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영 연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onthedh
(→임진왜란 소실 이후) |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 |
||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3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6번째 줄: | 6번째 줄: | ||
<br> | <br> | ||
− | *또한 이미 디지털화 된 정보에 대해서도 디지털 인문학의 역할이 존재한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정보가 넘치다 못해 정보의 홍수, 바다라고 표현되는 것과 같이 디지털 상에는 이미 전문가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존재한다. 그러나 전문가의 | + | *또한 이미 디지털화 된 정보에 대해서도 디지털 인문학의 역할이 존재한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정보가 넘치다 못해 정보의 홍수, 바다라고 표현되는 것과 같이 디지털 상에는 이미 전문가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존재한다. 그러나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정보는 신뢰도가 낮기 때문에 정보의 접근성은 높지만 정보의 가치가 낮은 상태가 된다. 디지털 인문학을 활용한다면, 흩어져 있는 낱개의 정보를 알아보기 쉽고 활용 가치도 높은 정보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창덕궁에 대한 서술== | ==창덕궁에 대한 서술== | ||
70번째 줄: | 70번째 줄: | ||
===임진왜란 소실 이후=== | ===임진왜란 소실 이후=== | ||
− |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궁궐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내 복구해야 했다. 선조 38년(1605)에야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나, 선조39년에 이국필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 문서를 검토한 후 창덕궁 중건으로 공사를 바꾸었다고 추정된다. 이에 더해 거대한 규모의 경복궁을 재건하기에는 물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했던 전란 직후의 형편 역시 고려되었을 것이다. | + |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궁궐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내 복구해야 했다. 선조 38년(1605)에야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나, 선조39년에 이국필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ref>『궁궐지』창덕궁지</ref>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 문서를 검토한 후 창덕궁 중건으로 공사를 바꾸었다고 추정된다. 이에 더해 거대한 규모의 경복궁을 재건하기에는 물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했던 전란 직후의 형편 역시 고려되었을 것이다. |
− |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 + |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
===후원=== | ===후원=== | ||
89번째 줄: | 89번째 줄: | ||
==조선시대 궁궐 화장실의 구조와 정화 시설== | ==조선시대 궁궐 화장실의 구조와 정화 시설== | ||
===궁궐의 화장실=== | ===궁궐의 화장실=== | ||
− | 궁궐의 화장실의 경우 궁궐 내 건물로 지어진 화장실과 이동용 변기인 매우틀(매화틀)을 같이 사용했다. 특히 왕과 왕비는 모두 매우틀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매우"는 대소변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매는 큰 것, 우는 작은 것을 빗댄 이름이라고 한다. 최초표기는 훈몽자회에 있는 매유통 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ref>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 209쪽</ref> | + | *궁궐의 화장실의 경우 궁궐 내 건물로 지어진 화장실과 이동용 변기인 매우틀(매화틀)을 같이 사용했다. 특히 왕과 왕비는 모두 매우틀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매우"는 대소변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매는 큰 것, 우는 작은 것을 빗댄 이름이라고 한다. 최초표기는 훈몽자회에 있는 매유통 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ref>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 209쪽</ref> |
<gallery mode=packed caption="매우틀 구조"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gallery mode=packed caption="매우틀 구조"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96번째 줄: | 96번째 줄: | ||
