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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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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font>===
<br><div style="text-align:justify><big>'''디지털 인문학'''</big>은 인문대학 학부생들에게는 아직 낯설고 ‘잘 모르는’ 학문 분과일 것이다. 나 또한 수업을 수강 신청할 때조차 디지털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러나 디지털 인문학을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면 ''인문학에 접근하는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인문학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의 측면보다는 인문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가깝고, 더불어 현재 사회와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처럼 느껴진다. 전통적으로 인문학 연구는 ‘책과의 씨름’이었다. 나의 분야와 관련된 모든 책을 끝없이 읽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처럼 느껴지며 이는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유효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서나 외서, 책의 형태가 아닌 기록물, 도판, 기타 자료일 경우엔 일반인은 물론 연구자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내가 알고 싶은 그것’을 위해 품이 많이 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디지털 인문학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너무 많은 책에 흩어져 담겨있는 내용을 웹상에서 열어볼 수 있게 하고, 검색과 출처 확인이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에 접근하는 마음을 보다 쉽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더불어 실물 자료보다 더 길게 전승될 수 있을 것이리라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한 권의 실물 책은 연약하고 쉽게 손상된다. <font color="green">'''그러나 웹페이지 상의 정보는 실물 책이 사라지더라도 계속해서 보존될 수 있다.'''</font><br>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전 영역이 디지털 인문학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또한 있다. 사건, 인물, 건물이나 국가유산의 객관적 정보와 출처가 필요한 역사 관련 분과는 디지털 아카이브의 효과가 특히 두드러진다.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조선왕조실록]이나 [https://www.heritage.go.kr/main/ 국가문화유산포털]이 없었다면 이토록 쉽게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모든 인문학 분과를 위키식 아카이브로 정리할 수 있을까? 디지털 인문학이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 외의 다른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과 다름 없는 디지털 작업의 분야가 아닐까 싶었다. <ins>굳이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디지털과 인문학은 내용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ins> 현재로서는 디지털 인문학의 성립과 당위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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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justify>'''디지털 인문학'''은 인문대학 학부생들에게는 아직 낯설고 ‘잘 모르는’ 학문 분과일 것이다. 나 또한 수업을 수강 신청할 때조차 디지털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러나 디지털 인문학을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면 ''인문학에 접근하는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인문학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의 측면보다는 인문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가깝고, 더불어 현재 사회와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처럼 느껴진다. 전통적으로 인문학 연구는 ‘책과의 씨름’이었다. 나의 분야와 관련된 모든 책을 끝없이 읽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처럼 느껴지며 이는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유효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서나 외서, 책의 형태가 아닌 기록물, 도판, 기타 자료일 경우엔 일반인은 물론 연구자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내가 알고 싶은 그것’을 위해 품이 많이 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디지털 인문학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너무 많은 책에 흩어져 담겨있는 내용을 웹상에서 열어볼 수 있게 하고, 검색과 출처 확인이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에 접근하는 마음을 보다 쉽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더불어 실물 자료보다 더 길게 전승될 수 있을 것이리라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한 권의 실물 책은 연약하고 쉽게 손상된다. <font color="green">'''그러나 웹페이지 상의 정보는 실물 책이 사라지더라도 계속해서 보존될 수 있다.'''</font><br>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전 영역이 디지털 인문학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또한 있다. 사건, 인물, 건물이나 국가유산의 객관적 정보와 출처가 필요한 역사 관련 분과는 디지털 아카이브의 효과가 특히 두드러진다.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조선왕조실록]이나 [https://www.heritage.go.kr/main/ 국가문화유산포털]이 없었다면 이토록 쉽게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모든 인문학 분과를 위키식 아카이브로 정리할 수 있을까? 디지털 인문학이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 외의 다른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과 다름 없는 디지털 작업의 분야가 아닐까 싶었다. <ins>굳이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디지털과 인문학은 내용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ins> 현재로서는 디지털 인문학의 성립과 당위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div>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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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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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광해군9) 6월 술인 김일룡이 정원군의 옛집이 왕기가 있음을 이유로 들어 이궁을 새문동에 건립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이미 한해 전부터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을 짓고 있었기에 여러 신하들은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을 짓고 이어한 뒤 차례대로 추진하자고 건의했지만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6011_002 『광해군일기(중초본)』9년 6월 11일]</ref> 궁궐은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나 광해군은 경덕궁에 입궐하지 못하고 왕위에서 쫓겨났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1001_003 『광해군일기(중초본)』5년 1월 1일]</ref><br> 이후 인조는 경운궁에서 즉위하였고<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 『인조실록』1년 3월 13일]</ref> 창덕궁과 창경궁에 임어했기에 경덕궁이 실질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624년(인조2) 부원수 이괄이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4_003 『인조실록』2년 1월 24일]</ref>을 일으키면서 인조가 피난을 가야 했고, 보름 만에 돌아왔으나 창덕궁과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어 경덕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묘호란<sup>1627년(인조 5)</sup>, 병자호란<sup>1636년(인조 14)</sup> 등 정세가 매우 어려웠기에 경덕궁 생활도 편치 않았다.<br>인조 이후 경희궁은 ‘서궐<sup>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했다</sup>’이라 불리며 이궁의 자리를 지켰으며 영조는 1760년 2월(영조36) 경덕궁의 이름이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궁명을 바꿨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3602028_002 『영조실록』36년 2월 28일]</ref> 경희궁은 고종이 재정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던 때 일부 해체되어 경복궁 건립의 자재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1865년 9월(고종2)때만 되어도 경희궁의 문짝, 마룻장이 대부분 사라지는 등 제대로 된 건물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경복궁의 중건으로 이궁의 역할조차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br>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된 후 경희궁은 학교 및 대중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다수 이주하였고, 거류민단립중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 거류민단립중학교는 1925년 경성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10년 전후 경희궁 자리를 침범하였다. 해방 뒤에는 경성중학교 자리에 서울공립중학교가 들어섰으며 1971년 서울고등학교만 남게 되었다가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터로 남았다. 그 후로 2000년까지 경희궁의 복원이 조금씩 추진되어 숭전전과 회랑, 자정전, 태녕전 등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서울특별시는 2002년 경희궁 터 일부에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개관하였다.
 
