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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표석정보 |사진=Bongsangsi02.png |사진출처=2018년 7월 촬영 |표석명칭=봉상시 |한자표기=奉常寺址 |영문명칭=Site of Bongsangsi Government Office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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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순종실록』권2 > 순종 1년(1908) > 8월 26일(양력) | |출처=『순종실록』권2 > 순종 1년(1908) > 8월 26일(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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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사강목』과 『연려실기술』, 『임하필기』에서 봉상시의 연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 ||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 ||
+ | !style="width:20%"|목종!!style="width:15%"|문종!!style="width:15%"|충렬왕!!style="width:50%"|충선왕 | ||
+ | |- | ||
+ | |태상(太常)<br/>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았다. ||태상부(太常府) || 태상시 || 봉상시(奉常寺)로 고쳤다가 전의시(典儀寺)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는 태상시ㆍ전의시로 섞어 불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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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봉상시(奉常寺) : 신라에서는 ‘전사서(典祀署)’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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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에서는 ‘태상부(太常府)’라 하였다가 봉상시로 고쳤고, 다시 ‘전의시(典儀寺)’ · ‘태상시(太常寺)’로 고치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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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는 봉상시를 설치하여 제사와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태종이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는데, 세종이 다시 ‘봉상시’라 일컬었다. | ||
+ | |출처=『연려실기술』> 별집 권7 > 관직전고(官職典故) > 제사(諸司) | ||
+ | }} | ||
+ | {{Blockquote|태조(太祖) 원년(1392)에 봉상시(奉常寺)를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고 시호(諡號)를 논의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9년(1409)에는 전사시(典祀寺)로 고쳤고, 세종(世宗) 3년(1421)에는 다시 봉상시라고 칭하고 판사(判事) 이하를 모두 문관으로 제수하도록 명하였으며, 세조(世祖) 11년(1465)에는 도제조(都提調) 1원(員)을 개정(改定)하였다. | ||
+ | |출처=『임하필기』권24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봉상시(奉常寺) | ||
+ | }} | ||
+ | 『연려실기술』과 『임하필기』에서는 분봉상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
+ | {{Blockquote|분봉상시(分奉常寺)는 고려에서는 사농경(司農卿)을 두어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는 ‘전농사(典農司)’란 것이 있어서, 사자(使者)가 나가면 ‘무농염철사(務農鹽鐵使)’라 일컬었다. 곧 고쳐서 ‘적저창(績儲倉)’이라 하였으며, 다시 사농시를 설치하였고, 또 적전관(籍田官)을 두어서 본시(本寺 분봉상시)에 예속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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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를 설치하여 적전(籍田)에 경작(耕作)한 곡식 및 사당 제사에 소용되는 술ㆍ단술과 희생(犧牲)을 진설하는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이 전농시(典農寺)라 고쳐 일컫고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다가, 뒤에는 봉상시에 병합하여 ‘분봉상시’라 일컬었으며, 동서 적전을 예속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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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조에 내시별감(內侍別監) 김원효(金元孝)가 순곡(舜穀) 30이삭을 진상(進上)하므로, 각궁(角弓) 한 장을 하사하였다. 원효가 조회에 들어오자 어떤 사람이 종자를 얻어 가꾸어 바쳤는데, 줄기는 조대[秫莖]와 같고, 이삭은 포황(蒲黃)과 같으며, 열매는 조와 같았다. 임금이 내농소(內農所) 동서 적전에 심어서 가꾸도록 명하였다. | ||
+ | |출처=『연려실기술』> 별집 권7 > 관직전고(官職典故) > 제사(諸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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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태조(太祖) 원년에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여 적전(籍田) 및 제사에 쓰는 주온(酒醞)과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원년(1401)에는 전농시(典農寺)라 칭하였고, 뒤에 봉상시에 합병되어 분봉상시(分奉常寺)라고 칭하였다. | ||
+ | |출처=『임하필기』권24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분봉상시(分奉常寺) | ||
+ | }} | ||
+ | 분봉상시는 봉상시의 기능 일부를 맡은 관청인데, 그 역할이 적전의 관리에 한정되어 있으며 봉상시의 주 기능을 나눠 맡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분예빈시를 설치하여 예빈시의 접대 기능을 분담시킨 것과는 다르다. 봉상시가 한때 전농시로 바뀌면서 전농시의 업무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전농시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봉상시에 병합되고 봉상시 관원을 파견하여 해당 업무를 감독하게 한 것이다. 이 분봉상시는 봉상시와 별개로 혁파되기도 하고 재설치되기도 하였다. | ||
+ |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봉상시의 위치를 서부 여경방이라고 하였으며, 제사와 증시 업무 외에 적전의 관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 ||
