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Daniel James Cumming, 김아각, 1892~1971)은 목포에서 활동한 미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버지니아주 스탠턴에서 태어난 커밍은 루이스빌과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선교사로 내한, 목포에서 영흥학교와 목포정명여학교,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장을 지내며 주로 교육 사역에 힘쓰는 한편, 목포 인근의 농어촌 전도와 프렌치병원 감독 역할도 하였다. 1938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귀국하여 1945년 켄터키 웨일리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재차 내한하여 목포와 광주의 성경학교장으로 활동하였고, 1966년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선배 선교사 프레스톤(변요한)의 딸 변애례와 1934년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다. 동생 부르스 커밍(김아열) 역시 목포 순회선교사로서 형제가 함께 사역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