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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3일 (토) 22:10 판

전옥서 터
(典獄署址)
2018년 7월 촬영
표석명칭 전옥서 터
한자표기 典獄署址
설치연도 1997년
주소 청계천로 41(서린동 30)


표석 문안

Quote-left.png 조선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한말 항일의병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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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 자료 및 고전번역서

전옥서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개국 초부터 형조에 소속되어 죄인의 관리를 맡았던 곳으로 감옥시설로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전옥서의 관원으로는 태조 1년에 영 2명, 승 2명을 두었다가, 태종 14년(1414) 영을 승으로 승을 부승으로 개정하였고, 숙종 29년(1708)에 제조(提調) 1명, 주부(主簿) 1명, 봉사(奉事) 1명, 참봉 1명으로 하였다. 영조 19년(1743) 봉사를 없애고 참봉을 2명으로 하였으며, 하위직인 서리, 쇄장, 군사 등을 증원하고 전옥서의 품계를 종6품 아문으로 정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전옥서는 경무청감옥서로 변경되었다.

업무 및 체제 관련

Quote-left.png 典獄署掌獄囚. 國初始置典獄署. 成宗十四年, 改爲大理寺, 有評事. 文宗復改爲典獄署, 置令一人秩正八品, 丞二人正九品. 忠宣王罷. 恭愍王十一年, 復置令從八品, 丞從九品. 吏屬, 文宗置史二人, 記官三人.

전옥서(典獄署). 감옥과 죄수를 담당하였다. 국초에 처음으로 전옥서를 두었다가, 성종(成宗) 14년(995)에 태리시(大理寺)로 고쳤는데, 관원으로 평사(評事)가 있었다. 문종(文宗) 때에 다시 전옥서로 고치면서, 영(令) 1인을 두고 관품은 정8품으로 하였으며, 승(丞) 2인은 정9품으로 하였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혁파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11년(1362)에 다시 영을 두고 종8품으로 하였으며, 승은 종9품으로 하였다. 이속(吏屬)은 문종 때에 사(史) 2인, 기관(記官) 3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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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사 志 卷第三十一


Quote-left.png 문무 백관의 관제

典獄署: 掌囚徒事。 令二, 從七品; 丞二, 從八品; 司吏二。 典廐署 : 掌畜養事。 令一, 從七品; 丞二, 從八品; 司吏二。

전옥서(典獄署)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고, 사리(司吏) 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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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7월 28일 정미 4번째기사


Quote-left.png 典獄署原掌獄囚。副提調一員, 承旨。

전옥서(典獄署), 옥(獄)에 수감된 죄수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부제조 1원, 승지가 겸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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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전통편 > 이전(吏典) > 경관직(京官職) > 종6품아문(從六品衙門) > 전옥서(典獄署)


Quote-left.png 刑曹 屬衙門[刑曹 屬衙門] 原 屬衙門, 典獄署。掌隷院[증] Quote-right.png
출처: 형전 > 刑典 형조 속아문


Quote-left.png 군국기무처에서 의안과 각 부, 각 아문 소속 관청 명세를 올리다

法務衙門, 刑曹、典獄、律學。

법무아문. 형조, 전옥, 율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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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1894) 7월 18일 임진 5번째기사


Quote-left.png 의안(議案)

전옥서(典獄署)는 경무청(警務廳)에 부속시키고, 대소 관원의 상소(上疏)·소사(疏辭)·실사소(實事疏)는 의정부(議政府) 도찰원(都察院)에 넘겨서 사품(査稟)하게 한다. 승선원(承宣院)·경연청(經筵廳)·춘계방(春桂坊)의 당직 순차는 모두 한 사람씩으로 마련한다. 제관(祭官)은 종백부(宗伯府)에서 채워서 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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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오실기 1895년 7월 22일[二十二日]


Quote-left.png 법부령 제1호 경성감옥서를 설치하는 건
漢城府에 監獄署 置야 京城監獄署라 稱홈
本令은 隆熙二年 一月 一日로붓터 施行홈
隆熙元年十二月二十七日
法部大臣 趙重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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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관보』 호외, 융희 원년(1907) 12월 28일.


위치 관련

Quote-left.png 전옥서와 행랑 8간, 종루 동쪽의 인가 2백여 호가 연소되다

是日亦風。 未時, 火始發典獄署西住隊副鄭連戶, 延燒典獄署及行廊八間, 至于鍾樓, 大臣及百官盡力救之, 鍾樓得全。 火燄飛過鍾樓東行廊, 延爇人家凡二百餘戶。 二日之災, 盜賊相半, 未被火之家, 奔忙避災, 財産亦盡亡失。

