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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div style="text-align:justify><big>'''디지털 인문학'''</big>은 인문대학 학부생들에게는 아직 낯설고 ‘잘 모르는’ 학문 분과일 것이다. 나 또한 수업을 수강 신청할 때조차 디지털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러나 디지털 인문학을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면 ''인문학에 접근하는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인문학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의 측면보다는 인문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가깝고, 더불어 현재 사회와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처럼 느껴진다. 전통적으로 인문학 연구는 ‘책과의 씨름’이었다. 나의 분야와 관련된 모든 책을 끝없이 읽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처럼 느껴지며 이는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유효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서나 외서, 책의 형태가 아닌 기록물, 도판, 기타 자료일 경우엔 일반인은 물론 연구자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내가 알고 싶은 그것’을 위해 품이 많이 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디지털 인문학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너무 많은 책에 흩어져 담겨있는 내용을 웹상에서 열어볼 수 있게 하고, 검색과 출처 확인이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에 접근하는 마음을 보다 쉽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더불어 실물 자료보다 더 길게 전승될 수 있을 것이리라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한 권의 실물 책은 연약하고 쉽게 손상된다. <font color="green">'''그러나 웹페이지 상의 정보는 실물 책이 사라지더라도 계속해서 보존될 수 있다.'''</font><br>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전 영역이 디지털 인문학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또한 있다. 사건, 인물, 건물이나 국가유산의 객관적 정보와 출처가 필요한 역사 관련 분과는 디지털 아카이브의 효과가 특히 두드러진다.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조선왕조실록]이나 [https://www.heritage.go.kr/main/ 국가문화유산포털]이 없었다면 이토록 쉽게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모든 인문학 분과를 위키식 아카이브로 정리할 수 있을까? 디지털 인문학이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 외의 다른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과 다름 없는 디지털 작업의 분야가 아닐까 싶었다. <ins>굳이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디지털과 인문학은 내용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ins> 현재로서는 디지털 인문학의 성립과 당위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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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5일 (금) 18:06 판
목차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전 영역이 디지털 인문학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또한 있다. 사건, 인물, 건물이나 국가유산의 객관적 정보와 출처가 필요한 역사 관련 분과는 디지털 아카이브의 효과가 특히 두드러진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국가문화유산포털이 없었다면 이토록 쉽게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모든 인문학 분과를 위키식 아카이브로 정리할 수 있을까? 디지털 인문학이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 외의 다른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과 다름 없는 디지털 작업의 분야가 아닐까 싶었다. 굳이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디지털과 인문학은 내용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디지털 인문학의 성립과 당위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경희궁
1617년(광해군9) 6월 술인 김일룡이 정원군의 옛집이 왕기가 있음을 이유로 들어 이궁을 새문동에 건립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이미 한해 전부터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을 짓고 있었기에 여러 신하들은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을 짓고 이어한 뒤 차례대로 추진하자고 건의했지만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1] 궁궐은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나 광해군은 경덕궁에 입궐하지 못하고 왕위에서 쫓겨났다.[2]
이후 인조는 경운궁에서 즉위하였고[3] 창덕궁과 창경궁에 임어했기에 경덕궁이 실질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624년(인조2) 부원수 이괄이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4]을 일으키면서 인조가 피난을 가야 했고, 보름 만에 돌아왔으나 창덕궁과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어 경덕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묘호란1627년(인조 5), 병자호란1636년(인조 14) 등 정세가 매우 어려웠기에 경덕궁 생활도 편치 않았다.
인조 이후 경희궁은 ‘서궐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했다’이라 불리며 이궁의 자리를 지켰으며 영조는 1760년 2월(영조36) 경덕궁의 이름이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궁명을 바꿨다.[5] 경희궁은 고종이 재정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던 때 일부 해체되어 경복궁 건립의 자재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1865년 9월(고종2)때만 되어도 경희궁의 문짝, 마룻장이 대부분 사라지는 등 제대로 된 건물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경복궁의 중건으로 이궁의 역할조차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된 후 경희궁은 학교 및 대중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다수 이주하였고, 거류민단립중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 거류민단립중학교는 1925년 경성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10년 전후 경희궁 자리를 침범하였다. 해방 뒤에는 경성중학교 자리에 서울공립중학교가 들어섰으며 1971년 서울고등학교만 남게 되었다가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터로 남았다. 그 후로 2000년까지 경희궁의 복원이 조금씩 추진되어 숭전전과 회랑, 자정전, 태녕전 등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서울특별시는 2002년 경희궁 터 일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