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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유래와 변천사(정릉동 행궁, 경운궁, 덕수궁))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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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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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소개==
===덕수궁의 위치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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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위치===
<div style="text-align: just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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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임진왜란 중인 1593년<sup>선조 26</sup>에 선조가 피난지인 의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에 머물면서 행궁으로 사용하던 곳을 1611년<sup>광해군 3</sup>에 광해군이 처음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다<ref>『광해군일기』 3년 10월 11일</ref>. 1623년<sup>인조 1</sup>에는 인조반정 뒤에 인조가 경운궁 [[즉조당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였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  (인조실록 1년 3월 13일)], 이후 1748년<sup>영조 24</sup>에는 영조가 인조의 즉위처를 확인하기 위해 경운궁에 임어하기도 했다<ref>『영조실록』 24년 1월 27일</ref>. 고종 이전까지 명례궁(明禮宮)이 자리하기도 했다.<br>
+
===주변 지하철===
고종대 황폐한 이곳에 새롭게 궁궐을 조성했다. 1893년<sup>고종 30</sup>에는 고종이 즉조당에서 선조 환도 300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치렀다(『고종실록』 30년 10월 4일). 1896년<sup>고종 33</sup>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궁으로 삼고자 경운궁을 영건하였다.<br>
+
1호선: 시청역 / 2호선: 시청역, 을지로입구역 / 5호선: 광화문역
1897년<sup>광무 1</sup>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경운궁은 황궁(皇宮)으로 격상되었다. 1907년<sup>융희 1</sup> 고종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된 이후 고종의 호를 덕수(德壽)로 하였기 때문에 경운궁은 <font color=#ccff66>덕수궁</font>(德壽宮)으로 불렸다. 속칭 정릉동 황궁(皇宮)으로 불리기도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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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사후인 1921년에는 경운궁선원전(璿源殿), 순종 비의 혼전인 의효전(懿孝殿)을 창덕궁으로 이건한 뒤, 궁역 서북부가 분할·매각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del>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del>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br>
+
===덕수궁의 역할===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하며 임진왜란기와 광해군대 임시 궁궐인 행궁으로 사용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폐기되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font color=yellow>황궁</font>으로 이용되었다.<br>
+
<div style="text-align: justify;">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왕이 머물던 곳이라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렀고 행궁은 왕들이 임시로 머무는 궁을 말한다. 이후 선조에 이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경운궁은 러시아 공사관과 멀지 않고, 주변에 외국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있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이후 나라의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황제국 다운 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황제가 머무는 궁궐에 맞게 경운궁도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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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jsessionid=n3y6WSyaPfRhDbOr2jIomIOEzbPGiri9V7Hbv11TK3O5q4aJ7AZDQL28tBJw6agu.cpawas_servlet_engine1?pg=/palaces/palacesDeokInfo.jsp&pageNo=2_3_1_0/ 국가문화유산포털 - 덕수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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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history.go.kr/data/pdf/eh/eh_r0331_0010.pdf 국사편찬위원회 <대한 제국 황실의 궁궐이었던 덕수궁>]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의 역사==
===이름의 유래와 변천사(정릉동 행궁, 경운궁, 덕수궁) ===
+
===정릉동행궁===
'''정릉동행궁'''<br><br>
+