1617년(광해군9) 6월 술인 김일룡이 정원군의 옛집이 왕기가 있음을 이유로 들어 이궁을 새문동에 건립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이미 한해 전부터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을 짓고 있었기에 여러 신하들은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을 짓고 이어한 뒤 차례대로 추진하자고 건의했지만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6011_002 『광해군일기(중초본)』9년 6월 11일]</ref> 궁궐은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나 광해군은 경덕궁에 입궐하지 못하고 왕위에서 쫓겨났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1001_003 『광해군일기(중초본)』5년 1월 1일]</ref><br> 이후 인조는 경운궁에서 즉위하였고<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 『인조실록』1년 3월 13일]</ref> 창덕궁과 창경궁에 임어했기에 경덕궁이 실질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624년(인조2) 부원수 이괄이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4_003 『인조실록』2년 1월 24일]</ref>을 일으키면서 인조가 피난을 가야 했고, 보름 만에 돌아왔으나 창덕궁과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어 경덕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묘호란<sup>1627년(인조 5)</sup>, 병자호란<sup>1636년(인조 14)</sup> 등 정세가 매우 어려웠기에 경덕궁 생활도 편치 않았다.<br>인조 이후 경희궁은 ‘서궐<sup>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했다</sup>’이라 불리며 이궁의 자리를 지켰으며 영조는 1760년 2월(영조36) 경덕궁의 이름이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궁명을 바꿨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3602028_002 『영조실록』36년 2월 28일]</ref> 경희궁은 고종이 재정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던 때 일부 해체되어 경복궁 건립의 자재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1865년 9월(고종2)때만 되어도 경희궁의 문짝, 마룻장이 대부분 사라지는 등 제대로 된 건물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경복궁의 중건으로 이궁의 역할조차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br>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된 후 경희궁은 학교 및 대중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다수 이주하였고, 거류민단립중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 거류민단립중학교는 1925년 경성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10년 전후 경희궁 자리를 침범하였다. 해방 뒤에는 경성중학교 자리에 서울공립중학교가 들어섰으며 1971년 서울고등학교만 남게 되었다가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터로 남았다. 그 후로 2000년까지 경희궁의 복원이 조금씩 추진되어 숭전전과 회랑, 자정전, 태녕전 등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서울특별시는 2002년 경희궁 터 일부에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개관하였다.
  
