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명 축음기의 등장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축음기(蓄音機), 또는 유성기(留聲機)로 불리는 음향기기가 들어온 후 상당기간 동안 기계에서 사람의 소리가 나오는 신기한 현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일반인은 이런 신기한 체험을 위해서 초창기 텔레비전의 보급 시기처럼 공동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에 이용료를 지불하고 입장해야 했다. 때문에 축음기는 일부 부유층의 최고급 사치품에 속했고, 더구나 나팔통식 녹음은 기술적 제한으로 인해 소리의 재생이 미약한 반면 가격은 비싸서 상업적으로도 소비계층의 확산이 어려웠다.
1928년은 음반사의 일대혁신을 가져온 전기녹음 음반이 발매된 시기였다. 전기기술의 향상은 이전의 나팔통식 녹음에 비해 소리의 증폭과 음질의 향상은 물론 축음기 가격의 인하를 동반했다. 보다 저렴하고 간편한 보급형 축음기가 등장하여 부유층의 최고급 사치품이 드디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 축음기는 점차 대중화되었고 전기녹음에 맞춰 조선음반의 발매가 본격화되었다. |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1928년에는 빅터레코드, 그리고 1929년에는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최초의 유행가수 스타인 채규엽이 등장했으며 폴리돌과 태평레코드가 등장하고 1931년에는 시에론레코드가 음반을 발매해서 이철의 오케레코드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조선에는 메이저 레코드회사의 기반이 다져지고 있었다.
안동교회, 전쟁의 서막이 열리다
1928년 1월, 북촌의 양반들이 모인 안동교회에 “시온회”라는 선교모임이 창설된다. 시오니즘을 표방한 선교모임으로 한글학자인 이윤재가 회장을 맡았고 총 14명의 사람이 참여했다. 윤치영, 윤치소, 그리고 윤치오의 가족 이름이 보여 윤 씨 집안의 여러 사람이 회원으로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윤치오의 부인인 현송자와 이철의 본명인 이억길을 회원명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상에선 많은 자료에 이철로 기록되었지만 1938년 5월에 개명하기 전까지 공식문서에는 본명인 이억길로 기록되었다. 안동교회사에서는 본명이 기록되어 있다.
▲ 시온회 조직도 <출처 : 안동교회 90년사 108p> |
매달 월례회를 갖고 강습회, 음악회, 성경학교, 주보발행 등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 모임은 1930년 7월을 끝으로 활동을 접고 만다. 중심에서 활동하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버린 때문이었다. 바로 이철과 현송자의 문제가 그 원인이었다.
시온회가 창립된 1928년에 25세의 이철은 연희전문에 입학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학제로 보면 입학 가능 최소연령 대비 여덟 살이나 많은 나이의 만학이었다. 이철은 나이가 많았던 만큼 동기들보다 월등한 사회 활동을 보였는데 1월 시온회 참여, 3월 배재고보 졸업, 4월 연희전문 상과 입학 및 배구자음악무용회개최, 9월 안동교회 추석대연주회, 10월 전조선현상가무대회를 개최하며 한 해 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이때부터 이철의 본격적인 음악활동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에도 이미 교회 성가대 지휘와 음악출판사 운영 등 계속 음악관련 활동을 해왔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철의 적극적인 활동력인데, 1926년 윤심덕의 정사사건에 이철의 이름이 보이더니 1928년에는 배구자와 연관 지어진다.
이철과 배구자
배구자는 배정자의 조카라는 설이 우세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출생의 소문이 무성해진 당대의 인기 무용수였다. 1938년에는 대중적인 그의 무용을 평가 절하한 비평가도 있지만 세간에선 최승희, 조택원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무용수로 거론되기도 했다. 1918년부터 공연을 통해 조선에 얼굴을 알린 배구자는 1926년 덴까스곡예단(天勝曲藝團)의 평양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뛰쳐나와 칩거를 하고 있었다.
▲ 왼쪽부터 순서대로 최초의 배구자 공연(1918), 평양탈출(1926), 배구자음악무용회(1928) 기사 |
이철은 이런 배구자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평양공연 이후 2년여 칩거 중인 배구자를 한 달 간의 설득 끝에 무대에 올린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미국유학을 앞둔 배구자가 국내 고별무대로 장만한 <배구자음악무용회>였다. 훗날 이 무용회는 한국인이 발표한 최초의 신무용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때 발표한 창작무용 <아리랑>이 큰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배구자는 1929년 여름에 애초의 계획인 미국유학 대신 홍순언과 함께 <배구자무용연구소>를 설립한다. 1935년에는 동양극장을 설립하여 전속극단 <호화선>, <청춘좌> 등을 통하여 많은 대중극을 올렸고, 그 중에 “홍도야 울지 마라”로 유명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장안의 화제를 불러왔다. 또한 <배구자악극단>을 운영하여 대중에게 쇼와 음악이 어우러진 레뷰를 본격 소개한다.
