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4.8독립만세운동(4.8萬世運動, 1919.4.8) 목포 최초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발생했으나 목포경찰서장과 무안군수의 회유로 해산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만세운동은 4월 8일 전개된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유학생 그룹, 둘째 청년학생그룹, 셋째 기독교계이다. 이들 세 그룹은 각기 치밀한 사전계획 속에 태극기, 경고문 등 유인물 제작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4월 7일 시내에 살포하고 조선인 상점은 철시하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4월 8일 거사 당일에는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공립보통학교, 간이상업학교, 양동 교회 신도들, 애국지사, 민중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시위를 벌였다. 일제는 경찰과 수비대가 출동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저지하였고 광주에서 일본군 보병이 지원됐다. 시위는 다음날까지 이어져 일본 군대가 추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이틀간의 시위로 32명이 검사국으로 넘겨져 재판에 회부되었다. 현 정명여고 선교사사택에서 당시의 격문과 독립가 등 관련 문서가 발견돼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목포의 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청년학생들의 연합이 다른 지역보다 더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며, 만세운동 참여자들이 이후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