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갈등?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록과 증언에 의하면 이철의 가장 큰 장점이 사교력이라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한다. 그것은 단순한 언변이 아니라 성실한 노력과 뚜렷한 성과를 바탕으로 한 친화력이었다. 이런 이철을 교회의 젊은이들은 얼마만큼 신뢰했기에 당대의 세도가라 할 윤 씨 집안에 집단으로 저항할 생각을 했을까?
▲ 이철의 사교력은 한청빌딩의 지배인으로 등장하는 1935년 5월 광고에서도 확인된다. 이 빌딩은 마주보는 화신백화점과 고층건물로 경쟁하며 장안의 화제를 불러왔는데 건축주가 한규설의 손자인 한학수였다. 한규설은 이철의 장인인 현영운을 탄핵하여 귀양 가게 했던 사연이 있다. |
“목사가 그를 출교한 것은 같은 교인인 유부녀와의 스캔들 때문이었는데, 청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유산계급(부르주아)을 두호해서 프롤레타리아인 가난한 청년을 좇아낸다고 항의하면서 다른 교회로 가고 말았다.“ ▲ 안동교회 90년사
1928년부터 3년여 기간 동안 이철과 현송자는 <시온회>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기에 두 사람 간에 어떤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면 모임의 회원들이 모르고 넘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에서는 이철과 현송자의 불륜을 차마 공개할 수 없었고 청년들은 이를 오해해서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처럼 청년들이 계급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아마 당시의 경제공황과 더불어 노동자, 농민의 각성 분위기와 연관되어 보인다. 가난한 시골 청년과 대부호이며 세도가인 윤 씨 집안을 대립각으로 보고 윤치오를 두둔하는 교회에 반발한 것이다.
▲ 연희전문 밴드부(1929.3, 원안의 인물 좌측 이철, 우측 김성흠) |
“그 무렵 이억길은 재학 중이던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속하여있던 뺀드부의 악기를 자의로 처분한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내막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들고일어나 이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였고, 그 양반 댁에 사실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 이 일 때문에 장로들 사이에도 서로 서먹한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 젊은이들의 주장이 받아드려지지 않자 이들 중 몇 사람이 교회를 떠났다." ▲ 안동교회 90년사
일단 위의 인용문은 문맥이 맞지 않다. 악기의 무단처분과 불륜사건이 혼재되어 결론이 어긋나있다.
불륜사건의 내막을 밝히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와는 무관한 이철의 도덕적 흠결을 지적하고 있다. 무단으로 악기를 처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철이 퇴학당한 시점은 청년들이 떠난 8월로부터 3개월 후인 11월이기에 <안동교회 90년사>의 서술내용과는 전개과정이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에서 다시 지적하겠지만 이 시기의 연희전문의 실세는 안동교회의 집사인 유억겸 학감이었다. 당시 연희전문의 교장은 외국인이었고 대부분의 학사운영은 학감의 권한에 속했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이 내막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나 양반 댁에 사실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하는 것은 악기의 무단처분 때문이 아니라 이철과 현송자가 불륜관계라는 지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 일로 장로들 사이에서도 서로 서먹해졌다는 것은 조사에 응하자는 입장과 반대 입장이 대립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후에 이억길은 현○○를 데리고 중국으로 떠나가 버리면서 이 사건의 전말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이미 교회를 떠난 청년들은 다시 안동교회로 돌아오지 않았다.“ ▲ 안동교회 90년사
결국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버린 것은 이철과 현송자의 사건의 처분에 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떠난 사람들 중 <시온회>의 서기 유익이 있었는데 두 형제가 함께 다른 교회로 옮겼다. 이들은 당시 안동교회 유창겸 장로의 아들들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익의 아들인 유경재 목사가 후에 안동교회로 부임해 와서 <안동교회 90년사>에 아버지와 연관된 <이억길 사건>(이철, 현송자 사건)의 전말을 생생하게 기록해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이철이 출교 당하고 젊은이들이 떠나간 여름 이후에 더욱 치열해지는 싸움을 보면 두 사람의 불륜이 사실인지도 교회의 기록만으로 판단하기는 부족해 보인다. 또한 이철이 현송자를 데리고 중국으로 떠났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젊은이들은 이철과 현송자의 불륜을 인정하지 않았거나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고 악기의 무단처분으로 몰고 간 교회의 처사에 수긍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사건이 마무리된 다음에도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동격서
1930년 여름에 안동교회에서 출교처분을 받기 전 이철에게 먼저 위기가 닥쳤다. 2월에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은 것이다.
▲ 연희전문 이철 학적부 |
“본교 학칙 제27조에 의하여 소화 5년 2월 15일부터 1주간 정학, 1년간 근신을 명한다.”
