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下代)를 시작한 원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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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2인자 김경신의 노력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무열왕계 김주원(金周元)은 1인자, 내물왕 12세 손인 김경신(金敬信)은 2인자였다. 그러나 김경신의 어머니 계오부인 박씨(繼鳥夫人 朴氏, 소문왕후)가 경주 주변의 여러 사찰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사찰을 배경으로 한 막대한 경제력과 승병조직 등 강력한 현실적 지원 덕분에 왕위 계승 서열이 낮음에도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인 김경신은 신라 중대(中代) 무열왕계(武烈王系) 세력과 경쟁하여 왕이 되었다.

계오부인 박씨는 의상대사의 제자인 승전법사가 창건한 경상북도 김천 갈항사의 두차례 중창에 관련이 있다. 동, 서 삼층석탑(국보) 중 동탑 기단부에 새겨진 석탑기(국보)에 의하면 1차는 삼층석탑을 건립하고 석조여래좌상(보물)을 조성한 758년(천보 17)이며 불상이 안치될 정도의 불사가 행해졌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차는 명문을 새긴 원성왕대로 볼 수 있는데, 1차 중창 시 세력이 크지 않아 중창하였다는 사실을 적지 않고, 원성왕이 즉위한 이후의 중창에서는 석탑기를 새겨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갈항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조선 중기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국보인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1916년 도굴로 파손되어 경복궁내 야외 정원으로 이건되었고, 이 과정에서 동·서 탑 기단부에서 각각 청동사리호, 금동사리병 등이 발견되어 사리장엄구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리장엄구 중 준제다라니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이외 청동사리호, 금동사리병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2005년 다시 해체 복원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정원의 야외전시실에 있다.

② 원성왕 즉위와 하대 왕실 기반 마련

『삼국사기』 10권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2권 기이(紀異)조에서 원선왕 즉위과정을 보면, 김경신은 혜공왕대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고 선덕왕을 내세운 후 세력을 잡아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이후 선덕왕이 785년(선덕왕 6)에 후사없이 죽자 김경신이 먼저 궁에 들어가 재빨리 군사적 행동을 취하여 궁을 장악하고 즉위하여 원성왕으로 올랐다.

원성왕 대는 실질적으로 신라 하대(下代)가 시작된 시기로 평가되는데, 변칙적인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천명(天命)을 꾸며내고 <만파식적설화(萬波息笛說話)>를 앞세우는 등 원성왕의 신성성을 꾸미고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웠다. 또한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오묘(五廟)에 포함시키고 진지왕의 추복 사찰인 봉은사를 완성하는 등 무열왕계를 극복 및 포섭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하대 왕실 성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③ 신라 조각 왕릉의 완결판, 원성왕릉

원성왕릉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원성왕릉이 토함산(吐含山)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숭복사비)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괘릉에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사적)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동곡사는 소문왕후의 외숙이며, 원성왕비 숙정왕후의 외조부인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것이라 관련이 많다. 숭복사비에는 원성왕릉과 경문왕계 왕실의 숭복사 중건에 대한 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숭복사지에 있는 숭복사비는 복원한 것으로 원 숭복사비는 15개의 비편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경주의 지지(地誌)인 『동경잡기』에는 원성왕을 수중에 장사지내고 관을 돌 위에 걸어 두었다가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괘릉(掛陵)은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잘 완비된 능으로 입구에 두 쌍의 석인상, 12구의 십이지상, 두쌍의 사자상 등 왕릉 조각(보물)의 모든 종류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 ‘신라 조각 왕릉의 완결판’이라고 한다. 특히 ‘서역인 이미지’의 석인상은 원성왕릉 이전까지는 유례가 없었던 것으로 서역인의 독특한 복식, 얼굴, 자세 등이 눈길을 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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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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