선조 임금은 1593년<sup>선조 26</sup> 10월 서울로 돌아왔다. “상이 아침에 벽제역(碧蹄驛)을 출발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정릉동(貞陵洞)<ref>정릉동이라는 지역 이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었다. 태종 연간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긴 뒤에도 정릉동이라는 지명은 이어져 내려왔다.</ref>의 행궁(行官)으로 들어갔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01_002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2번째기사]</ref> 고 『선조실록』은 10월 1일자 기사로 전한다.(선조수정실록에서 4일로 수정함. <ref>[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10001_001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ref>)<br> 정릉동의 집들을 행궁 터로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왜군들이 주둔했던 곳이라 기거할 만한 집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정릉동의 행궁은 흉악한 적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므로 비린내 나고 더러워서 임금의 처소로 적당하지는 못하였으나, 거처할 곳이 없어서 우선 거처하신 것이다.” <ref>[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00A_0180_010_0090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ref> 라고 적혀있다. 이때 선조가 행궁으로 삼았던 집은 월산대군의 집으로 “정릉동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ref>[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00A_0180_010_0090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ref> 라고 『연려실기술』은 기술한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고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10001_001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ref> <br>
선조 임금은 1593년<sup>선조 26</sup> 10월 서울로 돌아왔다. “상이 아침에 벽제역(碧蹄驛)을 출발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정릉동(貞陵洞)<ref>정릉동이라는 지역 이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었다. 태종 연간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긴 뒤에도 정릉동이라는 지명은 이어져 내려왔다.</ref>의 행궁(行官)으로 들어갔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01_002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2번째기사]</ref> 고 『선조실록』은 10월 1일자 기사로 전한다.(선조수정실록에서 4일로 수정함)<br> 정릉동의 집들을 행궁 터로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왜군들이 주둔했던 곳이라 기거할 만한 집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록』에는 “정릉동의 행궁은 흉악한 적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므로 비린내 나고 더러워서 임금의 처소로 적당하지는 못하였으나, 거처할 곳이 없어서 우선 거처하신 것이다.” 라고 적혀있다. 이때 선조가 행궁으로 삼았던 집은 월산대군의 집으로 “정릉동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라고 『연려실기록』은 기술한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고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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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의 집은 궁궐로 삼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이에 선조는 관서들을 궁 밖으로 이전시키고 순차적으로 궐내로 포함시키게 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03_007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3일 계미 7번째기사] </ref> 이렇게 주변의 집들을 이용하여 정릉동행궁을 꾸렸지만 임금의 거처로서 짜임새를 갖추기가 어려웠다. 이에 본래의 법궁을 중건하여 이어하려고 했지만 중건 공사가 끝나기 전 1608년 2월 1일 정릉동행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002001_015 『광해군일기(중초본)』 1권 광해 즉위년 2월 1일 무오 15번째 기사]</ref> 선조 승하 다음날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정릉동행궁 서청에서 즉위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002002_009 『광해군일기』 1권 광해 즉위년 2월 2일 기미 9번째기사]</ref> <br><br>
월산대군의 집은 궁궐로 삼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이에 선조는 관서들을 궁 밖으로 이전시키고 순차적으로 궐내로 포함시키게 하였다.  이렇게 주변의 집들을 이용하여 정릉동행궁을 꾸렸지만 임금의 거처로서 짜임새를 갖추기가 어려웠다. 이에 본래의 법궁을 중건하여 이어하려고 했지만 중건 공사가 끝나기 전 1608년 2월 1일 정릉동행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선조 승하 다음날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정릉동행궁 서청에서 즉위하였다.<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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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경운궁'''<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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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10011_001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ref> <ref>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ref> 광해군은 경운궁에 길한 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법궁에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렇게 약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물다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4002_001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ref> 이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하에게 경운궁에 가서 감찰하라고 전교한다. 실록에는 “모후를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고 분병조와 분총부를 이미 두어서 숙직하여 지키는 것을 엄하게 했는데, 또 판서 이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검찰하게 하였다. 이후에 또 헌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고 또 간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여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번갈아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구금하고 곤궁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다만 ‘폐한다[廢]’는 한 글자만 아직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4008_001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8일 갑신 1번째 기사]</ref> 라고 적혀있다.<br>