이날도 바람이 불었다. 미시(未時)에 전옥서(典獄署)의 서쪽에 사는 대부(隊副) 정연(鄭連)의 집에서 불이 일어나, 전옥서와 행랑 8간까지 연소되고 종루(鍾樓)에까지 미쳤는데, 대신과 백관이 힘을 다하여 불을 꺼서, 종루는 보전되었으나, 불꽃이 종루 동쪽에 있는 행랑에 튀어가서 인가 2백여 호가 연소되었다. 이틀 동안의 화재에 도둑맞은 것이 절반이나 되었고, 불이 번지지 않은 집에서도 황급히 화재를 피하였다가, 재산을 또한 다 망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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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2월 16일 경진 2번째기사


종루를 중심으로 한 시전(市廛) 건립은 1410년부터 계획되어 지금의 종로1가 福淸橋로부터 창덕궁 동구에 이르는 800여칸의 좌우행랑이 건조되었고, 종루로부터 서북쪽의 경복궁까지와 창덕궁에서 종묘 앞 누문(樓門)까지, 그리고 남대문 전후까지 1414년에 모두 1,360여칸이 완성되었다. 광통교의 북쪽인 오늘날의 종로 네거리에 위치한 종루는 지금의 크기와 달리 종루의 아랫부분이 십자형으로 뚫려 인마(人馬)가 통행하는 등 다락[樓]형식의 건물로는 상당히 큰 건물이었다. 종루의 위치를 통해 전옥서의 위치를 확정할 수 있다.

Quote-left.png 사역원 제조 우의정 신개와 예조 판서 김종서 등이 전옥을 사역원으로 옮기고 사역원을 승문원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반대하다

司譯院提調右議政申槪、禮曹判書金宗瑞等啓: "今移典獄於司譯院, 移司譯院於承文院, 非徒承文院間閣之數未及於司譯院, 本院乃生徒各以私材營構, 其功不細, 且是中央往來鍊業爲便, 請仍舊。" 上曰: "予之欲移典獄者, 典獄距刑曹隔遠, 司譯院則罪囚往來爲便易耳。" 槪等更啓: "其間相距, 大不相遠, 不過三百餘步。 且以陰陽之理言之, 京外犴獄, 皆置東南隅者, 蓋欲受生氣也, 非無意謂也。" 上曰: "予從卿等之請矣。“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 우의정(右議政) 신개(申槪)와 예조 판서 김종서 등이 아뢰기를,

"지금 전옥(典獄)을 사역원(司譯院)으로 옮기고, 사역원을 승문원(承文院)으로 옮기오나, 승문원의 집 간수가 사역원만 못할 뿐 아니오라 승문원은 곧 생도들이 각기 사사 재물로 지어서 그 공적이 적지 않으며, 또 중앙에 있어서 왕래하며 학업을 익히기에 편리하오니, 청하옵건대, 그 전대로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전옥을 옮기려 한 것은 형조와의 거리가 멀고, 사역원은 죄수들의 왕래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개(槪) 등이 다시 아뢰기를,

"그 사이의 거리가 크게 멀지 않아서 3백여 보(步)에 지나지 않사오며, 또 음양(陰陽)의 이치로 말하더라도 서울 밖의 옥(獄)은 모두 동남쪽 모퉁이에 두는 것은 대개 생기(生氣)를 받으려 한 것이오며, 무의(無意)로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 등의 청을 따르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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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 104권, 세종 26년(1444) 6월 2일 경진 4번째기사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사역원은 한성 서부 적선방(현재 종로구 적선동과 도렴동)에 규모가 동서 23칸, 남북 24칸(총 552칸)에 달하는 크기였으며, 형조·병조의 뒤 담장과 맞닿아 있었다고 한다. 세종이 죄수들의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 형조와 가까운 곳으로 전옥을 옮기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기타 관련

Quote-left.png 우의정의 아들을 은고리로 갓끈을 꾸몄다 하여 함부로 가둔 사헌부 서리들을 치죄하다

議政府上書, 請司憲府書吏、所由等擅囚李泉之罪, 命下刑曹推問治罪。 泉, 右議政李原之子也。 以銀環飾笠纓, 禁亂書吏、所由遇諸道, 囚之典獄

의정부는 글월을 올려, 사헌부 서리(書吏) 소유(所由)들이 함부로 이천(李泉)을 잡아 가둔 죄를 청하므로, 형조에 가두고 문초하여 치죄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천은 우의정 이원의 아들인데, 은고리로 갓끈을 꾸민 것으로써, 금란 서리(禁亂書吏) 소유들이 길에서 보고 붙잡아 전옥(典獄)에 가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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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 1월 24일 기사 5번째 기사


전옥은 중죄인만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사치를 금하는 법령을 어긴 자를 잡아넣기도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Quote-left.png 장리 오명의가 옥에서 사헌부로 가는 도중 도망하다

贓吏吳明義自獄詣司憲府, 其妻率從婢數人, 來止憲府側一家, 邀見明義, 明義因潛去項鎖, 移著于其奴, 令覆衣掩面而臥, 自著女服, 詐爲妻形, 率從婢而逃。 獄卒不知其爲奴, 押還至典獄門乃覺之。 翌日, 守都城門索之, 終不獲。

