미를 따라서 생기게 되어 기품(氣稟)의 구속과 물욕(物慾)의 가리움을 면할 수 없어서, 어두워지고 더러워지는 것이 거의 다 그러하다.’ 옛날에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한다.’ 하고, 또는 '욕심을 적게 하라.’ 하였으니, 이는 더러운 물욕을 씻어 버리고 양심을 기르는 공부가 천리(天理)의 바름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현이라도 이 공부에 종사하면서 오히려 중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목욕통과 그릇에 새기고, 서재에 써서 마음속으로 수양한 것이 비록 성성(惺惺)한 경지에 이르더라도, 밖에서 경계하는 것도 애썼다. 이것은 마음이 물욕에 따라서 옮겨지는 것이 있으면 닳아지고 검어지기가 쉽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마치 보배로운 구슬이 탁한 흙탕물에 빠지고 맑은 거울이 티끌 속에 묻힌 것처럼 되니, 진실로 빛을 회복하거나 다시 비출 수 있는 기약이 없게 되어, 오관(五關)이 한번 열리면 사지와 몸의 모든 부분이 드디어 풀어져서 본체(本體)의 밝음이 날로 어두워져 외부에서 오는 물욕을 막아낼 수 없게 되고, 끝내는 천지와 귀신까지도 함부로 대하여, 그 몸을 해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군자가 그 마음을 씻기를 마지 않은 바이다. 우리 무송 선생이 세심(洗心)이라고 그 당의 이름을 지은 것은 벗과 동료들과 같이 경계하고 반성하려는 것이다. 동료들이나 뒤에 이 당에 오는 이들이 이 당의 이름을 따라 그 본뜻을 연구하여 사욕을 이기고 공심으로 돌아가서 날마다 새롭게 하여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소리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눈을 즐겁게 하는 채색이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입을 즐겁게 하는 고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코를 즐겁게 하는 향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려서 모든 외부의 물건이 내 마음을 유혹하고, 내 진심을 해롭게 하는 것은 다 씻어 버린다면 마음속이 탁 트이고 밝아져서 사욕이 깨끗이 없어지고 천리가 유행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가 곧장 반명(盤銘)과 같이 날로 새로워지며, 강한(江漢)의 물로 씻는 것과 같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확장하여 가게 되면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힐 수도 있는데, 하물며 이 자그마한 관청의 일이랴? 그런 즉 이 당이 어찌 우리들의 한때의 경계하는 장소만이 될 것이랴? 뒤에 오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 무궁할 것이다. 보는 분들은 여기에 뜻을 다하기 바란다.” 하였다. 무송 선생의 이름은 자영(子濚)이고, 자(字)는 담수(淡叟)로, 현재 봉상시 부정(副正)이라 한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직장(直長)과 봉사(奉事) 각 1명씩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혁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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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권2 > 경도 하(京都下)


위 기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심당기>는 봉상시 관해(官廨)의 하나였던 세심당에 붙인 기문이다. 최숙정(崔淑精)의 문집 『소요재집(逍遙齋集)』권2에 수록된 글이다. 세심당에 관한 글은 강희맹, 서거정, 심의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Quote-left.png 봉상시세심당(奉常寺洗心堂)

族兄淡叟氏。博雅君子也。以才擢置太常亞正。莅事以勤。御官以廉。連捷復試,拔英兩科。聲名藉甚。爲時輩所服。扁其所居廨宇曰洗心堂。其有旨哉。凡吏之怠于職。荒于政者。皆心有所汚故也。心旣有汚則去其汚復其潔。可也。心無形也。非浣濯澡雪之所可施也。將如何哉。洗之其必有方焉。其必有術焉。淡叟氏其知方術而欲接乎目耶。抑慮其難防而豫爲之所歟。是未可知也已。謹矢之以詩。

澹寂本虛靈。愚智共圓明。慾因氣稟生。氛翳蝕大淸。繁興亂七情。逐一互紛爭。耳之欲淫聲。目之耽美形。外交中不寧。貪濁沒惺惺。如珠墮穢坑。滌穢還晶熒。欲洗渴滄溟。難除一點腥。執之如奉盈。本自有權衡。請君試靜聽。防意信如城。爲吏保令名。事上竭忠誠。敬以爲律令。洗濁還淸冷。寫此贈厖兄。揭爲座右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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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희맹(姜希孟),『사숙재집(私淑齋集)』권3 > 오언고시