===궁궐과 관련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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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궁궐과 관련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font>===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가지 이상 작성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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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big>'''궁궐의 구조'''</big></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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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sortable 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ye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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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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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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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중국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궁궐 구성의 기본 원칙 <font color="green">'''오문삼조'''</font>에 의해 조직된다.왕실의 거처이자 최고의 행정 중앙 관청으로서 <ins>많은 건물들이 각 기능에 따라 조직적인 구조를 가진다.</ins> 배산임수의 원칙을 지켜 터를 정하고 왕실의 존엄성과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크고 화려하게 건축 된다. 궁궐은 크기와 격에 따라 <big>'''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big>으로 구분하며 순차적으로 건물들의 신분과 위계 질서를 의미한다. 궁궐은 궁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내부의 각 구역은 출입문이 있고 남에서 북으로 다섯 개의 문을 배열한다. 이 다섯 개의 문 안에 '외조/치조/연조'라는 세 조정이 있어 <big>'''오문삼조'''</big>의 원칙이 성립된다.<br><br>[[파일:최맑은샘 중간고사 01.jpg]]<br><br>궁궐은 크게 <font color="red">'''외전/내전/동궁/후원/궐내각사'''</font>로 나눌 수 있다.<br><big>'''외전'''</big>은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는 곳으로 궁궐에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공간이다. 조정의 조회, 사신 응대, 잔치, 연회 등의 공식적 의식을 거행한다. 외전에는 정전과 편전 등이 포함된다.<br><big>'''내전'''</big>은 궁의 중앙에 위치한다. 왕과 왕비의 공식 활동 및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곳으로 궁의 핵심을 이룬다 내전은 <ins>대전과 중궁전으로 구성되며 대전은 왕이, 중궁전은 왕비가 기거하는 곳이다.</ins> 이때 대비전도 내전에 속한다.<br><big>'''동궁'''</big>은 왕위 계승자인 세자의 활동공간으로 내전의 동편에 처소를 마련하였다. <ins>해가 동쪽에서 뜨는 원리에 따라 세자가 떠오르는 해와 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ins><br><big>'''후원'''</big>은 왕을 비롯한 궁궐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ins>연못, 정자, 산골짜기 등이 배치된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ins> 과거시험, 군사훈련, 종친 모임등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br><big>'''궐내각사'''</big>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관리들의 업무 공간으로 정치 및 행정 담당 기구, 군사 기구, 시중 및 시설 관리 기구 등이 있었다. <ins>정승, 빈청, 정청, 대청,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등이 궐내각사에 속한다.</ins><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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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가지 이상 작성하시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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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just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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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갔을 때 클릭해서 메뉴로 넘어가거나 첫 화면에서 바로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닌 <font color="red">'''스크롤을 내려서 메뉴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 불편하다.'''</font> 첫 화면의 스크롤이 너무 길고 아카이브 검색/의연금 검색/콘텐츠 보기/전문검색 등의 메뉴 이름은 직관성이 떨어진다. 국채보상운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페이지에 와서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국채보상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부터 그와 관련되어 어떤 자료가 있고  <font color="red">'''이 홈페이지가 무엇을 '아카이빙'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입문의 과정을 잘 보이게 배치할 필요''' </font>가 있을 듯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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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이용 방법'의 페이지 설명란이 빈약하게 느껴진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찾고 활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가이드가 더 제시되었으면 좋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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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금 검색-인물 검색-직업으로 검색하기 시 세부 카테고리를 더 나눠서 이용자가 직업의 이름을 모르고도 점점 범위를 좁혀갈 수 있으면 좋겠다. '관직'만 선택한 뒤부터는 구체적인 '관직명'을 알아야만 검색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 '관직명'을 검색할 거라면 '관직'으로 카테고리를 나눌 필요성이 크게 없어진다. <ins>사관/시위보병 등의 하위 갈래가 더 필요할 것 같다.</ins><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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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보기'라는 메뉴의 이름이 애매하다. 첫번째 이야기부터 다섯 번째 이야기가 있는데 연속성을 가진 다섯 개의 시리즈라기 보다는 국채보상운동을 다섯 개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고 다섯번째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설명하는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font color="red">'''특히 콘텐츠 보기에서 첫번째 이야기를 누르면 카테고리가 첫번째~다섯 번째로만 표기되어 두 번째 이야기엔 무엇이 있는지, 세 번째 이야기엔 무엇이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선택하기 어렵다.'''</font> 이용자는 원하는 정보가 있는지를 하나하나 클릭해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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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검색'창이 기존에 띄워둔 페이지를 가리면서 하나의 독립적인 화면으로 전환되는 점이 아쉽다.</ins><sup>[[미디어:최맑은샘 중간고사 02.png]]</sup> 화면에 보이는 단어를 검색어에 입력하지 못하게 되고, 이용자는 검색어를 머릿속에 외우지 않은 채 검색창을 눌렀다가는 검색창을 껐다가 화면을 확인한 뒤에 다시 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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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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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aladin.kr/p/3Jnbf/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눌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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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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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조선왕조실록]
 +
* [https://www.heritage.go.kr/main/ 국가문화유산포털]
 +
* [http://www.gukchae-archive.org/gp/#intro/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각주==
 