장리(贓吏) 오명의(吳明義)가 옥에서 사헌부로 나아가는데, 그 아내가 종비(從婢) 두어 명을 데리고 사헌부 옆의 어느 집에 와서 있다가 명의를 불러 보니, 명의가 몰래 항쇄(項鎖)를 벗어서 그 종에게 옮겨 씌우고, 옷을 덮어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게 하고, 자기는 여자의 옷을 입고 아내 모양으로 꾸며서 종비를 데리고 도망하였다. 옥졸(獄卒)이 그 종인 줄 모르고 압송(押送)하여 전옥문(典獄門)에 이르러서야 이를 알았다. 이튿날 도성문을 지키고 이를 찾았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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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1437) 8월 12일 기사 2번째기사


Quote-left.png 司憲府啓: "義禁府典獄署囚人, 如有致死者, 須卽報府, 令漢城府檢覆, 方許(理)〔埋〕 葬。" 從之

사헌부에서 전옥서(典獄署) 수인(囚人) 중에 죽는 자는 한성부로 하여금 다시 검사시켜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게 할 것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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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1438) 12월 24일 갑술 3번째기사


Quote-left.png 조관으로 전옥서에서 국문해야 할 자는 모두 의금부로 옮기라고 형조에 전교하다

傳于刑曹曰: "今後朝官犯罪, 當囚鞫典獄者, 例移義禁府。"

형조(刑曹)에 전교하기를,

"이 뒤로 조관(朝官)으로서 죄를 범하여 전옥서(典獄署)에 가두어 국문해야 할 자는 으레 의금부(義禁府)로 옮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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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 131권, 성종 12년(1481) 7월 20일 계사 3번째기사


Quote-left.png 典獄署近處失火, 屋宇延燒, 移囚罪人于刑曹, 翌日還囚典獄署。

전옥서(典獄署) 근처에 불이 나서 집들이 잇달아 연소되었으므로, 죄인을 형조(刑曹)에 옮겨 가두었다가 다음날 도로 전옥서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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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 38권, 중종 15년(1520) 2월 21일 경진 3번째기사


Quote-left.png 大坡兒 權管 尹以顯 이하 죄인 13명을 典獄署에 가둔 뒤 정세를 관망하여 논의하여 처리하길 청하는 備邊司의 啓

啓曰, 卽接平安道差使員, 雲山郡守李憕, 昨日成貼馳報, 則大坡兒權管尹以顯以下十三名押領, 已到碧蹄站, 明當入京云, 今日到京, 則竝爲拘囚于典獄署後, 觀勢議處何如, 答曰, 依啓, 守令則不必拘囚, 且姜破回事, 極爲可慮, 又爲嚴飭催促可也。

아뢰기를,

"방금 평안도 차사원인 운산(雲山)군수 이징(李憕)이 어제 성첩(成貼)하여 치보한 내용을 보면 대파아 권관 윤이현(尹以顯) 이하 13명을 압송하여 벽제참(碧蹄站)에 이미 도착하였으니 내일은 입경한다 하였습니다. 오늘 서울에 도착하면 모두 전옥서에 가둔 뒤 정세를 관망해가며 논의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수령은 굳이 가둘 것이 없다. 또 강파회 문제는 매우 염려가 되니 또 엄중 신칙하여 독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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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비변사등록 15책 효종 3년(1652) 12월 21일(음)


Quote-left.png 典獄署 罪囚의 犯罪의 輕重을 살펴 處決할 것을 청하는 承政院의 啓

政院啓曰, 伏見典獄署囚徒案, 則啓覆罪人一名, 承傳罪人三十七名, 咀呪罪人三名, 刑曹罪人三十一名, 來關罪人二十三名, 各司罪人, 四十五名, 合以計之, 則乃一百四十名, 啓覆罪人及其他負犯重大者, 雖難一時處決, 至如犯禁負債與各司來關罪人, 所犯輕歇之類, 其數亦多, 不卽疏釋, 久繫牢獄, 有乘聖上欽恤之意, 令該曹, 察其罪犯輕重, 速爲査決, 俾無滯獄之弊事, 分付何如, 傳曰, 允。

정원에서 아뢰기를,

"삼가 전옥서(典獄署)에 갇힌 죄수의 문안(文案)을 보건대 계복(啓覆: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는 일)한 죄인 1명, 승전(承傳)한 죄인 37명, 저주(咀呪) 죄인 3명, 형조(刑曹) 죄인 31명, 내관(來關: 동급 또는 상급관청으로부터 온 공문 또는 공문을 보내는 것) 죄인 29명 각사(各司) 죄인이 45명으로 합하여 계산하면 1백 40명입니다. 계복(啓覆)한 죄인 및 기타 범한 죄가 중한 자는 비록 한꺼번에 처리하기가 어려우나 범금(犯禁), 부채(負債)와 각사에서 관문이 온 죄인에 이르러서는 범한 죄가 가벼운 무리의 숫자가 많은데 즉시 석방하지 않고 오래 가두어 두면 성상께서 죄인을 신중히 심리하는 은전을 베푸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 범죄의 경중을 살펴서 속히 조사해 처결하도록 해 옥사가 지체되는 폐단이 없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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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비변사등록 32책 숙종 2년(1676) 05월 05일(음)


