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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동방의 대보살, 성주산문을 열다

시놉시스

충남 보령의 성주사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탑비가 하나 서 있다. 비록 지금은 건물 하나 남지 않은 곳이지만,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 탑비는 성주사의 옛 영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로, 성주사를 창건한 낭혜화상 무염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낭혜화상 무염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지만, 진골 귀족이던 그의 집안은 아버지 김범청이 왕위쟁탈전에 연루되면서 육두품으로 강등되었다.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무염은 당시 사람들이 공부하는 유학의 사상들이 비루하다고 느꼈고, 마침내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했다.

이후 무염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선종을 배웠고,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며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도와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그러나 도교를 신봉하던 당 무종(武宗)이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무염은 신라로 귀국하였고, 같은 태종무열왕계 후손인 김흔의 후원으로 지금의 충남 보령 지역에 성주사를 건립하였다.

성주사를 중심으로 하는 성주산문은 선문구산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제자가 2,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특히 무염은 신라 경문왕과 헌강왕 2대에 걸쳐 국사로 책봉되며, 왕실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성주사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여전히 대가람으로 번성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성주산문의 승려들이 지방 호족, 고려의 태조 왕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고려의 건국과 왕권 강화에 조력하였기 때문이다. 여엄은 사무외대사 중 한 명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하였다. 태조의 국사였던 현휘는 충주 정토사에 주석하며 중부 내륙 지역의 호족 세력을 태조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핵심노드

  • 무염: 성주산문을 개창한 신라시대의 승려.
  • 성주산문: 무염이 보령 성주사에 개창한 선종 산문의 하나.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무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
  • 여엄: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한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 현휘: 고려 태조의 국사.


핵심관계

  • 성주산문 – ekc:founder -> 무염 : 성주산문의 처음으로 연 사람은 무염이다.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ekc:isSteleOf -> 무염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무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이다.
  • 무염 - ekc:hasDisciple -> 여엄 : 무염은 여엄의 스승이다.
  • 무염 - ekc:hasDisciple -> 현휘 : 무염은 현휘의 스승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와 그 시험작

시놉시스

조선 세종이 1443년 한글을 반포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집현전을 설립하여 많은 신진 학자들을 끌어모았다. 한글이 창제된 후에는 한자를 읽는 방식에 대한 표준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의 표준 음운서인 『홍무정운』을 한글로 번역하여 『홍무정운역훈』을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한자 표준 음운서인 『동국정운』을 편찬할 수 있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실의 건국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글 노랫말로 만들어 엮은 책으로, 조선 건국의 신성성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한글 창제 직후 편찬된 서적들은 한자의 표준발음 체계를 정립하고 백성들을 교화한다는 한글 창제의 목적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핵심노드

  • 조선 세종 : 훈민정음을 만든 조선의 4번째 왕.
  • 훈민정음 : 조선 세종이 만든 우리말(한글).
  • 홍무정운역훈 : 중국의 한자 발음서인 홍무정운을 한글로 번역한 책.
  • 동국정운 : 한자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지침서.
  • 용비어천가 : 조선 건국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한글과 한시로 기록하여 엮은 책.

핵심관계

  • 훈민정음 - dcterms:creator -> 조선 세종 : 훈민정음은 조선 세종이 만들었다.
  • 훈민정음 - edm:isRelatedTo -> 홍문정운역훈 : 홍문정운역훈은 훈민정음으로 쓰였다.
  • 훈민정음 - edm:isRelatedTo -> 용비어천가 :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쓰였다.

조선후기 왕실의 일상 - 숙명공주에게 보낸 안부편지

시놉시스

숙명공주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딸이며, 조선 현종의 누나이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심익현에게 시집을 간 후 부모님, 동생을 비롯하여 할머니인 장렬왕후, 올케인 명성왕후(현종의 아내)와도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 편지들을 한데 모아 숙명공주의 남편인 심익현가의 후손들이 '숙명신한첩'으로 엮어내었다. 아버지 효종이 아이를 잃은 숙명공주를 위로하고, 동생인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귤을 보내는 내용까지, 숙명신한첩을 통해 조선 후기 왕실 인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핵심노드

  • 숙명신한첩 : 숙명공주가 왕실인물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모은 책.
  • 숙명공주 : 효종의 딸이나 현종의 누나.

핵심관계

  • 숙명신한첩- dcterms:creator-> 숙명공주 : 숙명신한첩은 숙명공주에 의해 만들어졌다.

술과의 전쟁 - 영조가 내린 세번의 금주령

시놉시스

조선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신료들에게 경계해야 할 것 세 가지로 붕당(朋黨), 사치, 술을 제시하였다. 1731년, 1757년, 1762년 총 세 차례에 걸쳐 금주령을 내린다. 첫 번째 내린 금주령을 적은 '계주문'에서는 술이 없을 수는 없다며, 술을 많이 빚지 말라는 내용을 담는다. 그러나 관리들이 잘 따르지 않자, 두번째 금주령을 적은 '어제계주윤음'을 지방의 관리에게 내린다. 이 때는 국가 제사에서도 술을 금지하고, 금주령을 어길 경우 10년의 형벌을 내린다고 선언한다. 더불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내용이 잘 전달되도록 한글로 번역한다. 그러나.. 금주는 힘든 것인가 보다. 1762년 역관들이 모여 술을 마신 일이 발생하자 금주령을 다시 반포하는데,이 때는 지난 번역 버전이 번역체 문장이라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라 판단해, 처음부터 내용을 한글로 작성한다. 즉 영조의 금주령 전개과정은 (본인은 답답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한글이 한자의 보조적 문자에서 독자적인 문자로 인정받아 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ps.이렇게 쉽게 썼으면 좀 알아듣지?)

핵심노드

  • 조선 영조 : 금주령을 내린 조선의 21대 왕.
  • 어제계주윤음 : 1757년에 영조가 내린 금주령에 대한 내용이 담긴 문서.
  • 어제경민음 : 1762년에 영조가 내린 금주령에 대한 내용이 담긴 순한글 문서.
  • 금주령 : 술을 금지하는 명령(어명).

핵심관계

  • 조선 영조 -edm:isRelatedTo-> 어제계주윤음 : 조선 영조가 금주령을 내려 어제계주윤음이 반포되었다.
  • 조선 영조 -edm:isRelatedTo-> 어제경민음 : 조선 영조가 금주령을 내려 어제경민음이 반포되었다.
  • 어제계주윤음 -edm:isRelatedTo-> 금주령 : 어제계주윤음은 금주령에 관한 내용이다.
  • 어제경민음 -edm:isRelatedTo-> 금주령 : 어제경민음은 금주령에 관한 내용이다.