− | 우리나라 전통화장실의 경우 본채나 다른 건물채와 독립된 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른 건물채와 연결되어 있더라도 주 건물이 아닌 행랑채, 마구간, 외양간, 창고 등 부속건물에 붙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창덕궁 대조전의 경우는 좀 다른데, 대조전과 회랑으로 연결된 경훈각 뒤편에 화장실이 붙어 있다. 김광언은 이에 대해 대조전이 잦은 화재로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었으며 경훈각이 1920년 경복궁의 만경전을 뜯어 옮긴 점, 매우그릇을 옮기는 끌개가 19세기 중반에 일본에서도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제에 의해 조성된 일본식 화장실로 결론지어진다. <ref>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 166쪽.</ref> 한편, 궁궐내의 연경당에서 특이한 형태의 화장실을 볼 수 있다. 한 칸의 화장실에는 변기구멍이 두 개가 나란히 있고, 그 사이에는 가림막이 없다. 심지어 앞쪽에도 문이 없이 트여있다. 이 화장실은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8581| 행랑채] 대문인 장락문 옆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랫사람들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ref>이화영.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화장실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2009. 서울</ref> | + | *우리나라 전통화장실의 경우 본채나 다른 건물채와 독립된 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른 건물채와 연결되어 있더라도 주 건물이 아닌 행랑채, 마구간, 외양간, 창고 등 부속건물에 붙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창덕궁 대조전의 경우는 좀 다른데, 대조전과 회랑으로 연결된 경훈각 뒤편에 화장실이 붙어 있다. 김광언은 이에 대해 대조전이 잦은 화재로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었으며 경훈각이 1920년 경복궁의 만경전을 뜯어 옮긴 점, 매우그릇을 옮기는 끌개가 19세기 중반에 일본에서도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제에 의해 조성된 일본식 화장실로 결론지어진다. <ref>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 166쪽.</ref> 한편, 궁궐내의 연경당에서 특이한 형태의 화장실을 볼 수 있다. 한 칸의 화장실에는 변기구멍이 두 개가 나란히 있고, 그 사이에는 가림막이 없다. 심지어 앞쪽에도 문이 없이 트여있다. 이 화장실은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8581| 행랑채] 대문인 장락문 옆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랫사람들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ref>이화영.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화장실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2009. 서울</ref> |
===궁궐의 정화 시설=== | ===궁궐의 정화 시설=== | ||
− | 조선 시대 정화 시설, 즉 배수는 기본적으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은 배산임수 형태였다. 지형의 고저차를 통해 흐르는 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적 ‘자연배수’의 개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인위적인 배수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수시설과 암거, 명거 형태의 배수로가 만들어졌다. | + | *조선 시대 정화 시설, 즉 배수는 기본적으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은 배산임수 형태였다. 지형의 고저차를 통해 흐르는 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적 ‘자연배수’의 개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인위적인 배수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수시설과 암거, 명거 형태의 배수로가 만들어졌다. |
− | 경복궁의 경우 전체적인 배수시설은 기존의 지형을 고려하고, 주변의 산줄기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배치로 설계되었다. | + | *경복궁의 경우 전체적인 배수시설은 기존의 지형을 고려하고, 주변의 산줄기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배치로 설계되었다. 배수 과정은 하수가 흘러 거치는 경로에 따라 집수시설, 중심 암거, 개방형 어구 총 세 군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표면에 흐르는 낙수와 생활하수는 집수시설에 모임으로서 실질적인 배수가 시작된다. 집수시설로는 표면의 하수와 낙수를 처리하는 집수정이 대표적이다. 표면 배수는 지면의 기울기를 조정하여 지표면에서 물을 배수하는 방식이다. 궁궐에서는 마사토나 박석으로 포장된 표면에 고저차를 두어 집수정 쪽으로 배수를 유도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 각각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15134&cid=42322&categoryId=42322| 암거]들은 중심 암거로 한 번 합수된다. 마지막으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39765&cid=50320&categoryId=50320| 명거]형태의 배수로인 개방형 어구로 빠져나간다.<ref>김태민,and 남호현. "경복궁(景福宮) 배수시설(排水施設)의 조성원리(造成原理)에 관한 연구." 문화재 51.4 (2018): 120-145.</ref> |
− | 배수 과정은 하수가 흘러 거치는 경로에 따라 집수시설, 중심 암거, 개방형 어구 총 세 군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표면에 흐르는 낙수와 생활하수는 집수시설에 모임으로서 실질적인 배수가 시작된다. 집수시설로는 표면의 하수와 낙수를 처리하는 집수정이 대표적이다. 표면 배수는 지면의 기울기를 조정하여 지표면에서 물을 배수하는 방식이다. 궁궐에서는 마사토나 박석으로 포장된 표면에 고저차를 두어 집수정 쪽으로 배수를 유도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 각각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15134&cid=42322&categoryId=42322| 암거]들은 중심 암거로 한 번 합수된다. 마지막으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39765&cid=50320&categoryId=50320| 명거]형태의 배수로인 개방형 어구로 빠져나간다.<ref>김태민,and 남호현. "경복궁(景福宮) 배수시설(排水施設)의 조성원리(造成原理)에 관한 연구." 문화재 51.4 (2018): 120-145.</ref> | ||