Quote-left.png 北道의 불법 월경 죄인들을 수감하는 일에 대해 아뢰는 備邊司의 啓

啓曰, 北道犯越罪人, 不久當爲入來, 典獄狹隘, 將無以容接, 此輩與他罪人混處, 亦涉難便, 取考乙丑年前例, 則守禦廳庫間, 竝爲移囚, 而今聞守禦廳, 米布軍器, 多儲其中, 實無一間空曠之處云, 錫胄家舍, 方爲空虛, 間架頗曠, 許多罪人, 可以容置, 令戶曹急速修補, 俾無虛疏之弊, 待其罪人之入來, 多定軍士, 嚴密守直, 刑曹郞官, 與典獄署官員, 依前例使之輪回直宿, 且刑曹郞官六員, 分掌各房, 常時亦患不足, 而今此査事, 本曹專管, 則許多罪人推覈之際, 決難周旋, 乙丑年, 減省郞官二員, 限査事結末間, 差出察任, 而今番罪人, 元數不至如乙丑之多, 一員姑先加出事, 分付該曹, 預爲差出, 以爲推移察任之地, 何如, 答曰, 允。

아뢰기를,

"북도의 불법 월경 죄인들이 머지않아 들어올 텐데 감옥이 좁아서 다 수용할 수 없고 이들은 다른 죄인과 혼합 수감하기도 어렵습니다. 을축년의 전례를 상고해 보면 수어청의 곳간까지 나누어 수감하였으나 지금은 듣자니 수어청의 쌀과 베, 군기 등을 그 속에 많이 저장하여 한 칸의 빈 곳도 없다 합니다. 김석주(金錫胄)의 가옥은 지금 비어 있는데 칸수(間數)가 꽤 많아 많은 죄인도 수용할 수 있으니 호조로 하여금 빨리 수리하여 허술한 폐단이 없게 하도록 하고, 죄인들이 들어오면 군사를 많이 차정하여 엄밀히 수직하되 형조 낭관은 전옥서의 관원과 함께 전례대로 돌려가면서 숙직하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형조 낭관 6인이 각방을 분장(分掌)하자니 평일에도 부족함을 느끼는데 이번의 사문사(査問事)는 본조에서 전관하여야 하니 허다한 죄인을 사핵할 즈음 주선하기가 극도로 어려울 것입니다. 을축년에 감축한 2인을 조사가 끝나기까지만 차출하여 일을 살피게 하여야 하겠으나 이번 죄인은 원 수효가 을축년처럼 많지 않으니 한 사람만 우선 더 내라고 해조에 분부하여 미리 차출하여 편의대로 일을 보살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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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비변사등록 44책 숙종 16년(1690) 10월 20일(음)


Quote-left.png 典獄署 官員의 取考 囚徒案을 알리는 承政院의 啓

政院啓曰, 依傳敎招致典獄署官員, 取考囚徒案, 則自四月初一日二十七日至, 殯殿都監所囚十八名, 山陵都監二名, 國葬都監九名, 橋梁所一名, 長生殿二名, 舍人司十二名, 備邊司十二名, 中樞府六名, 宗親府十三名, 儀賓府一名矣, 敢啓, 答曰, 知道。

정원에서 아뢰기를,

“전교에 의하여 전옥서(典獄署) 관원을 초치하여 수도안(囚徒案)을 상고하니 4월 1일부터 27일까지 빈전도감(殯殿都監)에서 거둔 죄수가 18명, 산릉도감(山陵都監) 2명, 국장도감(國葬都監) 9명, 교량소(橋梁所) 1명, 장생전(長生殿) 2명, 사인사(舍人司) 12명, 비변사(備邊司) 12명, 중추부(中樞府) 6명, 종친부(宗親府) 13명, 의빈부(儀賓府) 1명임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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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비변사등록 132책 영조 33년(1757) 05월 03일(음)


또 관련 부처에서 죄인의 죄질이나 지위고하에 따라 투옥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옥서를 공동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전옥서에 자리가 모자라면 관청의 곳간이나 때마침 몰수한 조정 대신의 빈집을 임시로 사용하기도 했다.
다만 편의상 의금부, 형조, 사헌부, 한성부에도 제각기 죄인을 구류해둘 수 있는 감옥을 마련해두었는데 이것이 법제에 올바른 방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조는 법에 어긋난다 하여 각 부처에 설치된 구륫간을 타파하려 하였는데 아무리 금지해도 360여 미터 떨어진 전옥서에서 죄인을 호송하고 다시 데려다 놓는 것이 번거로웠는지 금지와 설치가 매번 되풀이되곤 했다.

