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clickable button|[[이철_이야기|이철 이야기]]}}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4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01.jpg'/></html> |- | ▲ [http://dh.aks.ac.kr/~mokpo/wiki/images/1/1f/목포의눈물-이난영.mp3 목포의 눈물] / 이난영(1935년 9월,오케레코드 1795A) |} <big>오케레코드</big>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눈물젖은 두만강, 애수의 소야곡... 이처럼 아직도 우리 귀에 익숙한 상당수의 대중가요를 제작한 회사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오케레코드(Okeh Records)다. 고복수,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장세정 등 톱가수와 박시춘, 손목인, 김해송, 조명암 등 창작자들이 속해 있던 오케레코드를 운영하던 사람은 조선 최고의 흥행사 이철이었다. 이철은 당대의 조선 대중 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을 이끌었고,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의 남편이기도 했다. 이철의 아내 현송자는 대중지 <만국부인>에도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장안에 소문난 미인이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또한 한때 위세가 당당했던 구한말 육군참장 출신의 현영운이었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4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02.jpg'/></html> |- | ▲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 부부(1930년대) |} 2009년에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으로 문화원형디지털화사업 <[https://terms.naver.com/list.naver?cid=49325&categoryId=49325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을 전주대학교와 함께 진행했다. 사업 전반에 관여해서 한국과 일본에 생존해 있던 많은 오케레코드 관련 사람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사진과 증언 등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정리했던 자료들이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오케레코드> 관련 대부분의 원천자료이다. 하지만 일부 이용자들이 원천 자료를 흥미 위주로 접근하여 과도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누군가 잘못 인용한 자료를 확인 과정 없이 재인용하는 사례가 많아, 인터넷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오류가 확산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현재 인터넷을 검색하면 많은 글에서 배정자와 현송자를 모녀관계라고 확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더구나 <[https://ko.wikipedia.org/wiki/현영운#가족_관계 위키백과]>에서도 현영운과 배정자 사이에 두 딸을 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현영운에게는 학자(學子)와 송자(松子) 두 딸과 부건(富健)이라는 아들이 있기는 하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49.jpg'/></html> |- | ▲ 위키백과의 배정자 부분 / 현영운 부분에서는 두 딸을 둔 것으로 나온다. |} 민족반역자, 요화, 동방의 마타하리 등 갖가지 수식어를 동반하는 밀정 배정자는 오랜 기간 수차례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현재까지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이미 1910년대의 신문에도 기획기사가 연재될 정도로 당대의 이슈메이커이기도 했다. 배정자와 현송자의 부친인 현영운은 한때 조선과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부부였다. 배정자는 사교가로 명망이 있었고, 현영운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로 정국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상당 기간 이어졌으나 1907년에 떠들썩한 소문을 남기면서 헤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부부로 지낼 때 배정자는 현송자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big>현송자와 배정자</big>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직까지 밝혀진 증거로는 배정자와 현영운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기에 현송자는 배정자의 딸이 아니다. 첫 번째 근거는 이철의 호적이다. 일제 강점기 작성된 오케레코드 이철의 호적에는 현송자와의 혼인 사항 및 현송자의 출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배정자와 관련없음을 증명한다. 1934년 9월 6일 이철과 현송자 두사람의 혼인신고가 있었고 부인 현송자의 출생일은 1899년 5월 16일, 어머니는 이씨이며 이미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백하게 배정자는 현송자의 어머니가 아니다. 