==각주==
 
<references/>
 
<references/>

2022년 4월 22일 (금) 14:07 기준 최신판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은 인문대학 학부생들에게는 아직 낯설고 ‘잘 모르는’ 학문 분과일 것이다. 나 또한 수업을 수강 신청할 때조차 디지털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러나 디지털 인문학을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면 인문학에 접근하는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인문학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의 측면보다는 인문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가깝고, 더불어 현재 사회와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처럼 느껴진다. 전통적으로 인문학 연구는 ‘책과의 씨름’이었다. 나의 분야와 관련된 모든 책을 끝없이 읽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처럼 느껴지며 이는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유효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서나 외서, 책의 형태가 아닌 기록물, 도판, 기타 자료일 경우엔 일반인은 물론 연구자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내가 알고 싶은 그것’을 위해 품이 많이 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디지털 인문학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너무 많은 책에 흩어져 담겨있는 내용을 웹상에서 열어볼 수 있게 하고, 검색과 출처 확인이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에 접근하는 마음을 보다 쉽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더불어 실물 자료보다 더 길게 전승될 수 있을 것이리라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한 권의 실물 책은 연약하고 쉽게 손상된다. 그러나 웹페이지 상의 정보는 실물 책이 사라지더라도 계속해서 보존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전 영역이 디지털 인문학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또한 있다. 사건, 인물, 건물이나 국가유산의 객관적 정보와 출처가 필요한 역사 관련 분과는 디지털 아카이브의 효과가 특히 두드러진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국가문화유산포털이 없었다면 이토록 쉽게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모든 인문학 분과를 위키식 아카이브로 정리할 수 있을까? 디지털 인문학이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 외의 다른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과 다름 없는 디지털 작업의 분야가 아닐까 싶었다. 굳이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디지털과 인문학은 내용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디지털 인문학의 성립과 당위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경희궁