+ | {{Blockquote|봉상시(奉常寺)【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으며 제사(祭祀)와 시호(諡號)를 정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동적전(東籍田)과 서적전(西籍田)이 소속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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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正)ㆍ부정(副正)이 각각 1명씩이고, 첨정(僉正)ㆍ판관(判官)ㆍ주부(主簿)가 각각 2명씩이며, 직장(直長)ㆍ봉사(奉事)가 각각 1명씩이고, 부봉사가 1명인데 정9품이며, 참봉이 1명이다. 부봉사의 관품(官品)은 다른 관청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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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자영(尹子濚)이 지은 제명기에, “봉상(奉常)은 곧 옛날 태상(太常)이다. 직책이 제사를 관장하였으니, 위임의 중함이 다른 유사(有司)에 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벼슬을 둔 지가 오래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관제를 정하였는데, 판사는 정3품이고, 경(卿)은 종3품이며, 소경(少卿)은 정4품이고, 승(丞)은 종5품이며, 박사(博士)는 정6품이고, 협률랑(協律郞)은 정7품이며, 대축(大祝)은 정8품이고, 녹사(錄事)는 정9품이다. 태종 원년에 박사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또 경을 영(令)으로, 소경을 부령(副令)으로, 승을 판관(判官)으로 고쳤고, 9년에는 봉상시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다. 14년에는 영을 윤(尹)으로, 부령을 소윤(少尹)으로 고치고, 세종 3년에는 다시 봉상시로 개칭하였으며, 뒤에 또 소윤 이하는 모두 문관으로 제수(除授)하고, 위로 판사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오래도록 재직(在職)하게 하고, 임기가 만료되어 옮겨 주어야 할 사람은, 판사는 당상관으로 제수하고 그 외의 관원도 모두 관품을 고쳐 주었다. 지금까지도 이대로 따라서 길이 제도화하였으니, 이는 그 직임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 벼슬을 거쳐서 경상(卿相)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이가 전후에 많이 있으니, 진실로 후세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상상해 보고 사모할 바를 알게 하려면, 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송(唐宋) 이후로 비록 궁벽한 작은 고을이라도 그 관청의 벽에 전임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인데, 하물며 예의(禮儀)를 맡고 있는 태상(太常)에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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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숙정(崔淑精)이 지은 〈세심당기(洗心堂記)〉에 “동료(同僚) 무송(茂松) 윤선생(尹先生)이 봉상시에 두 번째로 들어와서, 그가 일을 하는 청사(廳舍)를 세심(洗心)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창녕(昌寧) 성중경(成重卿 성임(成任)) 선생이 큰 글자로 편액(扁額)을 써서 붙였고, 진산(晉山) 강경순(姜景醇 강희맹(姜希孟)) 선생과 달성(達城) 서강중(徐剛中 서거정(徐居正)) 선생이 서로 시를 지었는데, 글씨와 글이 난새와 봉황처럼 아름다운 광채가 벽상에 빛나고 있다. 무송이 공사를 다스리는 여가에 조용히 앉아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당에 있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할 것이니, 마음에 조금이라도 누가 있으면 이 당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란 실로 형체가 없으니, 이 관직에 있는 자로 뒤에 와서 지금을 잇는 자가 당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과 마음을 씻는 방법을 혹 모르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는 글을 엮어서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마음이란 신명(神明)의 집이며, 한 몸의 주재(主宰)이다. 아직 사물과 접촉이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거울처럼 비고 저울처럼 공평한 것이 깨끗하고 맑아서 비록 귀신도 엿볼 수 없지만 외물과 접하게 되면 선과 악이 기미를 따라서 생기게 되어 기품(氣稟)의 구속과 물욕(物慾)의 가리움을 면할 수 없어서, 어두워지고 더러워지는 것이 거의 다 그러하다.’ 옛날에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한다.’ 하고, 또는 '욕심을 적게 하라.’ 하였으니, 이는 더러운 물욕을 씻어 버리고 양심을 기르는 공부가 천리(天理)의 바름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현이라도 이 공부에 종사하면서 오히려 중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목욕통과 그릇에 새기고, 서재에 써서 마음속으로 수양한 것이 비록 성성(惺惺)한 경지에 이르더라도, 밖에서 경계하는 것도 애썼다. 이것은 마음이 물욕에 따라서 옮겨지는 것이 있으면 닳아지고 검어지기가 쉽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마치 보배로운 구슬이 탁한 흙탕물에 빠지고 맑은 거울이 티끌 속에 묻힌 것처럼 되니, 진실로 빛을 회복하거나 다시 비출 수 있는 기약이 없게 되어, 오관(五關)이 한번 열리면 사지와 몸의 모든 부분이 드디어 풀어져서 본체(本體)의 밝음이 날로 어두워져 외부에서 오는 물욕을 막아낼 수 없게 되고, 끝내는 천지와 귀신까지도 함부로 대하여, 그 몸을 해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군자가 그 마음을 씻기를 마지 않은 바이다. 우리 무송 선생이 세심(洗心)이라고 그 당의 이름을 지은 것은 벗과 동료들과 같이 경계하고 반성하려는 것이다. 동료들이나 뒤에 이 당에 오는 이들이 이 당의 이름을 따라 그 본뜻을 연구하여 사욕을 이기고 공심으로 돌아가서 날마다 새롭게 하여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소리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눈을 즐겁게 하는 채색이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입을 즐겁게 하는 고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코를 즐겁게 하는 향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려서 모든 외부의 물건이 내 마음을 유혹하고, 내 진심을 해롭게 하는 것은 다 씻어 버린다면 마음속이 탁 트이고 밝아져서 사욕이 깨끗이 없어지고 천리가 유행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가 곧장 반명(盤銘)과 같이 날로 새로워지며, 강한(江漢)의 물로 씻는 것과 같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확장하여 가게 되면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힐 수도 있는데, 하물며 이 자그마한 관청의 일이랴? 그런 즉 이 당이 어찌 우리들의 한때의 경계하는 장소만이 될 것이랴? 뒤에 오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 무궁할 것이다. 보는 분들은 여기에 뜻을 다하기 바란다.” 하였다. 무송 선생의 이름은 자영(子濚)이고, 자(字)는 담수(淡叟)로, 현재 봉상시 부정(副正)이라 한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직장(直長)과 봉사(奉事) 각 1명씩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혁파하였다. | ||
