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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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생각한 개천, 청계천

준천을 통해 백성을 생각하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개천으로 불렸다.(한양도 - 위백규(1727~1798)가 1770년 저술한 『환영지』에 수록) 15세기 세종 대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개천은 비가 오면 쉽게 범람하여 도선 안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조선 후기 영조는 개천에 대한 대대적인 준천(개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이 원활히 흐르게 하는 것)을 통해 홍수 피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한양은 상업도시로 변모하여 많은 상인과 평민이 생계를 목적으로 상경하였고, 이들은 주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며 개천 주변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호구총수에 기술)과 개천 주변 거류민 증가, 하류지역 경각지 개간, 도성 사산에서의 벌목(지봉유설에 기술), 시체 유기(박지원, 『연암집』 「방경각외전」 광문자전, 1754년) 등은 개천에 각종 퇴적물이 쌓이는 원인이 되었고, 개천 주변은 불안정한 거주공간이 되었다. (숙종실록 1710년 9월 5일)

이에 영조는 세종(1397~1450)이후 거의 시행되지 않았던 개천 준설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영조는 재임 기간 중 200여 차례의 순문을 진행했는데, 그 중 준천과 관련해서는 9차례를 진행하였다. 즉, 백성과 직접 소통하면서 준천에 대한 민심을 파악한 것이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승정원일기 1760 2월 23일), "개천의 준설은 첫째도 백성을 위함이요, 둘째도 백성을 위함이니..."라고 하였는데(『준천사실』)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준천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에 부응하듯 많은 여러 관원과 많은 백성들이 준천에 자원하여 참여하였다.

또한 영조는 준천이 시작되자 개천에 나가 곡식과 무명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위로하였고, 백성에 대한 자신의 뜻을 표현한 『어제균역준천여사업』(177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을 지었다.

  • 준천은 경진준천(1760년), 계사준천(1773년) 두번 진행되었는데, 두번째 공사는 개천의 양쪽 기슭에 석축을 쌓는 것으로 경진준천에서 목책으로 임시 가설한 것을 보완한 것이다.


백성이 사랑하는 수문을 만들다

  • 한양도(18세기)에는 18세기 한양 모습을 묘사한 지도로 송기교(松杞橋)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개천 본류의 준천 공사 구간에 있던 10개의 다리 명칭이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중 오간수문을 살펴보자.
  • 오간수문은 동대문 남쪽에 있던 개천의 배수구로 수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 기능도 하였다.
  • 준천 이후, 준천(濬川) 과정에서 둑을 튼튼하게 하고자 개천 양쪽 언덕에 심은 버드나무(『증보문헌비고』 권21 「여지고」 산천, 1908)와 수양버들로 오간수문은 한양의 상춘장소로 사랑받았다. (유본학, 『문암집』,「오간수문유제」,1812~181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준천으로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준천소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제공 (영조실록 1760년 4월 1일)하거나 뱀 장사를 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 준천때 퍼낸 흙은 동대문 일대 개천의 양 둑에 쌓아두고 이를 가산으로 불렀으며(『광여도』,「도성도」,18세기,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사산금표도』,1765), 훈련원과 동대문 밖의 땅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 오간수문(五間水門) 홍예(虹蜺) 기초석의 물가름석 위에 놓여있던 돌거북이 형상의 석조물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물흐름을 잘 관장하여 개천(開川)의 범람을 막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수문상친림관역도에도 그려짐)
    • 오간수문에는 외부인의 도성 출입을 막기 위해 오간수문(五間水門) 홍예 사이사이에 설치한 철책도 있었고, 이는 오간수문지(五間水門址)에서 발굴되었다.
    • 1907년(융희 1), 하천수와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 문을 뜯었고, 1908년(융희 2)에는 교통을 원활하게 하고자 남아있던 오간수문과 성벽을 헐어내며 오간수교라는 다리를 설치하였다. 이후 오간수교는 청계천 복개공사 때 사라졌다.


해체 이전의 오간수문의 사진은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 1904년)에 실려있다.


준천 참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다

  • 준천소좌목: 경진준천에 동원된 준천소 관원의 구성과 명단, 참여한 백성들의 구성을 자세히 기록한 『준천소좌목』(1760,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이 있다.
    • 임시로 설립된 준천소는 정식기구가 되면서 준천사가 되었고, 현재 준천사 터가 남아있다.
  • 춘첩첩은 영조가 경진준첩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종류는 '어제준천계첩', '어제갱진계첩' 두가지이나 각 종류마다 여러 첩이 존재하며, '영화당친림사선도'는 모든 준천첩에 실려있으나 이를 제외하고는 실린 그림에 차이가 있다.
  • 『준천첩』 내 어제준천계첩: 영조가 시를 지어 준천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내려준 것으로 어제어필, 격려하는 내용을 그린 그림, 좌목,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는 준천첩에 포함된 그림)
  • 『준천첩』 내 어제갱진계첩: 영조가 지은 시에 대해 신하들이 화답한 시들을 모아 제작한 것이다.
    •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영조(英祖)가 오간수문(五間水門)에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것으로 준천 당시 오간수문의 모습과 공사 현장의 생생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 영화당친림사선도 (暎花堂親臨賜膳圖): 공식적으로 준천이 완료된 후 영화당(暎花堂)에 나가 활쏘기 시합에 참석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담은 그림이다.
  • 모화관친림시재도 (慕華館親臨試才圖): 영조(英祖)가 모화관(慕華館)에서 각 군문(軍門)과 준천소 군병(軍兵)들의 훈련 모습을 시찰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군병을 격려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후 누락된 장교(將校)와 군졸(軍卒), 지원한 백성과 승려들까지 참여하여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영조가 준천소 당상(堂上)부터 하급 예속(隸屬)에 이르기 까지 준천의 참여자를 모두 연융대(鍊戎臺)에 모이게 한 후 잔치를 베푼 것을 그린 것이다. 이 날은 준천(濬川)에 관한 모든 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음을 기념(記念)하는 자리로 준천(濬川)에 참여한 군민(軍民)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없애 버렸다.

준천이 계속되다

  • 영조는 준천을 자신의 대표 업적 중 하나로 꼽으며, 세손(정조)과 신하들에게 명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어제준천명병소서, 1773)
  • 『준천사실』: 영조는 경진준천을 진행하면서 홍계희(洪啓禧)에게 준설을 기록하도록 하였고, 책의 구성은 영조가 직접 지은 서문을 비롯하여 배경과 과정을 기록한 준천사실, 개천관리의 전담기구인 준천사의 구성 인원과 활동 지침을 기록한 준천사절목으로 되어있다. 정조는 『준천사실』의 편찬을 통해서 후대 왕들에게 백성들의 안전을 위한 개천 관리의 모범을 전하고자 하였다.
  • 준천은 경진준천 후 경진지평, 계사경준, 기사대준 등 네 개의 글자를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에 새겼다. 이는 향후 준천 시에 네 글자가 다 보이도록 기준점을 잡기 위한 것이며, 준천의 지속적인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준천은 2~3년 주기로 진행되었으며, 1886년(고종 23)부터는 한성부에서 주관했고 1897,8년(광무 1,2)에는 민간업체인 경성마차회사에 위탁하여 실시하였다. 실제로 조선 정부가 주도한 준천은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민본정치의 이념을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 조선초기~계사준천까지의 개천의 역사는 채제공의 시문집인 번암집에서 함축적으로 볼 수 있으며, 여기에는 영조의 준천 후 평안하고 아름다운 개천을 노래하는 「준천가」가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