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clickable button|[[이철_이야기|이철 이야기]]}} <big>윤치오와 현송자의 결혼식</big> 1919년 5월 12일 정동교회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무려 다섯 시간 반 동안 윤치오와 현송자의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사촌동생의 세 번째 결혼식에 참석한 윤치호는 30세 연하의 신부에 대해 부러움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모호한 일기를 남겼다. ''My cousin seems to have the rare fortune of getting a good wife every time he marries. ''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20.jpg'/></html> |- | ▲ 윤치호 일기(좌 윤치호, 우 윤치오, 중앙 정동교회) |} 해평윤씨의 연보 소개에 따르면 신랑 윤치오(1869.8.5~1949.12.2)는 만 50세였으며 신부의 아버지인 현영운(1868.6.11~1939.12.6)보다 겨우 한 살 아래였다. 1896년 늦은 나이에 게이오의숙(慶應義孰)을 졸업하여 동문인 현영운의 11년 후배이기도 했다. 윤치오는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우리 역사의 큰 줄기를 차지하는 해평윤씨 가문에서 일찍부터 맹활약을 펼치는 인물이었다. 사촌형인 윤치호는 물론 조카인 4대 대통령 윤보선, 그리고 혼맥으로 이루어진 가계는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21.jpg'/></html> |- | ▲ 윤치오 가계도(좌), 해평윤씨 연보(출처 윤문 홈페이지) 연보에서는 윤치오와 현송자의 결혼을 표기하지 않았다. |} 윤치오도 한때 돈 문제로 시련이 있었으니 중추원 찬의를 역임하던 중 빚보증으로 채무를 이행하지 못해 사임하였고, 체포된 후 서훈이 박탈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혼할 때마다 좋은 부인을 얻는 행운을 가졌다던 사촌형의 평과는 달리 아내 복은 별로 없었는지 세 번의 결혼 모두 10년 내외의 짧은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두 번의 사별에 이어 세 번째 부인인 현송자와는 온갖 무성한 소문만 남긴 채 비극적인 파탄으로 끝이 났다. 세 부인 모두 초혼인 여성들이었으며 특히 두 번째는 신문에 공개구혼을 하여 낙점한 것으로 유명한 윤고라라는 신여성이었으나 혼인 5년만인 22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1919년에 윤치오는 윤고라와 사별 후 6년째 독신이었으며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겨우 체포를 모면하고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현영운이 비록 곤경에 있었더라도 이미 두 번의 결혼 경력과 딸보다 30세나 많은 자기 또래의 친구를 사위로 받아 들이기는 마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현실적인 이득을 얻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영운은 결국 딸을 윤치오에게 보냈다. 처음부터 파탄을 잉태한 슬픈 출발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1932년 9월에 발행된 별건곤 제55호에 이런 상황을 “부모님의 명령으로 김중배 집으로 시집간다는 심순애의 처지와 가티 송자(松子)는 아버지의 곤경을 구하기 위하야 그보다도 강박에 못 익여 나히가 20년이나 틀니는 윤치오씨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2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22.jpg'/></html> || ▲ 별건곤</br>‘개벽사’에서 잡지 『개벽(開闢)』이 일제 탄압으로 강제 폐간 당하자, 그 대신 1926년 11월 1일에 창간한 월간 취미잡지이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에 관한 이야기와 새로운 직업에 관한 내용 등을 주로 다루고 있어 젊은 독자층에게 인기가 있었다. |} <big>현송자의 일본 유학설과 집 안 내력</big> 현송자는 언니와 달리 명확한 일본 유학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위에 인용된 별건곤에서 “20세 되든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메지로녀자대학(目自女大)을 마치고 도라왓다”는 기록이 거의 유일하다. 이후의 기록들이 별건곤을 인용하여 유학을 거론하지만, 유학을 떠났다는 20세에 현송자는 결혼을 하였기에 유학의 가능성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 더구나 당시 현영운의 처지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기에 유학은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공통으로 등장하는 기록은 일본식 교육을 내세운 거류민 중심의 제일고등여학교(경성고등여학교) 졸업이다. 1907년 관직에서 물러난 현영운은 끊임없는 금전관계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년간 사기와 송사사건에 시달리던 끝에 마지막으로 1915년부터 1916년까지 금광에 관한 공유권 확인 청구소송이 진행된다. 1914년 경기도 양평군 양동에 67만 8천 평의 금광 소유권을 얻었지만 이 소송 후 경매로 넘어가는 아픔을 겪는다. 이런 집안의 곤경을 구하기 위해서 현송자는 몸을 던진 것일까?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23.jpg'/></html> |- | ▲ 현영운의 광업관련 소송기사(매일신보 1916.5.15와 1921.8.8) |} 현영운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의 일을 해왔으며 형제들도 비슷한 시기 관료생활을 했다. “개벽”의 문화부장을 지낸 현철이 현영운의 사촌동생이며 소설가 현진건, 독립운동가 현정건이 조카이다. 현정건은 현영운의 집에서 1905년부터 기거하다 1910년 결혼 후 분가하여 상해에 정착하였다. 1868년생인 현영운은 1883년 8월 15살의 나이에 같은 해에 선발된 일군의 군사유학생을 제외한 거의 최초의 관비유학생이 되어 게이오의숙(慶應義孰)에 입학한다. 2년 후인 1885년 8월에 게이오의숙을 졸업하고 9월부터 박문국 주사로 관직을 시작한다. 