111번째 줄: | 110번째 줄: | ||
− | 위 동영상은 경복궁 동궁 남쪽지역 대형 화장실유구 발굴 성과 설명 영상이다. 동영상의 내용에 따르면 <궁궐지>는 1904년 경복궁 전각의 칸수와 용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 | *위 동영상은 경복궁 동궁 남쪽지역 대형 화장실유구 발굴 성과 설명 영상이다. 동영상의 내용에 따르면 <궁궐지>는 1904년 경복궁 전각의 칸수와 용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통장청은 40칸으로 지금(1904년경)은 없다. 통장청 동쪽에는 문기수청이 있는데, 10칸이며 화장실은 4칸이다. 지금(1904년경)은 없다.'<ref>궁궐지</ref> | ‘통장청은 40칸으로 지금(1904년경)은 없다. 통장청 동쪽에는 문기수청이 있는데, 10칸이며 화장실은 4칸이다. 지금(1904년경)은 없다.'<ref>궁궐지</ref> | ||
− | 이 곳의 화장실의 구조는 아래 돌을 깔고 양옆은 장대석이 쌓임 가로는 10.4미터, 세로는 1.4미터, 폭은 1.8미터가량이며, 북쪽에 물이 들어오는 입구가 있고 동쪽 측면에 물이 나가는 출구가 2개가 있다. 특이한 지점은 물이 들어오는 곳보다 나가는 곳이 80센티미터 정도 높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안에 채워져 있던 흙에는 기생충 알이 다수 검출된 결과를 토대로 화장실 하부구조라고 추정한 것이다.이 구조 위로 화장실을 만든다. 하부 구조에 분뇨가 쌓이고 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 발효가 진행되면서 오물은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오수와 정화수가 분리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오물의 악취를 줄이고, 오물을 압착시켜서 분리하는 과정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출수구 바닥면 높이까지 정화수가 차오르면, 물이 외부로 나가기 시작한다. 화장실이 계속 사용되고 변이 입수구 높이까지 차오르면 화장실 바닥 판을 일부 들어내고 정화시설 내부의 변을 운반한다. | + | *이 곳의 화장실의 구조는 아래 돌을 깔고 양옆은 장대석이 쌓임 가로는 10.4미터, 세로는 1.4미터, 폭은 1.8미터가량이며, 북쪽에 물이 들어오는 입구가 있고 동쪽 측면에 물이 나가는 출구가 2개가 있다. 특이한 지점은 물이 들어오는 곳보다 나가는 곳이 80센티미터 정도 높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안에 채워져 있던 흙에는 기생충 알이 다수 검출된 결과를 토대로 화장실 하부구조라고 추정한 것이다.이 구조 위로 화장실을 만든다. |
+ | *하부 구조에 분뇨가 쌓이고 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 발효가 진행되면서 오물은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오수와 정화수가 분리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오물의 악취를 줄이고, 오물을 압착시켜서 분리하는 과정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출수구 바닥면 높이까지 정화수가 차오르면, 물이 외부로 나가기 시작한다. 화장실이 계속 사용되고 변이 입수구 높이까지 차오르면 화장실 바닥 판을 일부 들어내고 정화시설 내부의 변을 운반한다. | ||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개선점 및 오류 5가지== |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개선점 및 오류 5가지== |
2022년 4월 25일 (월) 13:26 기준 최신판
목차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
-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연구 방법 면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 그리고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성격의 인문학 연구를 포함한다.[1]
- 이에 따르면 내가 방점 찍어야 할 부분은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일 것이다. 우리 세대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학문연구와 정보들은 이미 디지털화가 상용화 된 이후의 작업이기 때문에 정보에 접근하고 아카이빙 하는 작업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컴퓨터 상용화가 되기 전에 생성된 문헌정보들은 정보의 열람과 확산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특별한 탐색 의도가 있거나 당장 정보를 필요로 하는 전문 분야 종사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에겐 접근성이 낮은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디지털 인문학의 산물인 <조선왕조실록>만 보더라도, 나 혼자서는 원문에 접근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날것의 원문을 해석하는 것 역시 매우 버거울 것이며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등 누군가의 손을 거쳐 가공된 정보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 인문학의 역할은 정보 접근을 효율적이게 만들어서 인문학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쉽게 접근하고 열람할 수 있도록 정보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또한 이미 디지털화 된 정보에 대해서도 디지털 인문학의 역할이 존재한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정보가 넘치다 못해 정보의 홍수, 바다라고 표현되는 것과 같이 디지털 상에는 이미 전문가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존재한다. 그러나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정보는 신뢰도가 낮기 때문에 정보의 접근성은 높지만 정보의 가치가 낮은 상태가 된다. 디지털 인문학을 활용한다면, 흩어져 있는 낱개의 정보를 알아보기 쉽고 활용 가치도 높은 정보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이다.
