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목포청년회(木浦靑年會, 1920~?)는 일제강점기 시대 활동한 목포 청년운동으로 1920년 5월 9일 발족하였다. 지식계발과 친목, 체육장려를 목적으로 83명의 회원이 모여 창립총회를 열었고, 초대 임원은 회장 김상섭(경무서 경무관 지냄), 부회장 김택현(변호사), 총무 차남진(대지주), 재무 정영희(사업가), 서무부장 이상빈(의사), 평의원 김연식(언론인), 문재철(대지주) 등이었다. 1922년 9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회장 문재철, 부회장 차남진, 총무 김상억 등으로 임원 개편을 하였다. 이듬해 1923년 청년회 체제가 회장제에서 이사제로 변경되어 5월 27일 임시총회를 기해 새롭게 선임된 임원은 총이사 차남진, 상무이사 임현빈, 유중길 등 15명이었다. 목포청년회는 발족할 때부터 숙원사업이었던 회관건립을 9월에 착수하여 이듬해 1925년 3월 대지 1백평, 건평 57평의 석조건물을 준공하였다. 청년회관을 중심으로 목포청년회는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1923년 목포부협의회 선거에 참여하거나,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 개선에 단체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목포청년회와 별개로 목포에는 사회주의 성격의 “무산청년회”(강석봉, 배치문 등)가 1924년 조직되었으며, 1925년에는 인근 지역의 청년회들과 결속한 “무목청년연맹”, 그리고 여성들로 구성된 “여자청년회”가 1926년 발족하였다. 목포청년회는 1927년 8회 정기총회에서 단체를 해체하였고, 1927년 10월 3일 “청년동맹”으로 변경하여 새롭게 창립하였으며 김철진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보다 앞서 “신간회 목포지회”도 출범하였고, 기존의 목포청년회나 무산청년회 등의 주요 인물들이 신간회로 재결속하여 목포 지역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소설가 박화성은 1934년 “헐어진 청년회관”이란 작품을 통해 목포청년회관을 중심으로 한 목포 청년운동의 활동을 잘 드러내었으며, 이 건물(목포시 차범석길 35번길 6-1)은 지금도 현존하여 국가등록문화재 제 43호로 지정되어 있다. [1]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Additional Attributes
Contextual Relations
Spatial Data
Spactial Information Nodes
gid |
region |
label |
hanja |
latitude |
longitude |
altitue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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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_목포청년회관 |
전라남도 목포시 |
구_목포청년회관 |
舊 木浦靑年會館 |
34.79310 |
126.380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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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청년회 회관(현 남교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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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Data
Temporal Information Nodes
tid |
timeSpan |
label |
hanja |
koreanEra |
japaneseEra |
indexDate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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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청년회_설립 |
1920 |
목포청년회 설립 |
木浦靑年會 設立 |
大正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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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청년회관_건립 |
1925 |
목포청년회관 건립 |
木浦靑年會館 建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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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正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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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남교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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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청년회_해산 |
? |
목포청년회 해산 |
木浦靑年會 解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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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 Reference
- type: 해설, 참고, 3D_모델, VR_영상, 도해, 사진, 동영상, 소리, 텍스트
Bibliography
author |
title |
publication |
edition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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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 ↑ 최성환, "1920년대 목포청년운동과 지역엘리트의 성격에 대한 연구",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 35권 1호, 2016, 3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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