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시작
1930년이 밝았다. 1929년 10월에 경제대공황이 닥쳐 노동자, 농민의 저항이 분출되고 있었으며 11월에는 3.1 만세운동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이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수많은 학생이 체포되거나 구속되었다.
그러나 발 등의 불을 꺼야 하는 이철에게는 격변의 사회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분주하게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1930년 여름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난다. 이러한 상황을 2001년 안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안동교회 90년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 (좌)안동교회 90년사 표지, (우)1912년 완공된 안동교회 예배당 |
<안동교회 90년사>가 지닌 장점은 대부분의 교회사가 주로 자신들의 좋은 점만 부각하려는데 반해, 안동교회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역사를 다소의 시각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더불어 당대의 사회사를 연구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전문을 자유롭게 공개한 점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청주가 고향인 이억길(李億吉)은 다재다능한 청년으로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다. 그 청년을 아낀 홍숙자 권사가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그 집에 기거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뺀드부에서 활약을 하였고, 교회에서는 시온회를 비롯하여 찬양대 지휘와 주일학교 교사 등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청년들이 자연 그를 사랑하였고 이들은 열정적으로 교회 봉사 활동에 전념하였다.” ▲ 안동교회 90년사
이철(李哲, 1903~1944)의 본명은 이억길(李億吉)이며 1938년 5월에 이철로 개명하고, 1940년 7월에는 아오야마 테츠(靑山哲)로 창씨 개명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개명 전에도 이철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안동교회 자료에는 이억길로 기록되고 있다.
이철의 고향은 공주(공주군 공주면 본정 294번지)이며 공주영명학교와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2년을 수료한 후 21세인 1924년 부터 청주성경학원 교무계에서 1년 반 가량 근무하였고, 1925년 9월에는 배고고보 3학년으로 편입하면서 안동교회에 출입하고 있었다. 이철이 재직하던 청주성경학원은 청주읍교회에 설립되었으며 1924년 당시 함태영 목사(3.1운동 민족대표 48인, 대한민국 3대 부통령)가 사역하고 있었다.
▲ (좌) 함태영 목사, (우) 청주제일교회가 설립한 청남학교 |
안동교회에서는 청주성경학원 경력 때문에 이철의 고향을 청주출신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으며, 유능하고 헌신적인 그의 활동에 감동받아 이인규와 홍숙자 부부가 후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철과 현송자의 사건이 표면화되기 전에 교회 청년들은 물론 많은 교인들이 그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함께 봉사하던 여자회원 중 유치원 보모였던 현○○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유부녀였다. 현○○는 어느 양반 댁 부인으로 세 아기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관계는 자연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어서 같이 활동하던 다른 청년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의 남편이 이를 알고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여 담임목사에게 이억길을 교회에서 내보내도록 요청을 하였고, 김우현 목사는 이억길을 출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 안동교회 90년사
출교처분이 내려진 것은 1930년 여름이었다. 위에서 표현된 “현○○”는 현송자이며 그녀의 남편은 3화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윤치오였다. 이철과 현송자가 사랑에 빠졌는데도 <시온회>를 같이 하던 젊은이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고, 오히려 남편인 윤치오가 이를 알고서 교회에서 쫒아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현송자의 남편 윤치오가 먼저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는 것과 김우현 목사는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윤치오와 안동교회
윤치오는 원래 정동감리교회 신자였다. 이곳에서 1919년에 현송자와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그와 안동교회의 인연은 1912년에 준공되면서 웅장한 건축물로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600명 수용 규모의 예배당 건축 헌금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안동교회의 예배당은 대규모 건축물이었기에 각계의 헌금을 필요로 했는데, 윤치오는 총 건축비용 1만여 원 중 10%에 해당하는 1천원을 헌금하였기에 교회로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참고로 당시 80Kg 쌀 한 가마의 가격은 5원 이었다고 한다.
▲ 안동교회와 윤치소 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윤치오의 동생 윤치소(윤보선 전 대통령 부친) 또한 안동교회 예배당 건축헌금 1천원을 내면서, 두 형제의 헌금만으로 전체 건축예산의 20%가 해결되었기에 안동교회에서 윤 씨 집안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윤치소는 거주지마저 안동교회와 마주보는 바로 앞 집으로 이사한 후 본래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에서 안동교회로 적을 옮겨 일가족과 함께 출석한다. 이러한 공로로 윤치소는 5년 후에 안동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이를 신앙심보다 경제력 때문이라며 반발한 일군의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버렸지만, 점차 안동교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윤치소의 영향력을 살필 수 있는 일면으로 1930년대 중반 현직인 목사를 교회에서 물러나게 한 일이 있느데, 그 후임으로 데려온 목사는 현직 목사와 대립하던 32세의 젊은 목사였다. 교회 내에서도 반대가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이처럼 윤 씨 집안은 안동교회 내에서 1910년대 이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철이 활동하던 1928년 당시의 선교모임 <시온회> 또한 윤 씨 집안의 사람들이 중심 회원으로 참여했기에, 안동교회는 그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윤 씨 집안의 며느리와 <시온회>의 젊은 학생 사이에 불미스런 스캔들이 발생한 것이다.
▲ 이철, 현송자 사건의 인물관계도 |
윤치오와 안동교회와의 특수 관계를 고려하면 애초부터 이 사건은 표면화되기도 어려웠고, 신속하고 조용히 마무리되어야 했지만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온회>의 젊은 회원들이 이 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