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ref>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ref> 광해군은 경운궁에 길한 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법궁에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렇게 약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물다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이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하에게 경운궁에 가서 감찰하라고 전교한다. 실록에는 “모후를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고 분병조와 분총부를 이미 두어서 숙직하여 지키는 것을 엄하게 했는데, 또 판서 이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검찰하게 하였다. 이후에 또 헌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고 또 간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여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번갈아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구금하고 곤궁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다만 ‘폐한다[廢]’는 한 글자만 아직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 라고 적혀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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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ref> 후에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본주에게 되돌려주라고 하교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7012_003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ref> 이 후 경운궁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1897년까지 조선 역사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명례궁과 경운궁 두 이름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1679년 숙종 때 개수 공사를 했다는 기록<ref>[http://sillok.history.go.kr/id/ksa_10505022_004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 5월 22일 을묘 4번째 기사]</ref>과 1748년 영조가 경운궁에 임어하여 어제를 게판했다는 기록이 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2401027_002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1월 27일 임자 2번째 기사]</ref>.  영조 대에 경운궁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게 많이 있다. 영조 45년<sup>1769</sup>, 영조는 경운궁에 임어하여 양조개어<sup>兩朝皆御</sup>, 계해즉조당<sup>癸亥卽阼堂</sup>이라는 글을 친히 쓰고, 게판하도록 명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4511002_003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11월 2일 경진 3번째 기사]</ref>.  또한 영조 47년<sup>1771</sup> 경운궁에 들러 궁호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다.  영조 49년<sup>1773</sup> 영조가 ‘석어당’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4701016_002 『영조실록』 116권, 영조 47년 1월 16일 무오 2번째 기사]</ref>.  이렇게 약 1년 반마다 한 번씩 들려 직접 글씨를 써 경운궁에 걸게 하였다.<br>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  후에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본주에게 되돌려주라고 하교하였다.”  이 후 경운궁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1897년까지 조선 역사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명례궁과 경운궁 두 이름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1679년 숙종 때 개수 공사를 했다는 기록 과 1748년 영조가 경운궁에 임어하여 어제를 게판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대에 경운궁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게 많이 있다. 영조 45년<sup>1769</sup>, 영조는 경운궁에 임어하여 양조개어, 계해즉조당이라는 글을 친히 쓰고, 게판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영조 47년<sup>1771</sup> 경운궁에 들러 궁호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다.  영조 49년<sup>1773</sup> 영조가 ‘석어당’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렇게 약 1년 반마다 한 번씩 들려 직접 글씨를 써 경운궁에 걸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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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고종 30년<sup>1893</sup> 10월 4일 고종과 신하들은 경운궁 즉조당에 나아가 선조가 수도에 환궁한 300년이 지난 것에 대해 예를 행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10004_001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10월 4일 임자 1번째 기사]</ref>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302011_001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1일 양력 1번째 기사]</ref>, 고종 34년<sup>1897</sup>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지 1년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02020_001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2월 20일 양력 1번째 기사]</ref><br><br>
시간이 흘러, 고종 30년<sup>1893</sup> 10월 4일 고종과 신하들은 경운궁 즉조당에 나아가 선조가 수도에 환궁한 300년이 지난 것에 대해 예를 행하였다.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 고종 34년<sup>1897</sup>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지 1년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br><br>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퇴위함.
 