사명당 유정의 임진왜란 활약상

시놉시스

사명대사 유정은 그의 스승 서산대사 휴정과 함께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승려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유정은 유점사에 머물렀는데, 이 때 근처에 있는 아홉 고을의 백성을 구출하였다. 그 이후 서산대사 휴정과 합류하여 승병을 이끌었는데 평양성 전투와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유정의 활약은 군사적인 부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일본 왜성에 찾아가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회담을 진행하는 등 외교적인 성과도 올렸다. 사명대사 유정을 기리는 대표적인 사찰은 밀양 표충사로서, 그 사찰이름은 그의 국가에 대한 충절을 표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승려의 지위는 천민과 다를바가 없었다. 사명대사 유정의 활약은 조선시대에 승려가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몇 안되는 사례다.

핵심노드

  • 유정: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조선시대 승려.
  • 휴정:유정의 스승.
  • 고산 유점사:유정이 머물렀던 사찰.
  • 평양성 전투:평양에서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 가토 기요마사: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 밀양 표충사:밀양에 있는 사찰로 사명대사 유정을 제향하고 있다.

핵심관계

  • 유정 – ekc:hasMaster -> 휴정 : 서산대사 휴정은 사명대사 유정의 스승이다.
  • 유정 - edm:isRelatedTo -> 고산 유점사 : 유정은 고산 유점사에 주석하였다.
  • 유정 - edm:isRelatedTo -> 4차 평양전투 : 유정은 4차 평양전투에 참가하였다.
  • 유정 - edm:isRelatedTo -> 가토 기요마사 : 유정은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하였다.
  • 유정 - edm:isRelatedTo -> 밀양 표충사 : 유정은 밀양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안성 칠장사와 인물 설화

시놉시스

안성 칠장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다녀간 곳이다. 먼저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라는 대사로 유명한 궁예는 이곳에서 13살 때까지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그래서 칠장사 명부전에는 활을 쏘는 궁예 그림이 그려져있다. 홍명희 소설에 나오는 의적 임꺽정도 칠장사와 인연이 있다. 임꺽정은 칠장사에서 스승인 갖바치와 만나게 되었으며 이봉학 등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칠장사에 얽힌 가장 유명한 설화는 어사 박문수의 과거급제 이야기이다.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가기 전날 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문수야 안성에 칠장사라는 절이 나한전이 있다던데 거기서 기도를 드리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더라. 너도 이번에 급제하도록 올라가는 길에 꼭 빌고가거라." 이 말을 듣고 박문수는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게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나한전 부처님이 나와서 과거에 나올 시제 여덟 줄 중에 일곱 줄을 알려주고 나머지 한줄은 알아서 쓰라고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과거를 보러갔는데 신기하게도 부처님이 알려준 일곱줄이 그대로 나와서 일곱줄은 쉽게 쓰고 나머지 한줄은 엄청난 고민 끝에 다썼는데, 그 마지막 줄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아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박문수의 전설 때문에 지금까지도 칠장사는 수능이나 국가고시 등에서 좋은 성적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고있다.

핵심노드

  • 안성 칠장사:안성시 죽산면 칠장리에 있는 사찰로, 다양한 역사적 인물 설화들이 전해진다.
  • 궁예:후고구려의 왕으로 자칭 미륵불. 자기가 관심법을 쓸 줄 안다고 착각. 무고한 사람 여럿 죽임. 어릴 때 칠장사에서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 박문수:조선 후기의 문신. 과거를 보러 가는길에 안성 칠장사에 들러서 하룻밤을 묵음.


핵심관계

  • 안성 칠장사 -edm:isRelatedTo-> 궁예 : 궁예는 어릴적 안성 칠장사에서 무예를 연마했다.
  • 안성 칠장사 -edm:isRelatedTo-> 박문수 : 박문수는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안성 칠장사에서 묵었다.

정조의 효심과 불교 - 불설대부모은중경언해

시놉시스

조선 정조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고 한동안 자식이 없어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융건릉(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화성으로 이전한 이듬해에 왕자가 태어났다. 정조는 이를 하늘의 은혜로 여기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절인 화성 용주사를 창건한다. 더불어 화성 용주사에서 부처가 부모의 은혜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그것을 그린 그림을 모아 '불설대부모은중경'를 편찬한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왕이 불교에 관한 책을 편찬하는 것은 비판받기 쉬운 일이었으나, '불설대부모은중경'이 '효도'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유교의 '효' 관념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어 편찬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조는 '불설대부모은중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효'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핵심노드

  • 조선 정조 : 화성 용주사를 세운 조선의 22대 왕
  • 화성 용주사 :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
  • 불설대부모은중경언해 : 부모의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한글로 번역한 책.

핵심관계

  • 조선 정조 -edm:isRelatedTo-> 화성 용주사 : 조선 정조는 화성 용주사의 건립에 기여하였다.
  • 화성 용주사 -edm:isRelatedTo-> 불설대부모은중경언해 : 화성 용주사에서 불설대부모은중경언해가 제작되었다.

조선후기 양반가 아녀자의 고된 삶 - 한산이씨 고행록

시놉시스

한산이씨는 17살에 43살이었던 유명천의 셋째 부인으로 시집을 간다. 유명천은 총 세 번의 귀양을 가게 된다. 한산이씨는 유명천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으나, 두 딸 모두 생후 5개월만에 세상을 떠난다. 결국 시동생의 아들인 유매를 양자로 들이게 된다. 한편 유명천은 결혼한 지 30년이 되던 해, 세 번째 귀양에서 사망한다. 남편이 죽고 5년 뒤 첫 번째 며느리(양아들 유매의 부인)이 사망하자, 둘째 며느리를 들이나 곧 사망하고, 셋째 며느리도 얼마 안가 사망한다. 한산이씨는 셋째 며느리에게서 얻은 손자인 유경용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고, 60세가 되던 해에 이런 고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산이씨 고행록'이란 글로 남긴다.

핵심노드

  • 한산이씨 고행록 : 한산이씨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
  • 유명천 처 한산이씨 : 유명천의 아내이자 한산이씨 고행록의 작가.

핵심관계

  • 한산이씨 고행록 -dcterms:creator-> 유명천 처 한산이씨 : 한산이씨 고행록은 유명천의 처 한산이씨가 지었다.

