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clickable button|[[이철_이야기|이철 이야기]]}} <big>에필로그</big>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43.jpg'/></html> |- | ▲ 1930년대의 이철, 현송자 부부의 평화로운 한 때 |} 이철은 과연 억울하게 교회와 학교에서 쫓겨난 것일까? 다행히 그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기록이 사건으로부터 84년이 지난 2014년에 새롭게 나타났다. 1935년 2월 경부터 오케레코드사에 입사하여 이철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함께 했던 트럼펫 연주자 현경섭이 남긴 일기이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2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기록한 현경섭 일기는 이철을 가장 가까이서 본 당대의 기록이며, 때로는 너무 돈을 밝히는 이철에게 실망감을 나타내는 등 개인의 감정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흥미롭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44.jpg'/></html> |- | ▲ 현경섭 일기(1939년 1월 4일자) |} “오늘은 일동이 모두 저녁밥도 함께 하고 하룻밤 재미나게 놀았다. 이 선생 부부는 이전에 연애 중에 받았던 러브레터를 모두에게 읽어 주었다. 정말 대단한 연애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 현경섭일기, 1939년 1월 4일자 새해를 맞아 자신의 집에 찾아온 부하직원들 앞에서 연애편지를 자랑스럽게 펼쳐 든 이철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현송자의 얼굴도 보인다. 하지만 연애시기를 언급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갈증만 돋우고 만 것인가? 두 사람은 안동교회에서 쫓겨난 1930년 8월 이후 곧바로 함께 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12월에 경기노회에 억울하다고 소장을 제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장을 제출한 12월부터는 같이 산 것으로 보인다. 이철과 현송자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난 것은 1931년 10월 12일이었다. 이 날은 이철의 소장이 거부된 경기노회가 열린 1930년 12월 16일로부터 만 10개월이 되기 4일 전이었다.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시기는 두 사람이 함께 살지 않았던 1930년 12월 이전, 즉 이철이 억울하다고 각계에 호소하던 그 시기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1930년 어느 지점부터는 이철에게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억울하지도 않았던 해라고 할 수 있다. <big>다시보는 이철사건</big> 사건의 전개가 복잡하여 다시 복기하면 다음과 같다. 1) 1929년 2월에 현송자는 아들을 낳았으며 출산 후 어떤 이유에선지 남편의 의심을 받는다. <시온회> 모임으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었는지 진짜 불륜의 싹이 트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1930년 2월에 이철은 연희전문에서 정학을 당한다. 사실여부를 알 수 없지만 악기를 무단처분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미 내부적으로 드러난 불륜설에 대해 <시온회>의 젊은 청년들은 무고를 주장하며 여름에 안동교회를 떠나버렸고, 이철마저 8월에 교회에서 쫒겨난다. 3) 1930년 11월에 이철은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12월에 열린 경기노회에서 학교에서의 퇴학과 교회에서의 출교조치에 대한 억울함을 주장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4)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1930년 여름 이후 어느 시점에서는 교회와 싸움을 하는 도중에 이철과 현송자 간에 연애편지를 주고 받고 있으며 12월 이후에는 같이 산 것으로 보인다. 1932년 <별건곤> 55호의 기사처럼 '먹지않으면 안되는 꿀맛 같은 사랑'의 시작이 사건의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모진 고난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이었을까? <big>현송자의 매력</big> 한편으로 생각하면 조용하기만 하던 양반 댁 마님 현송자에게 어떤 마력이 숨어 있기에 이철은 그토록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자신까지 고난을 당하면서도 인연을 놓지 않고 매달렸을까?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2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22.jpg'/></html> || ▲ 별건곤 1932.9</br>"「트로이카」라는 양술집에 현송자(玄松子)라는 여성이 잇다. 녀급은 아니라 할지라도 카페- 분위기 가운데 잇는 일개의 여성임은 틀림업다. 인물이 곱고 녀자대학을 마치엇다는 훌륭한 그가 다까끼보다도 오히려 전일의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씨의 마스코트이엿든 것이 한층 더 흥미잇는 이야기꺼리가 되는 것이다." |} 윤치오의 부인이었던 현송자는 교회에서 쫓겨난 지 2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 술집에서 일하는 처지가 되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이 무렵 현송자는 윤치오 소생을 포함하여 이미 네 명의 자녀를 출산한 상태였음에도 배경은 물론 미모까지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에 오를 만큼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트로이카>는 왕년의 정구선수이자 토월회의 명배우이던 연학년이 운영하던 술집 겸 다방이었으며, 연학년의 부인은 “만국부인싸론”에 현송자와 함께 이름을 올린 신여성 황귀경이었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45.jpg'/></html> |- | ▲ 현송자(1930년대 중반)와 만국부인 창간호(1932.10)<출처/아단문고> |} 1932년 10월에 삼천리사에서 발행한 <만국부인> 창간호에 이서구의 기획으로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만국부인싸론” 코너에서 당대의 주목을 받는 남녀 20여명을 열거하며 절세미인 구성안과 당대호남 구성안을 게재했는데 여자로는 현송자, 황귀경, 최정희, 김활란, 최승희 등과 남자로는 여운형, 윤치호, 안창호, 송진우 등이 거론되었다. 