순종은 8월 경운궁 돈덕전에서 즉위함. 11월 창덕궁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고종이 오래 건강히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꿈. 고종은 덕수궁에서 죽음
 
  
===왕조와의 관계(선조, 광해군, 인조, 고종, 영조+계축일기)===
+
===덕수궁===
#관련 인물
+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7019_003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7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ref>
##월산대군
+
이후, 순종은 고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궁호를 고종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덕수'로 칭하게 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02_001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ref> 순종 즉위년<sup>1907</sup>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ref>[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1013_001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11월 13일 양력 1번째기사]</ref> 경운궁은 자연스럽게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순종 12년<sup>1919</sup>,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c_11201021_002 『순종실록부록』 10권, 순종 12년 1월 21일 양력 2번째기사] </ref>
##선조
 
##광해군
 
##인조
 
##숙종
 
##영조
 
##고종
 
##순종
 
  
 
==덕수궁 건물별 소개(주요 전각들)==
 
==덕수궁 건물별 소개(주요 전각들)==
===각 건물의 이름 유래===
+
<small>이름의 유래와 쓰임</small><ref>[http://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주요전각]</ref>
===각 건물의 역할과 의미===
+
===외전===
===각 건물의 완공과 훼손, 복원의 시기(연표)===
+
====중화전====
 +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br>
 +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 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 새로운 정전으로 지음.
 +
===내전===
 +
====함녕전====
 +
咸寧 : 모두가 평안하다<br>
 +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곳이자 고종이 승하한 곳.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 소실되었다가 1905년 8월에 중건함.
 +
====즉조당====
 +
卽阼 : 즉위(卽位)<br>
 +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 경운궁 환궁 직후 정전으로 사용. 고종의 후비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
 +
====준명당====
 +
浚明 : 다스려 밝힌다<br>
 +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
 +
====석어당====
 +
昔御 :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br>
 +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에서 환도한 후 거처한 곳,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
 +
====덕홍전====
 +
德弘 : 덕이 넓고 크다<br>
 +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
 +
===서양식 건물===
 +
====정관헌====
 +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한 곳
 +
====석조전====
 +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곳. 해방 전까지 현대미술품을 진열,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활용한 석조건물
 +
====중명전====
 +
重眀 :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음<br>
 +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
 +
===문===
 +
====대한문====
 +
大漢 : 한양이 창대해진다<br>
 +
정문이자 동문
 +
====중화문====
 +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br>
 +
중화전의 정문
 +
====광명문====
 +
光明 : 밝음을 맞다<br>
 +
함녕전의 남쪽 대문
 +
===사라진 건물===
  
==각 건물의 건축 방법 및 특징==
+
== 덕수궁에서 일어난 사건==
===목제건축===
+
=== 아관파천(1896년)===
===석제건축===
+
<div style="text-align: justify;"> 1895년 10월 8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왕후를 시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4개월 후인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고종은 파천 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경운궁이 수리 중이라는 이유로 환궁 시기를 늦출 뿐만 아니라 경운궁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5%84%EA%B4%80%ED%8C%8C%EC%B2%9C&ridx=0&tot=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관파천]</ref><br>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기 2년 4개월 전쯤인 1893년 10월 4일에 경운궁을 찾은 적이 있었다. 임란으로 파천했던 선조가 수도로 돌아왔던 30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명성황후, 세자와 세자빈까지 대동하고 경운궁의 즉조당에 참배하면서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부흥시키려던 선조의 의지를 기렸다.<ref>[http://deoksugung.go.kr/c/introduction/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ref></div>
  
==덕수궁에서 일어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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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선포(1897년)===
===아관파천(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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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justify;"> <즉조당의 명칭변화: 즉조당=태극전=중화전=즉조당>
===대한제국 선포(18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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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후 덕수궁으로 온 고종은 덕수궁 내에 마땅한 법전이 없어 즉조당을 덕수궁의 법전으로 삼고 이름을 태극전으로 개명하여 사용한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반포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황제에 올랐다.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고종은 태극전(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ref>[https://www.gungstory.com:9008/01_cultural/01sub_02_05.asp?mcat=2  궁궐문화원-덕수궁역사]</ref></div>
===을사늑약(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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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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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늑약(1905년)===
===고종황제 승하(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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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justify;">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며 ‘을사조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였으며, 1906년 2월 1일에는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첫 통감으로 부임하였다.<ref>우리 궁궐 이야기, 홍순민, 250페이지</ref> 이는 외교권이 강탈되고 주권을 빼앗기는, 대한제국 패망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ref>덕수궁 문화재청-덕수궁 복원장비 기본계획</ref></div>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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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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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justify;"> 1905년 중명전에서 고종의 긴말한 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졌다. 고종은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담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회담 장소에 입장하지 못하였고, 일제는 이를 계기로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적으로 퇴위시킨다.<ref>[https://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Detail.do?serial_number=128&detail_code=19&gung_number=4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 중명전]</ref></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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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 승하(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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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justify;">1919년 1월 12일 고종 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함녕전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1897년(광무 1)에 건축되어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A8%EB%85%95%EC%A0%84&ridx=0&tot=484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덕수궁 함녕전]</ref>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 결국 그해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의 죽음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ref>덕수궁 문화재청-덕수궁 복원장비 기본계획</ref></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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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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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justify;"> 미·소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 독립정부의 수립과정으로서 임시 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이다. 1946년 1월 16일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한 예비회담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뤄졌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996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미소공동위원회]</ref></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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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br>
  
 
==덕수궁 관람 루트 추천==
 
==덕수궁 관람 루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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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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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2022년 4월 25일 (월) 02:01 기준 최신판