조선후기 이상적인 양반가의 여성, 장계향

시놉시스

장계향은 이름 높은 학자인 장흥효의 딸이다.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10세에 소학을 깨우치고 13세에 시를 짓는 등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19세에 아버지의 제자인 이시명의 둘째부인으로 시집을 갔다. 이시명은 이미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1녀를 둔 상태였다. 그녀는 전처의 아들인 '상일'의 공부를 위해, 2km가량 떨어진 선생의 집으로 '상일'을 매일 같이 업고 다니는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시명과의 사이에서 6남2녀를 두었으며, 그녀의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 덕택에, 7명의 아들은 모두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되어 '안릉가 7용'으로 불렸다고 한다. 특히 그녀의 둘째 아들인 '이현일'은 이조판서까지 역임하게 된다. 그녀는 70세가 되었을 무렵에 자손들을 위해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음식과 술에 대한 조리법을 담은 '음식디미방'을 저술한다. 이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요리책이자,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요리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핵심노드

  • 장계향 : 이시명의 아내이자 음식 디미방의 저자.

핵심관계

  • 음식디미방 -dcterms:creator-> 장계향.
  • 장계향 -ekc:hasSon-> 이현일.

조선 최초의 황비이자 숙명여대 설립자 - 순헌황귀비 엄씨

시놉시스

조선 최초의 황비인 순헌황귀비는 원래 명성황후의 보필하는 궁녀였다. 고종의 승은을 입고 궁궐에서 쫓겨났으나, 명성황후가 사망한 후 궁궐도 돌아왔다. 이후 영친왕 이은을 낳았으며, 조선 최초의 황귀비로 책봉받았다. 여성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숙명여학교는 현재 숙명여자대학교로 발전하였다.)

핵심노드

  • 순헌황후 : 고종의 아내이자 조선 최초의 황비인 순헌황귀비 엄씨.
  • 책황귀비홀기 : 순헌황귀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하는 의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

핵심관계

  • 순헌황후 -edm:isRelatedTo-> 책황귀비홀기 : 순헌황후의 황귀비 책봉식은 책황귀비홀기에 기록되었다.

한글로 기록된 왕실 의례 -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결혼식

시놉시스 1882년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결혼식이 있기 전 순종의 관례(성인식)이 먼저 진행되었다. 여기 참가한 궁인이 상은 부여한 내역은 '왕세자 관례 상격 발기', 당시의 상차림은 '왕세자 관례 상차림 발기'로 기록되었다. 왕세자빈 후보 명단은 '간택단자'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재간택(재시험) 과정에 오른 후보 3명에게 보낸 의복은 '왕세자빈 의대 발기'에 기록되어 있다. 결혼식에 사용될 의복을 준비하는 과정과 준비물은 '가례 의대 발기',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로 기록되어 있다. 결혼식에 물건을 담기 위해 사용된 보자기에 대한 것은 '각색 인문보 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자료는 모두 당시 궁인이나 왕실 여성이 보기 위해 한글로 기록되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핵심노드

  •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 1882년에 이루어진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결혼식
  • 간택단자 : 순종의 부인(왕세자빈) 후보 목록
  • 왕세자빈 의대 발기 : 왕세자빈 후보 중 재간택(재시험)에 지정된 후보 3명에게 보낸 의복 목록.
  • 각색 인문보 발기 :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결혼식에 사용된 보자기 목록
  • 왕세자 관례 상차림 발기 : 순종의 관례(성인식)에 사용된 상차림에 대한 기록.
  • 왕세자 관례 상격 발기 : 순종의 관례(성인식)에 참여한 나인들에게 내리는 상(보너스)에 대한 기록.
  • 왕세자 가례 차비관 발기 :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결혼식에 참가한 차비관(나인) 명단.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결혼식에 입은 순종의 의복에 사용된 패물 목록.
  • 가례 의대 발기 : 결혼식에 참가한 왕실 어른들의 의복에 대한 기록.

핵심관계

  • 간택단자 -edm:isRelatedTo->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 간택단자는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이다.
  • 왕세자빈 의대 발기 -edm:isRelatedTo->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 왕세자빈 의대 발기는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이다.
  • 각색 인문보 발기 -edm:isRelatedTo->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 각색 인문보 발기는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이다.
  • 왕세자 관례 상격 발기 -edm:isRelatedTo->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 왕세자 관례 상격 발기는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이다.
  • 왕세자 가례 차비관 발기 -edm:isRelatedTo->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 왕세자 가례 차비관 발기는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이다.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edm:isRelatedTo->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는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이다.
  • 가례 의대 발기 -edm:isRelatedTo->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 가례 의대 발기는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이다.

독립선언서의 탄생비화

시놉시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29명의 민족대표가 조선의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앉았다. 탁상 위에 있는 독립선언서에는 33명의 서명이 적혀있었지만, 당일에는 4명이 결석을 한 터였다. 당초에 독립선언서는 선언서가 아니라 일본 정부에 독립을 건의하는 건의서 형식으로 작성하기로 발의되었다. 하지만 최린은 독립 의지와 당위성을 강조하려면 선언서로 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그 뜻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독립선언서의 초안 작성은 최남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정작 최남선은 민족대표 33인에는 포함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본인은 "학자로 일생을 마치고 싶다"며 독립운동 전면에는 나서고 싶지않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당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일이었다) 한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민족대표끼리의 서로 자기 단체 이름을 먼저 올리겠다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기독교계통으로 참여한 이승훈의 훈계로 연장자이자 주최자였던 손병희가 민족 대표의 첫번째로 이름이 실리게 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비밀 유지를 위해 당시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은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 그는 2월 27일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키고, 커튼을 치고 조용히 인쇄 작업을 시작했다. 한창 인쇄를 하는데, 운이 나쁘게도 주변을 순찰하던 종로경찰서의 형사 신승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검문을 하러 보성사로 들어왔다. 이종일은 신승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도 조선사람이니 제발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애걸한 후,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고는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손병희는 안방에서 5천원 뭉치를 꺼내서 이종일에게 주었고, 신승희는 이돈 5천원을 꿀꺽하고 독립선언서 인쇄를 눈감아주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인쇄된 독립선언서,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는 한용운이 이를 낭독하였고 낭독이 끝나자 민족대표 일동은 다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파고다 공원에서는 정재용이 학생과 시민 5천명을 앞에두고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핵심노드