+ | |출처=『신증동국여지승람』권2 > 경도 하(京都下) | ||
+ | }} | ||
+ | 위 기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심당기>는 봉상시 관해(官廨)의 하나였던 세심당에 붙인 기문이다. 최숙정(崔淑精)의 문집 『소요재집(逍遙齋集)』권2에 수록된 글이다. 세심당에 관한 글은 강희맹, 서거정, 심의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 ||
+ | {{Blockquote|봉상시세심당(奉常寺洗心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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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族兄淡叟氏。博雅君子也。以才擢置太常亞正。莅事以勤。御官以廉。連捷復試,拔英兩科。聲名藉甚。爲時輩所服。扁其所居廨宇曰洗心堂。其有旨哉。凡吏之怠于職。荒于政者。皆心有所汚故也。心旣有汚則去其汚復其潔。可也。心無形也。非浣濯澡雪之所可施也。將如何哉。洗之其必有方焉。其必有術焉。淡叟氏其知方術而欲接乎目耶。抑慮其難防而豫爲之所歟。是未可知也已。謹矢之以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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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澹寂本虛靈。愚智共圓明。慾因氣稟生。氛翳蝕大淸。繁興亂七情。逐一互紛爭。耳之欲淫聲。目之耽美形。外交中不寧。貪濁沒惺惺。如珠墮穢坑。滌穢還晶熒。欲洗渴滄溟。難除一點腥。執之如奉盈。本自有權衡。請君試靜聽。防意信如城。爲吏保令名。事上竭忠誠。敬以爲律令。洗濁還淸冷。寫此贈厖兄。揭爲座右銘。 | ||
+ | |출처=강희맹(姜希孟),『사숙재집(私淑齋集)』권3 > 오언고시 | ||
+ | }} | ||
+ | {{Blockquote|(…)文職公署奉常寺崔淑精洗心堂記曰。僚友茂松尹先生。再入太常也。名其所處廨宇。曰洗心。昌寧成先生重卿。書大字以扁之。晉山姜先生景醇,達城徐先生剛中。相與詩之。鸞章鳳彩。輝暎壁上。而 治事之暇。翛然宴坐。乃謂余曰。凡處于是堂者。須先洗其心。心苟有累。是辱吾堂也。然心實無形。則同職者。後來繼今者。亦無迷其名之之義。洗之之方歟。子其爲文以記之。余惟心者云云。(…) | ||
+ | |출처=강희맹,『사숙재집』> 부록(附錄) | ||
+ | }} | ||
+ | {{Blockquote|洗心堂謌。爲尹大常。戱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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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심당가(洗心堂歌). 윤 태상(尹太常)을 위하여 장난삼아 짓다.<br/>세심당 앞에는 술이 흡사 회수와 같고 / 洗心堂前酒如淮<br/>세심당 북쪽에는 오만 꽃이 만발했는데 / 洗心堂北花滿開<br/>태상 선생이 마음 깨끗이 하고 앉았으니 / 太常先生洗心坐<br/>추수 같은 정신이요 빙설 같은 회포로다 / 秋水精神氷雪懷<br/>백 년이라 삼만하고도 육천 일에 / 百年三萬六千日<br/>한 달이면 이십구 일 동안을 재계하여 / 一月二十九淸齋<br/>아내가 있어도 일생을 서로 가까이 않고 / 有妻一生不相親<br/>술이 있어도 한 방울 입술에 대지 않는데 / 有酒一滴不入脣<br/>꽃을 대하면 바라만 볼 뿐 말을 못 해라 / 對花脈脈不得語<br/>때때로 담장 넘어가는 나비만 볼 뿐이네 / 時見蜂蝶過墻去 | ||
+ | 그대는 보지 못했나 이원 제자 삼천 인이 / 君不見梨園弟子三千人<br/>노래하고 춤추고 눈짓하며 청춘을 뽐낼 제 / 歌舞顧盻生靑春<br/>두릉의 후신은 눈마저 길이 썰렁한 채로 / 杜陵後身眼長寒<br/>담장 모서리서 곁눈질로 등 뒤만 보던 걸 / 牆角睥睨背後看<br/>이때엔 마음 씻기가 길이 마음에 괴로워 / 此時洗心長苦心<br/>때때로 상사의 시구를 읊조려 내나니 / 有時吟出相思吟<br/>청컨대 그대는 마음보다 먼저 눈을 씻어서 / 請君洗心先洗眼<br/>온갖 번뇌가 끊어지도록 하게나 / 能令煩惱斷<br/>그대는 못 보았나 남궁 선생은 하얀 귀밑털로 / 君不見南宮先生鬢如霜<br/>소년 태상같이 광기는 부리지 못하지만 / 不如少年太常狂<br/>마음은 또한 안 씻어도 갠 날처럼 빛나고 / 心亦不洗光似霽<br/>눈은 역시 안 씻어도 씻은 듯이 말끔하고 / 眼亦不洗淨如灑<br/>술 있으면 취하고 술 없으면 깨곤 하면서 / 有酒則醉無則醒<br/>세상에 헛된 이름 날리길 바라지 않는다네 / 不要世上流虛名<br/>나는 지금 손뼉 치며 크게 껄껄 웃으면서 / 我今拍手笑呵呵<br/>그대를 위하여 세심가를 한 번 노래하노라 / 爲君一歌洗心歌<br/>|출처=서거정(徐居正),『사가집(四佳集)』권13 > 제11 시류(詩類) | ||
+ | }} | ||
+ | 『동사강목』과 『연려실기술』, 『임하필기』에서 봉상시의 연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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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를 설치하여 적전(籍田)에 경작(耕作)한 곡식 및 사당 제사에 소용되는 술ㆍ단술과 희생(犧牲)을 진설하는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이 전농시(典農寺)라 고쳐 일컫고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다가, 뒤에는 봉상시에 병합하여 ‘분봉상시’라 일컬었으며, 동서 적전을 예속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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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조에 내시별감(內侍別監) 김원효(金元孝)가 순곡(舜穀) 30이삭을 진상(進上)하므로, 각궁(角弓) 한 장을 하사하였다. 원효가 조회에 들어오자 어떤 사람이 종자를 얻어 가꾸어 바쳤는데, 줄기는 조대[秫莖]와 같고, 이삭은 포황(蒲黃)과 같으며, 열매는 조와 같았다. 임금이 내농소(內農所) 동서 적전에 심어서 가꾸도록 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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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봉상시는 봉상시의 기능 일부를 맡은 관청인데, 그 역할이 적전의 관리에 한정되어 있으며 봉상시의 주 기능을 나눠 맡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분예빈시를 설치하여 예빈시의 접대 기능을 분담시킨 것과는 다르다. 봉상시가 한때 전농시로 바뀌면서 전농시의 업무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전농시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봉상시에 병합되고 봉상시 관원을 파견하여 해당 업무를 감독하게 한 것이다. 이 분봉상시는 봉상시와 별개로 혁파되기도 하고 재설치되기도 하였다. | ||