Quote-left.png 구륫간을 헐어버리려는 일에 반대 상소를 올린 지평 이동환을 파직케하다

先是, 上, 以刑曹、漢城府, 置拘留間以囚人, 是典獄之外, 更有典獄, 命毁之。 至是, 持平李東煥陳論事疏, 有曰: ‘近來獄訟太踈, 詞訟諸司, 無拘留之法, 而不分罪之輕重, 或就之典獄, 或保于閭家, 臣以爲罪其罪刑其刑, 亦正俗之一端也。" 敎曰: "名以法司, 而爲無於法之事者, 其罪尤重。 刑曹、漢城府所謂拘留間, 卽無於法中, 尤無狀無謂之謬例。 況有先朝受敎禁令, 而伊後冒犯復置, 極爲駭然。 再昨年有申禁之命, 則爲臺臣者, 當察申禁後解弛之弊, 隨聞劾正。 豈可反爲無於法之拘留, 謂之刑獄之太踈, 有若申請設者然? 其不可但以失言。 論持平李東煥罷職。“

이에 앞서 상이, 형조와 한성부가 구륫간(拘留間)을 두고 사람을 가두는 데에 대해서, 이는 전옥(典獄) 이외에 또 전옥이 있는 것이라 하여 이를 헐어버리도록 명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지평 이동환(李東煥)이 상소하여 시사를 논술한 가운데 "근래에는 옥송(獄訟)이 허술하여, 사송(詞訟)을 맡은 제사(諸司)에는 본디 사람을 구류하는 법이 없는데도, 죄의 경중을 분간하지도 않고서 혹은 전옥으로 넘기기도 하고 혹은 여염집에 보호시키기도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죄를 타당하게 정하고 형벌을 타당하게 쓰는 것이 또한 풍속을 바로잡는 일단이라고 여깁니다."고 한 말이 있으므로, 여기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법사(法司)라는 곳에서 법에 없는 일을 하는 경우는 그 죄가 더욱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형조와 한성부에 있다는 이른바 구륫간은 곧 법에 없는 것으로, 더욱 무상하고 불법적인 구례이다. 더구나 선조 때에 수교(受敎)한 금령이 있었는데도 그 후로 금령을 범하여 다시 설치한 것은 극히 해악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재작년에 이미 금령을 거듭 계칙하는 명이 있었고 보면, 대신(臺臣)으로서는 의당 금령을 거듭 계칙한 뒤로 다시 해이해진 폐단을 잘 살펴서 듣는 대로 논핵하여 바로잡았어야 할 것이다. 어찌 도리어 법에 없는 구륫간을 가지고 형옥이 너무 허술하다고 말하여 마치 구륫간을 다시 설치하자고 신청한 것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를 실언(失言)으로만 논할 수가 없다. 지평 이동환을 파직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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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 48권, 정조 22년(1798) 5월 12일 을해 2번째기사


Quote-left.png 典獄時囚

又所啓, 典獄時囚之每五日錄啓時, 亦經覽 於大臣, 法意有在, 比緣犯禁者多, 囹圄幾常充斥, 所 見誠爲慘悶, 其所坐最輕, 囚日已淹者, 錄覽之時, 略 嘗疏放, 此外, 亦飭其卽行勘決, 毋或留獄, 而近聞法 司, 或嫌滯囚之數多, 亦慮大臣之放釋其輕囚而未 及決者, 或於啓限先一日, 移拘於官府之內, 過其 日, 旋爲下獄云, 各衙門拘留之弊, 一切防禁, 昭載法 典, 而先朝乙卯, 至命刑漢兩司, 拘留間, 竝爲撤 毁, 別下傳敎, 責飭截嚴, 後更循襲, 該堂郞施, 以制 書有違之律, 仍令揭付司寇公堂, 今不容更煩科條, 苟復有如此之弊, 則斷當一遵乙卯飭令施行, 爲 先以此意, 申明分付, 何如, 上曰, 依爲之。

또 아뢰기를,

“전옥서(典獄署)에서 시수(時囚)를 5일마다 기록하여 아뢸 때에 대신(大臣)의 열람을 거치도록 한 것은 법의(法意)가 있는 것이나, 요즘은 범법자가 많아 감옥에는 거의 항상 많은 사람이 그득하여 보기에 참으로 애처롭고 불쌍하니, 가장 좌죄(坐罪)가 가볍고 갇힌 날짜가 오래된 자는 열람할 때 대충 석방하고, 이 외에도 즉시 감결(勘決)을 시행하고 옥에 오래 유치하지 말도록 신칙하였는데 근래 들으니 법사(法司)에서 혹 체수(滯囚: 미결수)의 숫자가 많음을 걱정하고 또 대신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킬 것을 염려해서 판결이 나지 않은 자를 간혹 녹계(錄啓) 하루 전에 관부(官府) 안에 옮겨서 구류(拘留)하였다가 그 날이 지난 후에 다시 하옥한다고 합니다. 각 아문에서 구류하는 폐단을 일체 금지한 것은 법전에 명백하게 실려 있으며, 선조(先朝) 을묘년(乙卯年: 정조19, 1795)에는 형조와 한성부에 구류간(拘留間)을 모두 없애도록 특별히 전교를 내려서 지엄하게 신칙하시고, 후에 다시 구습을 답습하면 당해 당상과 낭청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시행하도록 함과 동시에 사구(司寇: 형조판서)의 공당(公堂)에 게시하게끔 하셨으니 지금 과조(科條)를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실로 다시 이와 같은 폐단이 있게 되면 결단코 일체 을묘년의 칙령에 따라서 시행하도록 하고, 우선 이러한 뜻으로 거듭 밝히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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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비변사등록 213책 순조 25년(1825) 12월 10일(음)


