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대통령김대중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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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영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7월 14일 (수) 14:18 판 (새 문서: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 후보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네 번째 도전만 에 이루어낸 기적 같은 승리였다. 전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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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18일, 김대중 후보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네 번째 도전만 에 이루어낸 기적 같은 승리였다. 전남도청 앞 분수대 주변에 수백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나왔고, 그 들의 손에는 ‘드디어 해냈다! 50년만에 정권 교체’ 등의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길가의 시민들도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02) 목포역에도 마찬가지였다. 역 앞 육교에는 ‘얼마나 부르고 싶던 이름인가? 김대중 대통령!’이라 쓴 현수막이 내걸렸다. ‘행동하는 양심’, ‘인동초’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 민국의 큰 별이지만, 목포를 비롯한 호남인들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신 같은 존재였다. 김 대통 령의 당선은 목포 시민들에게 감동 그 자체였다. 그 감동의 순간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정권만 잡으면 ‘고통 끝, 행복 시작’인줄 알았지만, 김영삼 정부가 물려준 IMF 사태는 그런 기대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이었다. IMF 관리 체제라는 경제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해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행복은 뒷전으로 밀렸다. 목포 시민들은 ‘이 기회에 보다 많은 것을 얻어냈으면……’하다가도 ‘그러다 역풍을 맞아 대 통령님이 곤경에 처할까……’우려하였다. 그래서 우리 것 챙기기는 차라리 뒷전이었다. 자신의 이익 을 뒤로 할 만큼 대통령의 성공을 바랐다. 김 대통령의 당선으로 인해 그동안의 지역 차별에 대한 한 풀이를 했고 자존심을 회복했는데, 그걸 분명히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답은 성공한 ‘호남’대통령으로 기억되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어떤 물질적 보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이 2001년 8월 23일, IMF 관리 체제를 조기 종료하여 경제를 다시 정상궤도 에 올려놓았다. 혹독한 기업 구조조정과 정부의 자구 노력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금 모으기 운동’ 등 으로 일치·단결하여 극복에 앞장섰던 국민들 덕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삶의 기간 내내 숱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 특히 재임기간 01) 이 글에서는 비교적 일관되게 지역 사정을 전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주로 활용하였다. 단순 소식을 전하는 기사는 번거로움을 피해 생략 하였다. 02) 『조선일보』 1997. 12. 19. 「시민들 ‘김대중’ 연호 물결 / 광주 중심가 환호의 눈물」.490 제1권 항도 목포 동안 김정일 북한 국방 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해서 6·15 공동 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50 여 년 동안 지속된 한반도의 냉전을 남북 화해와 평화의 기틀로 바꾸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2)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아 김대중 대통령 만세, 만세! 김대중 대통령이 노 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타전된 2000년 10 월 13일 오후 6시 전남 신안군 하의도 김 대통령의 생가에 모인 고향 사람들은 일제히 만세를 높이 불 렀다.03)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2월 10일 노 르웨이 오슬로에서 김대중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 다. 그동안 14번이나 후보로 추천되었었다. 한국 인으로서는 첫 노벨상 수상이었다. 패트릭 스미스 (Patrick Smith)는 2003년 1월 말, 미국의 불룸버 그(Bloomberg) 통신에서 “수주일 후면 5년의 임기 를 마치는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 정치, 외교 분야에 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하여 성공한 대통령 으로 평가하였다.04)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 ‘한국 현대사의 거 목’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2 분, 향년 85세로 생을 마치고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 장되었다. 당시 장의 위원장이었던 한승수 국무총리 는 조사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를 이뤄 정치 발전의 확고한 기틀을 닦았고, 분 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남북 화해와 교류·협력의 길을 열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 03) 『조선일보』 2000. 10. 14. 「하의도 김대통령 생가 표정/ “섬마을서 세계인물 났네”」. 04) 정태영, 『목포발 청춘열차』, 뉴스투데이, 2014, 348쪽. 그림 1 노벨평화상 수상소감을 말하는 김대중 대통령(2000년 12월 10일, 김대중도서관)제4편 목포의 역사 491 의 위상을 드높인 일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라며 추모하였다.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된 역사의 현장 이었다. 이처럼 호남인이 대통령이 되어도 얼마든지 나라를 잘 경영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호남이 차별받을 이유가 없는 지역이란 점을 확인해 주었다. 성공한 대통령! 이것만큼 큰 유산은 없을 것이다. 3)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기억과 기념 목포 삼학도에 세워진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하는 학습의 장, 기념의 공간으로서 이를 기리는 기억의 장치이자 목포의 자부심을 느끼 게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2006년 10월 목포시는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목포를 방문했을 때 삼학도에 노벨 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발표하였다. 이 사업은 2007 년 타당성 조사 및 기본 계획 용역을 완료됐으나 이후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답보 상태에 빠졌다. 그 러나 2009년 10월에 들어서 국비를 확보하고 실시 설계, 유품 수집 등에 진전을 보이며 활기를 띠었 다. 2011년 9월 5일 착공식을 가졌고, 6·15 남북공동선언 13주년인 2013년 6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서거 3주기를 맞아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일대기 창작 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김성옥 연출가가 애 니메이션·영상·무용·노래 등을 결합해 만들었다. ‘당신은 우리입니다’라는 주제로 총 3부로 구성되 었다. 온갖 역경을 딛고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세계 평화의 지도자로 업적을 남긴 김 전 대통령의 일 대기를 그렸다.05)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은 기념관으로, 일대기 공연으로 다양하게 기억되고 있다. 목 포 시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며 여전히 살아 있다. 사실 역사란 사람들이 쓰는 것이고, 또 만들어 가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삶을 우리 지역의 훌 륭한 유산으로 만드느냐 여부는 그대로 우리들 하기 나름이다. 행동하는 양심, 인동초 등의 수식어가 말하듯이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는 좌절하지 않는 도전정신이다. 칠전팔기의 도전 정신, 지역 차별의 왜곡된 구조 속에서도 호남인이란 치명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승리로 이끈 불굴의 투지, 그런 정신을 계승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