  • 3.1독립선언서: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문.
  • 최남선: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쓴 인물.
  • 손병희:독립선언식을 주도한 인물.
  • 이종일:보성인쇄소의 사장으로 독립선언서 인쇄를 성사시켰다.
  • 보성사: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
  • 한용운:'님의 침묵'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승려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 독립선언식: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주도로 거행된 독립을 선언하는 행사.
  • 태화관:민족대표 29명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

핵심링크

  • 3.1독립선언서 -dcterms:creator-> 최남선 : 3.1독립선언서의 초안은 최남선이 작성했다.
  • 3.1독립선언서 -dcterms:publisher-> 보성사 : 3.1독립선언서는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 3.1독립선언서 -edm:isRelatedTo-> 한용운 : 3.1독립선언서는 한용운에 의해 낭독되었다.
  • 보성사 -edm:isRelatedTo-> 이종일 : 이종일은 보성사의 사장이다.
  • 민족대표 33인 -foaf:member-> 한용운 : 한용운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다.
  • 민족대표 33인 -foaf:member-> 최남선 : 최남선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다.
  • 민족대표 33인 -ekc:performed-> 독립선언식 :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 독립선언식 -ekc:isPerformedAt-> 태화관 : 독립선언식은 태화관에서 거행되었다.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시놉시스

1592년 10월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3만여 명은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진주성 안에서는 김시민이 지휘하는 조선군 3천여 명이 혈전을 벌였고, 곽재우 등의 의병부대는 성 밖에 진을 치고 왜군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6일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퇴했으나 전투를 지휘한 김시민은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 싸움의 결과로 조선군은 경상우도를 보존하고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전쟁의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 그곳에는 백성들의 신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인물인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이었다. 그는 사재를 터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으며, 동시에 언제 재개될지 모를 전쟁을 대비하는 데에도 힘썼다. 이렇듯 김성일은 전란의 시기에 지방관으로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고, 그 사이 그가 앓고 있던 병세도 점차 깊어져만 갔다.

1592년 12월 24일, 새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김성일은 안동 본가에서 장모를 모시며 살고 있는 그의 아내에게 편지를 붙인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있으라'고 아내를 다독였건만 이듬해 4월 김성일은 병사하고 만다. 그의 그리움은 그렇게 마지막 편지가 되어 아내에게 전해졌다.


핵심노드

  • 김성일: 조선 중기 문신 및 학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모으며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왜군으로부터 지키도록 하였으며, 경상우도관찰사과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 김성일 처 안동권씨: 김성일의 아내 안동권씨.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권덕황(權德凰)의 딸로 안동 금계마을 거주.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김성일이 1592년 12월 말에 아내 안동권씨에게 쓴 편지
  • 진주전투: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이다. 편지의 배경이 되는 전투는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


핵심관계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김성일 - dcterms:creator : 이 편지는 김성일이 그의 아내 권씨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이다.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김성일의 처 안동 권씨 - ekc:mentions : 이 편지는 김성일이 그의 아내 권씨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이다.
  • 김성일 - 김성일의 처 안동 권씨 - ekc:hasWife : 김성일의 아내는 권씨(안동권씨)이다.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진주전투 - edm:isRelatedTo : 이 편지가 작성된 시기는 1차 진주성전투가 끝난 이후이다.
  • 김성일 - 진주전투 - edm:isRelatedTo : 김성일은 경상우도관찰사로서 1차 진주성전투를 지휘했다.

안시성 전투


시놉시스

645년 4월부터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례로 점령한 당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고구려 장군 고연수와 고혜진은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 15만여명을 거느리고 당군과 대항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급하게 정면대결을 벌이다가 당군의 포위공격을 당했으며, 결국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뜻밖의 전과에 기세가 오른 당 태종은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안시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전쟁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당은 60일에 걸쳐 안시성의 동남쪽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성벽보다 높게 토산(土山)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한쪽 귀퉁이가 부서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무너진 성벽 사이로 빠져 나와 토산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작전 전반에 큰 타격을 받은 당은 88일간의 포위를 풀고 안시성에서 퇴각하였다. 야사에서는 양만춘을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자로 기록하고 있다.


핵심노드

  • 안시성전투: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 군대와 안시성에서 벌인 공방전
  • 안시성: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에 있던 산성으로, 안시성전투의 배경
  • 양만춘: 고구려의 장군이자 안시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의 성주


핵심관계

  • 양만춘 - 안시성전투 - edm:isRelatedTo : 양만춘은 안시성의 성주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자로 전해진다.
  • 안시성전투 - 안시성 - edm:happenedAt : 안시성전투는 안시성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조선 후기 여성 학자, 빙허각이씨와 사주당이씨

시놉시스

사주당이씨느 조선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의 11대손으로 전주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소학, 주자가례 등의 유학서를 공부하였으며 글솜씨로 유명하였다. 영조의 경영관이었던 송명흠이 사주당이씨에 대해 "친척이 아니라 대면하지 못함이 한스럽다"고 평했다는 일화도 전해져온다. 사주당이씨의 저술들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 버려 "태교신기언해"만 전해진다. "태교신기언해"의 머릿말을 적어준 사람 중 "빙허각이씨"는 사주당이씨의 조카(사주당이씨는 빙허각이씨의 외숙모)이다. 그녀는 당시 저명한 학자 집안인 '서유본'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남편인 서유본이 늦게 벼슬길이 오르게 되고, 그나마도 친척의 옥사로 일찍 그만두게 되자 직접 밭을 일구며 생활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활지식과 실학서적의 내용을 종합한 가정백과사전인 '규합총서'를 저술한다.

핵심노드

  • 사주당이씨 : 유희의 어머니이자 빙허각이씨의 외숙모. 태교신기언해의 저자.
  • 빙허각이씨 : 서유본의 아내. 규합총서의 저자.
  • 태교신기언해 : 사주당이씨가 짓고 유희가 한글로 번역한 조선시대 최초의 태교전문 서적.
  • 규합총서 : 요리법과 세탁법 등 각종 가정 살림에 관한 백과사전.