Quote-left.png 형조, 책객(冊客) 권순(權洵)의 처벌 문제에 대해 아룀

尹定善, … (중략) … 以刑曹言啓曰, 大王大妃殿傳曰, 繡啓中所謂冊客權漢, 豈可以人微而勿問乎? 自秋曹捉致, 嚴刑三次, 卽其地, 限己身充軍事, 命下矣. 謹依傳敎, 義州冊客權洵, 今已捉囚, 而金吾開坐, 旣有勿拘齋日卽速擧行之命, 故本曹開坐, 亦爲一體擧行, 而罪人權洵, 嚴刑三次後, 卽其地, 限己身充軍定配所, 而待拷限, 次次加刑, 準三次卽爲押送之意, 敢啓. 傳曰, 知道.

… (중략) … 尹定善, 以刑曹言啓曰, 罪人權洵, 嚴刑仍囚矣. 卽接典獄署牒報, 則權洵, 今月初四日巳時量, 因病物故云, 不得發配之意, 敢啓. 傳曰, 知道.

윤정선(尹定善)이 … (중략) …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대왕대비전께서 전교하시기를, ‘암행어사의 장계 가운데서 말한 책객(冊客) 권한(權漢)을 어찌 미천한 자라고 하여 추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조에서 잡아다가 엄하게 세 차례 형신한 뒤에 그곳에다가 죽을 때까지 충군(充軍)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전교대로 의주(義州)의 책객 권한을 지금 이미 잡아다가 가두었는데, 의금부의 개좌(開坐)에 대해 이미 재일(齋日)에 구애받지 말고 즉시 거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본조의 개좌 역시 일체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인 권한은 엄하게 세 차례 형신한 뒤 그곳에다가 죽을 때까지 배소(配所)를 정해 충군하되, 고한(拷限)을 기다려서 형신을 세 차례 가하고서 즉시 압송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중략) …

윤정선이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죄인 권순(權洵)을 엄하게 형신하고 그대로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전옥서의 첩보(牒報)를 보니, 권순이 이달 초4일 사시(巳時) 경에 병으로 인해 물고(物故)되었다고 하였는바, 배소로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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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편 고종시대사1 고종 1년(1864년) 3월 4일 / 승정원일기 고종 1년(1864) 3월 4일 13번째 기사


근현대 자료

갑오경장 이후 전옥서는 경무청감옥서로 변경되었다가 1907년 감옥사무가 법부로 이관된 후 경성감옥으로 개칭되었다. 일제는 1907년 일본인에게 설계를 맡겨 서대문 현저동 101번지(현 서대문독립공원)에 오백여 명의 기결수(旣決囚)를 수용할 수 있는 560여평의 목조건물을 지었다. 1908년 경성감옥을 신축하면서 기존의 전옥서는 경성감옥 종로구치감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수용할 공간이 다시 부족하게 되자 1912년 9월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현 서울서부지방 법원검찰청)에 새로운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서대문 현저동의 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경성감옥 종로구치감(옛 전옥서)은 서대문감옥 종로구치감으로 소속과 명칭이 바뀌게 된다. 1921년 1923년 5월 5일에는 서대문감옥을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로 개칭하였다.
※ 요약: 전옥서 – 경무청감옥서(1895~1907) – 경성감옥(1907~1908) – 경성감옥 종로구치감(1908~1912) – 서대문감옥 종로구치감(1912~1921) - 서린동 구치감 터로 인식

Quote-left.png 경무청 감옥 죄수 식비 증액 요청

內部所管警務廳監獄署罪□을 預算外支出請議書 第一百八十九號

本月十日內部大臣第二百一號照會를 接準온즉 內槪에 兼任警務使 閔泳綺 報告書를 據야 □度經費預算中 監囚食費를 以四千元立項□價의 刁騰과 罪囚의 顆多으로 月別金額이 罄乏야 逐朔應用에 計算不足이 爲二千元六十戔이라 本款中挪移이 妥當오나 各項에 剩餘가 無온즉 不得不增額乃已이기 該明細書를 添付仰照오니 照亮支出爲要等因이온바 査罪囚가 旣多와 食費增額이 勢不容□紙調書를 從야 預備金中支出으로 會議에 提出事.