외아문주사와 번역관, 법률기초위원을 거쳐 1898년에는 형법초안을 만들고 당시 정세를 주도하던 이등박문 초청 연회를 개최했다. 1900년에는 의화단 사건으로 러시아 군대가 남하하자 압록강을 넘어 침범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고, 이 때문에 고종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이등박문에게 한국국방동맹안을 제안하기도 한다. 1901년에 배정자와 결혼하였으나 1907년 11월에 헤어진다. 대부분의 글에서 현영운을 배정자의 덕으로 고속 승진한 행운아로 표현하지만 이는 정확한 평가라 할 수 없다. 배정자는 일제의 첩자노릇을 위해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줄 황제에게 인정받는 엘리트 관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의 배정자관련 기사에서 대부분 현영운의 처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도 현영운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현영운 또한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보다 적극적인 보조자를 필요로 했기에 일본정부와 연이 깊은 배정자를 택했을 것이다. 이런 관계는 서로의 이득을 매개로 하는 공생관계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혼 후 두 사람의 행로를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추태도 감수하는 모습이 아주 닮아있다. 1908년 일본인들이 기록한 통감부문서 8권의 “한국 관인의 경력 일반”에서도 현영운의 경력이 맞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시중에 나도는 소문을 첩보수준에서 정리한 듯한 내용이다. 현영운이 일본 유학 시 첩인 배정자와 동행하였고 귀국 후 칠원 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되어있으나, 유학시절 현영운의 나이는 15세에 불과했기에 첩을 거느리기엔 무리가 있다. 현영운은 배정자를 만나기 전에 이미 관비 유학생을 거쳐 16년간의 관직 생활을 통해 정3품으로 고속 승진했고 궁내부 번역관을 거쳐 칠원군수에 올라 있었다. 오히려 배정자를 만난 후 6년 간의 관직 생활에서 품계는 겨우 한 등급 오른 종2품에 그치고 이른 나이인 39세에 면직되고 말았으니, 결과적으로 현영운에게 배정자는 출세의 동아줄이 아니라 나락으로 떨어질 독배였던 셈이다. 현영운의 22년간의 관직생활은 철도원감독, 군부협판, 특명공사, 주일공사, 원수부검사총장, 육군참장, 농상공부서리대신, 태복시장 등 정통 엘리트 관료의 길이었다. 하지만 1907년 7월 고종의 퇴위와 순종의 즉위에 이어 9월에 무슨 이유였는지 육군참장에서 면직된다. 10월에 민영휘가 위원장을 맡은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 환영 외사임원을 맡으며 재기를 노리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width='700'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24.jpg'/></html> |- | ▲ 1907년 10월16일부터 일본황태자가 4박5일 일정으로 한국을 다녀간 45일 만에, 황태자 이은은 일본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이등박문에 끌려 인질로 잡혀간다. 일본 황태자의 방한은 한국의 황태자를 인질로 데려가기 위한 이등박문의 공작이었다. 1907년 12월 5일 만 10살의 어린 황태자 이은은 이등박문에게 끌려 길고 긴 인질생활의 험로에 올랐고, 살아서는 다시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 <big>그 이름, 배정자</big> 1907년 10월에 현영운이 재기에 실패하자, 배정자는 11월에 현영운을 떠나서 12월에 현영운의 후배인 박영철과 떠들썩한 혼례를 올린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놀랄만큼 빠르고 화려한 변신이었다. 11월의 대한매일신보에 배정자가 버림받은 것으로 보도된 기사는 박영철과 혼인하기 위한 배정자의 언론 플레이로 짐작된다. 비슷한 시기 같은 신문에서 그 반대의 기사도 보인다. {| class="wikitable" |- | <html><img src='http://dh.aks.ac.kr/~okehkim/lee/img/0025.jpg'/></html> |- | ▲ 1907년 11월 2일과 7일자 대한매일신보, 현영운과 배정자의 파경관련 기사 |} 박영철과의 결혼 이후의 배정자의 행태를 보면 필요에 따라 순식간에 결혼생활을 접고 마는데 대부분 돈이 개입된 이유로 발생한다. 배정자에게 현영운과의 결혼생활이 가장 길었던 것은 그만큼 얻을 이익이 많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1908년부터 1916년까지 이어진 현영운의 기사는 부채와 사기 등 금전관계로 인한 재판이 주를 이룬다. 이 기간 동안 현영운이 손 댄 사업은 금광을 비롯하여 수다하게 많지만 마치 불운의 아이콘처럼 모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재기에 몸부림치던 현영운은 마침내 윤택영을 집으로 데려와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무리수를 둔다. 하지만 황제의 장인이던 해풍부원군 윤택영은 당시 너무 많은 빚을 가지고 있어 부채대왕으로 불리며 자신의 앞가림조차 허덕이던 인물이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영운은 결국 사기사건으로 감옥에 가게 되면서, 별장은 박영효에게 처분해야 했고 살던 집 마저 채무로 인해 강제집행 당한다. 배정자 또한 별다르지 않게 같은 기간 동안 돈 문제로 인한 소송이 끊이지 않았지만 남자 문제는 화려하여 박영철에 이어 조병헌까지 연이어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다. 일제의 첩자 노릇을 계속하던 배정자는 1918년 10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만 1년 동안 만주로 무대를 옮겨 활동하게 된다. 바로 이 기간에 현송자의 결혼식이 치러진다. 배정자가 국내에 있었다면 궁지에 몰린 현영운이 추진한 현송자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까? {{clickable button|[[이철_이야기|이철 이야기]]}}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Clickable button (원본 보기) 3. 친구가 많아야 가는 길이 즐겁다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