+ |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봉상시의 위치를 서부 여경방이라고 하였으며, 제사와 증시 업무 외에 적전의 관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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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正)ㆍ부정(副正)이 각각 1명씩이고, 첨정(僉正)ㆍ판관(判官)ㆍ주부(主簿)가 각각 2명씩이며, 직장(直長)ㆍ봉사(奉事)가 각각 1명씩이고, 부봉사가 1명인데 정9품이며, 참봉이 1명이다. 부봉사의 관품(官品)은 다른 관청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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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자영(尹子濚)이 지은 제명기에, “봉상(奉常)은 곧 옛날 태상(太常)이다. 직책이 제사를 관장하였으니, 위임의 중함이 다른 유사(有司)에 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벼슬을 둔 지가 오래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관제를 정하였는데, 판사는 정3품이고, 경(卿)은 종3품이며, 소경(少卿)은 정4품이고, 승(丞)은 종5품이며, 박사(博士)는 정6품이고, 협률랑(協律郞)은 정7품이며, 대축(大祝)은 정8품이고, 녹사(錄事)는 정9품이다. 태종 원년에 박사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또 경을 영(令)으로, 소경을 부령(副令)으로, 승을 판관(判官)으로 고쳤고, 9년에는 봉상시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다. 14년에는 영을 윤(尹)으로, 부령을 소윤(少尹)으로 고치고, 세종 3년에는 다시 봉상시로 개칭하였으며, 뒤에 또 소윤 이하는 모두 문관으로 제수(除授)하고, 위로 판사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오래도록 재직(在職)하게 하고, 임기가 만료되어 옮겨 주어야 할 사람은, 판사는 당상관으로 제수하고 그 외의 관원도 모두 관품을 고쳐 주었다. 지금까지도 이대로 따라서 길이 제도화하였으니, 이는 그 직임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 벼슬을 거쳐서 경상(卿相)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이가 전후에 많이 있으니, 진실로 후세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상상해 보고 사모할 바를 알게 하려면, 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송(唐宋) 이후로 비록 궁벽한 작은 고을이라도 그 관청의 벽에 전임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인데, 하물며 예의(禮儀)를 맡고 있는 태상(太常)에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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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숙정(崔淑精)이 지은 〈세심당기(洗心堂記)〉에 “동료(同僚) 무송(茂松) 윤선생(尹先生)이 봉상시에 두 번째로 들어와서, 그가 일을 하는 청사(廳舍)를 세심(洗心)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창녕(昌寧) 성중경(成重卿 성임(成任)) 선생이 큰 글자로 편액(扁額)을 써서 붙였고, 진산(晉山) 강경순(姜景醇 강희맹(姜希孟)) 선생과 달성(達城) 서강중(徐剛中 서거정(徐居正)) 선생이 서로 시를 지었는데, 글씨와 글이 난새와 봉황처럼 아름다운 광채가 벽상에 빛나고 있다. 무송이 공사를 다스리는 여가에 조용히 앉아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당에 있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할 것이니, 마음에 조금이라도 누가 있으면 이 당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란 실로 형체가 없으니, 이 관직에 있는 자로 뒤에 와서 지금을 잇는 자가 당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과 마음을 씻는 방법을 혹 모르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는 글을 엮어서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마음이란 신명(神明)의 집이며, 한 몸의 주재(主宰)이다. 아직 사물과 접촉이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거울처럼 비고 저울처럼 공평한 것이 깨끗하고 맑아서 비록 귀신도 엿볼 수 없지만 외물과 접하게 되면 선과 악이 기미를 따라서 생기게 되어 기품(氣稟)의 구속과 물욕(物慾)의 가리움을 면할 수 없어서, 어두워지고 더러워지는 것이 거의 다 그러하다.’ 옛날에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한다.’ 하고, 또는 '욕심을 적게 하라.’ 하였으니, 이는 더러운 물욕을 씻어 버리고 양심을 기르는 공부가 천리(天理)의 바름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현이라도 이 공부에 종사하면서 오히려 중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목욕통과 그릇에 새기고, 서재에 써서 마음속으로 수양한 것이 비록 성성(惺惺)한 경지에 이르더라도, 밖에서 경계하는 것도 애썼다. 이것은 마음이 물욕에 따라서 옮겨지는 것이 있으면 닳아지고 검어지기가 쉽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마치 보배로운 구슬이 탁한 흙탕물에 빠지고 맑은 거울이 티끌 속에 묻힌 것처럼 되니, 진실로 빛을 회복하거나 다시 비출 수 있는 기약이 없게 되어, 오관(五關)이 한번 열리면 사지와 몸의 모든 부분이 드디어 풀어져서 본체(本體)의 밝음이 날로 어두워져 외부에서 오는 물욕을 막아낼 수 없게 되고, 끝내는 천지와 귀신까지도 함부로 대하여, 그 몸을 해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군자가 그 마음을 씻기를 마지 않은 바이다. 우리 무송 선생이 세심(洗心)이라고 그 당의 이름을 지은 것은 벗과 동료들과 같이 경계하고 반성하려는 것이다. 동료들이나 뒤에 이 당에 오는 이들이 이 당의 이름을 따라 그 본뜻을 연구하여 사욕을 이기고 공심으로 돌아가서 날마다 새롭게 하여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소리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눈을 즐겁게 하는 채색이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입을 즐겁게 하는 고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코를 즐겁게 하는 향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려서 모든 외부의 물건이 내 마음을 유혹하고, 내 진심을 해롭게 하는 것은 다 씻어 버린다면 마음속이 탁 트이고 밝아져서 사욕이 깨끗이 없어지고 천리가 유행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가 곧장 반명(盤銘)과 같이 날로 새로워지며, 강한(江漢)의 물로 씻는 것과 같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확장하여 가게 되면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힐 수도 있는데, 하물며 이 자그마한 관청의 일이랴? 그런 즉 이 당이 어찌 우리들의 한때의 경계하는 장소만이 될 것이랴? 뒤에 오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 무궁할 것이다. 보는 분들은 여기에 뜻을 다하기 바란다.” 하였다. 무송 선생의 이름은 자영(子濚)이고, 자(字)는 담수(淡叟)로, 현재 봉상시 부정(副正)이라 한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직장(直長)과 봉사(奉事) 각 1명씩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혁파하였다. | ||
+ | |출처=『신증동국여지승람』권2 > 경도 하(京都下) | ||
+ | }} | ||
+ | 위 기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심당기>는 봉상시 관해(官廨)의 하나였던 세심당에 붙인 기문이다. 최숙정(崔淑精)의 문집 『소요재집(逍遙齋集)』권2에 수록된 글이다. 세심당에 관한 글은 강희맹, 서거정, 심의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 ||