預備金支出調書

一金二千元六十戔 警務廳監獄署罪囚食費增額
監獄囚人食費不足額明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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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各部請議書存案 09 光武二年十月二十五日 (1898년 10월 25일)


Quote-left.png 경무청에서 감옥서 돌담 신축과 기타 수리비를 수감자식비 중 지출하고자 승인을 요청

照會 第二十號

敝廳所管監獄署의 石墻十餘間이 月前大雨에 頹圮이온바 慮有疏漏야 行將新築이오며 其他修葺處도 次第始役이오나 現今月別全額이 旣已告罄와 末由支用이오니 第二款第六項在監囚食費에셔 五百元을 挪移와 仝款第四項修理費로 劃用오미 似合方便이옵기 更正 目別及月別表를 繕交오며 玆에 照會오니 照亮承認시믈 爲要.

光武七年六月 日
光武七年度歲出經常部
警務廳所管監獄署出給預算旣定月別表及更正月別表
光武七年度歲出經常部警務廳所管監獄署出給預算旣正月別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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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警部來去文 1 光武七年六月十九日 (1903년 06월 19일)


Quote-left.png 경무청 관제를 비준하여 반포하다

勅令第十六號, 警務廳官制。 裁可頒布。 【警務廳屬于內部管轄, 管掌漢城內警察、消防事務, 總轄漢城各警務署及監獄署。 職員: 警務使一人, 勅任; 局長一人, 勅任或奏任; 警務官十二人以下, 奏任; 主事八人以下, 判任; 總巡三十四人以下, 判任; 技手一人, 判任; 監獄署長一人, 奏任; 監獄置主事一人, 判任; 監獄署看守長二人, 判任; 監獄署醫師二人, 判任。 漢城內分置警務五署及監獄署, 監獄署內置監獄, 而分男女不得渾雜。 光武六年勅令第三號警務廳官制, 廢止。】

칙령(勅令) 제16호, 〈경무청 관제(警務廳官制)〉를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경무청(警務廳)은 내부(內部)의 관할에 속하며 한성(漢城) 안의 경찰과 소방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면서 한성 각 경무서(警務署)와 감옥서(監獄署)를 총 관할한다. 직원은 경무사(警務使)가 1인인데 칙임관(勅任官)이고, 국장(局長)이 1인인데 칙임관 혹은 주임관(奏任官)이며 경무관이 12인 이하인데 주임관이고 주사(主事)가 8인 이하인데 판임관(判任官)이며 총순(總巡)이 34인 이하인데 판임관이고 기수(技手)가 1인인데 판임관이고 감옥서장(監獄署長)이 1인인데 주임관이고 감옥서 주사(監獄署主事)가 1인인데 판임관이며 감옥서 간수장(監獄署看守長)이 2인인데 판임관이고 감옥서 의사(監獄署醫師)가 2인인데 판임관이다. 한성 안에 경무 5서와 감옥서를 나누어 두고 감옥서 안에는 감옥을 두되 남자와 여자를 갈라서 혼잡 시키지 않는다. 광무 6년 칙령 제3호, 〈경무청 관제〉는 폐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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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 45권, 고종 42년(1905년) 2월 26일 양력 9번째 기사


Quote-left.png 이름 홍진항(洪鎭恒)
생년월일 1866-05-06
출신지 漢城 西部 弼雲臺 下塡井洞 六十八統 三戶(本籍)
현주소 漢城 西署 弼雲臺下 塡井洞 六十八統 三戶
경력 및 활동 1900년 7월21일 平壤間市場摠巡 敍判任六等
(중략)
1907년 현재 警務廳監獄署看守長九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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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제국 관원 이력서


Quote-left.png 京城監獄 鍾路拘置監을 西大門監獄 鍾路拘置監, 京城監獄 西大門出張所를 西大門監獄 大平洞出張所로 개칭하다.

경성감옥 종로구치감을 서대문감옥 종로구치감으로,
경성감옥 서대문출장소를 서대문감옥 태평동출장소로 개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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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朝鮮總督府官報 1912년 09월 17일


Quote-left.png 大正 2년 3월 20일
西大門監獄 鍾路拘置監
刑事被告人 安泰國
梁起鐸
林蚩正
高等法院長
조선총독부 판사 渡邊暢 귀하
上告申請書
玉觀彬
(위 사람은) 모살 미수 피고 사건에 대하여 大正 2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에 처하온 바, 판결에 대하여 불복하옵기, 이에 上告 신청서를 제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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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2권 105人事件公判始末書 Ⅱ > 一. 京城覆審法院篇(國漢文) > 上告關係書類


Quote-left.png 이름 出本美登龜
출신지 長崎縣 南高來郡 島原町(원적)
현주소 京城府 峴底洞官舍
현직업 西大門刑務所看守部長
경력 1913년 7월 25일 朝鮮總督府看守西大門監獄仁川分監 在勤
1914년 8월 18일 休職(戰時應召)
1915년 1월 4일 復職
1916년 8월 8일 西大門監獄鐘路拘置監 勤務
1920년 8월 26일 看守部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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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총독부시정 25주년 기념표창자 명감


