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동

North Korea Humanities

한지원(S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7일 (일) 20:39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한지원(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고희동(高羲東)
고희동 자화상.png
출처 : 네이버 블로그[1]
 
한글명 고희동 한자명 高羲東 영문명 Go, Hui-dong 가나명 コウ キドウ[2]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886년 몰년 1965년 출신지 한성(서울) 전공 서양화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고희동인물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동양화를 공부한 동양화가이자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이다.[3] 그는 화가로서 일제강점기 「정자관을 쓴 자화상」작품, 「부채를 든 자화상」작품, 「금강산진주담폭포」작품, 「탐승」작품 등의 작품을 남겼다.[4] 또한 그는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그리고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4]


생애


관료 생활과 화가로의 입문

고희동인물은 1886년 3월 11일 한성부공간 남부 훈도방 정승계 수표교동공간에서 아버지 고영철인물(高永喆)과 어머니 전주 이씨인물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5] 그는 14세 때 한성법어학교기관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 궁내부기관 주사로 취직하여 궁중 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4] 그리고 이 무렵 을사보호조약사건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 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하였다.[4]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인물과 조석진인물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다.[4] 그러나 당시 화단은 중국공간의 화보를 충실히 임모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여기에 환멸을 느낀 그는 궁내부기관 시절 외국인들과 접촉으로 대할 수 있었던 서양의 그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4]


일본 유학과 미술 교육자 활동

고희동인물은 1909년 일본공간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기관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3] 그리고 그곳에서 일본공간에 최초로 서양식 미술이론을 도입한 구로다 세이키인물에게서 그림을 배웠다.[5] 1915년 3월 29일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5] 귀국 후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기관와 휘문고등보통학교기관, 보성고등보통학교기관, 중동고등보통학교기관 등지에서 미술교사를 지냈다.[5] 도상봉인물·이마동인물·오지호인물·구본웅인물등 1세대 서양화가 대부분이 그의 제자였다.[6]


광복 이후의 행정과 정계 진출

고희동인물은 광복사건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단체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단체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4]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사건이 일어나자 김일성인물의 납북 리스트에 오르게 되어 납치 위기를 맞는다.[5]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기관이 개원되자 종신회원에 선출됨과 동시에 초대 회장에 취임했으며,[5] 1960년에는 민주당단체 소속으로 출마하여 참의원기관 의원으로 국회기관에 진출하기도 했다.[3] 1965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다가 10월 22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공간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5]





연구


근대적 자아의 표출: '자화상'과 시대 인식

고희동인물의 첫 서양화 작품이자 한국인이 그린 첫 서양화는 ‘정자관을 쓴 자화상작품’이다.[6] 이는 고희동인물이 도쿄미술학교기관를 졸업하면서 졸업요건으로 그린 자화상으로, 현재 도쿄예술대학교 박물관기관에 보존돼 있다.[6] 이 작품이 특이한 점은 그가 눈에 띄는 조선인 복장에 정자관을 썼다는 것이다.[6] 그는 자신의 머리에 정자관을 씌움으로써, 성균관을 졸업한 유생이라도 된 듯 스스로를 당당하게 그렸다.[6] 졸업 후 귀국한 해 여름에 그린 ‘부채를 든 자화상작품’도 모시 적삼을 풀어 헤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강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서적을 꽂은 서가와 서양화를 배치해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했다.[6] 프랑스어에 능숙했던 그는 프랑스 공사관기관에서 열린 소규모 전시회에 서양화 화풍을 흉내낸 자신의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다.[3]


동서양 화풍의 절충과 '신(新)한국화' 모색

고희동인물은 일본공간에서 귀국 후 10년 만인 1920년 후반, 동양화로 전향하여 서양화적 수법을 가미한 풍(風)을 개척하였다.[4] 구체적으로 그의 화풍은 남종화의 선염법(渲染法)을 쓰지 않고 서양화의 기법을 가미하여 북종화에서 쓰던 부벽준에 가까운 음영법을 쓴 것이 특징이다.[3] 전통적 수묵화법에 서양화의 색채 및 기법을 쓰는 절충양식의 새로운 한국화를 시도한 것이다.[7] 그러나 양식적으로는 독자성을 이루지 못하여 독립된 화가로서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4]