덕수궁 소개

덕수궁의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주변 지하철

1호선: 시청역 / 2호선: 시청역, 을지로입구역 / 5호선: 광화문역

덕수궁의 역할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왕이 머물던 곳이라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렀고 행궁은 왕들이 임시로 머무는 궁을 말한다. 이후 선조에 이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경운궁은 러시아 공사관과 멀지 않고, 주변에 외국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있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이후 나라의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황제국 다운 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황제가 머무는 궁궐에 맞게 경운궁도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가문화유산포털 - 덕수궁 소개

국사편찬위원회 <대한 제국 황실의 궁궐이었던 덕수궁>

덕수궁의 역사

정릉동행궁

선조 임금은 1593년선조 26 10월 서울로 돌아왔다. “상이 아침에 벽제역(碧蹄驛)을 출발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정릉동(貞陵洞)[1]의 행궁(行官)으로 들어갔다.”[2] 고 『선조실록』은 10월 1일자 기사로 전한다.(선조수정실록에서 4일로 수정함. [3])
정릉동의 집들을 행궁 터로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왜군들이 주둔했던 곳이라 기거할 만한 집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정릉동의 행궁은 흉악한 적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므로 비린내 나고 더러워서 임금의 처소로 적당하지는 못하였으나, 거처할 곳이 없어서 우선 거처하신 것이다.” [4] 라고 적혀있다. 이때 선조가 행궁으로 삼았던 집은 월산대군의 집으로 “정릉동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5] 라고 『연려실기술』은 기술한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고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다.[6]
월산대군의 집은 궁궐로 삼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이에 선조는 관서들을 궁 밖으로 이전시키고 순차적으로 궐내로 포함시키게 하였다.[7] 이렇게 주변의 집들을 이용하여 정릉동행궁을 꾸렸지만 임금의 거처로서 짜임새를 갖추기가 어려웠다. 이에 본래의 법궁을 중건하여 이어하려고 했지만 중건 공사가 끝나기 전 1608년 2월 1일 정릉동행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8] 선조 승하 다음날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정릉동행궁 서청에서 즉위하였다.[9]

경운궁

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10] [11] 광해군은 경운궁에 길한 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법궁에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렇게 약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물다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12] 이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하에게 경운궁에 가서 감찰하라고 전교한다. 실록에는 “모후를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고 분병조와 분총부를 이미 두어서 숙직하여 지키는 것을 엄하게 했는데, 또 판서 이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검찰하게 하였다. 이후에 또 헌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고 또 간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여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번갈아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구금하고 곤궁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다만 ‘폐한다[廢]’는 한 글자만 아직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13] 라고 적혀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14] 후에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본주에게 되돌려주라고 하교하였다.”[15] 이 후 경운궁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1897년까지 조선 역사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명례궁과 경운궁 두 이름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1679년 숙종 때 개수 공사를 했다는 기록[16]과 1748년 영조가 경운궁에 임어하여 어제를 게판했다는 기록이 있다[17]. 영조 대에 경운궁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게 많이 있다. 영조 45년1769, 영조는 경운궁에 임어하여 양조개어兩朝皆御,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라는 글을 친히 쓰고, 게판하도록 명하였다[18]. 또한 영조 47년1771 경운궁에 들러 궁호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다. 영조 49년1773 영조가 ‘석어당’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19]. 이렇게 약 1년 반마다 한 번씩 들려 직접 글씨를 써 경운궁에 걸게 하였다.
시간이 흘러, 고종 30년1893 10월 4일 고종과 신하들은 경운궁 즉조당에 나아가 선조가 수도에 환궁한 300년이 지난 것에 대해 예를 행하였다.[20]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21], 고종 34년1897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지 1년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22]

덕수궁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게 되었다..[23] 이후, 순종은 고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궁호를 고종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덕수'로 칭하게 하였다.[24] 순종 즉위년1907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25] 경운궁은 자연스럽게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순종 12년1919,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하였다.[26]

덕수궁 건물별 소개(주요 전각들)

이름의 유래와 쓰임[27]

외전

중화전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 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 새로운 정전으로 지음.