▲ 동양극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35.11.4) |
배구자는 이철의 인물 평가에는 박했던 것 같다. 자신을 긴 칩거에서 다시 무대로 이끌어준 은인이라 할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흉내내는 아류로 생각한 듯 하다. 이철은 쇼와 음악 중심의 <조선악극단>을 운영하면서 1940년 초반에 <배구자가극단> 출신의 무용수 홍청자를 데려왔는데 배구자는 이를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철은 1940년 9월에 <배구자무용연구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오케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한다.
공주 출신의 이철이 어떻게 배구자와 인연을 맺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자신의 적극적인 친화력을 바탕으로 만났을 가능성과 교회 멤버인 현송자의 소개 가능성이 존재한다. 현송자의 계모인 배정자는 배구자의 고모이기도 했다.
사랑의 에네르기
교회에서의 신앙모임과 봉사활동을 통한 유대감으로 맺어지고, 당대의 스타와 연결되는 주요 통로 역할을 해 준 현송자에게 이철은 매우 친밀한 호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현송자 또한 적극적인 교회활동과 천부적인 사업가의 능력을 보이며 젊은이와 교회의 어른들에게 모두 사랑받는 이철에게 가슴 설레는 두근거림을 경험했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별건곤>에서는 아버지의 곤경을 구하기 위해 나이 많은 윤치오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곳에서 구할 수 없는 사랑을 이철에게서 느끼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 별건곤 제55호, 1932.9 “례배당 출입에서 인연이 매저서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 연전학생의 리(李)모군이다. 새로 맛보는 사랑, 그 사랑이 꿀맛 가트나 먹지 안흐면 그 사랑의 에네르기도 삭아저 버리는 것이다. 그들도 이것을 절실히 늣기는 시기에 도달한 것이엇다.“ |
하지만 한 사람은 8년이나 늦게 대학에 입학한 가난한 고학생이었고 상대는 만삭이 다가오는 임신 중의 대갓집 마님이었다.
이철은 1929년에 연희전문의 밴드부(C.C.C Orchestra, College Chosen Christian Orchestra) 및 합창단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지도교수 현제명을 초빙하여 1928년에 창단된 것으로 보이는 이 밴드부에서 이철은 평생의 사업적 동지이자 매제가 되는 김성흠(金星欽, 1908.9.10~1986.9.30)을 만난다. 또한 오케레코드사를 설립하여 초대 문예부장을 맡게 되는 김능인도 여기서 만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능인 또한 연희전문 출신이다.
▲ 연희악대(1928~1929년 경, 원안의 인물 우측 현제명, 좌측 이철, 서 있는 사람 김성흠) |
▲ 김성흠(좌, 1928)과 연희악대(위), 연희합창단(아래) |
한 가지 아이러니는 이철이 설립한 오케레코드가 당대의 메이저로 성장한 이후에도 학창시절의 인연이 깊은 현제명의 음반은 발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제명은 유명한 성악가였기에 일제 강점기에도 많은 음반을 남겼지만 주로 빅터와 콜롬비아에서만 발표했다. 나중이지만 이철과 현송자의 사건이 교회와 학교에서 문제가 될 때 표면적인 첫 번째 이유가 연희전문 밴드부의 악기를 임의로 처분했다는 점이었다. 이때 현제명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오케레코드는 주로 대중가요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긴 했지만 국악이나 양악에서도 적지 않은 음반을 발표했었다. 각광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는 물론 한국오페라 운동의 개척자라고 하는 이인선의 음반을 여러 장 발매했다. 이철의 딸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이인선의 이태리 유학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어떤 자료를 인용했는지 위키백과에 따르면 1929년 2월에 현송자는 아들을 출산한다. 윤 씨 집안의 연보에서는 현송자의 이름은 물론 이 출산 또한 기록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안동교회 기록에는 이 당시 현송자가 세 자녀의 어머니로 되어 있고 교회 기록 사진에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이 있어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출산 후에도 교회 활동은 열심이어서 8월의 여자야학원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 안동여자야학원 제1회 졸업식(1929년, 원안의 인물 맨좌측부터 김우현 목사, 홍숙자 권사, 현송자) |
위의 사진에 놓칠 수 없는 사람들이 다수 등장하기에 다시 여기서 새로운 인물을 언급해야 한다. 이철의 사건에서 당시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우현 목사는 3.1운동 당시 옥고와 일제말기 협력이라는 굴곡의 삶을 사신 분이고, 현송자의 옆에 선 홍숙자라는 분은 당시 권사로서 가난한 고학생 이철을 수양아들 삼아 그 집에 기거하게 했다고 한다. 홍숙자는 이철의 학자금 지급보증인으로 학적부에 기록된 이인규의 아내이다. 향후 사건의 갈등을 내포한 복선 같은 사진이다.
1929년 3월에는 “시온회”의 회장을 맡고 있던 한글학자 이윤재가 안동교회의 장로로 피선되었다.
이철은 학교의 밴드부와 교회의 모임 및 찬양대 활동으로 바쁘게 움직였고 현송자 또한 출산 후 교회 일에 매진하면서 서로간의 인연을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불륜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다가올 격랑의 1930년을 향해 그렇게 봄날 같은 두 해가 바쁘게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