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李哲,1903~1944)
이철의 본명은 이억길(李億吉)이다. 공주 출신의 가난한 고학생이었지만 불굴의 투지와 승부사의 기질로 고난을 극복하고 당대 최고의 흥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빛나는 성공에는 그만큼 큰 그림자도 함께 한다. 배경 없는 사람의 성공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나 어두운 내막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상식적인 의문에서 시작하여 결과적으로 말년에 참여한 친일 경력으로 인한 오점 등이 짙은 그림자로 남는다.
이철은 단지 11년(1933년~1944년)을 오케레코드와 함께 했지만 그 기간에 남들이 이루지 못한 많은 것을 이루고 훌쩍 사라져 전설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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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케레코드 사무실에서 집무 중인 이철( 1930년대) |
사람들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도저히 이루기 힘든 불가능한 일을 한계를 넘어 기필코 이루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이루어지기 힘든 희망고문이라도 말이다. 일찌기 이런 드라마의 주인공이 있었다.
1930년, 오케레코드를 창립하기 직전의 2년간은 이철에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캄캄한 절벽 같았을 것이다. 맨주먹의 청춘, 가진 것 없는 농부의 아들이 아직 신분질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대에 조선 최고의 명문가 집안의 마님과 교회에서 만나 불륜에 빠졌다. 당연히 교회 내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이 논의 되었다. 마님댁과 교회에서는 조용하고 재빠르면서 동티나지 않게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이철로서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죽지 않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철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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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희전문 재학시의 이철(1928년) |
편모를 둔 공주의 한미한 집안 둘째 아들인 이철에게 생계문제는 언제나 가장 우선이었다. 어렵게 간이농업학교를 마친 후 생계활동을 해야 했기에 학교는 휴학, 편입을 반복하면서 공주영명과 공주고보를 거쳐 세번째 학교인 배재고보를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공주고보 재학 중에는 졸업을 미루고 청주성경학원 교무계에 취직해야 할 만큼 곤궁했다.
낯선 경성으로 올라와 배재고보 3학년으로 편입한 이후엔 학비를 벌기 위해 악보출판사를 운영했다. 남보다 8년이나 늦은 나이에 연희전문에 진학했지만 타고난 성실함과 낙천적인 성격으로 학교 밴드부를 창립하여 어린 학생들과 어울렸렸다. 교회에선 성가대의 지휘를 맡았고 유년학교에도 충실하여 교인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교회 모임과 유년학교 지도 등으로 젊은이들과 자주 어울렸고 그 자리에서도 당연히 모두에게 호감을 받았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대갓집 마님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깝게 보일 수록 소문은 커질 것이다.
어쩌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현송자(玄松子, 1899~1978?) 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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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송자(1930년대) |
구한말을 호령하던 권력가인 아버지 현영운과 조선 최고의 사교가라 불리던 계모 배정자의 귀여움을 받고 자라면서, 일본인과 소수의 특권층 조선인만 입학할 수 있었던 경성고등여학교를 다니며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언니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이 신문의 뉴스가 될 만큼 뜨르르한 집안의 배경은 물론 빼어난 미모까지 갖춰 오직 빛나는 미래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은 한꺼번에 오는 것, 각종 재판과 구설에 이은 부모의 이혼으로 집안은 몰락하고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대갓집의 세 번째 부인으로 출가해야 했다. 무슨 기구함인지 그 남자는 현송자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아버지의 친구였다.
체념과 적응 속에서 10여 년간 세 자녀를 낳았고, 그나마 외출이라면 집 안에서 후원하던 교회에서 유년학교 봉사활동과 선교모임을 하는 것이 유일했다.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가슴이 뛰는 경험을 하였고, 결국 네 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어쩌면 온갖 더러운 소문 속에서 참담하게 버려질 위기에 처했다.
태풍전야
여기까지가 1930년에 처한 이철과 현송자의 현실이었다. 두 사람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배경을 살펴보면 마치 당대의 세도가들이 경쟁하듯 등장하여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고 화려하다.
현송자는 구한말 종2품 육군참장을 지냈으며 이등박문을 초청하고 고종의 특사를 역임한 현영운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일제의 첩자로 반역의 치마를 드날리던 요화 배정자가 계모였으나, 지탄받는 도적도 집에서는 자애로운 부모로 변신하듯 배정자 또한 현송자에게는 따뜻한 보살핌을 주는 엄마였던 것 같다. 또한 현송자의 남편은 중추원 찬의를 역임한 윤치오로 구한말 명문가로 유명한 해평윤씨 집안의 윤영렬가 장남이며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었다. 광복 후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이 그의 조카이다.
사건의 중심배경이 되는 안동교회는 양반촌인 북촌(지금의 안국동)에 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국인들이 독자적으로 세운 일명 <양반교회>였고, 당시 해평윤씨 집안의 많은 사람이 이곳을 다니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안동교회의 장로인 유억겸은 유길준의 아들로 이철이 다니던 연희전문의 부교장이기도 했으며,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윤재는 안동교회의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또한 광복 후 부통령이 되는 함태영은 안동교회의 인근에 위치한 연동교회의 목사로 재직하면서 이철을 변론하기 위해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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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과 현송자 사건의 인물 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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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송자 남편 윤치오의 가계도(출처 인터넷 "직썰") |
등장 인물의 면면만 나열해도 벌써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못지않다. 이러한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1930년 한 해가 저물도록 1년간 날선 공방과 불꽃이 난무하는 전쟁을 치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