Quote-left.png 罪囚三名脫獄, 종로구치감에서 작일 새벽 한시에, 두명은 곳 잡혀 Quote-right.png
출처: 동아일보 1920-05- 26 03면 08단


동아일보 1920-05- 26 03면 08단
Quote-left.png 米國議員團入京時 鍾路拘置監에서 萬歲三唱, 이십사일밤에 삼백오십명이

지난 24일 미국의원단이 서울에 들어오든 날 밤에 아홉 시 □하야 경성 종로구치감(鐘路拘置監)에서는 재감인 삼백오십명이 일제히「조선독립만세」를 세 번 불렀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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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 1920-08-27 3면 12단


Quote-left.png 문: 본적, 주소, 출생지, 신분, 직업, 성명, 연령은 어떠한가.
답: 본적 江原道金化郡近北面栗木里三九○
주소 동상
출생지 동상
신분 평민
직업 매약행상
성명 具永燮
연령 민적상은 二九세이나 실은 二八세
문: 이제까지 형사처분, 기소유예, 또는 훈계방면을 받은 사실은 없는가.
답: 조선독립선언서 배포로 인하여 대정 八년 三월 四일 金化경찰서에 체포되어 一주일 동안 金化경찰서에 유치된 후 京城으로 호송되어 鍾路경찰서에서 二박하고, 京城지방법원 검사국으로 가서 그날 鍾路구치감에 보내져서 一박하고, 그 다음날 서대문감옥으로 호송되어 二주일 동안 있었고, 그 동안 검사가 한 번 조사하고 귀가하라고 하여서 돌아왔으므로 특히 본형의 처분은 받지 않았다.
(중략)
문: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필요한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대와 같은 천도교도가 제일 먼저 그 역원으로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답: 자기는 제二의 역원을 모집할 생각이었다.
문: 그런 것이 아니라 표면상으로는 상무사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독립단의 결사가 아닌가.
답: 내용은 무엇인지 모른다.
문: 내용을 모르는데 역원으로 될 수 있는가.
답: 나는 사칙을 보고서 일을 할 생각이었다.
문: 이익이 될 사실이 있으면 진술하여 보아라.
답: 아무 것도 없다.
이상을 통역에게 읽어 주고 또 통역으로 하여금 조서의 취지를 본인에게 고지시킨바 모두 틀림없다고 진술하고 서명 날인하다.
작성일 대정 一○년 一월 一九일 鐵原경찰서에서
피고인 具 永 燮
통역 통역 순사 金 在 卿
신문자 도순사부장 순사 大石長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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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38 > 臨時政府 道團員 군자금 모집사건(國漢文) > 具永燮 신문조서


서린동 종로구치감은 일제 치하 항일 운동과도 관련이 깊은 곳으로, 1911년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들을 탄압·해체한 105인 사건을 비롯하여 1919년의 3·1운동에 가담했던 투사들이 재판 중 거쳐 가기도 했다.

Quote-left.png 전옥명 개칭
감옥관제 개정의 결과, 현재의 전옥은 형무서장, 분감장은 지서장이라 칭한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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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 1922-10-16


1921년 4월 동아일보 사진은 수인들을 이송하는 광경을 포착한 것이다. 감옥 이전을 이슈로 하여 관련 기사들이 꽤 나왔다. 사진에 나오는 종로구치감은 곧 종래의 전옥서를 뜻한다. 전월에 이미 신축한 서대문감옥으로 이전 예정되어 있던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통감부는 서린동에 있던 종로구치감을 폐지하고 서대문감옥 안으로 미결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변호사들은 너무 멀어서 법원 출두가 불편하고 가족들에게도 폐가 된다고 반대하였으나 통감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째, 종로구치감은 구한국시대의 유물로 설비가 불완전하고 불편하여 가치가 보잘것없다. 둘째, 미결감옥을 시끌시끌한 시중 한복판에 두는 것은 부적당하다. 본래 재판소에 설치해야 하나 현재 공간이 여의치 않아서 불가능하다. 셋째, 자동차를 구입해 재판소까지 미결수를 태워 출정시킬 것이므로 수고로움이 덜하다.

한편 서린동 종로구치감에는 미결수만 있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21년 4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서린동 종로구치감 방문기에는 사형수와 사형 당시의 광경,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온 이들(박상진, 임국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서린동 구치감은 옛날 전옥으로 풍수지리상 생왕방(生旺方)이라 하여 모든 죄인들이 살아나가라는 뜻에서 매우 길한 자리로 택하여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된 후로 어디 죄가 있는 사람만 갇히겠냐는 뼈 있는 말과 함께 수인들을 서대문형무소로 옮긴 지금에 와서는 담도 없이 대문만 남아 씁쓸함만을 던져주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서린동은 현재 광화문 우체국에서부터 보신각 직전까지의 구역을 가리키며, 종로구 서린동 30번지는 지금도 현재 표석 자리와 일치한다.

지도 및 도판자료

1902년까지 서린동에 전옥이 남아있다. 이때 형조는 법부로 바뀌었고, 의금부와 우포도청이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