Quote-left.png (…)文職公署奉常寺崔淑精洗心堂記曰。僚友茂松尹先生。再入太常也。名其所處廨宇。曰洗心。昌寧成先生重卿。書大字以扁之。晉山姜先生景醇,達城徐先生剛中。相與詩之。鸞章鳳彩。輝暎壁上。而 治事之暇。翛然宴坐。乃謂余曰。凡處于是堂者。須先洗其心。心苟有累。是辱吾堂也。然心實無形。則同職者。後來繼今者。亦無迷其名之之義。洗之之方歟。子其爲文以記之。余惟心者云云。(…) Quote-right.png
출처: 강희맹,『사숙재집』> 부록(附錄)


Quote-left.png 洗心堂謌。爲尹大常。戱作。

세심당가(洗心堂歌). 윤 태상(尹太常)을 위하여 장난삼아 짓다.
세심당 앞에는 술이 흡사 회수와 같고 / 洗心堂前酒如淮
세심당 북쪽에는 오만 꽃이 만발했는데 / 洗心堂北花滿開
태상 선생이 마음 깨끗이 하고 앉았으니 / 太常先生洗心坐
추수 같은 정신이요 빙설 같은 회포로다 / 秋水精神氷雪懷
백 년이라 삼만하고도 육천 일에 / 百年三萬六千日
한 달이면 이십구 일 동안을 재계하여 / 一月二十九淸齋
아내가 있어도 일생을 서로 가까이 않고 / 有妻一生不相親
술이 있어도 한 방울 입술에 대지 않는데 / 有酒一滴不入脣
꽃을 대하면 바라만 볼 뿐 말을 못 해라 / 對花脈脈不得語
때때로 담장 넘어가는 나비만 볼 뿐이네 / 時見蜂蝶過墻去 그대는 보지 못했나 이원 제자 삼천 인이 / 君不見梨園弟子三千人
노래하고 춤추고 눈짓하며 청춘을 뽐낼 제 / 歌舞顧盻生靑春
두릉의 후신은 눈마저 길이 썰렁한 채로 / 杜陵後身眼長寒
담장 모서리서 곁눈질로 등 뒤만 보던 걸 / 牆角睥睨背後看
이때엔 마음 씻기가 길이 마음에 괴로워 / 此時洗心長苦心
때때로 상사의 시구를 읊조려 내나니 / 有時吟出相思吟
청컨대 그대는 마음보다 먼저 눈을 씻어서 / 請君洗心先洗眼
온갖 번뇌가 끊어지도록 하게나 / 能令煩惱斷
그대는 못 보았나 남궁 선생은 하얀 귀밑털로 / 君不見南宮先生鬢如霜
소년 태상같이 광기는 부리지 못하지만 / 不如少年太常狂
마음은 또한 안 씻어도 갠 날처럼 빛나고 / 心亦不洗光似霽
눈은 역시 안 씻어도 씻은 듯이 말끔하고 / 眼亦不洗淨如灑
술 있으면 취하고 술 없으면 깨곤 하면서 / 有酒則醉無則醒
세상에 헛된 이름 날리길 바라지 않는다네 / 不要世上流虛名
나는 지금 손뼉 치며 크게 껄껄 웃으면서 / 我今拍手笑呵呵
그대를 위하여 세심가를 한 번 노래하노라 / 爲君一歌洗心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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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거정(徐居正),『사가집(四佳集)』권13 > 제11 시류(詩類)


Quote-left.png 세심당명(洗心堂銘) 【堂在太常寺酒庫】

於戲。學視者。先見輿薪。學聽者。先聞撞鐘。夫人之心。管攝乎視聽。而主于中。湛湛然無垢。焉用夫洗爲。夜氣潛銷千里馳。視喪而攫人之金。聽閼而懵天之傾。況於輿薪之形。況於撞鐘之鳴。枵然一身。唯不亡者虛靈。物欲食而蒙蔽。盍先洗而反明。若余者。爲如何哉。混沌爲友。凝心醉鄕。方將耳視而目聽。抱迷罔而坐忘。寂乎漠乎。不知人間之得失。又奚暇論洗心之方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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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심의(沈義),『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권4 > 잡저(雜著)


다음은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의 기록이다. 후대의 위치인 인달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Quote-left.png 서부 인달방에 있다. 개국 초기에 세웠다. 제사와 시호 논의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동적전(東籍田)·서적전(西籍田)이 봉상시에 소속되어 있다. 태종 때는 전사청(典祀廳)이라 하였다가 세종 3년에 다시 봉상시로 고쳤다. 관원들이 거처하는 집에 세심당(洗心堂)이 있다. 성중경(成重卿)이 현판을 쓰고 최숙정(崔淑精)이 기문을 지었다.

