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과 안동교회
이철이 언제부터 안동교회에 출입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철이 다닌 공주영명고보와 청주성경학원, 배재고보가 모두 개신교 계열이니 배재고보 편입시기인 1925년부터 곧바로 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1926년 하기여름성경학교 사진에 이철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
▲ 1926년 8월 안동교회 여름아동성경학교 (원안의 인물이 이철) <출처 안동교회90년사> |
1917년 3월에 공주공립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 이철은 1921년 4월에 공주영명학교에 입학하기까지 4년 동안의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 기간 동안 생계를 위한 직업 활동을 하면서 후에 배재고보 입학 시 양부로 이름을 올리게 되는 이인규를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공주영명학교를 다니던 이철은 1년 만에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로 옮긴다. 보다 낮은 학비 때문에 옮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또한 졸업을 하지 못하고 2년 만에 그만 둔다. 이후 청주성경학원 교무계에서 1년여 근무하는데 이 곳에서 발행한 잡지 경험이 나중에 악보출판의 밑거름이 되었고, 역시 이 때 만난 함태영 목사가 안동교회 사건의 원군이 되었을 것이다.
연희전문의 학적부에는 청주성경학원 근무기간이 1925년 3월까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배재고보 입학을 4월로 기록하면서 잘못된 오기로 보인다. 실제로 배재고보 편입은 9월에 이루어졌으니 편입 직전까지 약 1년 반 정도 청주성경학원에 재직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학적부(좌측 배재, 우측 연희전문) |
청주성경학원을 그만 둔 이철은 1925년 9월에 배재고보 3학년으로 편입한다. 이미 공주영명학교 1년과 공주공립고보 2년을 마쳤기에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고보 학제는 5년제였다.
이철의 사교력
이철은 많은 기록과 증언에서 매우 사교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철의 사교력을 짐작할 수 있는 일단으로 양부와 조선총독, 그리고 영친왕과의 일화를 들 수 있다.
80년대까지도 은행대출은 물론 취업 등에서도 보증을 요구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일제 강점기는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경제력을 지닌 학생이 많지 않았기에 학교에서는 학자금 지급 보증인을 요구했다. 이때 곤란한 이철에게 든든한 배경으로 등장한 인물이 이인규였다. 이인규는 이철의 배재고보 편입 시 양부 자격으로 학자금 지급 보증인에 이름을 올린다. 학적부에 따르면 이미 친부는 사망하였고, 형인 이억석이 호주였지만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든든한 보증인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학적부에는 형의 신분은 평민이고 직업은 회사원으로 되어 있으나, 이인규의 신분은 양반이고 직업은 군수로 되어 있다. 이철이 언제 이인규를 만났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배재고보와 연희전문 재학시절 학자보증인이었고, 한동안 자신의 집에서 이철을 데리고 있을만큼 애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인규는 장연군수를 지낸 인물로 안동교회 홍숙자 집사의 남편이다.
이철의 연희전문 학적부는 배재고보 학적부와 다른 점이 눈에 띄는데, 이인규와의 관계가 양부에서 아버지로 변경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철의 적극적인 사교능력을 짐작케 한다. 이런 이철의 사교력은 이후 여러 자료에 증명되고 있으며, 미나미 총독의 육성음반을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것과 동경의 영친왕 저택에서 조선악극단이 어전공연을 벌인 일 등이 그것이다.
▲ 미나미 총독(좌)과 이철(우), 1930년대 말) |
▲ 동경 영친왕 저택(원안의 인물 이철), 1943.5.24 |
이철은 1926년에 처음으로 신문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엉뚱하게도 윤심덕의 정사사건의 인터뷰 대상자로 등장하였다.
1926년은 순종의 붕어와 이로 인한 6.10만세 운동이 있었던 격랑의 시기였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찌는 듯한 8월에는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남녀의 정사”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윤심덕 정사사건이 장안을 들쑤시며 대중의 관심을 얻고 있었다.
한편으론 이 기사를 쓴 기자의 신통력이 대단했던지 “윤심덕은 다시 볼 수 없으되 그의 남겨놓은 목소리는 영구히 세상에 돌아 다닐 것이다”라고 예견한대로 <사의 찬미>가 수록된 윤심덕의 음반이 2016년 경매에서 6천만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음반 한 장의 가격으로는 세계 최고가인 것으로 보인다.
▲ 윤심덕 정사사건과 이철의 인터뷰(동아일보 1926.8.5) |
동아일보의 이 기사에서 “그를 잘 아는 이철씨는 말하되”로 이철의 이름이 나온다. 아직은 본명인 이억길로 통용될 시기이기에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오케레코드 설립 이후에도 상업등기에는 이억길로 기록했지만 음반의 발행인 이름에는 꾸준히 이철로 기록했고 아래의 기사처럼 신문에서 이철로 언급되는 다른 예가 있으니 동일인물로 보인다.
이철의 데뷔
1927년 2월 배재고보 5학년 이철은 악보전문 출판사인 백장미사를 설립한다. 이 또한 고학생의 경제활동 방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앞으로 평생을 걸어야 할 음악계에 공식 데뷔한 기록인 셈이다.
▲ 백장미 제1집 발행 및 설립관련( 1927.2.5)과 악우모집(1927.4.2) 동아일보 기사 |
이철은 곧이어 4월에 백장미사에서 악우모집 광고를 내고 음악계에 활약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귀는 통로로 활용한다. 당시 조선 최초의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작곡가 김영환과 김애리시의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듬해에는 조선 최고의 무용가라 할 배구자를 2년 간의 칩거에서 끌어내 무대에 서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을 보이게 된다.
현송자의 결혼
이 기간 동안 현송자는 시집을 가서 두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막을 보면 기구한 운명의 비탈길을 힘겹게 걸어가는 연약한 모습이었다.
현송자는 1919년 5월 12일 윤치오와 결혼한다. 5월 14일 매일신보 기사에 스무 살의 앳된 현송자의 얼굴과 50세의 윤치오 얼굴이 나란히 보인다. 한 때는 최고의 권력가를 자부하던 현영운이 어떻게 자신보다 1살 어린 친구에게 딸을 시집보낼 생각을 했을까? 더구나 윤치오는 이미 9명의 자식을 둔 세 번째 결혼이었다.
▲ 현송자 결혼기사(매일신보 1919.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