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항해벽공사(木浦港海壁公事)는 각국거류지를 시가지로 만들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과제였다. 이 공사의 건설업무는 목포 '각국거류지회'에 위임되었지만, 대한제국은 건설과정의 자주성을 표방하고 있었다. 해벽공사는 1899년 6월에 착공하여 1901년 5월에 완성되었다. 구간은 서쪽 경계(櫻町, 금화동)의 산모퉁이를 기점으로 남해안의 해관 앞에 이르러 동해안의 갯고랑을 따라 송도(松島)에 이르러 연장 1,500미터, 송도의 서쪽 말단에서 목포역 정거장의 남쪽, 바위를 절개한 상반좌(常盤町, 지금의 상락동)가 된 바위 모서리에 이르는 연장 320미터에 해당하는 거리였다. 해벽은 1909년 5월까지 세차례의 수축을 마치고서 안정되었다. 해벽공사와 관련하여 독일인 힌쩨에 의한 목포항 암초 조사와 수심측량, 네덜란드인 스테든에 의한 시가지 설계지도가 기초적 자료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도로 폭원을 8미터 이상으로 만들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넓은 범위였는데, 상대적으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유달산 아래 지역은 철저히 소외되어 한일합방 이후 식민지 상황 아래서는 도시화의 구조적 차등성을 오랫동안 감내해야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