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무공 고하도 주둔(李忠武公 高下島 駐屯, 1597~1598)은 정유재란 시기인 1597년 이순신 장군이 명량(鳴梁)에서 승리한 후 전력을 정비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물색한 후 10월 29일 목포 앞바다에 있는 고하도로 진을 옮겼던 사건이다. 이곳에서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선과 군비를 확충한 뒤 다음해인 1598년 2월 17일 완도 고금도로 진을 옮길 때까지 주둔하였다.당시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기능이 목포 고하도에 형성된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고하도에 진을 설치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포에 이르렀다가 보화도(寶花島=고하도)로 옮겨 정박하니,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육지에 내려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매우 좋으므로 진을 치고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고하도는 영산강의 입구에 위치하여 해상 교통이 편리하고 영산강 연안의 곡창지에서 군량을 조달하는 것이 용이하였다. 또한 인근 도서에는 어염이 풍부하여 이를 활용할 수 있었으며, 주위의 수많은 도서는 적의 침입 시 전술적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또한 도서 지방으로 피난 온 피난민을 병사로 보충 할 수 있다는 계산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 돌로 남·서 길이 1㎞, 높이 2m, 폭 1m의 성을 쌓아 적의 배를 구별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오가는 배들에게 1∼3석의 식량을 내어 놓고 통행첩을 받아가도록 하여 열흘만에 일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무기와 배를 만들며 전열을 가다듬었다고 한다.이충무공의 고하도 주둔을 기념하여 훗날 통제사 오중주에 의해 시작되어, 경종 2년(1722) 8월에 공의 5대손인 이봉상에 의해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남구만이 짓고, 조태구가 글씨를 쓴 이충무공유허비에는 고하도의 위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섬은 남쪽, 서쪽으로 가는 바닷목에 놓여 있어 오른편으로는 경상도를 끼고 왼편으로는 서울로 연결되는 되는 바, 가까이로는 군사들을 먹여 큰 싸움을 이길 수 있게 하고, 멀리로는 임금이 피난해 계신 곳에 곡식을 바쳐 양식이 떨어질 때 쓸 수 있도록 할 것이니, 이는 나라를 위하여 깊이 꾀하고 멀리 걱정한 것이요. 우연히 한 일은 아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