+ | {{Blockquote|봉상시세심당(奉常寺洗心堂) | ||
+ | |||
+ | 族兄淡叟氏。博雅君子也。以才擢置太常亞正。莅事以勤。御官以廉。連捷復試,拔英兩科。聲名藉甚。爲時輩所服。扁其所居廨宇曰洗心堂。其有旨哉。凡吏之怠于職。荒于政者。皆心有所汚故也。心旣有汚則去其汚復其潔。可也。心無形也。非浣濯澡雪之所可施也。將如何哉。洗之其必有方焉。其必有術焉。淡叟氏其知方術而欲接乎目耶。抑慮其難防而豫爲之所歟。是未可知也已。謹矢之以詩。 | ||
+ | |||
+ | 澹寂本虛靈。愚智共圓明。慾因氣稟生。氛翳蝕大淸。繁興亂七情。逐一互紛爭。耳之欲淫聲。目之耽美形。外交中不寧。貪濁沒惺惺。如珠墮穢坑。滌穢還晶熒。欲洗渴滄溟。難除一點腥。執之如奉盈。本自有權衡。請君試靜聽。防意信如城。爲吏保令名。事上竭忠誠。敬以爲律令。洗濁還淸冷。寫此贈厖兄。揭爲座右銘。 | ||
+ | |출처=강희맹(姜希孟),『사숙재집(私淑齋集)』권3 > 오언고시 | ||
+ | }} | ||
+ | {{Blockquote|(…)文職公署奉常寺崔淑精洗心堂記曰。僚友茂松尹先生。再入太常也。名其所處廨宇。曰洗心。昌寧成先生重卿。書大字以扁之。晉山姜先生景醇,達城徐先生剛中。相與詩之。鸞章鳳彩。輝暎壁上。而 治事之暇。翛然宴坐。乃謂余曰。凡處于是堂者。須先洗其心。心苟有累。是辱吾堂也。然心實無形。則同職者。後來繼今者。亦無迷其名之之義。洗之之方歟。子其爲文以記之。余惟心者云云。(…) | ||
+ | |출처=강희맹,『사숙재집』> 부록(附錄) | ||
+ | }} | ||
+ | {{Blockquote|洗心堂謌。爲尹大常。戱作。 | ||
+ | |||
+ | 세심당가(洗心堂歌). 윤 태상(尹太常)을 위하여 장난삼아 짓다.<br/>세심당 앞에는 술이 흡사 회수와 같고 / 洗心堂前酒如淮<br/>세심당 북쪽에는 오만 꽃이 만발했는데 / 洗心堂北花滿開<br/>태상 선생이 마음 깨끗이 하고 앉았으니 / 太常先生洗心坐<br/>추수 같은 정신이요 빙설 같은 회포로다 / 秋水精神氷雪懷<br/>백 년이라 삼만하고도 육천 일에 / 百年三萬六千日<br/>한 달이면 이십구 일 동안을 재계하여 / 一月二十九淸齋<br/>아내가 있어도 일생을 서로 가까이 않고 / 有妻一生不相親<br/>술이 있어도 한 방울 입술에 대지 않는데 / 有酒一滴不入脣<br/>꽃을 대하면 바라만 볼 뿐 말을 못 해라 / 對花脈脈不得語<br/>때때로 담장 넘어가는 나비만 볼 뿐이네 / 時見蜂蝶過墻去 | ||
+ | 그대는 보지 못했나 이원 제자 삼천 인이 / 君不見梨園弟子三千人<br/>노래하고 춤추고 눈짓하며 청춘을 뽐낼 제 / 歌舞顧盻生靑春<br/>두릉의 후신은 눈마저 길이 썰렁한 채로 / 杜陵後身眼長寒<br/>담장 모서리서 곁눈질로 등 뒤만 보던 걸 / 牆角睥睨背後看<br/>이때엔 마음 씻기가 길이 마음에 괴로워 / 此時洗心長苦心<br/>때때로 상사의 시구를 읊조려 내나니 / 有時吟出相思吟<br/>청컨대 그대는 마음보다 먼저 눈을 씻어서 / 請君洗心先洗眼<br/>온갖 번뇌가 끊어지도록 하게나 / 能令煩惱斷<br/>그대는 못 보았나 남궁 선생은 하얀 귀밑털로 / 君不見南宮先生鬢如霜<br/>소년 태상같이 광기는 부리지 못하지만 / 不如少年太常狂<br/>마음은 또한 안 씻어도 갠 날처럼 빛나고 / 心亦不洗光似霽<br/>눈은 역시 안 씻어도 씻은 듯이 말끔하고 / 眼亦不洗淨如灑<br/>술 있으면 취하고 술 없으면 깨곤 하면서 / 有酒則醉無則醒<br/>세상에 헛된 이름 날리길 바라지 않는다네 / 不要世上流虛名<br/>나는 지금 손뼉 치며 크게 껄껄 웃으면서 / 我今拍手笑呵呵<br/>그대를 위하여 세심가를 한 번 노래하노라 / 爲君一歌洗心歌<br/>|출처=서거정(徐居正),『사가집(四佳集)』권13 > 제11 시류(詩類) | ||
+ | }} | ||
+ | {{Blockquote|세심당명(洗心堂銘) 【堂在太常寺酒庫】 | ||
+ | |||
+ | 於戲。學視者。先見輿薪。學聽者。先聞撞鐘。夫人之心。管攝乎視聽。而主于中。湛湛然無垢。焉用夫洗爲。夜氣潛銷千里馳。視喪而攫人之金。聽閼而懵天之傾。況於輿薪之形。況於撞鐘之鳴。枵然一身。唯不亡者虛靈。物欲食而蒙蔽。盍先洗而反明。若余者。爲如何哉。混沌爲友。凝心醉鄕。方將耳視而目聽。抱迷罔而坐忘。寂乎漠乎。不知人間之得失。又奚暇論洗心之方也哉。 | ||
+ | |출처=심의(沈義),『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권4 > 잡저(雜著) | ||
+ | }} | ||
+ | 다음은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의 기록이다. 후대의 위치인 인달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
+ | {{Blockquote|서부 인달방에 있다. 개국 초기에 세웠다. 제사와 시호 논의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동적전(東籍田)·서적전(西籍田)이 봉상시에 소속되어 있다. 태종 때는 전사청(典祀廳)이라 하였다가 세종 3년에 다시 봉상시로 고쳤다. 관원들이 거처하는 집에 세심당(洗心堂)이 있다. 성중경(成重卿)이 현판을 쓰고 최숙정(崔淑精)이 기문을 지었다. | ||
+ | |||
+ | 동적전은 동교(東郊) 10리 되는 곳에 있다. 이름을 전농(典農)이라 하고 친경당(親耕堂)의 관청집이 있으며, 필분각(苾芬閣)이라는 데 창고가 있어서 각색 곡식을 저장하고 있다. | ||
+ | |||
+ | 태조 때에 적전영승(籍田令丞)이 있어서 선농단에 친경할 때에 제사를 맡아 보게 하였다. 서적전은 개성부(開城府)에 있어서 적전에서 소출되는 각색 곡식으로 종묘 이하의 비상시 특별한 제사의 자성(粢盛)과 종묘의 6곡 천신에 공급한다. 봉상시는 제향일을 맡았으므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숙수(熟手)가 소속되어 있다. 자주(煮酒)라는 술을 빚는데, 그 술을 저장해 둔 지붕은 기와가 썩는다. 제포(祭脯)는 편포(片脯)라 하는데, 편포 만드는 방법은 칼로 고기를 난도질하여 흐물흐물하게 하여 쪽쪽으로 말린다. 봄과 가을에 만들어 둔다. | ||
+ | |||
+ | 성종 때 언양현(彦陽縣) 산 밑에 외[苽]가 있어서 그 종자가 경적전에서 나왔으므로 적전과(籍田苽)라 한다. 겨울에 심어서 4월 그믐께 나라에 바친다. 그 종자가 심히 키우기 어려웠다. 성종이 이것을 알고 폐지하게 하고 경적전에 보리와 외를 심게 하였는데, 외가 제일 먼저 익으므로 단오 전에 진공한다. | ||
+ | 또 문헌비고에 보면 “분봉상시는 태도 원년에 고려 때 제도대로 사농시(司農寺)를 두고 적전에 곡식을 경작하는 것과 제주의 예주(醴酒) 희생 등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태종 원년에 전농시라 고쳤다가 뒤에 봉상시와 합치고 분봉상시라 하였다.”고 하였다. | ||
+ | |출처=『한경지략』> 궐외각사 > 봉상시 | ||
+ | }} | ||
+ | {{Blockquote|봉상시(奉常寺)【예전엔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었는데 후에 인달방(仁達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고, 제사 및 시호를 의논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 9년에 전사사(典祀司)로 고쳤으며, 세종 3년에 다시 옛 이름으로 하였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였는데, 태종 원년에 고쳐 전농시(典農寺)라 칭하고 자성(粢盛 나라 제사에 쓰는 곡물)을 맡았으며, 후에 봉상시에 합병하고 분시(分寺)라 칭하였다. 동적전(東籍田)ㆍ서적전이 속한다. ○도제조ㆍ제조 각 1원, 정(正) 1원이며, 부정은 감하며, 첨정 종4품 ㆍ판관 각 1원인데 자벽하며, 주부 2원, 직장ㆍ봉사ㆍ부봉사ㆍ참봉 각 1원이다. ○신주(神主)의 재목인 밤나무 생산지에 경차관(敬差官)ㆍ범철관(泛鐵官)을 보내는데, 경상도에는 식년(式年)마다 한 번씩 채취하며, 충청도ㆍ전라도는 식년을 건너서 한 번씩 채취하고, 강원도는 국가 수요가 부족하면 간혹 별도로 베어 취하기도 한다. ○서쪽 동산에 신실(神室) 6칸이 있어 단사(壇祠) 신위판 34위(位)를 봉안하였다. ○윤자영(尹子濚)의 제명기(題名記)와 최숙정(崔淑精)의 세심당기(洗心堂記)가 있다.】 | ||
+ | |출처=『신증동국여지승람』권2 >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 > 경도(京都) | ||
+ | }} | ||
+ | |||
===근현대 자료=== | ===근현대 자료=== | ||
+ | 『경성부사』에서는 인달방의 봉상시 위치에 대해 ‘당주동 128번지’라는 주소를 제시하고 있다. 또, 1895년 봉상사로 개칭하여 1907년까지 존속하였음을 밝혔다. | ||
+ | {{Blockquote|(29) 봉상시奉常寺 (춘상사春常司) | ||