동적전은 동교(東郊) 10리 되는 곳에 있다. 이름을 전농(典農)이라 하고 친경당(親耕堂)의 관청집이 있으며, 필분각(苾芬閣)이라는 데 창고가 있어서 각색 곡식을 저장하고 있다.

태조 때에 적전영승(籍田令丞)이 있어서 선농단에 친경할 때에 제사를 맡아 보게 하였다. 서적전은 개성부(開城府)에 있어서 적전에서 소출되는 각색 곡식으로 종묘 이하의 비상시 특별한 제사의 자성(粢盛)과 종묘의 6곡 천신에 공급한다. 봉상시는 제향일을 맡았으므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숙수(熟手)가 소속되어 있다. 자주(煮酒)라는 술을 빚는데, 그 술을 저장해 둔 지붕은 기와가 썩는다. 제포(祭脯)는 편포(片脯)라 하는데, 편포 만드는 방법은 칼로 고기를 난도질하여 흐물흐물하게 하여 쪽쪽으로 말린다. 봄과 가을에 만들어 둔다.

성종 때 언양현(彦陽縣) 산 밑에 외[苽]가 있어서 그 종자가 경적전에서 나왔으므로 적전과(籍田苽)라 한다. 겨울에 심어서 4월 그믐께 나라에 바친다. 그 종자가 심히 키우기 어려웠다. 성종이 이것을 알고 폐지하게 하고 경적전에 보리와 외를 심게 하였는데, 외가 제일 먼저 익으므로 단오 전에 진공한다. 또 문헌비고에 보면 “분봉상시는 태도 원년에 고려 때 제도대로 사농시(司農寺)를 두고 적전에 곡식을 경작하는 것과 제주의 예주(醴酒) 희생 등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태종 원년에 전농시라 고쳤다가 뒤에 봉상시와 합치고 분봉상시라 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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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경지략』> 궐외각사 > 봉상시


Quote-left.png 봉상시(奉常寺)【예전엔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었는데 후에 인달방(仁達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고, 제사 및 시호를 의논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 9년에 전사사(典祀司)로 고쳤으며, 세종 3년에 다시 옛 이름으로 하였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였는데, 태종 원년에 고쳐 전농시(典農寺)라 칭하고 자성(粢盛 나라 제사에 쓰는 곡물)을 맡았으며, 후에 봉상시에 합병하고 분시(分寺)라 칭하였다. 동적전(東籍田)ㆍ서적전이 속한다. ○도제조ㆍ제조 각 1원, 정(正) 1원이며, 부정은 감하며, 첨정 종4품 ㆍ판관 각 1원인데 자벽하며, 주부 2원, 직장ㆍ봉사ㆍ부봉사ㆍ참봉 각 1원이다. ○신주(神主)의 재목인 밤나무 생산지에 경차관(敬差官)ㆍ범철관(泛鐵官)을 보내는데, 경상도에는 식년(式年)마다 한 번씩 채취하며, 충청도ㆍ전라도는 식년을 건너서 한 번씩 채취하고, 강원도는 국가 수요가 부족하면 간혹 별도로 베어 취하기도 한다. ○서쪽 동산에 신실(神室) 6칸이 있어 단사(壇祠) 신위판 34위(位)를 봉안하였다. ○윤자영(尹子濚)의 제명기(題名記)와 최숙정(崔淑精)의 세심당기(洗心堂記)가 있다.】 Quote-right.png
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권2 >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 > 경도(京都)


근현대 자료

『경성부사』에서는 인달방의 봉상시 위치에 대해 ‘당주동 128번지’라는 주소를 제시하고 있다. 또, 1895년 봉상사로 개칭하여 1907년까지 존속하였음을 밝혔다.

