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전위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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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전위동맹(木浦前衛同盟, 1925, 8.30.) 사상단체를 표방하며 김영식(金泳植), 배치문(裵致文), 서병인(徐炳寅), 박춘풍(朴春風), 이고산(李古山) 등이 발기하여 창립했다. 사업범위는 청년, 사상, 노농, 여성, 형평 등에 이르렀고, 명칭, 목적(대중의 생활향상과 역군 훈련), 신조(상호부조), 동맹원 자격(당파에 얽매이지 않는 자에 한함)을 명시한 규약 4조 외에는 보안상 일절 불성문(不成文)을 원칙으로 하여 내용을 문서화 하지 않았다. 1926년 목포제유 파업 때는 임흥수(任興洙) 오도근(吳道根) 박제민(朴濟民) 서병인(徐炳寅) 김영식(金泳植) 배치문(裵致文) 조극환(曺克煥) 등 7명이 제유노동자들과 함께 수감되기도 했다. 전위동맹 창립 당시 목포는 천여명의 공장노동자와 4천여명의 직업노동자가 집중돼 있었으나 이를 마땅이 지도할 단체가 없는 가운데, 뜻있는 청년, 노동자들이 사상단체 전위동맹을 조직하고 맹렬한 활동을 펼친 결과 목포제유노동조합을 위시하여 각 직업별 노동조합이 실로 요원의 불길처럼 결성되어 8개 단체가 가맹한 목포노동총동맹이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전위동맹 창립으로 목포지역 사회운동의 계급적 성격이 본격적으로 강화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