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진

mok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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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진(木浦鎭, 1439년∼1895),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목포의 탯자리요, 그래서 목포답사의 출발지로 꼽힌다.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이며 진의 우두머리인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부르기도 했고, 현 목포시 만호동의 유래가 되었다.

지리상으로 볼 때 목포는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며 호남과 경상 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목포진이 설치된 배경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안현(務安縣) 목포(木浦)와 보성현(寶城縣) 여도(呂島) 등은 모두 왜적이 드나드는 요해지(要害地)이온데, 병선(兵船)을 정박하여 세운 곳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청하옵건대, 목포와 여도에 따로 병선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를 임명하여 보내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21년 4월 15일(임진)

이와 같이 목포(木浦)는 그 길목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주목받게 되었으며, 그 곳을 침략하는 왜적을 경계하기 위해 목포진의 설치가 재가되었는데, 성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그보다 후대인 연산군 때(1501년 무렵) 의 일이다. 『목포진지』에는 만호(萬戶, 무관 종4품) 1인 외에 군관(軍官) 6인, 진무(鎭撫) 7인, 사부(射夫) 2인, 사령(使令) 5인의 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만호는 인근 지역의 해상 경계 경비 등 병사업무의 수행 이외에 진영 소재지 인근 마을의 일반 행정까지도 관할하였다. 

한반도 서남해 방어지로서 그 역할을 다했던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 군사제도의 개편요구에 따라 목포개항 2년 전인 1895년 7월 16일 칙령 제141호로 폐진되었다.

현재 객사가 복원돼 있으며, 오래된 비석 2기(수군절도사 신광익 선정비, 만호 방대령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