핵심관계

  • 태교신기언해 -dcterms:creator-> 사주당이씨 : 태교신기언해의 저자는 사주당이씨이다.
  • 규합총서 -dcterms:creator-> 빙허각이씨 : 규합총서의 저자는 빙허각이씨이다.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된 젊은 영조의 사랑이야기, 소훈이씨제문

시놉시스

소훈이씨는 효장세자의 어머니로,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던 해에 사망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온 사람을 잃은 영조는 슬픔을 담아 제문을 지었다. 그러나 후궁의 장례식에는 남성이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이 제문은 영조가 직접 읽지 못하고, 궁녀가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옮겨졌다. 소훈이씨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 조차 당시의 영조에겐 허락되지 못했다. 당시 정치계를 주름잡고 있던 소론이 노론과 영조를 동시에 몰아내기 위해 소훈이씨의 죽음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소론이 당시 힘을 잃어가던 노론이 경종을 암살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소훈이씨를 암살하였으며, 이에 화를 품은 영조가 역모를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신임사화). 이 사건을 통해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 세력은 정계에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세력들은 소훈이씨의 죽음을 다시 정치 위로 꺼내들어 소론이 소훈이씨를 독살하였다고 주장했다. 이 결과 소론이 정계에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핵심노드

  • 조선_영조 : 소훈이씨의 남편이자 노론 세력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조선의 왕.
  • 조선_경종 : 영조의 이복형이자, 소론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조선의 왕.
  • 소훈이씨 : 영조의 아내이자 효장세자(훗날 조선 정조의 양아버지)의 어머니로 정치적 싸움에 휘말려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있음.
  • 소훈이씨제문 : 영조가 소훈이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작성한 글.
  • 신임사화 : 경종 재위 연간에 소론이 노론과 영조가 경종을 시해하고자 했다는 명목으로 노론을 정계에서 축출한 사건.

핵심관계

  • 조선 영조 -ekc:hasWife-> 소훈이씨 : 조선 영조의 아내는 소훈이씨이다,
  • 소훈이씨제문 -dcterms:creator-> 조선 영조 : 소훈이씨제문의 저자는 조선 영조이다.
  • 조선 영조 -edm:isRelatedTo-> 신임사화(임인옥사) : 조선 영조와 노론은 신임사화로 정치적 힘을 잃게 되었다.
  • 조선 경종 -edm:isRelatedTo-> 신임사화(임인옥사) : 조선 경종과 소론은 신임사화로 정치적 힘을 얻게 되었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임금께 올린 구구절절한 편지, 광산김씨 상언

시놉시스

광신김씨는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딸이자, 이이명의 아내이다. 이이명은 노론으로 경종 때의 왕세제인 영조를 도와 역모를 꾀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을 당했다(신임사화). 이때 이이명의 손자인 이봉상도 연루되어 사형될 뻔 하였으나,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위장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영조가 즉위한 후에 노론이 소론에 대한 복수를 단행하자, 영조는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노론의 일부를 내보내고 소론을 일부 기용하고자 한다. 이때 이이명의 손자인 이봉상이 왕을 속였다는 혐의로, 이봉상의 작은 할아버지인 이익명은 이를 도왔다는 혐의로 하옥되었다. 이에 이이명의 아내인 광산김씨는 이봉상의 사망위장은 자신이 벌인 일이며, 노여움을 풀고 손자인 이봉상과 시동생인 이익명을 풀어달라는 내용의 편지(광산김씨 상언)를 임금(영조)에게 올린다.

핵심노드

  • 이이명 처 광산김씨 : 이이명의 아내, 이봉상의 할머니로 이봉상을 살려달라는 내용인 광산김씨 상언의 저자.
  • 신임사화 : 경종 때 영조를 도와 역모를 꾀했다는 혐으로 노론 일파가 축출당한 사건.
  • 이봉상 : 이이명의 손자로, 신임사화 때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위장해 목숨을 건지지만, 이후 왕을 속였다는 혐의로 하옥된다.
  • 광산김씨상언 : 이봉상이 하옥되자, 할머니인 광산김씨가 임금께 선처를 부탁하며 올린 편지.

핵심관계

  • 광산김씨 상언 -dcterms:creator-> 이이명 처 광산김씨 : 광산김씨 상언의 저자는 이이명 처 광산김씨이다.
  • 광산김씨 상언 -edm:isRelatedTo-> 신임사화(신임옥사) : 광산김씨 상언은 신임옥사로 인해 잡힌 가족을 풀어달라는 광산김씨의 편지이다.
  • 이봉상 -edm:isRelatedTo -> 신임사화(신임옥사) : 이봉상은 신임사화 때 죽음을 위장하여 살아남았으나, 이후 왕을 속였다는 혐의로 하옥되었다.

스승이 기록한 제자의 얼굴, 표암유고

시놉시스

강세황은 제자 김홍도를 두었다. 강세황은 당시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화가로 다양한 그림과 글을 남겼다. 강세황의 저작 중 '표암유고'에 자신의 제자인 김홍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어린 시절의 모습부터 김홍도의 작품에 대한 부분, 외모에 관한 부분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라 김홍도의 얼굴을 복원해낸 것이 김홍도 표준영정이다.

핵심노드

  • 강세황 : 김홍도의 스승으로 표암유고의 저자이다.
  • 김홍도 : 조선 후기에 이름을 날린 왕실, 풍속화가이다.
  • 표암유고 : 강세황의 문집으로, 김홍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 김홍도 표준영정 : 1981년 표암유고의 기록을 토대로 김홍도의 얼굴을 복원한 그림이다.

핵심관계

  • 김홍도 -ekc:hasMaster-> 강세황 : 김홍도의 스승은 강세황이다.
  • 표암유고 -dcterms:creator-> 강세황 : 표암유고의 저자는 강세황이다.
  • 표암유고 -ekc:mentions-> 김홍도 : 표암유고는 김홍도를 언급하였다.
  • 김홍도 표준영정 -ekc:depicts-> 김홍도 : 김홍도 표준영정은 김홍도를 묘사하였다.

조선 태종의 숨겨진 조력자, 이천우

시놉시스

이천우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배다른 형 이원계의 아들로 조선 태종의 사촌형이다. 아버지인 이원계가 동생인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며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이원계는 아들인 이천우에게는 숙부(이성계)을 충실히 도우라고 유언한다. 이에 따라 이천우는 이성계의 수하로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받는다. 이후 2번의 왕자의 난에서 조선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 정사공신에 책봉된다.

핵심노드

  • 이천우 : 조선 태조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로 조선 태조 이성계와 조선 태종을 도와 3번의 공신에 책봉되었다.
  • 좌명공신 :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사람에게 내려진 칭호이다.
  • 정사공신 :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사람에게 내려진 칭호이다.

핵심관계

  • 좌명공신 -foaf:member-> 이천우 : 이천우는 좌명공신에 책봉되었다.
  • 정사공신 -foaf:member-> 이천우 : 이천우는 정사공신에 책봉되었다.