창덕궁에 대한 서술
창덕궁
-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왔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은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하였다.[2] 조선왕조 내내 가장 오래 존속되었고, 가장 오래 임금들이 임어하였던 공간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창덕궁은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 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 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3]
창덕궁 연표
세기 | 년도/사건 |
---|---|
1400년대 |
1494년(연산군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후원 꾸밈 1456년(세조 2) 사육신 사건 1406년(태종 6) 후원 조성 1405년(태종 5) 조선의 이궁으로 건설 |
1500년대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에서 피난길을 떠나 의주로 파천, 경복궁과 창덕궁 등 모든 궁궐이 소실됨 |
1600년대 |
1647년(인조 25) 인조반정으로 소실된 건물 중건(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등)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의 대부분 궁궐전각들이 소실됨 1610년(광해군 2) 창덕궁 중건을 완료하여 법궁으로 삼음 |
1700년대 |
1776년(정조 즉) 2층 누각을 세워 위층에는 주합루, 아래층에는 규장각이라 함 1749년(영조 25) 대보단 중수 1704년(숙종 30) 후원에 대보단 건설 |
1800년대 |
1884년(고종22) 창덕궁 관물헌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남 1882년(고종20) 창덕궁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남 1833년(순조 33)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 1834년 재건 1803년(순조 3) 인정전 소실, 1804년에 재건 |
1900년대 |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1990년~1999년 대규모 복원 사업(돈화문 월대, 낙선재 일대, 진선문, 숙장문 등) 1926년(순종20) 마지막 황제 순종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 1920년(순종14) 경복궁 일부건물을 옮겨 창덕궁 건물 재건 1917년(순종11) 대 화재로 침전 건물 소실 1910년 경술국치 |
태종의 건립 의도
- 창덕궁이 조선 전기에 이미 정궁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태종이 이궁 건설 시기를 한성 환도 시점으로 정한 이유와 관련되어 있다. 태종은 왕의 계승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으며,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는 개경이었다. 혼란기의 정치 상황을 마무리하고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경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집권 관료층의 관심을 천도와 새로운 궁궐 조성으로 돌려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 창덕궁을 건립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때 창덕궁은 이궁이라는 이름으로 궁궐을 도성 안에 하나 더 지음으로서 왕권의 현실적 기반을 공간적으로 확대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5]
동궐도
- <동궐도>는 본궁인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것으로 동궐도(東闕圖)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궁궐그림 2점이다. 이는 세로로 16첩으로 잘린 절첩식 그림이며, 비단에 채색을 하였고, 공중에서 내려다본 시각을 갖춘 부감법을 적용한 국보다. 각 건물 및 시설물에는 작은 글씨로 이름을 적어 넣어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소실 이후
-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궁궐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내 복구해야 했다. 선조 38년(1605)에야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나, 선조39년에 이국필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6]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 문서를 검토한 후 창덕궁 중건으로 공사를 바꾸었다고 추정된다. 이에 더해 거대한 규모의 경복궁을 재건하기에는 물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했던 전란 직후의 형편 역시 고려되었을 것이다.