화단의 설계자: 미술 행정과 교육

고희동인물은 1918년 일본인 서양화가로 조직된 조선미술가협회단체에 대항하여, 당시 서화계의 중진과 대가들을 종용하여 최초의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이자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단체를 결성하였다.[5][4] 서화협회단체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회원 작품전으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사건이 열렸다.[4] 또한 회원전과 더불어 계몽 사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지인 『서화협회보학술지』를 창간하기도 했다.[4] 이후 1936년 제15회전을 끝으로 서화협회단체가 더 이상 열리지 않을 때까지 총무 또는 회장으로 민족진영의 미술가 단합에 정력을 기울였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사건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4] 그가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했던 욕망 속에는, 최초의 서양화가로 상징되는 자신을 포함해 조선 예술가 전체의 위상을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6] 결과적으로 그는 ‘환쟁이’를 ‘화가’의 위치로 격상시키기 위해 애쓴 선구자였음에 틀림없다.[6]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고영철 Person: 고희동 A hasSon B
Person: 전주 이씨 Person: 고희동 A hasSon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한성법어학교 A takesCourseAt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궁내부 A worksAt B
Person: 고희동 Person: 안중식 A hasMaster B
Person: 고희동 Person: 조석진 A hasMaster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도쿄미술학교 A graduates B
Person: 고희동 Person: 구로다 세이키 A hasMaster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중앙고등보통학교 A worksAt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휘문고등보통학교 A worksAt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보성고등보통학교 A worksAt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중동고등보통학교 A worksAt B
Person: 도상봉 Person: 고희동 A hasMaster B
Person: 이마동 Person: 고희동 A hasMaster B
Person: 오지호 Person: 고희동 A hasMaster B
Person: 구본웅 Person: 고희동 A hasMaster B
Person: 고희동 Group: 조선미술건설본부 A isMemberOf B
Person: 고희동 Group: 조선미술협회 A isMemberOf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대한민국예술원 A worksAt B
Person: 고희동 Group: 민주당 A isMemberOf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국회 A worksAt B
Person: 고희동 Institution: 참의원 A worksAt B
Person: 고희동 Work: 정자관을 쓴 자화상 A creator B
Person: 고희동 Work: 부채를 든 자화상 A creator B
Person: 고희동 Work: 금강산진주담폭포 A creator B
Person: 고희동 Work: 탐승 A creator B
Person: 고희동 Group: 서화협회 A isMemberOf B
Group: 조선미술건설본부 Group: 조선미술가협회 A isPredecessorOf B
Event: 을사보호조약 Person: 고희동 A isRelatedTo B
Event: 한국 전쟁 Person: 고희동 A isRelatedTo B
Event: 대한민국미술전람회 Person: 고희동 A isRelatedTo B
Event: 서화협회전 Group: 서화협회 A isRelatedTo B
Journal: 서화협회보 Group: 서화협회 A publisher B
Institution: 한성법어학교 Location: 한성부 A isLocatedIn B
Institution: 도쿄미술학교 Location: 일본 A isLocatedIn B
Institution: 도쿄예술대학교 박물관 Location: 일본 A isLocatedIn B
Institution: 프랑스 공사관 Location: 한성부 A isLocatedIn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고희동", 『나무위키』online.

"고희동", 『위키백과』online.

김인혜, 「조선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화는 조선인의 自畵像이었다」,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4년 03월 31일.

"작가소개 | 춘곡 고희동”, 『고희동 미술관』 online, 종로문화재단.






주석


  1. 셜리,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다.", 『셜리의 베이스캠프 837』online, 작성일: 2011년 05월 26일.
  2. 고희동의 한자명 高羲東을 가타카나로 표기한 것으로, '코우 키도우'라고 읽음.
  3. 3.0 3.1 3.2 3.3 3.4 "고희동", 『위키백과』online.
  4. 4.00 4.01 4.02 4.03 4.04 4.05 4.06 4.07 4.08 4.09 4.10 4.11 4.12 오광수, "고희동 (高羲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5.0 5.1 5.2 5.3 5.4 5.5 5.6 5.7 "고희동", 『나무위키』online.
  6. 6.0 6.1 6.2 6.3 6.4 6.5 6.6 6.7 김인혜, 「조선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화는 조선인의 自畵像이었다」,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4년 03월 31일.
  7. "작가소개 | 춘곡 고희동”, 『고희동 미술관』 online, 종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