여성들의 사치 금지 법령, 가체신금사목

시놉시스 가체랑 조선시대 여성들이 썼던 머리 장식으로 오늘날의 가발과 비슷하다. 조선 후기 이 가체를 크고 높게 만드는 것이 유행이 되자, 조선 정조는 가체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한다. 조선 영조가 이미 가체의 사용을 금하고, 족두리로 대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잘 지켜지지 않자 정조 대에는 아예 법령으로 지정한 것이다. 이 법령을 백성, 특히 사대부가의 아녀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한문과 한글 번역본을 함께 수록한 것이 '가체신금사목'이다. 법을 어길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있긴 하나 실제로 처벌한 사례는 거의 없다.

핵심노드

  • 가체신금사목 : 조선 정조가 내린 가체를 금지에 관한 법령에 대한 서적.
  • 가체 : 여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기 머리가발

핵심관계

  • 가체신금사목 -ekc:mentions-> 가체

포로로 잡힌 백성을 구출하다

시놉시스

선조 국문 유서는 임진왜란 발생 후 의주로 피난가 있던 선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문서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백성들이 생존을 위해 일본군에 협력했다. 이에 조선 선조는 백성들이 조선의 군대에 협력하기를 독려하는 문서를 만들어 배포한다. 당시 권탁이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포로로 잡힌 백성을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핵심노드

  • 선조 국문 유서 :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 선조가 의주에 피신해 있을 당시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교서
  • 권탁 : 임진왜란 시기 활동한 무신으로 선조의 유서를 가지고 백성을 구출함.

핵심관계

  • 선조 국문 유서 -edm:isRelatedTo-> 권탁 : 권탁이 선조 국문 유서를 가지고 포로가 된 백성을 구출했다.

집념과 열정이 만들어낸, 허준의 얼굴

시놉시스

허준 표준영정의 작가인 최광수씨의 이력은 예사롭지 않다. 한의학을 전공한 후 동양화를 추가로 배웠다. (마치 허준의 표준영정을 그리기 위해 준비된 사람인 것 같은 스펙) 그 후 양천허씨, 초상화나 사진이 전해지는 허준의 후손들의 얼굴들을 모아 허준의 표준영정을 그렸다. 허준의 외모에 대한 문헌 기록에 따르면.. 통통하고 미소를 잘 지어 스님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표준영정 속의 허준은 말랐으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근엄한 모습이다. (최광수씨가 굉장히 존경했는지, 굉장히 엄격·근엄·진지한 모습으로 그렸다.)

핵심노드

  • 허준 표준영정 : 최광수가 그린 조선시대의 의사 허준의 표준영정이다.
  • 최광수 : 허준 표준영정을 그린 현대 한의사이자 동양화가이다.

핵심관계

  • 허준 표준영정 -dcterms:creator-> 최광수 : 허준 표준영정은 최광수가 그렸다.

삼대에 걸쳐 지식을 축적하다, 서명응-서호수-서유구

시놉시스

서명응과 그의 아들 서호수는 청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면서 많은 책을 수집했다. 그리고 규장각에서 근무하면서도 많은 지식을 수집하였다. 이 서씨 부자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서호수의 아들인 서유구도 청나라 외교관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고, 실증주의적 연구를 추구하는 북학파 학자들과 친분을 쌓았으나, 친척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정치적 진출이 힘들어지게 된다. 이후 서유구는 삼대에 걸쳐 쌓은 지식을 모아 백과사전이 '임원경제지'를 편찬한다.

핵심노드

  • 서명응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연행사(청나라 외교관)를 거쳐 규장각 제학으로 근무하였으며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 서호수 : 서명응의 아들로 연행사를 거쳐 규장각에 제학으로 근무하였다.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 서유구 : 신진관리 교육제도(초계문신)로 선발되어 규장각에서 근무하였다.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를 편찬하였다.
  • 동국문헌비고 : 조선 후기 국가에서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 임원경제지 : 서유구가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핵심관계

  • 서명응 -ekc:hasSon-> 서호수 : 서명응은 아들 서호수를 두었다.
  • 서호수 -ekc:hasSon-> 서유구 : 서호수는 아들 서유구를 두었다.
  • 동국문헌비고 -dcterms:creator-> 서명응 : 동국문헌비고의 저자는 서명응이다.
  • 동국문헌비고 -dcterms:creator-> 서호수 : 동국문헌비고의 저자는 서호수이다.
  • 임원경제지 -dcterms:creator-> 서유구 : 임원경제지의 저자는 서유구이다.


최무선, 화포를 만들다

시놉시스

최무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의 국산화를 이룬 과학자이자 무인이다. 최무선은 화약을 만들기 위해 원나라 출신 염초장인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법을 배웠고, 조정에 건의하여 화약,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관청인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는 직접 만든 화약과 화기를 가지고 나세 장군과 함께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무찌르기도 했다. 최무선이 화포를 제조하는 과정은 최대섭 작가가 그린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에 나타나 있으며, 이 그림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최무선의 아들로는 최해산이 있는데 그 또한 아버지의 비법을 전수받아 화차를 제작하는 등 무기제조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핵심노드

  • 최무선 :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제조한 무인이다.
  • 화통도감: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 최해산: 최무선의 아들이다.
  • 진포대첩: 1380년(고려 우왕 6) 고려 수군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 해전이다.

핵심관계

  • 최무선 -ekc:hasSon-> 최해산 : 최무선은 아들 최해산을 두었다.
  • 최무선 -edm:isRelatedTo-> 화통도감 : 최무선은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하였다.
  • 최무선 -edm:isRelatedTo-> 진포대첩 : 최무선은 진포대첩에 참여하였다.


허준과 동의보감

시놉시스

허준은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는 조선의 명의이다. 그가 내의원에 들어가기전까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미암 유희춘의 문집인 미암일기가 유일하다. 미암일기에는 허준이 유희춘의 종기를 치료한적이 있으며, 유희춘이 허준을 이조판서에게 천거하여 내의원 자리에 오르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내의원에 들어가게된 허준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면서 본격적으로 의술을 인정받게 된다. 그는 높은 벼슬에 오르게도 했지만,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잘못치료하여 죽게 했다는 죄로 귀양을 가게된다. 하지만 그의 귀양은 동의보감이라는 조선 의학의 독보적인 명저를 탄생시키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사실 동의보감 편찬은 중국 의서의 번잡한 처방을 정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선조의 지시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임진왜란 전까지는 허준 뿐만 아니라 여러 의원들이 함께 수행하던 작업이었다. 하지만 정유재란 이후에는 허준이 단독으로 작업했고, 14년에 걸쳐 240여종의 의서를 참고하고 정리하는 노력 끝에 결국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핵심노드

  • 허준 : 동의보감을 편찬한 조선 중기의 의원이다.
  • 동의보감: 허준이 완성한 의학서적이다.
  • 동의보감 편찬: 동의보감 편찬 작업
  • 미암일기: 미암 유희춘의 문집으로 허준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 광해군: 선조의 아들. 조선 중기의 왕으로 허준이 어의를 하면서 병을 여러번 고쳐주었다.
  • 선조: 조선 중기의 왕으로 허준을 비롯한 의원들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명하였다.