쟁쟁한 인물들 속에서 절세미인 형에 오른 현송자의 매력 포인트는 “입”이었다. “신문 배달하는 고학생 이철(李哲)과 돈 많은 집 소실 현송자(玄松子)는 남몰래 사랑을 속삭였고 결국 부부가 되었다. 결혼 후 현(玄)은 이철(李哲)이 「섹소폰」을 불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일본제국(日本帝國) 축음기회사에 부탁해서 서울에 지점을 내게 하고 남편을 사장으로 모셨다.” ▲ 선데이서울 1973.2.25. 이 글은 아마 1971년 12월에 중앙일보에 연재된 고복수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가요계 이면사>에서 참고한 듯하다. 고복수의 이야기는 현송자의 일본 유학시절 대학 동창의 아버지가 레코드회사 중역이라서 이철과 맺어지도록 힘을 썼다는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오케레코드에 관한 대부분의 글에서 회사 설립에 대한 현송자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지적한다. 이 연재의 앞선 4화에서는 배구자와의 인연을 현송자가 중개했을 가능성도 언급했었다. 이철에게는 현송자의 이런 배경이 중요한 관심이었을지 모른다. 오케레코드 설립 후 3년이 지난 <조광> 1935년 11월호에서는 “우연한 기회에 제축의 간부를 만난 이철 씨가 오케레코드를 창시”했다고 되어 있다. 우연한 기회의 배경이 현송자의 활약 덕분인지 또는 다른 이유인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배정자가 중개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제축의 간부는 일본인 카시오 케이조(樫尾慶三)였을 것으로 <[http://www.riss.kr/link?id=T15537434 논문]>에서 밝힌바 있다. <big>사랑의 유통기한</big> 오케레코드를 창립하여 불과 1년 만인 1934년에 고복수의 <타향(타향살이)>이 빅히트를 하며 이철은 음반업계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1935년에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까지 큰 성공을 불러와서 오케레코드는 완전히 자리를 잡고, 다음해인 1936년엔 남인수, 장세정, 김정구를 스카우트 하여 조선에서 활약하는 6대 음반회사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로 성장한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46.jpg'/></html> |- | ▲ [http://dh.aks.ac.kr/~okehkim/lee/mp3/03.mp3 타향], 고복수 노래, 오케레코드 1677, 1934년 6월 |} <타향살이>가 성공하여 자신감을 얻은 때문인지 1934년 9월 6일 이철과 현송자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한다. 이미 두 아이를 낳은 후 였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혼인신고를 가능하게 한 다른 요인이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수정되어 있지만 한 때는 위키 백과에 현송자의 사망일이 1934년 2월 16일로 올라 있었다. 기록자가 누구이고 참고자료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중혼이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서 한 쪽에서의 사망이 다른 한편에서는 혼인신고의 필요조건이 된 것이다. 봄날의 꽃이 한 철이듯 사랑 또한 영원하지 않는 것인가. “요사이 李 先生 宅에로 家庭에 不安이 생기여 잇스며 또 아지마님께서는 病院에 入院을 하시고 家庭에는 李 先生조차 宅에 잘 드러가시지 아니하신다는 所聞이 들니 엿다. 큰일이다. 금전 잇는 家庭에도 역시 그와 반대로 不安이 생기는 것이라.“ ▲ 현경섭 일기 1940.11.12. 가난한 연주자 현경섭이 이미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인 자신의 보스 이철을 걱정하고 있다. 소문으로는 무슨 불안이 생겼는지 현송자가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이철은 집에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한다. 집 안에 어두운 기운이 내린 가운데 갑자기 이철의 어머니마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소문이 돈지 1년 후 둘째 아들이 호적에 올라간다. 낳지도 않았는데 현송자가 어머니로 기록되었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47.jpg'/></html> |- | ▲ 이철의 둘째 아들 관련 호적부분, 오른쪽은 생모인 장세정</br> 역설적이지만 연재의 처음에 이철의 호적에 근거하여 현송자는 배정자의 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마찬가지로 둘째 아들의 친엄마는 장세정이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호적이 반드시 사실을 기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그로부터 3년 후인 1944년 6월 20일 이철이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이 때 둘째 아들을 낳은 여인에게 복중이던 유복자가 있었다. 유복자는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보지도 못한 채 새 아버지의 성을 이어 한씨가 되었다. 각기 이 씨와 한 씨 성을 받은 두 아이의 어머니는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른 장세정이다. 첫째의 이름은 영이고 둘째의 이름은 웅, 아버지가 같지만 처음부터 성을 다르게 받은 두 아이의 이름은 영웅이었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48.jpg'/></html> |- | ▲ 장세정(좌)과 한웅(우) |} <big>The End</big> {{clickable button|[[이철_이야기|이철 이야기]]}}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Clickable button (원본 보기) 8. 영원한 사랑은 없다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