호적은 1970년대 이전까지도 실제 생일과 호적에 기록된 생일이 다른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 사실만 기록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박 증거가 명백하지 않으면 어떤 문헌보다 신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마지막회에서 호적과 이철의 아들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4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03.jpg'/></html> |- | ▲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의 호적</br>(부인 현송자의 출생일이 1899년 5월 16일로 되어있다) |} 두 번째 근거는 당대의 신문기사이다. 1916년 12월 8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현영운과 배정자가 결혼한 시기는 1901년이다. 1899년 생인 현송자는 배정자의 소생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배정자와 조병헌의 결혼기사를 다루는 매일신보의 기사에서 전 남편들에 관한 구체적인 결혼 시기가 언급되어있다. 더불어 현영운과 만남 및 이혼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이 쓴 오마이뉴스의 배정자 기사([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44239?sid=001 이토 히루부미가 키운 조선의 '마타하리])에서는 현영운과 배정자가 1년여간 같이 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앞의 기사에 따르면 현영운과 7년간(1901년~1907년, 기사 본문에서는 오륙년으로 명기)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로 1907년 11월 2일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배정자가 현영운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보도(매일신보에서는 배정자가 버린 것으로 명기)되어 서로 시기가 일치한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04.jpg'/></html> |- | ▲ 괴물 배정자(1916.12.8 매일신보) |} 마지막으로 현영운의 첫째 딸 학자의 나이이다. 현학자는 1915년 12월 7일 당년 26세로 사망하였다(매일신보). 따라서 현학자는 1890년 출생으로 추정할 수 있고, 배정자는 이 시기에 아직 일본에 있었으며 1894년에서야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에서는 현영운과 배정자의 사이에 자녀가 없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05.jpg'/></html> |- | ▲ 현학자 사망기사(1915.12.7 매일신보) |} ==그래도 남는 의문점== 1. 배정자는 현영운과 이혼한지 이미 27년이나 지났는데, 왜 친딸도 아닌 현송자의 아들 돌에 참석했을까? - 아무리 어린 시절 현송자를 자식처럼 키운 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27년은 사람의 관계를 충분히 흐리게 할 오랜 세월이 아닐까? 혹시 그동안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져왔을까? - 현영운은 왜 손자의 돌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혹은 참석했지만 배정자가 껄끄러워서 가족사진을 함께 찍지 않았을까?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06.jpg'/></html> |- | ▲ 이철 부부의 첫 아들 돌(1934년. 맨 왼쪽 앉은 사람 배정자, 맨 오른쪽 현송자, 맨 오른쪽 서있는 사람 이철) |} 배정자가 이철 부부의 아들 돌에 참석한 이유에 대해 지난 2009년 이철의 딸(1941년생)은 이렇게 증언했다. 증언자가 현영운과 배정자를 부부관계로 언급하지 않고 가끔 들르는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은 현송자가 사실을 다르게 알려줬거나, 배정자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의도적으로 완화한 것으로 보인다. - 그래. 왜 배정자씨 등장했느냐면.. 어머니(현송자)가 그 외할아버지 원수부청장(육군참장) 시절에 그 일본과 아마 이런 관계가 있었던 걸로 음. 나는 확실히... 자세한..(내용은 모르지만...) - 그때 인제 배정자씨. 에 또 일본 일본과 관계가 있는 걸로 생각이 되요. 그래서 인제 외할아버지 관계로 해서 어머니가(말씀하시길) 이분(배정자)이 집을 자주 오셨데요. - 그래서 어머니가 어머니(할머니) 없이 사셨거든요. 그러니깐 어머(니), 에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 어머니 노릇을 많이 하셨다 이렇게 많이 들었어요. - 집에 가끔 오셔가지고. 그래서 여기서 배정자씨가 나타나 등장하는 겁니다. 2. 배정자와 현송자의 같은 나이 무렵의 사진은 왜 서로 닮아 보일까?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07.jpg'/></html> |- | ▲ 좌측은 1905년 배정자(당 35세 경, "한국사진첩"에 수록된 상류의 귀부인 풍속 사진),</br> 우측은 현송자(1934년 무렵, 당 35세 경) |} --- 객관적인 기록으로는 배정자와 현송자의 혈연관계를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정황상 의문점이 있다고 뭐 유전자검사를 할 수도 없으니.... {{clickable button|[[이철_이야기|이철 이야기]]}}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Clickable button (원본 보기) 1. 오케레코드와 현송자,그리고 배정자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