내전

함녕전

咸寧 : 모두가 평안하다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곳이자 고종이 승하한 곳.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 소실되었다가 1905년 8월에 중건함.

즉조당

卽阼 : 즉위(卽位)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 경운궁 환궁 직후 정전으로 사용. 고종의 후비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

준명당

浚明 : 다스려 밝힌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

석어당

昔御 :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에서 환도한 후 거처한 곳,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

덕홍전

德弘 : 덕이 넓고 크다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

서양식 건물

정관헌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한 곳

석조전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곳. 해방 전까지 현대미술품을 진열,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활용한 석조건물

중명전

重眀 :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음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

대한문

大漢 : 한양이 창대해진다
정문이자 동문

중화문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중화전의 정문

광명문

光明 : 밝음을 맞다
함녕전의 남쪽 대문

사라진 건물

덕수궁에서 일어난 사건

아관파천(1896년)

1895년 10월 8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왕후를 시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4개월 후인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고종은 파천 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경운궁이 수리 중이라는 이유로 환궁 시기를 늦출 뿐만 아니라 경운궁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28]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기 2년 4개월 전쯤인 1893년 10월 4일에 경운궁을 찾은 적이 있었다. 임란으로 파천했던 선조가 수도로 돌아왔던 30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명성황후, 세자와 세자빈까지 대동하고 경운궁의 즉조당에 참배하면서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부흥시키려던 선조의 의지를 기렸다.[29]

대한제국 선포(1897년)

<즉조당의 명칭변화: 즉조당=태극전=중화전=즉조당> 아관파천 후 덕수궁으로 온 고종은 덕수궁 내에 마땅한 법전이 없어 즉조당을 덕수궁의 법전으로 삼고 이름을 태극전으로 개명하여 사용한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반포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황제에 올랐다.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고종은 태극전(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30]

을사늑약(1905년)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며 ‘을사조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였으며, 1906년 2월 1일에는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첫 통감으로 부임하였다.[31] 이는 외교권이 강탈되고 주권을 빼앗기는, 대한제국 패망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32]

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년)

1905년 중명전에서 고종의 긴말한 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졌다. 고종은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담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회담 장소에 입장하지 못하였고, 일제는 이를 계기로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적으로 퇴위시킨다.[33]

고종황제 승하(1919년)

1919년 1월 12일 고종 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함녕전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1897년(광무 1)에 건축되어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다.[34]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 결국 그해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의 죽음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35]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 독립정부의 수립과정으로서 임시 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이다. 1946년 1월 16일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한 예비회담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뤄졌다.[36]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덕수궁 관람 루트 추천

각주

  1. 정릉동이라는 지역 이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었다. 태종 연간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긴 뒤에도 정릉동이라는 지명은 이어져 내려왔다.
  2.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2번째기사
  3.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4.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5.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6.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7.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3일 계미 7번째기사
  8. 『광해군일기(중초본)』 1권 광해 즉위년 2월 1일 무오 15번째 기사
  9. 『광해군일기』 1권 광해 즉위년 2월 2일 기미 9번째기사
  10.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11. 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
  12.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
  13.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8일 갑신 1번째 기사
  14.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15.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
  16.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 5월 22일 을묘 4번째 기사
  17.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1월 27일 임자 2번째 기사
  18.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11월 2일 경진 3번째 기사
  19. 『영조실록』 116권, 영조 47년 1월 16일 무오 2번째 기사
  20.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10월 4일 임자 1번째 기사
  21.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1일 양력 1번째 기사
  22.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2월 20일 양력 1번째 기사
  23.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7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
  24.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25.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11월 13일 양력 1번째기사
  26. 『순종실록부록』 10권, 순종 12년 1월 21일 양력 2번째기사
  27.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주요전각
  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관파천
  29.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
  30. 궁궐문화원-덕수궁역사
  31. 우리 궁궐 이야기, 홍순민, 250페이지
  32. 덕수궁 문화재청-덕수궁 복원장비 기본계획
  3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 중명전
  3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덕수궁 함녕전
  35. 덕수궁 문화재청-덕수궁 복원장비 기본계획
  3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미소공동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