핵심관계

  • 허준 -edm:isRelatedTo-> 동의보감 편찬: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하였다.
  • 동의보감 편찬->edm:isRelatedTo-> 동의보감: 동의보감 편찬은 동의보감에 관한 것이다.
  • 선조 -edm:isRelatedTo-> 동의보감 편찬: 선조는 동의보감 편찬은 명하였다.
  • 미암일기-ekc:mentions-> 허준: 허준은 미암일기에 언급된다.
  • 선조-ekc:hasSon-> 광해군: 선조는 광해군이라는 아들이 있다.
  • 허준 -edm:isRelatedTo-> 광해군: 허준은 광해군의 어의로서 병을 여러번 고쳐주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

시놉시스

녹두장군으로 불리어지는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다. 전봉준은 서른 살즈음에 현재의 전북 정읍인 고부에 들어와 살면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하고 한약방을 열어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고부의 군수였던 조병갑은 군민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벌이고, 억울함을 호소할 경우 엄한 형벌로 다스리는 등의 횡포를 부렸다. 이에 참다못한 전봉준을 비롯한 군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빼앗긴 곡식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고자 안핵사 이용태를 보냈지만, 그 역시 백성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 전가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이에 반발한 동학교도와 백성들은 손을 잡았고 동학접주인 전봉준이 주축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동학농민운동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김개남과 손화중이 보좌하면서 이루어졌다. 관군과 황토현에서 전투를 하여 승리하였지만, 이후 일본과 청의 군사들이 조선에 들어오자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12개조폐정개혁안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화약대로 전봉준은 이후 폐정개혁을 시행하는 기구로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청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전봉준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명목으로 또 한번 거병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대패하였고 결국 전봉준은 붙잡혀 교수형을 당했다.

핵심노드

  • 전봉준: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 고부민란: 전봉준의 주도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저항하여 일으킨 봉기이다.
  • 김개남: 조선 말기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 손화중: 조선 말기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 1차 동학농민운동: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1차)
  • 2차 동학농민운동: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2차)

핵심관계

  • 전봉준 -edm:isRelatedTo-> 1차 동학농민운동: 전봉준은 1차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 전봉준 -edm:isRelatedTo-> 2차 동학농민운동: 전봉준은 2차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 김개남 -edm:isRelatedTo-> 1차 동학농민운동: 김개남은 1차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 송화중 -edm:isRelatedTo-> 1차 동학농민운동: 김개남은 1차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 1차 동학농민운동 -dcterms:hasPart-> 고부민란: 고부민란은 1차 동학농민운동안에 포함된다.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시놉시스

안중근은 일제의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인물로 잘 알려져있다. 안중근은 이날의 거사를 위해 오래토록 준비하였고, 마침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시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얼빈역으로 나가 그를 저격한 것이다. 체포된 안중근은 여순에 있는 일본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가 여순 감옥에서 쓴 글씨는 현재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는 장면은 박영선이라는 화가가 그림으로 재현하였으며, 해당 그림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핵심노드

  •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대한의용군 의병장.
  • 이토 히로부미: 근대 일본의 건설과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정치가.
  • 하얼빈: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
  • 안중근의사유묵: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쓴 글씨.
  • 박영선-이등박문을 총살하는 안중근 의사: 박영선 작가가 그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는 그림.

핵심관계

  • 안중근 -edm:isRelatedTo->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 안중근의사유묵 -dcterms:creator-> 안중근: 안중근의사유묵을 쓴 사람은 안중근이다.
  • 박영선-이등박문을 총살하는 안중근 의사 -ekc:depicts-> 안중근
  • 박영선-이등박문을 총살하는 안중근 의사 -ekc:depicts-> 하얼빈

2차년도 데이터 기반

5번의 공신, 천재와 수완가, 신숙주와 한명회

  • 공신


시놉시스

"신숙주와 한명회 역사는 안다",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이란 동요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 두명은 조선 단종을 배반하고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는 명목으로 조선시대 배반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이 둘은 사돈관계이기도 하다.(한명회의 장녀와 신숙주의 장남이 혼인) 신숙주와 한명회는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한 동지이지만, 성격은 사뭇 달랐다. 신숙주는 타고난 천재로 5개의 언어를 구사하고,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훈민정음 창제를 돕고, 동국통감, 실록을 편찬하는 등의 엄청난 연구 및 외교실적을 남긴다. 반면, 같은 배신의 아이콘인 한명회는 공부에 대한 머리는 뛰어나지 못했던 듯하다. 대신 정치적 수완은 대단했다. 한명회는 43세까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으나, 세조의 즉위의 실질적 설계자였다. 세조 즉위 이후 두딸을 각각 조선 예종, 조선 숙종에게 시집 보내며 권력을 확실하게 틀어쥔다. 그러나 말년에 명나라 사신을 본인이 지은 정자(압구정)에서 대접한 일로 탄핵을 받아 모든 관직을 내려놓게 된다. 사돈관계이고 세조와 숙종의 즉위를 도운 정치적 동반자였으나, 능력 발휘에 있어서는 엄연히 분야갸 구분되어 있었다. (오른팔과 왼팔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나 할까..) 이 둘은 죽은 이후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종묘의 공신전에 배향된다.

핵심노드

  • 한명회 : 조선 숙종과 예종의 장인이자, 조선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5명의 왕을 모신 조선 전기의 인물.
  • 신숙주 : 조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명의 왕을 모신 조선 전기의 인물.
  • 정난공신-1453 : 조선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데 참여한 사람에게 내린 칭호.
  • 좌익공신 : 1455년 조선 세조의 즉위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칭호.
  • 익대공신 : 1468년 남이의 역모를 진압한 사람에게 내린 칭호.
  • 좌리공신 : 성종의 즉위 참여한 사람에게 내린 칭호.
  • 종묘배향공신 : 왕의 충신으로 인정받아 왕과 함께 종묘의 공신전에 배향된 사람에게 내려진 칭호.