1928년 연희전문 입학과 더불어 교회와 사회활동에 열심이며 학교 밴드부와 합창단 활동까지 종횡무진으로 바쁘게 보내던 이철이 갑자기 정학 및 근신처분을 당했다. 그 때까지 이철을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에 징계는 갑작스런 사건이었다. 학칙 27조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징계이유는 향후 사건의 전개과정으로 미루어 이철과 현송자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방학기간 중 1주간의 정학에 불과했기에 이철은 가볍게 생각한 것 같다. 더구나 사실과는 다른 오해로 빚어진 결과이기에 이를 해명할 수 있다고 믿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5월 안동교회 유년주일학교, 원 안의 인물 좌측 이철, 우측 현송자 <출처 : 안동교회> |
연초부터 시작된 징계로 이미 학교와 교회에서 위기를 느꼈을 법 하지만 이철과 현송자는 1930년 5월까지 낙관적인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진 속 두 사람에게서 몇 달 후에 쫓겨날 위기감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안고 있는 현송자의 모습에서 치열한 고민의 흔적보다는 평온함이 묻어난다. 교회의 젊은이들도 이들의 모습에서 불륜을 상상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철의 바람과는 달리 사건은 격랑으로 빨려 들어가고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1차 결과는 이철의 완벽한 패배였다. 8월에 교회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억길은 어느 주일 예배 때 들어와 자기가 출교 당한 것은 억울하고 교회에서 출교를 당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퇴학당하였다고 행패를 부렸으나 마침 그 예배에 참석하였던 연희전문학교 학감인 유억겸 집사가 이억길을 나무라서 그를 쫓아냈다. 그 후 이억길은 청주에서 알게 된 함태영 목사를 찾아가 출교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내용을 알지 못한 함목사는 노회에 고소장을 내도록 일러준 것 같고, 이억길은 시찰회에 임시노회 소집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었다.” ▲ 안동교회 90년사
전쟁의 결말, 승자는 없었다.
이철은 1930년 11월 5일자로 연희전문에서 퇴학당하고 12월 16일에 열린 경기노회에 소장을 제출했다. 11월경으로 추정되는 안동교회 예배에서 이철은 불륜은 물론 악기를 처분한 사실도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교회에서 쫓겨난 것을 억울한 누명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학교에서 퇴학당한 것도 교회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고 있다. 연희전문의 학감이자 안동교회의 집사인 유억겸의 존재는 이철의 주장에 합리성을 두게 한다. 당시 유억겸은 연희전문의 학사 전반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 1930년대의 연희전문 상과의 모습, 원 안의 인물 유억겸 |
교육방면에 많은 영향을 남긴 유억겸은 개화사상가인 유길준의 둘째 아들로 안동교회와 인연이 깊었다. 안동교회 설립을 주도한 유성준은 유억겸의 숙부이며 사건 당시 장로로 봉직하고 있었다. 또한 유성준의 딸 유각경은 1924년에 안동유치원 설립을 주도하여 부원장으로 있었다. 이처럼 유 씨 집안의 많은 사람들 역시 윤 씨 집안과 마찬가지로 안동교회에 출입하고 있었다.
▲ 안국유치원 (1924.5, 원안의 인물 좌측 윤치소, 중앙 유성준, 우측 유각경) <출처 : 안동교회> |
연희전문에서 퇴학당한 이철은 안동교회의 상위기관인 경기노회에 소장을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었다. 당회의 경유가 없었다는 절차상의 이유였다. 이때 강력하게 이철을 변호한 사람이 함태영 목사였다. 이 일로 안동교회의 김우현 목사와는 서로 사이가 멀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13회 경기노회 때인데, 이 때 함태영 목사가 일어나 이억길이 출교 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변명하자 김우현 목사가 이를 반박하였고, 이 일로 함태영 목사와 소원해지기 시작하였다고 김우현 목사가 증언하였다. “ ▲ 안동교회 90년사
함태영 목사는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호의를 베풀었을까? 여름에 안동교회를 떠들썩하게 들쑤시며 진상조사를 주장하던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다른 교회로 옮겨가버린 사건을 안동교회와 멀지도 않은 연동교회에 봉직하던 함태영 목사가 모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이미 장로회총회장을 역임한 57세의 교계 원로이자 민족지도자로 존경받던 함태영 목사가 35세의 젊은 안동교회 목사와 감정이 상할 만큼 싸운 이유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래도 남는 의문점
과연 이철이 마지막까지 교회 출교 조치의 부당함을 주장했던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한 해 동안 진행된 이 사건으로 이철은 물론 교회 또한 큰 타격을 받은 것 같다. 내부의 다툼과 알력으로 젊은이들이 떠나자 남은 신자들 역시 불편한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 담임목사 또한 몇 년 후 교회를 떠나야 했다.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이철이 황량한 거리에서 헤매는 동안 강석연의 <방랑가>가 출반되어 애달픈 가슴을 위로하고 있었다.
▲ 방랑가 / 이규송 작사, 강윤석 편곡, 강석연 노래 콜럼비아레코드 40138, 1931년 1월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돋는 달 지는 해 바라보면서 춘풍추우(春風秋雨) 덧없이 가는 세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