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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진구 || [[뚝섬 나루터]] || 이곳은 강남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 || 자양동 126-1(도로명주소 없음) || 1989 || 김지선 | | | 광진구 || [[뚝섬 나루터]] || 이곳은 강남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 || 자양동 126-1(도로명주소 없음) || 1989 || 김지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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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금천구 || [[강희맹 살던 곳]] || 조선 초 문인화가로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1424~1483)이 살면서 농업 전반에 관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던 곳 || 독산로32나길 36(시흥동 807-14) || 199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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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금천구 || [[흥선대원군 별장 터]] ||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 터. 현재는 철거되었으나 1985년까지 서울 대가(大家)의 전형적인 정원과 담장이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었다. || 탑골로3길 50(시흥동 220-2) || 2000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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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대문 || [[성동역 터]] || 성동역은 일제강점기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회사가 부설한 사설철도(私設鐵道)인 경춘선의 출발역이었다. 이 역에는 30여 년간 경기도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임산물, 농산물이 많이 운반되었다. 광복 후 경춘선 사설철도는 국유화 되었으며 1970년 청량리역으로 이전하자 헐렸다. || 왕산로 109(제기동 892-71) || 2004 ||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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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대문 || [[전영택 집터 ]] || 목사이고 소설가이며 한국 신문학 운동의 개척자인 늘봄 전영택(1894~1968)이 살던 곳이다. 그는 1919년 최초 문예잡지 <창조>의 동인이며 작품으로는 소설 <화수분(1925년)>,<소(1964년)>,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등이 있다. || 이문로21길 7(이문동 327-15) || 2009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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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대문 || [[휘경원 터]] || 휘경원은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1823년(순조 23) 조성되었다가 1863년(철종 1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겼다. || 망우로18나길 20(휘경동 286-66) || 2001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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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작구 || [[노강서원 터]] ||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다가 혹독한 국문(鞠問)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사망한 박태보(朴泰輔, 1654~1689)를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 그가 사망한 장소 인근에 건립되었다.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9년 경기도 의정부시에 중건되었다. || 노량진로23가길 23(본동 494) || 2000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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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작구 || [[노량진 터]] || 노량진은 용산과 마주한 한강 남쪽 기슭의 나루이다. 서울과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잇는 수상 교통의 요지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철교가 놓인 곳이기도 하다. || 노량진로 247(본동 258-1) || 1989 ||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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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작구 || [[사충서원 터]] || 사충서원은 경종을 폐하고 연잉군(후의 영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1722년(경종 2) 사형된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배향한 서원으로 1725년(영조 1) 건립되었다. 1927년 보광동으로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8년 경기도 하남시에 중건되었다. || 노량진로 135(노량진동 60-19) ||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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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작구 || [[장승백이]] || 장승배기는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헌륭원에 참배하러 가면서 쉬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인가도 없고 행인마저 적었는데 정조가 장승을 만들어 세우라고 지시한 이후 장승배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 장승배기로 94(노량진동 310-150) || 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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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작구 || [[주교사 터]] ||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때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조 13년(1789)에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 || 노량진로32길 10(본동10-23) ||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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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공세청 터]] || 공세청은 조선시대에 서강나루로 들어오는 선박에서 세금을 거두던 관청이다. 서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였던 서강나루에는 공세청과 함께 점검청(點檢廳), 광흥창(廣興倉)도 있었다. || 창전로 10(신정동 145-7) || 2001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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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담담정 터]] ||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였으나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별장이 되었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시회(詩會)를 베풀었다. 신숙주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세조는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 후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麻浦莊)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 마포대로 4길 122(마포동 419-13) || 2003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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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무쇠막 터]] || 무쇠막은 정부에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바친 철공장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일찍부터 무쇠막 또는 무수막 터로 알려졌는데, 무수막에서 수철(水鐵)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수철리에서 신수동이라는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 독막로 189(신수동 112-1) ||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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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박세채정승 살던 곳]] || 박세채(1631~1695)는 조선후기 숙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관리이며, 유학자로 소론(少論)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에 전념하여 '예학의 대가'라고 칭하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의 아호인 현석(玄石)을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 신수로3길 23(현석동 220) ||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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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삼개포구]] || 황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던 물화(物貨) 집산(集散)의 포구 || 토정동 136-1(도로명주소 없음) || 1989 ||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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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서강 나루터]] || 삼개 나루(용호,마호,서호)의 하나. 삼남 지방과 서해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 || 창전로 10(신정동 145-7) || 1994 ||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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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서활인서 터]] || 전염병자를 격리 치료하던 의료기관이 있었던 곳 || 마포대로 247(아현동 267-1) || 1987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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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양화진 나루터]] || 서울과 제물포, 강화 방면을 잇던 나루터 || 합정동 353-4(도로명주소 없음) || 1989 ||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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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포구 || [[토정 터]] || 조선중기 저명한 역학자(易學者)였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집터. || 토정길32길 11(토정동 138) || 1992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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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대문 || [[복주우물]] || 복주우물은 복주 즉, 귀인(貴人)이 이용하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이 우물 뒤쪽의 금화산은 공기와 물이 맑아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 그래서 복수산(福壽山)이라고도 하였는데 후에 음이 와전되어 복주산으로 불렸다. 이에 따라 산 아랫마을을 복주산동, 그 마을의 우물을 복주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북아현로140(북아현동 1-1616) || 2001 ||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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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대문 || [[연희궁 터·서잠실 터]] || 연희궁은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의 하나이다. 1420년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고쳐지었으며, 세종 자신도 1426년에 이 곳에 잠시 머물렀다. 또한 세종은 이 궁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 세조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였다. 1505년에는 연산군이 이를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연세로 50(신촌동 134) || 2002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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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대문 || [[의령원 터]] || 의령원은 영조의 세손 의소(懿昭)의 묘원(墓園)이다. 의소는 영조 26년(1750) 사도세자의 장자로 태어나 세손으로 책봉되고 다음 해 죽어 이곳에 장사되었다. 세손이었기에 장례 절차며 치장에 격식을 갖추어 속칭 '애기능'이라 불렀으며 1948년 서삼릉으로 옮겨갔다. || 북아현로11가길 7(북아현동 190-1) || 2001 || 장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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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대문 || [[초리우물 터]] || 초리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가우며, 물이 꼬리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넘쳐서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고 차가운 물이 염색하기에 좋아서 염색을 하는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 부근 마을을 미정동(尾井洞)이라고 했던 것도 이 우물 때문이다. || 통일로 97(미근동 209) || 2001 ||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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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대문 || [[홍제교 터]] || 조선시대 도성에서 의주로 통하는 길목인 홍제천에 놓였던 돌다리터. 일명 서석게다리 || 통일로 483(홍은동 217-27) ||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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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대문 || [[홍제원 터]] || 여기서 약 50m 골목 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 통일로 416(홍제동 137-25) || 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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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초구 || [[동재기 나루터]] || 수원 이남 삼남(충청,영남,호남) 지방과 서울(漢陽)을 이어주던 나루터 || 신반포로11길 40(반포동 115-5) || 1988 ||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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