+ | |||
+ | 설치 - 태조조 | ||
+ | |||
+ | 위치 - 서부 여경방, 후에 인달방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당주동 128번지 | ||
+ | |||
+ | 종묘사직 제사와 의시(議諡)를 관장하는 곳이다. 태조 원년 봉상시 제도를 정하고, 태종 9년 전사시(典祀寺)로 개칭하였다. 세종 3년 다시 봉상시로 복구하였다. | ||
+ | |||
+ | 1895년 봉상사(奉常司)로 개칭하였고, 1907년 사무를 규장각과 장례원(掌禮院)으로 이관하였다. | ||
+ | |출처=『경성부사』제1권 > 제2편 이조시대의 경성(Ⅰ) > 제1장 이조 국초 경성의 건설 > 8. 문직공서 | ||
+ | }} | ||
+ | 『경성부사』에서는 바로 뒤이어 분봉상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
+ | {{Blockquote|(30) 분봉상시(分奉常寺) | ||
+ | 적전에 곡식을 기르고 사제(祠祭)·주례(酒醴)·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던 곳이다. 태조 원년 사농시(司農寺)를 두었다. 태종 원년 전농시로 개칭하고 14년에 봉상사로 합하여 분봉상시라고 불렀다. | ||
+ | |출처=『경성부사』제1권 > 제2편 이조시대의 경성(Ⅰ) > 제1장 이조 국초 경성의 건설 > 8. 문직공서 | ||
+ | }} | ||
+ | 봉상시, 곧 봉상사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 ‘이왕직 봉상소(李王職奉常所)’로 불리게 되었다. ‘이왕직(李王職)’은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제국황실을 이왕가로 격하하고, 기존의 궁내부 소관 업무를 담당하게 한 기구이다. 『경성부사』에서는 봉상사 업무는 1907년 규장각과 장례원으로 이관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봉상사 건물은 그대로 남아 이왕직봉상소로 불렸으며 여전히 제사를 돕기도 했다. 아래는 1921년의 기사이다. | ||
+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Bongsangsi donga.png|『동아일보』, 1921년 5월 5일(석간 03면) | ||
+ | </gallery> | ||
+ | 일제 때 봉상소 건물은 이왕직 아악대(李王職雅樂隊)에 활용되기도 했다. 1926년 아악대는 운니동에 새 거처를 정하게 되어 봉상소를 떠난다. 아래는 1921년 사진이다. | ||
+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Bongsangsi 1921.png|1921년,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朝鮮中國音樂調査紀行』<ref>출처=韓國音樂學資料叢書, 제41집 : 근현대 한국음악 풍경</ref> | ||
+ | </gallery> | ||
+ | 봉상소 건물은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 역할을 한 적도 있다. 일제는 1928년 이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역대 국왕 및 왕실의 태옹(胎甕)을 수습하여 바로 이곳 경성의 이왕직 봉상소에 임시 보관하였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기사이다. | ||
+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Bongsangsi maeil.png|『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 (3면 1단) | ||
+ | </gallery> | ||
+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Bongsangsi donga2.png|『동아일보』, 1929년 3월 1일 (2면) | ||
+ | </gallery> | ||
+ | 1936년 봉상소 건물의 사진이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다만 자료 상태가 좋지 않아 또렷한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며, 기사의 내용도 판독이 어렵다. | ||
+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Bongsangsi maeil2.png|『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 (3면 1단) | ||
+ | </gallery> | ||
+ | 이 봉상소 건물은 1936년 화재를 입게 된다. 당시의 기사에 의하면 이 화재로 1동(棟) 10칸(間)이 전소(全燒)했다고 한다. | ||
+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Bongsangsi donga3.png|『동아일보』, 1936년 1월 14일 | ||
+ | </gallery> | ||
+ | 아래는 1958년에 편찬된 『서울명소고적』에서 봉상시 건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이 글을 통해 1958년 당시 봉상시 본채 건물이었던 세심당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 | {{Blockquote|봉상시(奉常寺) | ||
+ | |||
+ | 당주동(唐珠洞) 128번지에 거의 허물어져 가는 옛 건물이 한 채 있다. 이것이 이씨 조선시대의 봉상시 자리이다. | ||
+ | |||
+ | 봉상시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는 일을 맡아 보았고 또 의시(儀諡)도 맡아 보았다. | ||
+ | |||
+ | 태조 원년(1392)에 이 제도를 처음 마련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전사시(典祀寺)라고 고쳐 불렀다가 세종 3년에 다시 봉상시라 하였다. 고종 32년(1895)에는 봉상사(奉常司)라고 고쳤었고 순종 융희 원년(1907)에 이르러 폐지되고 말았다. | ||
+ | |||
+ |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봉상시와 함께 분봉상시(分奉常寺)도 있었는데 적전(籍田)에 곡식을 심어 경작하는 일과 사제(祀祭) 주례(酒醴)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 ||
+ | |||
+ | 원래 태조는 이같은 일을 맡아 보는 기관으로 그의 원년에 사농시(司農寺)를 두었다. 그 후 태종은 전농시(典農寺)라 고쳤고 이어서 그의 14년(1414)에 이를 봉상시에 합쳐 분봉상시라 하였다. | ||
+ | |||
+ | 봉상시의 건물 본채는 세심당(洗心堂)이라 하였다. 이 건물이 날로 퇴락되어 가고 있음은 못내 섭섭한 일이다. (96-97쪽) | ||
+ | |출처=서울특별시편찬위원회,『서울명소고적』, 1958 | ||
+ | }} | ||
===지도 및 도판자료=== | ===지도 및 도판자료=== | ||
+ | <도성대지도>와 <수선전도>에서 인달방의 봉상시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 ||
+ | <gallery mode=packed heights=3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Bongsangsi dosung.png|도성대지도(18세기 중반) | ||
+ | 파일:Bongsangsi susun.png|수선전도(1860년대) | ||
+ | </gallery> | ||
+ | 아래는 당주동 128번지가 표시된 지적도이다. | ||
+ | <gallery mode=packed heights=3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Bongsangsi ji.png|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지적도(1913)<ref>경기도 경성부 서부 서대문정1정목외5정-011[당주동,도렴동,내자동,적선동,수창동]</ref> | ||
+ | </gallery> | ||
+ | 아래는 현재 표석위치이다. 고지도 및 지적도에 표시된 자리와 대략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