-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후원
- 창덕궁 안에 있는 조선시대 정원이다. 조선왕궁의 놀이와 잔치 장소로 활용된 대표적인 조원(造苑)유적이다. 1997년 창덕궁과 함께 후원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이 후원에서 여희(女姬)들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고 새나 짐승을 놓아기르며 사냥을 즐기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이 후원은 20년간 폐허가 되었다가 1610년 불타 버린 창덕궁을 복구하면서 광해군은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원에 책방(冊房)을 만들고 별전(別殿)과 소정(小亭) 등을 여러 곳에 짓고 기이한 꽃과 이상한 수목, 괴석을 즐겨 그 기묘하고 사치함이 예전에 볼 수 없는 경관이었다 한다.
- 보통 후원이라 불리는 기록이 많으나, 1903년 (광무) 12월 30일자로 창덕궁 후원을 관장하는 기구로서 비원을 설치하고 난 뒤 비원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는 일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순종 융희 연간에 들어가면서부터 널리 쓰였다고 한다.[7]
“포달(布達) 제108호, 〈궁내부 관제 중 비원 증치 안건〔宮內府官制中祕院增置件〕〉을 반포하였다. 【비원(祕院)은 창덕궁(昌德宮) 안 후원(後苑)을 관리하며 지키는 사무를 맡아본다. 감동(監董) 2인은 각부(各府)와 부(部), 원(院)의 칙임관 중에서 겸임시키며 검무관(檢務官) 3인, 감동(監董) 1인은 주임관이고, 주사(主事) 4인은 판임관이다.】”고종실록 43권[8]
- 부용지는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은 연못에 피어 있는 한송이 꽃의 형상을 하고 있다.[9]
조선시대 궁궐 화장실의 구조와 정화 시설
궁궐의 화장실
- 궁궐의 화장실의 경우 궁궐 내 건물로 지어진 화장실과 이동용 변기인 매우틀(매화틀)을 같이 사용했다. 특히 왕과 왕비는 모두 매우틀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매우"는 대소변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매는 큰 것, 우는 작은 것을 빗댄 이름이라고 한다. 최초표기는 훈몽자회에 있는 매유통 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10]
- 우리나라 전통화장실의 경우 본채나 다른 건물채와 독립된 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른 건물채와 연결되어 있더라도 주 건물이 아닌 행랑채, 마구간, 외양간, 창고 등 부속건물에 붙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창덕궁 대조전의 경우는 좀 다른데, 대조전과 회랑으로 연결된 경훈각 뒤편에 화장실이 붙어 있다. 김광언은 이에 대해 대조전이 잦은 화재로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었으며 경훈각이 1920년 경복궁의 만경전을 뜯어 옮긴 점, 매우그릇을 옮기는 끌개가 19세기 중반에 일본에서도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제에 의해 조성된 일본식 화장실로 결론지어진다. [11] 한편, 궁궐내의 연경당에서 특이한 형태의 화장실을 볼 수 있다. 한 칸의 화장실에는 변기구멍이 두 개가 나란히 있고, 그 사이에는 가림막이 없다. 심지어 앞쪽에도 문이 없이 트여있다. 이 화장실은 행랑채 대문인 장락문 옆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랫사람들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12]
궁궐의 정화 시설
- 조선 시대 정화 시설, 즉 배수는 기본적으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은 배산임수 형태였다. 지형의 고저차를 통해 흐르는 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적 ‘자연배수’의 개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인위적인 배수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수시설과 암거, 명거 형태의 배수로가 만들어졌다.
- 경복궁의 경우 전체적인 배수시설은 기존의 지형을 고려하고, 주변의 산줄기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배치로 설계되었다. 배수 과정은 하수가 흘러 거치는 경로에 따라 집수시설, 중심 암거, 개방형 어구 총 세 군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표면에 흐르는 낙수와 생활하수는 집수시설에 모임으로서 실질적인 배수가 시작된다. 집수시설로는 표면의 하수와 낙수를 처리하는 집수정이 대표적이다. 표면 배수는 지면의 기울기를 조정하여 지표면에서 물을 배수하는 방식이다. 궁궐에서는 마사토나 박석으로 포장된 표면에 고저차를 두어 집수정 쪽으로 배수를 유도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 각각의 암거들은 중심 암거로 한 번 합수된다. 마지막으로 명거형태의 배수로인 개방형 어구로 빠져나간다.[13]
- 위 동영상은 경복궁 동궁 남쪽지역 대형 화장실유구 발굴 성과 설명 영상이다. 동영상의 내용에 따르면 <궁궐지>는 1904년 경복궁 전각의 칸수와 용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통장청은 40칸으로 지금(1904년경)은 없다. 통장청 동쪽에는 문기수청이 있는데, 10칸이며 화장실은 4칸이다. 지금(1904년경)은 없다.'[14]
- 이 곳의 화장실의 구조는 아래 돌을 깔고 양옆은 장대석이 쌓임 가로는 10.4미터, 세로는 1.4미터, 폭은 1.8미터가량이며, 북쪽에 물이 들어오는 입구가 있고 동쪽 측면에 물이 나가는 출구가 2개가 있다. 특이한 지점은 물이 들어오는 곳보다 나가는 곳이 80센티미터 정도 높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안에 채워져 있던 흙에는 기생충 알이 다수 검출된 결과를 토대로 화장실 하부구조라고 추정한 것이다.이 구조 위로 화장실을 만든다.