Quote-left.png (29) 봉상시奉常寺 (춘상사春常司)

설치 - 태조조

위치 - 서부 여경방, 후에 인달방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당주동 128번지

종묘사직 제사와 의시(議諡)를 관장하는 곳이다. 태조 원년 봉상시 제도를 정하고, 태종 9년 전사시(典祀寺)로 개칭하였다. 세종 3년 다시 봉상시로 복구하였다.

1895년 봉상사(奉常司)로 개칭하였고, 1907년 사무를 규장각과 장례원(掌禮院)으로 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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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성부사』제1권 > 제2편 이조시대의 경성(Ⅰ) > 제1장 이조 국초 경성의 건설 > 8. 문직공서


『경성부사』에서는 바로 뒤이어 분봉상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Quote-left.png (30) 분봉상시(分奉常寺)

적전에 곡식을 기르고 사제(祠祭)·주례(酒醴)·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던 곳이다. 태조 원년 사농시(司農寺)를 두었다. 태종 원년 전농시로 개칭하고 14년에 봉상사로 합하여 분봉상시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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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성부사』제1권 > 제2편 이조시대의 경성(Ⅰ) > 제1장 이조 국초 경성의 건설 > 8. 문직공서


봉상시, 곧 봉상사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 ‘이왕직 봉상소(李王職奉常所)’로 불리게 되었다. ‘이왕직(李王職)’은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제국황실을 이왕가로 격하하고, 기존의 궁내부 소관 업무를 담당하게 한 기구이다. 『경성부사』에서는 봉상사 업무는 1907년 규장각과 장례원으로 이관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봉상사 건물은 그대로 남아 이왕직봉상소로 불렸으며 여전히 제사를 돕기도 했다. 아래는 1921년의 기사이다.

일제 때 봉상소 건물은 이왕직 아악대(李王職雅樂隊)에 활용되기도 했다. 1926년 아악대는 운니동에 새 거처를 정하게 되어 봉상소를 떠난다. 아래는 1921년 사진이다.

봉상소 건물은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 역할을 한 적도 있다. 일제는 1928년 이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역대 국왕 및 왕실의 태옹(胎甕)을 수습하여 바로 이곳 경성의 이왕직 봉상소에 임시 보관하였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기사이다.

1936년 봉상소 건물의 사진이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다만 자료 상태가 좋지 않아 또렷한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며, 기사의 내용도 판독이 어렵다.

이 봉상소 건물은 1936년 화재를 입게 된다. 당시의 기사에 의하면 이 화재로 1동(棟) 10칸(間)이 전소(全燒)했다고 한다.

아래는 1958년에 편찬된 『서울명소고적』에서 봉상시 건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이 글을 통해 1958년 당시 봉상시 본채 건물이었던 세심당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Quote-left.png 봉상시(奉常寺)

당주동(唐珠洞) 128번지에 거의 허물어져 가는 옛 건물이 한 채 있다. 이것이 이씨 조선시대의 봉상시 자리이다.

봉상시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는 일을 맡아 보았고 또 의시(儀諡)도 맡아 보았다.

태조 원년(1392)에 이 제도를 처음 마련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전사시(典祀寺)라고 고쳐 불렀다가 세종 3년에 다시 봉상시라 하였다. 고종 32년(1895)에는 봉상사(奉常司)라고 고쳤었고 순종 융희 원년(1907)에 이르러 폐지되고 말았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봉상시와 함께 분봉상시(分奉常寺)도 있었는데 적전(籍田)에 곡식을 심어 경작하는 일과 사제(祀祭) 주례(酒醴)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원래 태조는 이같은 일을 맡아 보는 기관으로 그의 원년에 사농시(司農寺)를 두었다. 그 후 태종은 전농시(典農寺)라 고쳤고 이어서 그의 14년(1414)에 이를 봉상시에 합쳐 분봉상시라 하였다.

봉상시의 건물 본채는 세심당(洗心堂)이라 하였다. 이 건물이 날로 퇴락되어 가고 있음은 못내 섭섭한 일이다.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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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특별시편찬위원회,『서울명소고적』, 1958


지도 및 도판자료

<도성대지도>와 <수선전도>에서 인달방의 봉상시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당주동 128번지가 표시된 지적도이다.

아래는 현재 표석위치이다. 고지도 및 지적도에 표시된 자리와 대략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1. 출처=韓國音樂學資料叢書, 제41집 : 근현대 한국음악 풍경
  2. 경기도 경성부 서부 서대문정1정목외5정-011[당주동,도렴동,내자동,적선동,수창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