1617년(광해군9) 6월 술인 김일룡이 정원군의 옛집이 왕기가 있음을 이유로 들어 이궁을 새문동에 건립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이미 한해 전부터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을 짓고 있었기에 여러 신하들은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을 짓고 이어한 뒤 차례대로 추진하자고 건의했지만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1] 궁궐은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나 광해군은 경덕궁에 입궐하지 못하고 왕위에서 쫓겨났다.[2]
이후 인조는 경운궁에서 즉위하였고[3] 창덕궁과 창경궁에 임어했기에 경덕궁이 실질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624년(인조2) 부원수 이괄이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4]을 일으키면서 인조가 피난을 가야 했고, 보름 만에 돌아왔으나 창덕궁과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어 경덕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묘호란1627년(인조 5), 병자호란1636년(인조 14) 등 정세가 매우 어려웠기에 경덕궁 생활도 편치 않았다.
인조 이후 경희궁은 ‘서궐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했다’이라 불리며 이궁의 자리를 지켰으며 영조는 1760년 2월(영조36) 경덕궁의 이름이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궁명을 바꿨다.[5] 경희궁은 고종이 재정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던 때 일부 해체되어 경복궁 건립의 자재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1865년 9월(고종2)때만 되어도 경희궁의 문짝, 마룻장이 대부분 사라지는 등 제대로 된 건물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경복궁의 중건으로 이궁의 역할조차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된 후 경희궁은 학교 및 대중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다수 이주하였고, 거류민단립중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 거류민단립중학교는 1925년 경성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10년 전후 경희궁 자리를 침범하였다. 해방 뒤에는 경성중학교 자리에 서울공립중학교가 들어섰으며 1971년 서울고등학교만 남게 되었다가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터로 남았다. 그 후로 2000년까지 경희궁의 복원이 조금씩 추진되어 숭전전과 회랑, 자정전, 태녕전 등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서울특별시는 2002년 경희궁 터 일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개관하였다.

궁궐과 관련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궁궐의 구조

구조
구분
외전
내전
동궁
후원
궐내각사

궁궐은 중국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궁궐 구성의 기본 원칙 오문삼조에 의해 조직된다.왕실의 거처이자 최고의 행정 중앙 관청으로서 많은 건물들이 각 기능에 따라 조직적인 구조를 가진다. 배산임수의 원칙을 지켜 터를 정하고 왕실의 존엄성과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크고 화려하게 건축 된다. 궁궐은 크기와 격에 따라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으로 구분하며 순차적으로 건물들의 신분과 위계 질서를 의미한다. 궁궐은 궁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내부의 각 구역은 출입문이 있고 남에서 북으로 다섯 개의 문을 배열한다. 이 다섯 개의 문 안에 '외조/치조/연조'라는 세 조정이 있어 오문삼조의 원칙이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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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크게 외전/내전/동궁/후원/궐내각사로 나눌 수 있다.
외전은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는 곳으로 궁궐에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공간이다. 조정의 조회, 사신 응대, 잔치, 연회 등의 공식적 의식을 거행한다. 외전에는 정전과 편전 등이 포함된다.
내전은 궁의 중앙에 위치한다. 왕과 왕비의 공식 활동 및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곳으로 궁의 핵심을 이룬다 내전은 대전과 중궁전으로 구성되며 대전은 왕이, 중궁전은 왕비가 기거하는 곳이다. 이때 대비전도 내전에 속한다.
동궁은 왕위 계승자인 세자의 활동공간으로 내전의 동편에 처소를 마련하였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원리에 따라 세자가 떠오르는 해와 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후원은 왕을 비롯한 궁궐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연못, 정자, 산골짜기 등이 배치된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시험, 군사훈련, 종친 모임등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관리들의 업무 공간으로 정치 및 행정 담당 기구, 군사 기구, 시중 및 시설 관리 기구 등이 있었다. 정승, 빈청, 정청, 대청,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등이 궐내각사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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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 사이트

각주

  1. 『광해군일기(중초본)』9년 6월 11일
  2. 『광해군일기(중초본)』5년 1월 1일
  3. 『인조실록』1년 3월 13일
  4. 『인조실록』2년 1월 24일
  5. 『영조실록』36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