- 하부 구조에 분뇨가 쌓이고 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 발효가 진행되면서 오물은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오수와 정화수가 분리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오물의 악취를 줄이고, 오물을 압착시켜서 분리하는 과정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출수구 바닥면 높이까지 정화수가 차오르면, 물이 외부로 나가기 시작한다. 화장실이 계속 사용되고 변이 입수구 높이까지 차오르면 화장실 바닥 판을 일부 들어내고 정화시설 내부의 변을 운반한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개선점 및 오류 5가지
- 대구 1907 화면 중 '저항, 대구, 경제, 언론, 외교'라는 항목을 두고 테마별 아카이빙이 되어 있는 부분에서, 토픽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제공되고 있으나 네트워크 그래프 페이지에 들어가야 그 내용을 알 수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네트워크 그래프는 한 페이지에 담긴 정보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서 로딩이 오래 걸리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페이지에 들어가지 않아도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간략한 설명을 테마 페이지에 추가되면 좋을 것 같다.
- 대구 1907이라는 챕터는 제목에 걸맞도록 저항, 대구, 경제, 언론 테마의 순서에서 대구를 맨 앞에 두면 좋을 것 같다.
- 국채보상운동을 이야기 형식으로 정렬한 콘텐츠 보기 페이지에는 총 다섯 개로 분류된 이야기를 볼 수 있는데, 이 중 아동을 위한 ‘KIDS국채보상운동 알아보기’ 항목은 앞의 네 개의 항목과 분류표기 되었으면 좋겠다. 앞의 네 항목은 각자 다른 부분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섯 번째 항목은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을 한 번에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연결도가 떨어진다.
- 국채보상운동 전문검색 페이지의 경우, 자료의 목록을 글자만 표기하는 방안을 추가할 필요성을 느꼈다. ‘문집’ 종류나 ‘문서’ 종류에는 이미지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이미지 검색은 필요하지 않고 제목과 발행년도 등을 한 눈에 보는 편이 자료를 찾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 대구 1907 페이지는 처음 접속했을 때, 이 페이지에 관한 정보가 간단하게 적혀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 대구 1907이라는 제목부터 이 페이지에 관한 정보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므로, 하단에 나열되어 있는 ‘저항, 대구, 경제, 언론 테마’의 항목 이름들만으로는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페이지인지 한 번에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각주 목록
- ↑ 김현. (2013). 디지털 인문학. 인문콘텐츠, (29).
- ↑ [1]
- ↑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 ↑ 문화재청 궁능관리본부 창덕궁관리소
- ↑ 이강근 외,『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국립고궁박물관, 2011, 6p.
- ↑ 『궁궐지』창덕궁지
-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하』, ㈜눌와, 2017, 151p.
- ↑ 고종실록 43권고종 40년 12월 30일 양력 1번째기사 1903년 대한 광무(光武) 7년궁내부 관제 중 비원 증치 안건을 반포하다
- ↑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 ↑ 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 209쪽
- ↑ 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 166쪽.
- ↑ 이화영.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화장실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2009. 서울
- ↑ 김태민,and 남호현. "경복궁(景福宮) 배수시설(排水施設)의 조성원리(造成原理)에 관한 연구." 문화재 51.4 (2018): 120-145.
- ↑ 궁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