<gallery mode=packed heights=300px style="float:center" > | <gallery mode=packed heights=3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 | + | 파일:Bongsangsi today.png |
− | + | 파일:Bongsangsi today2.png | |
− | |||
− | |||
− | 파일: | ||
− | |||
</gallery> | </gallery> | ||
252번째 줄: | 445번째 줄: | ||
===갤러리=== | ===갤러리=== |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 | + | 파일:Bongsangsi01.png |
− | 파일: | + | 파일:Bongsangsi03.png |
− | 파일: | + | 파일:Bongsangsi04.png |
− | 파일: | + | 파일:Bongsangsi05.png |
− | 파일: | + | 파일:Bongsangsi06.png |
</gallery> | </gallery> | ||
+ | ==주석== | ||
+ | <references/> |
2018년 11월 6일 (화) 14:59 기준 최신판
봉상시 (奉常寺址) |
|
표석명칭 | 봉상시 |
---|---|
한자표기 | 奉常寺址 |
영문명칭 | Site of Bongsangsi Government Office |
설치연도 | 2016년 |
주소 | 새문안로3길 15(당주동 128-27) |
표석 문안
봉상시는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를 관장하고, 시호를 제정하며, 적전(籍田)의 농사를 관리하던 관청이다. 1392년(태조 1)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 32) 봉상사(奉常司)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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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봉상시(奉常寺)는 조선 태조 1년(1392)에 종묘(宗廟)의 제향(祭享)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설치되었다.
봉상시는 고려 때의 태상부(太常府)를 이어받은 제도로서, 전의시(典儀寺), 봉상시(奉常寺), 태상시(太常寺) 등의 명칭이 있었다.
그런데 종묘 제향을 관장한다는 봉상시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래는 조선전기 봉상시의 활동을 보여주는 실록의 기사들이다.
봉상시에 명하여 4대 선조의 신주를 만들게 하다
命奉常寺作四代神主。 봉상시(奉常寺)에 명하여 사대(四代)의 신주(神主)를 만들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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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조실록』권1 > 태조 1년(1392) > 8월 9일(무오) |
나라의 제사에 사용할 신주와 위판의 제작, 제례에 사용할 음악과 악기를 살피는 일, 제사에 소용되는 배신(陪臣)의 제복(祭服)이나 곡식을 담는 그릇 등을 관리하는 것 등이 봉상시가 맡은 일이었다. 봉상시에 대하여 ‘예악’을 맡은 관사라고 한 태종 1년 11월 기사는 봉상시가 제례의 음악을 담당하는 곳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 시호(諡號)를 정하여 올리는 것도 봉상시의 일이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시호 제정의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정부에서 이조로, 이조에서 예조로 사안이 넘어오면 예조에서는 봉상시에 지시하여 그 행적을 논하여 시호를 제정하게 하였다. 그 다음 예조에서 다시 의정부로 보내어 임금의 교지를 받는다. 아래는 이에 관한 절차를 명시해 놓은 세종대의 기록이다.
봉상시에서 시호를 올려도 최종적으로는 임금의 뜻이 중요했다. 또, 시호를 잘못 올렸다고 하여 봉상시 관원이 탄핵을 받거나 구금되는 일도 있었다.
태종 때에는 잠시 봉상시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이때 제사 음식의 준비는 전농시에서, 제사 음악과 기물의 관리는 봉상시에서 맡고 있었으므로 제사를 전담하는 관청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농시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쳐서 제사 전담 기구로 만들고, 봉상시를 전농시로 바꿔 적전(籍田) 관리 등을 맡기게 된다. 봉상시가 맡았던 여러 역할들 중 일부(제사 기물 관리)는 전사시로 넘어가고, 일부(증시, 제복과 음악)는 예조의 직접 관할 업무로 편성한 것이다. 봉상시는 전농시로 바뀌면서 소속도 예조에서 호조로 변경된다.
봉상시가 다시 설치된 것은 11년 후인 세종 2년(1420)이다.
예조에서 악공의 교습과 음악의 정비, 제복과 악기의 관리 등을 하나하나 신경 쓸 여력이 없고, 또 육조의 체통을 세우기 어려우니 봉상시를 다시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이다. 세종 대는 특히 조정의 음악 정비에 힘썼던 시기였으므로 봉상시를 부활할 필요성이 커졌던 것이다.
아래는 예악 정비와 관련된 봉상시의 활동을 보여주는 세종 대의 기록들이다. 아악서(雅樂署)와 관습도감(慣習都監)이 있긴 하였으나, 봉상시에서도 악공을 두고 음악을 교습하였으며, 악기를 보관하고 제작하는 일을 관장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7년(1445)에는 봉상시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봉상시는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속했던 당주동 128번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처음 설치된 곳이 아니라 광해군 때 이전된 위치이다. 아래 기록에서 봉상시 이전의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
봉상시 이설 문제를 속히 처치하라고 전교하다
傳曰: "奉常寺移設甚急, 而尙無處置之事, 宜速議處之意, 言于都監。" 전교하였다. "봉상시를 옮겨 설치하는 일이 매우 급한데 아직도 처치하지 않고 있으니 속히 의논해 처치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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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해군일기』[중초본] 권45 > 광해 10년(1618) > 5월 3일(경인) |
경덕궁(慶德宮)은 경희궁의 처음 명칭으로, 광해 9년(1617)에 창건되었다. 경덕궁 창건과 함께 본래 경덕궁 부지 내에 속해 있던 봉상시를 다른 곳으로 이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봉상시 이설이 쉽지 않았던지, 광해군이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하라고 독촉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여러 차례 나온다. 결국 『광해군일기』에는 봉상시 이설을 완료했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정확히 어느 시점에 인달방의 새 청사를 쓰게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이후 봉상시의 기능은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종대에 봉상시가 폐지되고 전농시의 업무를 맡게 되면서 적전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봉상시가 다시 설치된 후에도 적전의 관리는 봉상시 소관으로 남게 된다. 다만 본시와 구별하여 분봉상시(分奉常寺)를 따로 설치하여 기존 전농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봉상시는 1894년까지 존속하다가 궁내부 관직 변경과 함께 봉상사(奉常司)로 바뀌게 된다.