핵심관계

  • 정난공신-1453 -hasAppointee-> 신숙주 : 신숙주는 정난공신에 책봉되었다.
  • 좌익공신 -hasAppointee-> 신숙주 : 신숙주는 좌익공신에 책봉되었다.
  • 익대공신 -hasAppointee-> 신숙주 : 신숙주는 익대공신에 책봉되었다.
  • 좌리공신 -hasAppointee-> 신숙주 : 신숙주는 좌리공신에 책봉되었다.
  • 종묘배향공신 -hasAppointee-> 신숙주 : 신숙주는 종묘배향공신에 책봉되었다.
  • 정난공신-1453 -hasAppointee-> 한명회: 한명회는 정난공신에 책봉되었다.
  • 좌익공신 -hasAppointee-> 한명회 : 한명회는 좌익공신에 책봉되었다.
  • 익대공신 -hasAppointee-> 한명회 : 한명회는 익대공신에 책봉되었다.
  • 좌리공신 -hasAppointee-> 한명회 : 한명회는 좌리공신에 책봉되었다.
  • 종묘배향공신 -hasAppointee-> 한명회 : 한명회는 종묘배향공신에 책봉되었다.


3대에 걸쳐 권력을 탐하다. 임원준-임사홍-임숭재

  • 신도비나 인물관계 등의 추가 데이터가 들어갈 경우 그래프 제작 가능
  • PCN LOD

시놉시스 임원준은 세종, 세조, 숙종과 연산군 시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영화 '간신'의 주인공인 '임숭재'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세종이 자신의 형인 효령대군의 농장에 갔다가 그가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 발탁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건 다같이 짜고 친 듯... 왜냐면 임원준의 아들 임사홍이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령군의 사위임. 즉 사돈관계임. 어찌되었든 임원준은 이렇게 정치에 입문하고 탁월한 문장 능력은 사실이었는지, 의방유취, 구급방, 창진집 등 다양한 의학서의 편찬에 참여한다. 성종이 즉위할 때는 뒤에서 줄을 잘 섰었는지... 좌리공신에 책봉된다. 아들 임사홍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버지 보다 더했던 것 같다. 임사홍의 큰아들 임광재는 조선 예종의 사위이고, 셋째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사위였다. 또... 임사홍은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가 죽은 내막을 고자질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들을 내쫓아버렸다. 그래도...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광재, 임숭재 모두 문장도 뛰어나고 글씨도 잘써서 좌리공신에 책봉된 인물들의 신도비문을 짓거나 써준다. (머리와 재주는 유전되나봄..).. 아 임숭재는 아버지 임사홍보다 권력 욕심이 더 컸다고 한다... (갈수록 커지네) 미녀들을 대량으로 뽑아(채홍사) 연산군에게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연산군 시기에 절정에 달한 그들의 권력은 결국 연산군이 나라를 말아먹게 하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하여;; 백성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핵심노드

  • 임원준 : 의방유취, 구급간이방등을 저술하고, 좌리공신에 책봉된 인물.
  • 임사홍 : 임원준의 아들이자, 효령대군의 손녀사위로 갑자사화(연산군에게 어머니 폐비 윤씨가 죽은 내막을 고자질함)를 주도한 인물.
  • 임숭재 : 임사홍의 아들이자 성종의 사위로 연산군 시기의 간신.

핵심관계

  • 임원준 -ekc:hasSon-> 임사홍. : 임원준은 아들 임사홍이 있다.
  • 임사홍 -ekc:hasSon-> 임숭재. : 임사홍은 아들 임숭재가 있다.

영조대 노론의 핵심인물, 이재

시놉시스

이재(1680~1746)은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김창협의 제자, 조선 숙종의 처조카, 여흥무원군 민유중의 외손자로 인현왕후의 친조카, 조선 현종과 사돈이자 정승을 지낸 오두인의 사위, 작은 어머니는 영의정 김수흥의 딸이고, 아내는 스승 김창협의 사위의 누이였다. 여흥민씨, 해주오씨, 안동김씨 등 당대 노론 계열의 잘나가는 집안과 모두 혈연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학술적 능력까지 뛰어났던 대사헌, 참판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여 노론계열의 중심인물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그러나 조선 영조 초기에 노론계열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자, 책임을 느낀 탓인지 사퇴하고 용인으로 내려가 제자를 키우고, 다양한 책을 저술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런 그의 정치적, 혈연적, 학문적 지위는 그가 써준 다양한 사람들의 비문에서 확인이 가능한다. 그는 서원의 묘정비는 물론, 여흥민씨, 해주오씨, 안동김씨, 남양홍씨 등 다양한 인물들의 비문을 써주었는데, 그 중 종2품 이상의 고위관직자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신도비문을 지은 것이 8개나 된다.

핵심노드

  • 이재-1680 : 조선 숙종~영조 시기 활동한 노론계 핵심인물.
  • 홍계적 신도비 : 숙종 시기 노론계 인물로 이조판서에 추중된 홍계적의 신도비.
  • 김인후신도비 : 동방 18현인 김인후의 신도비
  • 민정중신도비 : 인조, 현종, 숙종시기의 인물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민정중의 신도비
  • 민진후신도비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의 신도비
  • 이수신도비 : 조선 중기 왕족인 귀천군 이수의 신도비
  • 이유신도비 : 송시열의 문인으로 삼정승을 지낸 이유의 신도비
  • 조여신도비 : 생육신인 조여의 신도비
  • 조영복신도비 : 김창협의 제자인 조영복의 신도비.

핵심관계

  • 김인후신도비 -ekc:calligrapher-> 이재-1680 : 이재는 김인후신도비의 글씨를 썼다.
  • 민정중신도비 -ekc:writer-> 이재-1680 : 이재는 민정중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 민진후신도비 -ekc:writer-> 이재-1680 : 이재는 민진후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 이수신도비 -ekc:writer-> 이재-1680 : 이재는 이수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 이유신도비 -ekc:writer-> 이재-1680 : 이재는 이유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 조여신도비 -ekc:writer-> 이재-1680 : 이재는 조여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 조영복신도비 -ekc:writer-> 이재-1680 : 이재는 조영복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 홍계적신도비 -ekc:writer-> 이재-1680 : 이재는 홍계적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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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핵심노드 핵심관계