1895년 궁내부 관직 규정에서 봉상사는 “제례를 맡고 악공을 감독한다.”고 되어 있고, 1905년 개정된 규정에서는 “제사 의식과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일을 맡아본다.”고 되어 있다. 조선시대 봉상시의 기능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봉상사가 언급된 마지막 실록 기록은 아래와 같다.
『동사강목』과 『연려실기술』, 『임하필기』에서 봉상시의 연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목종 | 문종 | 충렬왕 | 충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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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太常)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았다. |
태상부(太常府) | 태상시 | 봉상시(奉常寺)로 고쳤다가 전의시(典儀寺)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는 태상시ㆍ전의시로 섞어 불렀다. |
『연려실기술』과 『임하필기』에서는 분봉상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태조(太祖) 원년에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여 적전(籍田) 및 제사에 쓰는 주온(酒醞)과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원년(1401)에는 전농시(典農寺)라 칭하였고, 뒤에 봉상시에 합병되어 분봉상시(分奉常寺)라고 칭하였다. | ||
출처: 『임하필기』권24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분봉상시(分奉常寺) |
분봉상시는 봉상시의 기능 일부를 맡은 관청인데, 그 역할이 적전의 관리에 한정되어 있으며 봉상시의 주 기능을 나눠 맡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분예빈시를 설치하여 예빈시의 접대 기능을 분담시킨 것과는 다르다. 봉상시가 한때 전농시로 바뀌면서 전농시의 업무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전농시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봉상시에 병합되고 봉상시 관원을 파견하여 해당 업무를 감독하게 한 것이다. 이 분봉상시는 봉상시와 별개로 혁파되기도 하고 재설치되기도 하였다.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봉상시의 위치를 서부 여경방이라고 하였으며, 제사와 증시 업무 외에 적전의 관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위 기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심당기>는 봉상시 관해(官廨)의 하나였던 세심당에 붙인 기문이다. 최숙정(崔淑精)의 문집 『소요재집(逍遙齋集)』권2에 수록된 글이다. 세심당에 관한 글은 강희맹, 서거정, 심의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동사강목』과 『연려실기술』, 『임하필기』에서 봉상시의 연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목종 | 문종 | 충렬왕 | 충선왕 |
---|---|---|---|
태상(太常)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았다. |
태상부(太常府) | 태상시 | 봉상시(奉常寺)로 고쳤다가 전의시(典儀寺)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는 태상시ㆍ전의시로 섞어 불렀다. |
『연려실기술』과 『임하필기』에서는 분봉상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태조(太祖) 원년에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여 적전(籍田) 및 제사에 쓰는 주온(酒醞)과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원년(1401)에는 전농시(典農寺)라 칭하였고, 뒤에 봉상시에 합병되어 분봉상시(分奉常寺)라고 칭하였다. | ||
출처: 『임하필기』권24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분봉상시(分奉常寺) |
분봉상시는 봉상시의 기능 일부를 맡은 관청인데, 그 역할이 적전의 관리에 한정되어 있으며 봉상시의 주 기능을 나눠 맡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분예빈시를 설치하여 예빈시의 접대 기능을 분담시킨 것과는 다르다. 봉상시가 한때 전농시로 바뀌면서 전농시의 업무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전농시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봉상시에 병합되고 봉상시 관원을 파견하여 해당 업무를 감독하게 한 것이다. 이 분봉상시는 봉상시와 별개로 혁파되기도 하고 재설치되기도 하였다.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봉상시의 위치를 서부 여경방이라고 하였으며, 제사와 증시 업무 외에 적전의 관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위 기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심당기>는 봉상시 관해(官廨)의 하나였던 세심당에 붙인 기문이다. 최숙정(崔淑精)의 문집 『소요재집(逍遙齋集)』권2에 수록된 글이다. 세심당에 관한 글은 강희맹, 서거정, 심의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다음은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의 기록이다. 후대의 위치인 인달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근현대 자료
『경성부사』에서는 인달방의 봉상시 위치에 대해 ‘당주동 128번지’라는 주소를 제시하고 있다. 또, 1895년 봉상사로 개칭하여 1907년까지 존속하였음을 밝혔다.
『경성부사』에서는 바로 뒤이어 분봉상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0) 분봉상시(分奉常寺)
적전에 곡식을 기르고 사제(祠祭)·주례(酒醴)·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던 곳이다. 태조 원년 사농시(司農寺)를 두었다. 태종 원년 전농시로 개칭하고 14년에 봉상사로 합하여 분봉상시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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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성부사』제1권 > 제2편 이조시대의 경성(Ⅰ) > 제1장 이조 국초 경성의 건설 > 8. 문직공서 |
봉상시, 곧 봉상사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 ‘이왕직 봉상소(李王職奉常所)’로 불리게 되었다. ‘이왕직(李王職)’은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제국황실을 이왕가로 격하하고, 기존의 궁내부 소관 업무를 담당하게 한 기구이다. 『경성부사』에서는 봉상사 업무는 1907년 규장각과 장례원으로 이관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봉상사 건물은 그대로 남아 이왕직봉상소로 불렸으며 여전히 제사를 돕기도 했다. 아래는 1921년의 기사이다.
일제 때 봉상소 건물은 이왕직 아악대(李王職雅樂隊)에 활용되기도 했다. 1926년 아악대는 운니동에 새 거처를 정하게 되어 봉상소를 떠난다. 아래는 1921년 사진이다.
1921년,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朝鮮中國音樂調査紀行』[1]
봉상소 건물은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 역할을 한 적도 있다. 일제는 1928년 이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역대 국왕 및 왕실의 태옹(胎甕)을 수습하여 바로 이곳 경성의 이왕직 봉상소에 임시 보관하였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기사이다.
1936년 봉상소 건물의 사진이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다만 자료 상태가 좋지 않아 또렷한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며, 기사의 내용도 판독이 어렵다.
이 봉상소 건물은 1936년 화재를 입게 된다. 당시의 기사에 의하면 이 화재로 1동(棟) 10칸(間)이 전소(全燒)했다고 한다.
아래는 1958년에 편찬된 『서울명소고적』에서 봉상시 건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이 글을 통해 1958년 당시 봉상시 본채 건물이었던 세심당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및 도판자료
<도성대지도>와 <수선전도>에서 인달방의 봉상시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당주동 128번지가 표시된 지적도이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지적도(1913)[2]
아래는 현재 표석위치이다. 고지도 및 지적도에 표시된 자리와 대략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